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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학봉기념관, 학봉종택에서 소장한 김성일의 유품을 볼 수 있는 곳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의성김씨 학봉종택에 위치한 학봉기념관이다. 조선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학봉 김성일 종택에서 소장하고 있는 유품 중 그의 생애와 학덕, 업적 등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 유물로는 퇴계 이황의 학맥을 잇는 학자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는 <학봉선생문집>을 비롯하여 퇴계의 전기 초고본인 <퇴계사전초(退溪史傳草)>, 관료로서 국정 수행과정을 기록한 각종 일기(日記), 임진왜란 당시 초유사로서 영남지방 의병들의 궐기를 촉구하는 <초유문초(招諭文抄)>을 비롯한 의병활동 관련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학봉기념관>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학봉종택 바깥에 마련된 학봉기념관. 주요 소장 유물들과 학봉선생의 생애를 간략하게 요약.설명해 주고 있다. 김성일(金誠一, 1538~1593년)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로 호는 학봉(鶴峯)이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서애 류성룡 선생과 함께 퇴계 선생의 학통을 이어받은 학자이자 중앙과 지방의 여려 관직을 역임한 관리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민심의 동요를 고려하여 일본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 보고하여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초유사, 경상감사로 의병의 궐기를 촉구하고 관군과 의병의 적극 협력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으며,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끌고 순국하였다. 저술로 『학봉선생문집』총20권, 『경연일기』, 『상례고증』, 『해사록』 등이 있고, 『용사일기』 등의 사적이 전한다.

촉석루 삼장사
촉석루 위에 마주 앉은 세 장사,
한잔술 비장한 웃음으로 남강 물에 맹세하네.
남강 물 쉬지 않고 도도히 흘러가듯,
저 강물이 마르지 않는 한 우리의 넋도 죽지 않으리

학봉이 초유사로 진주에 도착하니 성은 텅 비고 강물만 흐르고 있어 서글픔을 가눌 길 없었다. 조종도(趙宗道)와 이노(李魯)가 찾아와서 비감하게 말한다. “적의 칼날에 쓰러지느니 차라리 강물에; 빠져 죽읍시다.” 그러나 학봉은 결연히 답한다. “죽기는 두렵지 않으나 여러분이 도와 의병을 일으킨다면 적을 막을 수 있을 것이요. 만약 뜻대로 되지 않으면 그대, 나라를 지키다가 죽는 것도, 적을 꾸짖다가 찢겨 죽는 것도 좋겠소” 학봉은 시를 써 세 장사가 함께 결사 항전할 것을 맹세했다. <출처:학봉기념관>

<의성김씨 종택, 학봉선생 생가>

 학봉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안동 임하 천전에 있다. 화재로 소실된 건물을 학봉선생이 1587년 ‘巳’자형으로 직접 설계하여 다시 지었으며, 1967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학봉선생문집(鶴峯先生文集)

학봉의 시(詩), 서(書), 일기(日記), 연보(年譜), 행장(行狀) 등과 학봉의 저술을 엮은 문집으로 목판본이다. 1649년(인조27) 학봉선생문집 7권을 여강서원(호계서원)에서 간행하였고, 1726년(영조2) 학봉선생 연보와 1782년(정조6) 학봉선생문집속집5권을 호계서원에서 모두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1851년(철종2) 문집과 속집을 중간하면서 분집부록 4권을 처음으로 편제에 넣어 함께 임천서원에서 간행했다. 기존의 원집.속집과 부록에는 빠져 있었으나 종택에서 수백년 동안 고이 보관되어온 유초(遺草)와 자료들을 일고(逸稿) 4권과 일고부록 3권으로 문집에 처음으로 합편하여 1972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학봉전집』으로 간행했다. 1996년부터 6년여에 걸쳐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국역 학봉전집』을 6권으로 완역.완간했다. <출처:학봉기념관>

임천서원(臨川書院).

