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는 문자로 표현하는 예술인 서예는 예로부터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교양의 하나로 여겨졌다. 아름다운 글씨는 마음과 정신에서 나온다고 여겨졌으며, 이를 위해 글씨를 열씸히 써야 할 뿐만 아니라 학문을 깊이 공부하고 인격을 닦아서 고결한 정신을 갖추어여 한다고 생각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서예의 시대적 특징과 발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으며, 왕희지를 비롯하여 큰 족적을 남긴 당태종, 구양순, 미불, 소식, 조맹부, 옹방강 등 역대 명필의 글씨를 볼 수 있었다.
서성(書聖)으로 일컬어는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가 서예를 예술적으로 완성시켰으며, 당(唐)대에는 태종의 비호 아래 구양순, 저수량 등 일세를 풍미한 서예가들이 서예미(書藝美)의 표준을 제시하였으며, 당중기에는 강한 개성을 표현하는 초서(草書)가 크게 발전하였다. 송(宋)의 서예는 소식(蘇軾), 미물(米芾) 등과 같은 문인이자 개성있는 서예가들이 시문학과 결합하여 높은 격조를 보여주었다. 또한 역대 명필들의 글씨를 모은 순화각첩(淳化閣帖, 992년)과 같은 법첩이 간행되었다.
원.명대에는 고전(古典)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진전되었는데, 조맹부는 왕희지 글씨의 본질로 회귀하는 복고를 추진하였고, 동기창은 서예의 본질과 정신을 강조하였다. 이 시기에는 상업적인 법첩이 출판되기도 하였다. 청대(淸代)에는 서예의 과거 전통을 계승하는 가운데 이를 재조명하는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었는데, 고대 비석 중심의 서예를 연구하였다. 이시기에는 원형에서 멀어진 법첩에 대한 평가는 낮아지고, 비석을 탑본한 비첩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서예미의 표준을 제시한 당(唐) 서예가
당(唐)은 서예의 발전이 가장 활발하던 때였다. 서예 문화를 주도한 당 태종(太宗, 599~649년)의 비호 아래 구양순(歐陽詢, 557~641년), 우세남(虞世南, 558~638년), 저수량(貯水量, 596~658년) 등 굴지의 초당대 서예가들은 아름다운 글씨로 일세를 풍미하며 서예미의 표준을 제시하였다. 당 중기 이후에는 안진경(顔眞卿, 709~758년)과 같은 개성이 강한 서예가가 등장하여 다음 시대를 예고하였다. 대부분 비석으로 세워진 이들의 글씨는 비첩으로 많이 제작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진사명(晋祠銘), 당 646년, 당태종(599~649년), 행서.
당태종은 고려시대 비석에서 집자비석이 남아 있을 정도로 뛰어난 명필이었다고 한다.
태종의 대표적인 글씨로 정관 22년(646년)에 새겨졌다. 필치는 담담하면서도 무인의 활달함이 있는데, 변화가 크지 않은 균일하고 정제된 맛을 보여준다. 초당대의 일반적인 서풍 경향과 견주어 볼 때 개성이 강하다. <출처:중앙박물관>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당 632년, 구양순(歐陽詢, 557~641년), 해서.
구양순은 당초기에 활동했던 서예가로 왕희지와 함께 가장 잘 알려진 서예가이다. 모든 서체를 잘하였으며, 특히 해서가 뛰어 났다고 한다.
구양순이 당 태종의 명을 받아 쓴 비문이다. 정관 6년(632년) 태종이 구성궁(별궁)으로 피서를 왔을 때 메마른 별궁 안에서 샘물이 솟아 이를 기념한 내용을 담았다. 당의 해서를 대표하는 글씨로 매우 단정하고 절제된 필법을 보이며 글자의 따임새가 긴밀하다. <출처:중앙박물관>
황보탄비(皇甫誕碑), 당 정관 연관(627~649년), 구양순, 해서
정권쟁탈 과정에서 죽은 수(隨)의 대신 황보탄을 위해 아들인 황보무일(皇甫無逸)이 당의 재상 우지녕(于志寧, 588~641년)에게 글을, 구양순에게 글씨를 부탁하여 세운 비석이다. 구양순의 글씨는 단정한 글자 형태, 짜임새가 긴밀한 결구(結句), 엄격한 점획과 날카로운 운필이 특징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벽락비(碧落碑), 당 670년, 전서
산시성 용흥사(龍興寺)에 있는 비석으로 원래의 이름은 <이훈등위망부모조대도존상>이다. 당 고종 총장 3년(670년)에 이훈, 이의, 이찬, 이심 등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세웠다. 글씨는 전서와 대전(大篆)이며 고격을 갖춘 중요한 글씨로 평가된다. <출처:중앙박물관>
초서(草書)에서의 새로운 개성 분출과 자유표현
당(唐) 중기에 접어들며 서예는 점차 강한 개성 표현을 지향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초서에서 두드러졌다. 장지(張芝)와 왕의지(王羲之)에 이어 장욱(張旭)과 회소(懷素)에 의해 당의 초서는 자유롭고 격정적인 광초(狂草)의 새 경지를 열었다. 휘몰아치듯이 변화가 많은 필선은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상징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자서첩(自敍帖), 당 777년, 회소(懷素, 725~785년), 초서, 복제본
자서첩 글씨.
