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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박물관 특별전, "헝가리 왕실의 보물"] 헝가리 귀족의 복식, 화려한 일상생활

전시회 두번째 주제는 ‘헝가리 귀족의 복식’이다. 헝가리 복식문화는 귀족들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르네상스 시기 유럽 직물산업의 발전과 함께 다양한 직물들과 재료들이 헝가리 귀족들의 복식에 사용되었다. 17세에는 평민들이 귀족의 복식을 모방하자 사치를 금지하는 규제가 실시되기도 하였다. 합스부르크 왕가 통치 시기에는 독일 복식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에 대한 반발로 기존 헝가리 농민들의 전통복식을 모방하기도 하였다.  특별전에 전시된 복식들은 합스부르크 왕가 통치시기인 18~19세기에 사용되었던 헝가리 귀족들의 복식을 전시하고 있다. 이들 복식들은 독일의 영향을 받은 갓으로 보이며, 전형적인 유럽 귀족 복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헝가리적인 요소가 일부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헝가리 왕실의 보물”의 두번째 주제는 ‘헝가리 귀족’의 복식이다. 헝가리의 귀족들을 중심으로 한 복식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헝가리 여성의 복식
헝가리 여성 복식의 주요 요소들은 16세기에 완성되었다. 유럽 상류층의 영향을 받은 헝가리 귀족 여성들은 화려한 자수나 구슬로 장식한 주름소매의 셔츠, 레이스나 벨벳테두리가 있는 긴주름치마, 코르셋, 화려하게 장식된 몸에 딱 붙는 보디스(Bodice), 자수와 레이스로 꾸며진 앞치마, 여성용 외투, 망토, 드레스 등 상류층의 권위에 맞도록 호화로운 장식과 부풀리고 과장된 복식을 선호하였다. 18~19세기 헝가리 귀족 여성들의 복식에서는 로맨틱 스타일의 영향이 나타난다. 이 시기 새롭게 유행한 귀족풍 의상은 목선을 옆으로 퍼지게 하여 어깨를 많이 드러내고 소매의 윗부분을 부풀리고 허리는 더욱 가늘게 조였으며, 스커트를 버팀대로 부풀린 형태였다. 여기에 주름이나 레이스장식을 통해 화려하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헝가리 귀족 여성들의 복식에서 가장 중시된 것은 색감과 장식의 조화였다. 헝가리 귀족 여성들은 다양한 색상의 옷을 즐겨 입었으며 비단, 벨벳 등의 옷감을 선호하였다. 그리고 금실과 비단장식자수, 금단추, 레이스 등으로 옷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때문에 비슷한 형태의 옷이라도 귀족 여성의 옷은 평민 여성의 옷에 비해 훨씬 더 장식적이고 화려했다. <출처:고궁박물관>

헝가리 여성의 연회복,

동화속에 많이 등장하는 전형적인 19세기 유럽의 연회식 복장이다. 대관식 연회에 입었던 것으로 당대 귀족들이 입었던 최고 수준의 연회복이라 할 수 있다.

1867년 머일나트 죄르지(Maijlith Gyorgy, 1786~1861년) 백작의 부인인 슈테파니아 프란다우(Stefania Prandau)가 1867년 프란츠 요제프1세(Franz Jeseph I)의 대관식에서 입은 연회복이다. 코르셋 스타일의 블라우스, 치마, 베일, 앞치마로 구성되어 있다. 1867년 대관식 이후, 백작부인의 후손이 1896년 헝가리 민족 정착 천년맞이 기념행사에서 이 드레스를 입었다. 헝가리 귀족들은 전통적인 헝가리의 의상을 입거나, 그 옷의 모티브를 이용해서 새 옷을 제작.주문하는 것을 즐겼다. 정장을 입을 때에는 장신구로 펜던트를 부착하기도 했다. <출처:고궁박물관>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펜던트(17세기초), 꽃모양 펜던트(17세기 중엽). 