문충공 학봉선생을 주향한 서원이다. 1593년 학봉이 진주공관에서 돌아가시고 14년 뒤, 1607년에 학봉의 학덕과 공훈을 기려 사림의 선비들이, 당시 안동부사 한강 정구(鄭逑)선생의 주도하에 임하현(臨河縣) 서쪽 옛 서당에 사묘를 세우고 향사했다. 한강은 제문에서, “충의는 골수에 박혔으며 도리는 심장에 가득하다는 옛 선현의 말을 공이 진실로 받았다”라고 하며, 학봉의 정충대절을 기렸다. <출처:학봉기념관>

석문정사(石門精舍).

1587년(선조20) 학봉이 건립했으며, 안동 풍산 막곡에 있다. 벼슬을 그만두고 여생을 이곳에서 지내며, 퇴계선생의 유서를 잇고, 후학을 양성하려고 건립했던 정사이다.

호당삭제(湖堂朔製).

1574년(선조7) 학봉이 호당(湖堂, 독서당)에서 사가독서 할때 지은 친필 시고(詩稿)를 모은 첩이다. 모두 3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애민사상이 잘 나타나 있는 「모별자」, 「적벽행」 등이 실려 있다. <출처:학봉기념관>

퇴계학의 적통을 잇다.

학봉은 “성풍이 강직 방정하고 자질이 매우 뛰어 났으며 큰 절개가 있었다. ” -『선조실록』-
퇴계선생께서, “행실이 고상하고 학문이 정수하여 내가 본 가운데 그와 견줄만한 사람이 없다,”, “사람됨이 명민 영특하고 학문을 좋아하니 여간해서 얻어보기 힘든 사람이다.”하며, 학봉의 자질.인격.학문 모두를 칭양하셨다. – 『퇴계선생언행록』, 『퇴계집』-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

오륜 중 이륜인 장유(張維)와 붕우(朋友)에 관한 모범된 분들의 행실을 모아 그림으로 엮은 책이다. 중종때 모재 김안국(金安國)이 편찬했다. 1579년(선조12) 5월 학봉에게 내린 내사본(內賜本)이다. <출처:학봉기념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고려사와 같은 시대에 독자적으로 편찬한 것으로 작자와 연대는 미상이다. 1453년(단종1)에 간행된 초주 갑인자본(甲寅字本)이다. <출처:학봉기념관>

사기(史記)

.중국 한나라 사마천이 쓴 역사서로 기전체 형식으로 편찬했다. 1425년(세종7)에 간행된 책으로 경자자본(庚子字本) 금속활자본이다. <출처:학봉기념관>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

예기 중 뜻이 의심스러운 점에 대해 의견을 적은 책으로 목은 이색의 뜻을 받들어 양촌 권근(權近)이 지었다. 1418년(태종18)에 간행된 조선시대 최초의 계미자(癸未字) 활자본 복각(復刻)이다. <출처:학봉기념관>

퇴계선생께서 병명(屛銘)을 내리다. 도통(道統) 전수(傳受)의 징표

학봉은 29세 때 퇴계선생으로부터 요순 이래로 성현이 전한 심법(心法)을 차례로 적은 80자를 손수 쓴 병명(屛銘)을 받았다. 그 내용은 요(堯).순(舜).우(禹).탕(湯).문왕(文王).주공(周孔).공자(孔子).증자(曾子).안자(顔子).자사(子思).맹자(孟子).주염계(周濂溪).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주자(朱子) 등 16성현을 그 심법의 핵심을 들어 찬양한 글이다.

여장아집(與長兒潗).

학봉이 1568년 장남 집(潗)에게 써 준 장시(長詩)이다. 장자 집이 근친차 나주에 왔을 때 노비 2명을 주었는데 가난한 동생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며 사양했다. 학봉은 아들의 우애에 감동하여 즉석에서 이 시를 지어 아들에게 주었다. 기쁨과 면려의 뜻이 담겨 있다. 끝에 “취중에 붓을 찾아 이 시를 쓴다.”가 보인다. 감동과 취기때문인지 필치가 매우 활달하다.  <출처:학봉기념관>