회소(懷素)는 원래 승려로 술을 좋아해 만취한 상태로 붓을 놀려 쓴 글씨인 광초(狂草)를 잘 썼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서 초서를 대표한 글씨이다.
회소는 당의 승려로 변화와 흥취 그리고 기운이 뛰어난 자유분방한 초서를 썼는데, 이를 광초(狂草)라고 한다. 자서첩은 회소 자신의 삶과 글씨에 대한 깨달음을 담고 있는데, 몰아치는 붓의 기세로 예리하면서도 부드러운 변화가 큰 글씨를 써서 초서 예술의 최고 경지로 평가된다. 이 글씨는 자서첩의 면모를 잘 재현해 놓은 복제품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자서첩(自敍帖), 당 777년, 회소, 초서
법첩은 서예작품을 모사하여 만든다. 특히 탑본 법첩은 글씨가 흰색으로 보이는 반전(反轉) 효과로 인해 일반 서예 작품과 다른 인상을 준다. 이것은 회소의 자서첩을 탑본하여 법첩으로 만든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쟁좌위고(爭坐位稿), 당 764년, 안진경(顔眞卿, 706~785년), 행서.
안진경(顔眞卿)은 중국 당나라의 서예가로 남성적인 박력과 균제미(均齊美)를 발휘한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당대 이후 중국 서도(書道)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안진경은 국가 법요 때 환관들의 횡포와 아첨하는 조정대신들의 태도에 분노하여 당시 책임자인 곽영예(郭英乂)에게 항의문을 보내는데, 이것은 그 항의문 서간의 초고이다. 단슴에 자유자재로 휘두른 필획에서 풍부한 변화를 보여주면서 중후함과 격조가 느껴진다. <출처:중앙박물관>
다보탑비(多寶塔碑), 당 752년, 안진경, 해서
장안(長安) 천복사(薦福寺)에 건립된 비석으로 안진경이 44세 때 쓴 글씨이다. 안진경 특유의 굵은 필획과 터질듯한 서풍이 보이기 전의 초기 글씨로, 단정한 자형에 정밀하고 변화가 큰 필획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개성있는 서예 표현과 법첩의 제작
송(宋)의 서예는 자유롭고 담백하게 개성을 표현하였고 시문학과 결합되어 높은 격조를 지녔다. 소식(蘇軾, 1037~1101년), 황정견(黃庭堅, 1045~1105), 미불(米芾, 1051~1107년) 등 개성있는 서예가들이 활동하였다. 또한 《순화각첩(淳化閣帖)》(992년)과 같은 법첩이 간행됨으로써 서예는 보다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강엄의 시(江淹詩), 북송 1080년, 미불(米芾), 행서,
미불은 송(宋)대 서예가이자 화가이다. 문장.서(書).시(詩).고미술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소식(蘇軾) 등고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산수화에서 아름다운 자연을 묘사하기 위해 미점법(米點法)이라는 독창적임 점묘법을 창시하였다.
남조 양(梁, 502~557년)의 시인 강엄의 시 「종관군건평왕등노산향로봉」을 쓴 것이다. 미불의 글씨는 소식(蘇軾)에 비해 날카롭지만 먹선의 조절과 변화가 큰 필획으로 표현하여, 감각적인 개성이 넘친다. <출처:중앙박물관>
취옹정기(醉翁亭記), 북송 11세기, 소식, 해서.
시인으로 더 잘 알려진 소식이 쓴 글씨이다.