꽃모양을 하고 있는 화려한 장식이다. 조선시대 왕실이나 상류층 여인들이 사용했던 것과 유사하며,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자들의 취양은 비슷해 보인다.

인어모양 펜던트(17세기초), 머리장식(17세기 전반)

머리꽂이, 1748년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허리띠, 18세기 후반.

허리띠, 18세기 전반.

상당히 화려하게 꾸며 놓은 허리띠이다. 16세기 이후 평민들이 귀족들의 복식을 모방하면서, 상류층에서는 화려한 장신구로 서민층과 차별화하였다.


여성용 가슴장식(Stomacher), 18세기 전반

망토 잠금 장식, 18세기 후반


헝가리 미혼 여성의 머리장식(Parta), 18세기,

헝가리 미혼여성들이 착용했던 머리장식이다. 주로 축제 때 사용했던 것으로 금속실, 유리구슬 등 값비싼 귀금속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헝가리 여성의 모자(Bonnet), 18세기,

여성이 쓰는 모자로 보통 기혼 여성들이 썼다. 보닛은 처음에는 귀족 여성들만 착용했으나 18세기 되면서 평민 여성들도 장식된 보닛을 쓰게 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여성 모자(Bonnet), 1850년 경,

출산 직후에 착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이 보닛은 엘리자베트 왕비(Eilsabeth von Wittelsbach, 1837~1898)가 자신의 가종교사였던 에마멘델네니(Emma Mendlenyi)에 선물한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여성용 신발(1770~1780년),

앞이 뽀족하고 좁은 여성용 신발로 굽은 부드러운 염소가죽으로 감쌌다. 18세기 유럽에서는 프랑스 궁중 패션이 독보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이 신발의 모양과 천, 장식은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출처:고궁박물관>

엘리자베트 왕비의 부채, 1880년 경,

19세기 상류층 여자들이 많이 사용하던 얼굴을 가리는 부채이다.

흰색 레이스로 만든 부채로 부챗살은 자개로 장식하였다. 엘리자베트 왕비는 그녀의 미모에 대한 전설을 지키기 위해 대중 앞에 설 때는 종종 부채로 얼굴을 가리곤 했다. 이 부채는 왕비가 그녀의 시중을 들었던 코르니시 마리어(Kormis Maria)라는 헝가리 여인에게 선물한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엘리자베트 왕비의 손수건, 1880년 경,

가장자리에 레이스가 달린 흰 손수건으로 “E”가 바탕에 수놓아져 있다. 이 손수건은 원래 엘리자베트 왕비의 것이었으나, 후에 가정교사였던 에마멘델레니에게 선물한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엘리자베트 왕비의 외출복, 1890년대,

엘리자베트 왕비의 외출복이다. 궁중 재단사가 제작한 것으로 허리 바로 아래까지는 몸에 딱 붙고 그 아래로는 점점 폭이 넓어져 엉덩이를 덮는 형태로 되어 있다. 이 옷은 왕비가 여행이나 외출 때 입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고궁박물관>

앞치마, 1830년대,

귀족 여성이 입었던 앞치마이다. 지위가 낮은 여성들이 일상생활에서 착용하던 앞치마는 귀족여성들이 농장과 집안일을 직접 감독하는 책임을 맡게 되면서 귀족의 복식이 되었다. 앞치마는 주부의 미덕을 상징하는 동시에 값비싼 재료와 화려한 장식으로 고귀함과 부유함을 나타내기도 했다. <출처:고궁박물관>


여성상의(Bodice), 18세기 중엽,

여성용 상의로 몸에 꼭맞고 가슴부터 허리에 걸쳐 끈을 조여 입는 옷이다. 헝가리 여인들은 이러한 종류의 보디스를 고운 리넨으로 제작된 속옷 위에 입었다. 보통 보디스와 같은 재질로 만들어진 폭이 긴 치마와 함께 입는다. <출처:고궁박물관>