김천(金洊) 호구단자,

1390년(고려 공양왕2)에 작성한 김천(학봉의 고조부)의 호적단자(戶籍單子)이다. 고려 때의 호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문서이다. 필사(筆寫) 원본이다. <출처:학봉기념관>

글씨

심경찬(心經贊),

심경 가운데 성현의 격언을 가려 모은 것으로 송나라의 서산 진덕수의 글이다. 심경찬에 대해서는 퇴계선생 당시 이미 많은 문답이 있었으며, 한국 유학사에 중요한 학술적 관심사가 되었다. 퇴계선생의 노년 글씨로 추정되며, 자형의 방정함이 퇴필(退筆)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학봉기념관>

상례고증(喪禮考證),

1581년(선조14) 학봉이 예기(禮記)에서 상례에 관한 자료를 모아 편찬한 학봉 친필의 상례고증 초고본(草稿本)이다. 불교와 무속신앙을 배척하고 『주자가례』를 근간으로 행례하려고 했던 학봉의 앞선 예(禮) 의식이 반영되었다.  <출처:학봉기념관>

퇴계사전초(退溪史傳草),

퇴계선생의 부음을 듣고 1571년(선조4) 선생의 말씀 중 『당후일기』에 있는 것을 모두 뽑아 기록하여 연보 편찬을 준비했다. 퇴계선생의 전기를 찬술한 책으로 학봉의 친필 초고본이다.  <출처:학봉기념관>

당파를 초월한 조정의 호랑이, 간관(諫官) 언관(言官) 사관(史官)

사관원 정언 때 경연에서 왕이 “나를 전대의 왕과 비교하면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한 신하가 “요순(堯舜)과 같은 성군입니다.”하자, 학봉은 “자품이 고명하시니 요순 같은 성군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스스로 성인인체 하시고 간언을 거절하는 병통이 계시니 걸주(桀紂, 폭군)가 망한 까닭이 아닙니까?”라고 말하니, 왕은 얼굴색이 변하고 모두 벌벌 떨었다. – 『선조실록』 –

조천일기(朝天日記),

1577년(선조10) 2월 학봉이 사은겸 개종계주청(改宗系奏請) 서장관으로 임명되어 명나라 북경에 갔을 때의 사행 기록이다.  <출처:학봉기념관>

경연일기(經筵日記),

1570년(선조3)에서 1574년(선조7)까지 학봉이 사관으로 재직시 경연에서 군신간에 행한 경서(經書)나 정사(政事) 등의 강론과 정전에서 행한 승지 및 조신의 입계(入啓) 또는 관리 임명 등 모든 사실을 기록한 일기책으로 친필초고본이다.  <출처:학봉기념관>

학봉선생 풍광시(친필)

나무마다 단풍경치 곳곳이 아름답고
만나는 장면 모두 정겨운 것들일세.
술두루미 하나 싣고 조각배 떠나니
아득한 강 하늘이 그림속에 들어선 듯

 목민의 이상을 펴다. 순무어사(巡撫御使).나주목사(羅州牧使)

학봉은 함경.황해도 순무어사가 되어 북풍한설 휘몰아치는 최북단 국경보루를 강행군하며 윤관과 김종서의 북방개척을 기리고, 세금과 부역과 부정군역에 시달리는 농민의 참상을 살피고, 지보(鎭堡).군기(軍器).창곡(倉穀) 등 국방실태를 낱탄이 점검했다. 잘못이 있는 관리는 조정에서 엄하게 책임을 묻게 했다. 「적병행(積兵行」), 「모별자(母別子)」 같은 시로 “어미와 아들이 눈물로 헤어져야 하는 아픔을”을 함께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살리기 위한 7개조를 상소하면서 「대동법(大同法」), 「사창법(社倉法)」시행을 주청했다. – 『선조실록』, 『북정록』, 『해서록』 –

나주목사 입안문(羅州牧使 立案文).

