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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비석/금석문

  • 구례 연곡사 현각선사탑비(보물)

    전남 구례군 토지면 연곡사 경내에 있는 현각선사탑비(보물)이다. 이 탑비는 고려초 활동했던 현각선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글이 적힌 비몸은 없어지고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거북받침돌은 용의 머리와 거북모양의 몸체로 되어 있다. 머릿돌은 여러마리의 용이 다투고 있는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조각수법이 세밀하고 힘이 넘친다. 머릿돌 앞쪽에는 탑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뒷편에 위치한 고려초 승탑인 북승탑의 주인이 현각선사라는 의견도…

  • 구례 연곡사 동승탑비(보물)

    전남 구례군 토지면 연곡사 동 승탑 옆에 있는 탑비(보물)이다. 글이 새겨진 비몸은 없어지고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거북받침돌은 용의 머리를 하고 있으며, 등에는 육각형의 거북등껍질 대신 새 날개 모양의 무늬를 새겨놓고 있다. 비몸을 올리는 비좌에는 구름무늬과 연꽃무늬로 장식하고 있다. 머릿돌에는 용무늬는 없고 구름무늬만 새겨 놓고 있으며, 꼭대기에는 연꽃봉우리 모양을 조각해 놓았다. 웅장한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 남원 황산대첩비지(사적), 태조 이성계가 왜구를 크게 물리친 곳

    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에 있는 황산대첩비지(사적)이다. 이곳은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를 크게 무찌른 황산대첩이 있었던 지역이다. 황산대첩비는 선조 10년(1577)에 황산대첩 승리를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 호조판서 김귀영이 글을 짓고 송인의 글씨를 새긴 승전비이다. 당시에는 비각, 별장청 등 부속건물도 함께 지어 비를 지키도록 했다. 일제강점기 2차세계대전 막바지로 치달은 1945년 1월에 남원 경찰이 비를 폭파하고 비문에 새겨진 글자를 없애버렸다.…

  •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보물)

    전북 남원시 실상사 수철화상탑 앞에 세워진 탑비(보물)이다. 탑비에는 수철화상의 행적과 탑의 조성경위 등을 기록하고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글자를 거의 판독할 수 없다. 탑비는 거북받침돌이 있는 당시의 일반적인 탑비와는 달리 직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탑비가 세워져 있다. 머릿돌에는 구름속에 두마리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가운데 ‘능가보월탑비’라는 승탑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조각수법이나 조형미가 뛰어난 편은 아니다.…

  •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비(보물), 통일신라 비석의 원형을 보여주는 탑비

    남원 실상사에 증각대사탑과 함께 세워져 있는 탑비(보물)이다. 실상사를 창건한 홍척(洪陟)국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비몸은 남아 있지 않고,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받침돌은 무열왕릉비처럼 거북 형상을 하고 있다. 조각수법이 섬세한 편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비석받침돌을 고전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반면, 머릿돌은 조각수법이 뛰어난 편으로 앞쪽에 ‘응료탑비(凝蓼塔碑)’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비교적 이른 시기인 9세기 중엽에 만들어 졌다.…

  • 무령왕릉 지석(국보), 무덤주인을 밝혀준 중요한 유물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는 무령왕릉 지석(국보)이다. 1970년대 무령왕릉이 처음 발굴되었을 때 무덤 널길에 놓여 있던 것으로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아주 중요한 유물이다. 무령왕과 왕비의 지석 2매로 되어 있다.  묘지석에는 죽은 날자와 무덤에 안장한 날짜가 적혀 있는데, 무령왕은 1년상, 왕비는 3년상을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왕비가 죽은 후 서쪽에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어 공주 정지산에 빈전이…

  • 안동 송제비(松堤碑), 임하댐 아래 반변천에 제방을 쌓은 내력이 적힌 비석

    안동 도심에서 반변천을 따라 영양과 영덕을 연결하는 34번 국도변에 있는 송제(松堤) 사적비이다. 이곳은 안동 도심에서 4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안동댐이 있는 낙동강 본류와 임하댐이 있는 반변천이 만나는 지점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주변 지역은 백두대간의 물이 한곳에 모이는 곳으로 예로부터 홍수의 피해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주택가에서 약간 떨어진 도로변 경치좋은 곳에 작은 정자와 함께…

  • 성균관 탕평비, 영조가 붕당정치 폐해를 해소하고자 세웠던 비석

    공자를 모신 서울 문묘(文廟)가 있는 성균관대학교 교문을 들어서면 조선후기 영조가 세운 탕평비를 볼 수 있다. 탕평비는 1742년(영조18)에 자신의 집권한 이래 붕당정치의 폐해를 해소하고자 펼친 탕평책을 대외적으로 표방하기 세운 비석으로 관직 진출을 준비하는 새로운 인재들이 모여 있는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 유생들에게 붕당정치를 경계하도록 세웠다. <성균관 탕평비> 영조가 즉위했을 때에는 숙종대부터 이어져온 붕당정치가 절정을 이루던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