헝가리 남성의 복식
헝가리 남성들의 전통 복식은 돌마니(Dolmany, 몸에 딱 맞는 재킷), 통이 좁고 꽉 끼는 바지, 부츠, 멘테(Mente, 남성 상의), 커처가니(Kaczahany, 호랑이나 늑대 등의 가죽), 로제트와 깃털로 장식된 털모자 등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귀족 남성의 옷은 같은 양식이라도 벨벳, 공단, 진홍단과 같은 값비싼 옷감으로 만들었고 모피로 장식했다. 기독교의 유입이후, 헝가리에서는 고대 신앙이나 관습 등을 금지시켰다. 이에 따라 얼마간은 동쪽으로부터 유입되었던 아름다운 복식이 귀족들로부터 외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상류게층은 그들에게 친숙한 전통복식을 다시 찾기 시작했고, 11세기 이후부터 헝가리 귀족 남성은 구슬로 수놓은 셔츠, 어깨 위로 걸쳐진 걸쇠가 달려 있는 멘테, 뾰족한 모자, 수가 놓인 가죽 또는 모피 쾨드묀(Kodmon, 재킷), 높은 부츠 등을 착용하였다. 헝가리에는 가죽을 얻을 수 있는 동물이 많았다. 특히 담비의 수가 많았기때문에 귀족뿐만 아니라 평민들까지도 모피와 가죽으로 옷을 만들었다. 주로 바지, 부츠, 털모자, 벨트, 소형 가방, 안장, 술달린 마구 등을 가죽으로 만들고 했다. 귀족들은 평민들과의 차이를 두기 위해 계급을 나타내는 칼과 같은 장식을 더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헝가리 남성용 정장, 1916년,
남성용 정장으로 멘테(Mente), 돌먼(Dolman), 바지, 모자로 구성되어 있다. 귀족 세죄디 주켈테르 리요시(Szecodi Culkkelter Lajoi)의 옷으로, 마지막 헝가리 왕이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황제였던 카를1세(Karl I, 재위1916~1918년)의 대관식에 참여할 때 입기 위해 부다페스트에서 제작된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어깨에 걸쳐 입는 재킷(Dolman), 1916년,

격식 있는 정장 안에 입는 상의이다. 회색 실크에 흰색과 금색의 장미 꽃봉오리 문양을 장식했다. 헝가리 귀족들이 입었던 대표적의 의상이다.


망토(Mente), 1916년,

헝가리 귀족 남성의 나들이용 외투이다. 소매 옆구리에 절개된 부분과 앞쪽 여밈에는 매듭 커프스를 장식했다. 커프스 아래쪽과 옷깃에는 장식줄로 식물문양이 표현되었다. 옷 뒤쪽의 절개선 부분은 금색 장식줄로 강조했다. <출처:고궁박물관>


모자, 1916년,

벨벳으로 만들어진 남성용 모자이다. 네 조각의 천으로 제작했는데 절개선 부분은 얇은 줄로 장식했다. 모자의 꼭대기 중앙부분에는 금실로 짠 단추와 세 줄로 땋은 장식줄이 달려 있고 깃털 장식을 꽂기 위한 작은 구멍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바지, 1916년,

파란색 실크로 제작한 헝가리식 바지이다. 바지 뒤쪽의 절개선은 금실로 테두리를 둘렀다. 앞쪽은 다양한 두께의 실로 만들어진 끝이 뾰족한 화살표 형태의 장식이 아래쪽으로 부착되어 있다. 바지 앞에 제작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금속 걸쇠와 비닐 단주로 바지를 잠글 수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부츠(20세기초), 자수부츠(19세기초), 자수신발(17세기 말) 

부츠, 20세기초, 짙은 가죽부츠로 폭이 좋은 형태이다. 부츠의 윗부분에는 끈을 꼬아 장식했다. 굽에는 작은 금속제 장식을 달았다. 헝가리 남성들은 정장차림을 할때 일반적으로 꼭 뿥은 바지에 이러한 부츠를 신었다.자수부츠, 19세기초, 위로 갈수록 통이 넓어지는 형태의 남성용 부츠이다. 부츠의 윗부분은 아치 모양으로 금색실을 꼬았고 중앙에는 장미모양 장식이 있다. 금실로 땋은 끈은 부츠 측면까지 내려오고, 나무줄기와 도토리 문양을 함께 장식했다. 자수신발, 17세기 말, 발목 길이의 가죽 신발로 당시의 실내화 모양을 따라 재단되었다. 황금색의 앞고 튤립 문양이 자수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넥타이, 20세기초,