1586년(선조19) 학봉이 나주목사 재직시 내린 노비소송에 관한 판결문으로 모두 5건이다. 1)노비의 소유권 문제, 2)공노비의 양천문제, 3)사노비가 양인임을 호소, 4)사노비가 공노비임을 주장 하는 등의 입안문이다. 암록(暗綠)과 압량위천(壓良僞賤)이 횡행하는 당시의 사회상이 잘 나타나 있으며, 호적의 증명력과 중간확인의 소(訴) 절차도 나타나는 등 노비법제의 주요한 사례이다.  <출처:학봉기념관>

목숨을 건 외교투쟁, 일본통신부사

학봉은 1577년 중국에 서장관으로 가서 조선왕조 최대의 외교현안이었던 종계변무(宗系辨誣, 태조 종계의 잘못된 기록을 바로잡는 일)을 약속받았다. 1590년 모두가 꺼리는 일본통신부사에 임명되자처음부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 신라의 박제상이 되기를 각오했다.
“학봉은 봉명사신으로 바르게 자신을 지켜 왜인의 서계(書契)에 패만(悖慢)한 말은 엄격히 꾸짖고 ‘고치지 않으면 죽임이 있을 뿐’이라고 하며 받지 않으니, 왜적의 괴수도 두려워하면서 서계의 내용을 고첬다. – 『선조실록』-

해사록(海槎錄 ),

1590년(선조23) 3월에 학봉이 일본 통신부사로 갔다가, 다음해 2월에 귀국할 때까지의 역로(歷路)와 유숙(留宿)하던 곳에서 지은 자필 시문과 일본과의 교섭과정 중에 있었던 일과 생각을 기록한 사행록(使行錄)이다. 택당 이식은 발문에서 논의가 준정(峻整)하고, 의리가 명밴한 글로 극찬했다.  <출처:학봉기념관>

민심과 국가 안정을 위하여, 귀국보고의 진실

학봉은 “왜적이 사신들을 뒤따라 금방 쳐들어 올 것이라 장황하게 말하여 인심을 요동시키는 정사(正使)의 보고가 사의(事宜)에 매우 어긋난다하며 이데 부동하지 않았다. 이것은 왜란으 가능성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왜적이 오기도 전에 조야가 겁에 질려 혼란이 생길 것을 염려한 것이나 꼭 잘못 주달한 것은 아니다. ” – 『선조실록』, 유성룡 『징비록』, 이항복 『당후일기』 –

유서(諭書),

1592년(선조25) 4월11일 학봉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임명하고 밀부(密符,백지임명장) 제26부를 내리는 문서이다. 유서통에 넣어서 가지고 다녔다.  <출처:학봉기념관>

의병의 아버지, 임진왜란을 역전시킨 3대전략

학봉은 경상도 초유사(招諭使)로 임명되자 전세를 역전시키고왜적을 몰아낼 3대전략, – 1) 의병 봉기, 2) 의병과 관군의 합동작전, 3) 곡창 호남을 적의 침략으로부터 막기 위한 진수사수 – 을 세웠다. – 허선도 『학봉과 임진의병활동』 –

용사사적(龍蛇史籍),

학봉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임진년(1592년)과 그이듬해인 계사년에 초유사와 경상도 관찰사로서 관군과 의병을 지휘한 내용을 기록한 진중일기이다. 학봉의 막료인 송암 이로가 저술하였다. 일명 문수지라고 하며, 이본으로 『용사일기』가 있다.  <출처:학봉기념관>

초유문초(招諭文抄),

1592년 5월4일 초유사 학봉이 의병의 창기를 촉구하기 위해 지은 초유문 초록으로 ‘글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나왔고, 붓에 먹을 찍을 겨를도 없이 써 내려갔다.’고 했다. 문화민족의 긍지와 선비정신에 호소하고, 구체적인 행동방법까지 제시했으며, 승리를 확신하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초유문이 포고되자 ‘마음 깊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경상도 일대가 바람에 쏠리듯 의병이 일어났고.’고 했다. 260구 1558자에 달하는 긴 격문이다.  <출처:학봉기념관>

초유사 교지(招諭使 敎旨),

1592년 4월 학봉을 경상도 초유사로 임명한다는 내용의 왕명을 받아 승지가 작성하여 학봉에게 전달한 문서이다.  <출처:학봉기념관>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김성일, 진주대첩을 총 지휘하다.