취옹정기는 취옹정의 유래와 경치 및 삶의 정취를 담은 글로, 북송의 문장가 구양순(歐陽脩, 1007~1072년)가 지었다. 이는 소식이 중대자(中大字)의 행가(行氣)가 넘치는 해서로 박력있게 썼는데, 그는 왕희지의 서법을 추구하면서 안진경의 글씨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글씨를 창출해냈다. <출처:중앙박물관>
전통 고전(古典) 서예의 재현
원(元)과 명대(明代)에는 전통 고전(古典) 서예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진전되어 이전보다 한층 더 깊이 있는 서예 표현이 이뤄졌다. 서예가들은 모두 문인의 품격을 지닌 서예를 펼쳤다. 조맹부(趙孟頫, 1254~1322년)는 왕희지 글씨의 본질로 회귀하는 복고를 추구하였다. 왕희지에 대한 존숭은 문징명(文徵明, 1254~1322년)과 동기창(董其昌, 1555~1636년)으로 이어졌는데, 특히 동기창은 형식을 넘어 서예의 본질과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때에는 법첩 제작이 더욱 활성화되었고 상업적인 법첩의 출판도 이루어졌다. <출처:중앙박물관>
적벽부(赤壁賦), 원 13세기 후반, 조맹부, 해서,
원(元)대 활동한 화가이자 서예가로 왕희지, 구양순과 함께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서예에서 왕희지의 전형으로 복귀할 것을 주장한 복고주의에 앞장섰다.
조맹부는 옛 글씨의 심도있는 연구를 바탕으로, 왕희지(王羲之) 글씨의 요체를 깨닫고 이를 자신의 글씨로 소화하여 송설체(松雪體)를 이루었다. 소식의 「전前 적벽부(赤壁賦)」를 쓴 것으로, 단정하면서도 날카로운 풍모를 갖추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증도가(證道歌), 원 1316년, 조맹부 해서
「증도가」는 당(唐) 영가대사(永嘉大師) 현각(玄覺:665∼713)이 지은 것으로, 육조 혜능을 배견(拜見)하고 깨우친 선종의 깨들음을 표현한 글이다. 조맹부의 해서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연우 3년(1316) 조맹우가 균헌선사(筠軒禪師)를 위해 쓴다는 발문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석가여래성도기(釋迦如來成道記), 명 16세기, 동기창, 행서.
동기창은 명(明)대 말에 활동한 문인, 화가, 서예가이다. 문학에 능통하였으며 명대 제일의 서예가로 평가받았다.
당의 문학가 왕발(王勃, 650~676년)이 지은 「석가여래성도기」를 동기창이 쓴 것이다. 동기창은 안진경과 왕희지를 통해 자신의 글씨를 이루었다. 이 글씨는 글자의 형태뿐 아니라 유유(幽幽)한 필획과 정취가 빼어난 글씨로 평가된다. <출처:중앙박물관>
지상편(池上篇), 명 16세기, 동기창, 행초서
백거이(白居易, 772~846편)의 시 「지상편(池上篇)」을 행초서로 쓴 것으로, 서예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변화있고 매끄럽게 쓴 글씨는 유려함과 동기창 자신의 깊은 문학적 소양을 보여준다. <출처:중앙박물관>
전통 서예의 재조명
청대(淸代)에는 서예의 과거 전통을 계승하는 가운데 이를 재조명하는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첩학(帖學)은 왕희지(王羲之) 서예 중심의 보수적 전통을 추구했고, 비학(碑學)은 고증학(考證學)과 금석학(金石學)을 기반으로 한 고대 비석 중심의 서예를 연구하였다. 청대에는 명필이었던 황제 건륭제(乾隆帝, 1711~1799)를 비롯하여 비학과 첩학 두 영역을 아우른 옹방강(翁方綱, 1733~1799년), 비학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완원(阮元, 1764~1849) 및 예서의 대가 등석여(鄧石如, 1743~1805년) 등 수많은 서예가들이 활동하였다. 한편 모각을 되풀이하는 가운데 원형에서 멀어진 법첩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으로 낮아졌지만, 비석을 탑본한 비첩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다. <출처:중앙박물관>
금강반야바라밀경, 청 1801년, 옹방강, 해서,
옹방강은 추사 김정희 스승을 잘 알려진 인물이다.
옹방강은 청대 제일의 서예가이자 감식가로 비학과 첩학을 모두 아울렀는데, 특히 비학의 출발점이 되는 인물이다. 이는 가경 6년(1801)에 쓴 것을 법첩으로 제작한 것이다. 그의 글씨는 김정희의 젊은 시절 서예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이진재법첩(詒晉齋法帖), 청 1796~1798년, 성친왕(成親王, 1752~1824년), 해서
성친왕은 부친 건륭제의 재능을 이은 명필로, 조맹부와 동기창의 글씨를 중심으로 전형적인 고전 서풍을 이룬 첩파(帖派)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느 가정 3년(1798) 가당(駕堂) 선생을 위해 쓴 글로 알려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고금영련휘각(古今楹聯彙刻), 청 1900년, 여러 서체
이 법첩은 건물 기둥의 옛 영련(楹聯, 주련) 글씨를 모아 엮은 것으로 자집(子集)에서 해집(亥集)까지 총12권이다. 각각의 주련 글씨를 일관된 크기로 축소하여 간편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서예 감상의 다양한 방식을 보여주는 예이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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