2개의 끈으로 돌먼(Dolman) 옷깃 아래에 묶을 수 있는 형태의 넥타이이다. 프랑스 패션의 영향으로 헝가리 남성들은 그들의 전통 복식에 타이를 매기 시작했다. <출처:고궁박물관>

헝가리 의상을 입은 남녀, 론 얼러요시(Alajos Rohn), 1859년,

19세기 헝가리 귀족들의 전형적인 의상이다. 당시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헝가리 국립박물관을 배경으로 헝가리 의상을 입은 남녀를 그린 석판화이다. 당시 가을, 겨울의 패션을 보여주는 의상이다. 1848~1849년 독립전쟁의 좌절 후 처형된 영웅들의 장례식이 큰 사회적 행사가 되었고, 대중들은 저항의 상징으로 검은색 헝가리식 상복을 입었다. <출처:고궁박물관>

헝가리 의상을 입은 남성들, 1867년,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입었던 헝가리 전통 의상이다.

헝가리 문화의 상징인 헝가리 국립박물관 앞에 서 있는 7명의 남자를 그린 석판화이다. 왼쪽에서부터 순서대로 귀족, 평민, 전령, 후사르 기병, 그리고 가장 오른쪽은 시종이 각자의 신분이 나타나는 헝가리 의상을 입고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에스테르하지 백작 가족, 1830년대 초,

에스테르하지 팔(Esterhazy Pal, 1786~1866년) 백작 가족을 그린 그림이다. 에스테르하지 팔은 외교관이자 정치가로 1848년 헝가리 국회의 최초 책임자로서 왕의 측근인 장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헝가리의 외교정책을 대변하는 임무를 맡았다. 가장 부유한 헝가리 귀족 가문 중 하나였던 에스테르하지 가문은 호화로운 생활로 유명했다. <출처:고궁박물관>


군인과 귀족 여성, 비케시 하인부허 요제프(Jozsef Bikessy-Heinbucher), 1816년,

19세기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에 반발하여 헝가리 전통의상을 입었던 시대상을 보여준다.

군인이 귀족 여성에게 작별을 고하는 장면을 묘사한 다색 석판화이다. 이들은 전형적인 헝가리 전통 복장을 입고 있는데, 당시 헝가리인들이 프랑스나 독일의 패션을 거부하고 전통 복식을 고수했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헝가리 귀족 남녀, 요한 크리스토프 슈미트하머(Johans Christopher Schmidhammer), 18세기,

헝가리 전통 축제 의상을 차려 입은 헝가리의 젊은 남.녀 귀족을 그린 다색 석판화이다.


차키 요제프 백작, 1749년,

헝가리 부총리였던 차기 요제프(Csaky Jozseff, 1745~1799년) 백작의 어린 시절 초상화이다. 1749년에 그린 것으로 백작이 4살 되던 무렵의 모습이다. 초상화 속 모습은 실제보다 더 나이 들어 보여 마치 작은 어른과 같은 느낌을 주는데 인물의 개성보다는 사회저거 지위를 부각시켜 그랬던 당시 초상화 스타일의 유행을 따른 것이다. 정교하게 묘사된 어린 아이의 얼굴, 콘솔 탁자와 기둥, 장막이 있는 도해적인 배경을 통해 화가는 이 어린 아이 속에 내재되어 있는 미래의 영향력 있는 귀족 청년의 영혼을 표현해 내고자 했다. <출처:고궁박물관>