학봉은 진작부터 “진양은 호남의 보장이다. 진양이 없으면 호남이 없고, 호남이 없으면 나라를 어쩔 수 없다. 적이 침 흘리며 노리는 바가 이곳이나 방수(防守)를 조금도 늦출 수 없다. 끝까지 목숨을 걸고 지킬 것이다.”라고 하며 군량조달지 호남방어를 위한 진주사수 전략을 세웠다.

진주 수성절차(守城節次),

1592년 10월 학봉이 경상우도 관찰사로 진주성 내외의 관군과 의병을 총지휘하여 진주성 전투를 승리한 후 성을 수비한 전말을 자세하게 기록하여 왕에게 보고한 진주수성 승첩장(勝捷將) 친필 초고본이다.  <출처:학봉기념관>

언문편지,

1592년 12월 24일 학봉이 경상우도 감사로 재직시 경남 산음(산청)에서 안동 본가에 있는 부인에게 보낸 편지로, 학봉이 진중에서 부인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비장한 영결의 편지이다. 학봉은 4개월 후 죽음을 예감하였던지 “살아서나 다시보면 그때나 나을까 모르지만 기필 못할세”라 했다. 감사라 하여도 전시 중이라 형편이 어려워서 ‘석어(조기) 2마리, 석이(버섯) 2근, 석류 20개’만을 보낸 것이 피봉에 적혀 있다. 이 한글 편지는 귀중한 국문학적 자료이다.  <출처:학봉기념관>

이덕형 서간문,

1592년 의주 행조소(行朝所)에서 한음 이덕형이 경상우도 감사인 학봉에게 보낸 서간문이다.  <출처:학봉기념관>

진췌 순국(盡萃 殉國), 시호 문충(文忠, 도와 덕을 널리 알았으미 문이요, 몸을 바쳐 나라를 받들었느니 충이다.)

학봉은 정부 지원이 거의 불가능한 가운데 병사와 백성을 돌보는 천백사를 한 몸에 지고 분투하다가 병을 얻었다. “임종 때도 사적인 일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 아들 또한 옆방에서 함께 병이 걸려 위독했으나 한 번도 묻지 않고, 오직 국사를 종사자들에게 면려하면서 진중에서 운명하니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비통해 하였다. 아. 아! 성일은 옛날의 유직(遺直)이라 할 만하다.” – 『선조실록』, 「김성일 졸기(卒期)」-

증시 교지(贈詩 敎旨),

1679년(숙종5) 8월6일에 학봉에게 시호를 내리는 교지이다.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고, 시주는 “도와 덕을 널리 알았으니 문(文)이요, 몸을 바쳐 나라를 받들었느니 충(忠)이다.”  <출처:학봉기념관>

학봉 김성일의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는 기념관 내부

청계공 분재기(淸溪公 分財記),

1565년 2월20일 학봉의 진사시험 합격에 대한 상으로 부친 청계공 김진이 노(奴) 1구(1口)를 별급하는 분재문서이다.  <출처:학봉기념관>

퇴계학의 적통 다시 학봉가에서 잇다. 서산 김흥락(金興洛)

서산 김흥락(1827~1899)은 학봉의 11대 주손으로 정재 유치명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조선의 마지막 산립지사로 일컬어졌다. 학덕으로 저명했으며, 마지막 종장(宗匠)이었다.

경제잠집설도(敬齊箴集說圖),

서산(西山)의 학문체계에 일관하는 주제가 ‘경(敬)’이었다. 경재잠(敬齊箴)은 주자가 지은 것으로 도학에 있어서 심성수양론의 규범이었다. 왕백이 이것을 그림으로 주해하여 「경재잠도」를 만들었고, 퇴계선생이 『성학십도(聖學十圖)』속에 이것을 담았다. 이때부터 불교의 선과 같은 심성수양법인 경(敬)은 영남학파의 중심사상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의 실천적 규명은 이상정이 편찬한 『경재잠집설』속에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서산은 이것을 다시 도상화하여 『경재잠집설도』를 편찬했다.  <출처:학봉기념관>