차키 언너 백작부인, 1750년경,

차키 요세프 백작의 부인인 차키 언너(Csaky Anna)의 초상화이다. 차기 요제프 백작의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백작부인은 그녀의 나이에 맞지 않은 훨씬 더 성숙한 신체비례를 보인다. 이런 종류의 초상화는 주인공의 사회적 위치를 과시하기 위해 저택의 회랑에 걸어 장식하였다. 언너는 망사 앞치마가 있는 연한 자주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상의를 묶는 끈 장식과 어깨에 두른 레이스는 오스트리아 빈과는 다른 헝가리 귀족 특유의 의상이다. <출처:고궁박물관>

헝가리 귀족의 복식
헝가리 귀족들은 자신들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화려하고 품위있는 복식에 관심이 많았다. 따라서 헝가리의 복식문화는 귀족들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르네상스 시기 유럽의 직물산업은 생산체제 뿐 아니라 기술도 크게 개선되어 기계가 개량되고 염색술의 발전으로 인해 새로운 상품이 계속 개발되었다. 고급 모직이 동방에서 전래되었고 단색의 벨벳, 자수를 놓은 직물과 같이 원단의 종류가 매우 다양해져 귀족들의 미적 감각이 높아졌다. 또한 동물의 모피가 상류층에서 애용되었으며 다양한 종류의 레이스가 개발되어 헝가리 귀족 복식에 사용되었다. 16세기에는 평민들의 귀족 복식 모방이 도를 넘어서자 귀족들이 강하게 반발하기 시작했고, 17세기에는 사치를 금지하는 규제가 실시되어 사회적 지위에 맞게 옷을 입도록 하는 법령이 선포되기도 했다. 이 시기 헝가리 귀족들은 평민들과 비슷한 형태의 옷을 입었지만 색, 품질, 장식 등으로 차이를 두려고 했다. 오스만제국 침략 시기에는 그 영향을 받아 복식의 형태가 더욱 단순해졌으나 색감은 화려하게 변하였다. 합스부르크왕가의 통치 아래 헝가리 귀족들은 독일 복식의 영향을 받아 공산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주로 모피로 만든 경기병 재킷, 수놓은 재킷, 보닛 모자, 장식 망토, 깃털로 장식한 모자 등이 헝가리 상류계층의 전형적인 복식이 되었다. 19세기에 들어 합스부르크 왕가의 압제정책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귀족들은 기존 헝가리 농민들의 전통 민속복식을 모방하기도 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전시회 세번째 주제는 ‘헝가리 귀족의 화려한 일상생활’이다.

헝가리 귀족들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 이후에더 봉권 귀족의 특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귀족들은 영지에서 생산된 농산물이나 섬유제품 등을 오스트리아에 판매하면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들은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우호적인 관계속에서 서유럽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빠르게 받아 들였다. 전시회에서는 헝가리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을 보여주는 식기를 비롯한 생활용품, 섬유제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헝가리 귀족의 화려한 일상생활
헝가리 왕국의 귀족들이 건국 이래로 누려온 봉권적 특권은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헝가리 왕위를 세습하게 된 후에도 유지되었다. 헝가리 귀족들은 자신들의 영지에서 생산된 농산물과 섬유제품을 오스트리아에 판매하여 부를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왕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서유럽 귀족계급의 문화를 빠르게 받아들였다. 헝가리의 고위 귀족들은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의 문화에 깊이 물들었으며 일부 귀족은 빈에 저택을 두고 머무르기도 했다. 17세기 중반 이후 헝가리 왕국에서는 바로크 예술이 크게 유행하였다. 바로크 예술은 본래 카톨릭 예수회를 중심으로 한 반종교개혁의 표현수단이기도 했기 때문에 헝가리의 신교 운동을 탄압하려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방침과도 일치했다. 이 시기에 헝가리 각지의 카톨리 교회건축은 물론 고위 귀족의 저택도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에스테르하지(Esterhaxzy) 가문의 궁전이 대표적이다. 합스부르크 왕가 중심의 헝가리 재통일 이후인 18세기에는 보다 웅장하고 화려한 바로크예술이 헝가리에서 꽃피었다. 헝가리의 고위 귀족들은 바로크 양식의 궁전에 극장과 연주회장 등의 문화시설을 갖추고 서유럽의 극단, 악단과 예술가를 초빙했다. 일상생활에서도 빈 등지에서 들여온 가구, 금속 기물, 의상 등을 즐겨 사용하였다. 이처럼 18세기 헝가리 고위 귀족들은 헝가리어를 모국어로 하고 복식 등에 헝가리 민족 고유의 요소 일부를 지키고 있었지만 생활 문화의 대부분은 서유럽을 모델로 삼고 있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언드라시 가문의 식탁용 장식 분수, 1748년,

헝가리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와인을 담아 마시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세개의 주전자를 붙여 놓은 모양의 분수이다. 주전자 바닥에는 “Csinltata Andrassy Ferenc 1748(1748년 언드라시 페렌츠를 위해 제작)”이라는 명문이 있어 언드라시(Andrassy) 가문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와인을 담아 마시는데 사용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헝가리 귀족들의 정찬에 사용되었던 식기
18세기 이후 헝가리 귀족들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생산된 최고급 은식기를 수입, 사용하였다. 또한 헝가리 장인들도 헝가리의 전통과 오스트리아의 영향을 조화시켜 훌륭한 수준의 은식기를 제작하였으며, 식기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어 공방의 명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귀족들의 정찬에 유리잔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로, 유리 세공 기술이 크게 발달했던 베네치아와 슐레지엔에서 수입한 제품을 사용하다가 차츰 헝가리 자체 제작품을 사용하게 되었다. 18세기 이후로는 도자기 선호 현상이 뚜렷해져 헝가리의 도자기 제작기술이 발달하였으며, 1826년에는 유명한 헤렌드(Herend) 도자기 제작 회사가 설립되어 지금까지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포크, 나이프, 숟가락과 같은 ‘커틀러리(Cutlery)’를 현대처럼 한 세트로 갖추어 사용하게 된 것도 18세기에 이르러서이다. 숟가락과 포크는 시기에 따라 그 모양이 조금씩변형되기는 하였으나, 잎사귀와 꽃 모양으로 손잡이를 장식하였고, 음식의 용도에 따라 구분하여 여러가지 모양의 은제 커틀러리를 사용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18세기 이후 헝가리 귀족들이 사용했던 화려한 식기 세트이다. 유럽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은으로 만든 제품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18세기 이후 도자기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헝가리 귀족들의 정찬을 재현한 식탁.

술잔세트(1675년) 와 조개모양잔(17세기 말),

손잡이가 없는 잔으로 큰 잔에 작은 잔을 포개어 넣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잔에는 소유주였던 트란실바니아의 수상 텔레키 미하이(Teleki Mihaly)와 그의 부인 베르 유디트(Ver Judit)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와인주전자, 1752년,

포도주를 담았던 주전자이다. 몸체에 문장과 “Torcka Sz Gyorgyi Torockai Kata 1752(토로커 가문의 죄르지와 토로커 커터 1752년)”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술병, 안드레에 쉬슬러(Andreas Schuussler), 1640년경


뚜껑달린 와인잔(고블릿,Goblet with Lid), 1600~1610년.

뚜껑이 달려 있는 포도주 잔이다. 뚜껑 위에는 창과 방패를 들고 있는 로마전사가 주조되어 있다. 잔에 새겨진 글을 통해 라코치라슬로(Rakoczi Laszlo)와 반피 에르제베트(Banffy Erzsebet)가 소유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숟가락, 17세기 중엽

육각형 접시, 1669~1686년

주전자와 그릇, 1630년 경,

천사와 꽃문양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주전자와 그릇이다. 손을 씻을 때 사용하는 물을 담는 도구로 ‘세수식 세트(Lavabo-set)’라고도 한다. 타원형의 그릇 바닥에는 함께 사용하는 주전자를 놓을 수 있도록 홈을 파놓았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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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 18세기,

소나무 짜임에 호두나무와 단풍나무 판재를 덮은 트란실바니아에서 제작된 화장대이다. 상판의 중간부분에는 접고 펼 수 있는 거울이 달려있고, 양 옆으로는 수평의 받침대 아래로 서랍이 2개씩 있다. 의자의 뒷면은 서랍과 같은 모양으로 사용하지 않을 때는 화장대 중간에 끼워 넣어 보관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출처:고궁박물관>

헝가리의 섬유 공예
머저르족(Magyar)은 헝가리에 정착하기 이전부터 가내 수공업으로 섬유제품을 생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삼을 재배하고 이를 가공하여 베를 짜는 방직은 19세기 중반의 공업화 이전까지 헝가리 여성들의 가장 중요한 일거리였다. 헝가리의 섬유 공예는 오스만 제국의 오랜 지배 기간을 거치면서 이슬람 전통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다양한 패턴에 근거한 섬유 제작이 발달한 터기의 섬유 공예는 헝가리 귀족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중앙아시아에서 생산된 고급양탄자 등은 헝가리 왕실과 귀족들에게 인기를 끌어 많은 양이 수입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아시아 문화의 영향과 함께 18세기 전반부터는 유럽의 바로크와 로코코 문화의 영향을 받아 이 두 문화가 결합된 독특한 헝가리만의 자수 패턴이 나타나게 되었다. 18~19세기 이후 헝가리의 민족 운동이 활발해지게 되자 귀족들은 서민층의 전통 의상과 문화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서민 문화가 자수에도 반영되어 꽃과 잎사귀, 곤충 등의 문양이 어우러진 독특한 패턴이 만들어졌으며 현재도 이와 같은 패턴의 많은 자수 공예품이 특산물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러그, 17세기 후반

터기의 우샤크(Usak) 지방에서 제작된 양탄자는 1920년 이전까지 헝가리 영토였던 트란실바니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트란실바니아 양탄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양탄자의 가운데 부분에는 두 개의 기도용 벽감과 앞사귀 무늬로 장식된 등불이 천장에 매달린 모습이 묘사되어 있으며 그 바탕은 넝쿨에서 돋아난 작은 장미 문양과 식물 문양으로 장식되었다. 벽감을 둘러싼 푸른색 네 귀퉁이는 별과 꽃으로 장식하였다. 바깥쪽 문양대에는 10개의 모서리가 있는 트란실바니아식 메달리온이 노란 바탕 사이에 붉은색과 흰색으로 번갈아 배치되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베갯잇, 17세기 중엽,

카네이션과 장미 문양을 중앙에, 그 사이에 잎사귀와 작은 튤립 등을 채우고 아래위로 작은 장미, 튤립, 석류, 카네이션 등을 수놓아 장식한 배갯잇이다. 자수의 모티프와 색상, 수를 놓은 방식 등은 모두 터키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고궁박물관>

침대시트, 17세기말,

작은 꽃으로 장식된 석류, 넝쿨, 튤립 등을 수놓아 장식한 침대 시트이다. 침대 밖으로 흘러내리는 시트 부분을 장식하기 위해 리본 문양의 에리스를 하단에 부착했다. 17세기에는 헝가리 귀족들을 중심으로 터기 패턴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을 혼합한 헝가리식 ‘귀족자수’가 유행했다. <출처:고궁박물관>


러그, 17세기 전반,

탁자나 침대를 덮거나 벽걸이 융단으로 사용되던 러그이다. 터키의 우샤크 지방에서 제작된 것으로 중앙에는 붉은색 바탕에 노란 아라베스크 무늬가 장식되었고, 테두리는 푸른색 띠 위에 끝이 뾰족한 앞을 가진 식물 문양과 별 문양, 양식화된 쿠픽 문자가 번갈아가며 배열되었다. 회화 작품과 문헌 기록에 따르면 17세기에 동방의 값비싼 양탄자는 소수의 특권층만 소유할 수 있었다. <출처: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