천하총도(天下總圖),

전국 8도와 중국, 일본 등을 그려 놓은 지도이다. 산음(山陰), 안음(安陰) 등의 지명이 적혀 있어 영조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학봉기념관>

서산선생문집(西山先生文集),

서산의 저술을 한데 묶은 책으로 1907년 문집24권, 1936년 속집 6권이 간행되었다. 1982년 연보, 행장, 묘갈명, 제문 등을 모아 『문집부록』2권을 처음으로 편제에 넣고, 『보인계첩』을 추가하여, 『서산전집』을 영인 간행했다. 필사본 『만제집』 15책이 별도로 있다.  <출처:학봉기념관>

팔고조도(八高祖圖),

의성김씨 시조인 김석으로부터 18대손인 김예범까지의 세계와 19대손인 김진으로부터 31대손인 김흥락까지의 팔고조를 도표로 표시한 가첩(家牒) 형태의 문서이다.  <출처:학봉기념관>

학봉 김성일 학맥도

병명 목판(屛銘木版),

퇴계선생께서 66세 되던 해 정초에 도통(道統) 전수의 징표로 학봉에게 내린 병명을 새긴 목판이다. 요순이래의 성현이 전한 심법(心法)을 80자로 집약시킨 명(銘)이다.  <출처:학봉기념관>

서산선생문집목판,

학봉선생문집목판,

각대,

관복을 입고 관복 위에 두르던 띠로 학봉이 사용하던 것이다.

가죽신,

학봉이 착용하던 가죽신이다.

유서통(諭書筒),

1592년 4월11일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된 학봉이 왕의 유서를 넣어 가지고 다니던 통이다. 양쪽 끝으로 고리가 있어 등에 멜 수 있게 만들었다. 왕명을 받든 문서가 들어 있어서 누구도 손댈수가 없는 불가침의 통이다.  <출처:학봉기념관>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

주자가 살면서 만년에 무이정사를 짓고 후진을 양성하던 무이산을 그린 그림이다. 무이구곡의 전체 경관을 한 화면에 그린 총도형식이다. 1577년 학봉이 중국사신으로 가서 가지고 온 것으로 전해진다.  <출처:학봉기념관>

거문고,

밤나무 판 위에 오동나무로 속이 비게 길게 짜고, 그 위에 여섯개의 줄을 걸어 놓은 것으로 가야금과 함께 우리나라 재래의 대표적인 현악기이다.  <출처:학봉기념관>

말안장,

학봉종가에서 누대로 사용하던 말안장이다.

철퇴,

학봉이 임진왜란 당시 초유사, 경상우도 감사로 활동하면서 지휘봉 및 호신용으로 사용했다. 몸체에 은으로 용을 음각하였다.

안경,

1577년 학봉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가져온 우리나라 최초의 안경이다. 안경알은 옥돌이며, 안경테는 거북등뼈로 만들었다. 학봉의 신문물에 대한 관심을 알 수 있다.

호패

인장,

학봉종가에서 사용하던 도장으로 문서나 서류에 사용하여으며 당호.호 등을 새겼다. 서책에 찍어 소유자를 나타내기도 했다.

대선(大扇), 촛대, 필통,

방구부채의 일종으로 크기가 큰 부채이다. 대선은 바람을 얻기 위해 사용했지만, 여름철 장식품으로 집안에 걸어 두어 시각적인 시원함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산가지,

옛날 수효를 셈할 때 사용하던 물건으로 이것을 가로와 세로롤 벌여 놓아서 셈을 했다. 또한 주역을 공부할 때 괘를 풀어 보는데도 사용했다. 대나무나 뼈 등으로 젓가락처럼 만들었다. ‘산통을 깨다’ 할 때의 산동이다. 학봉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안경과 함께 가지고 온 것으로 학봉의 새로운 선진 문물에 대한 관심과 실용적인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출처:학봉기념관>

패도(佩刀),

학봉이 임진왜란 때 차고 다니더너 칼이며, 지휘도.호신도로 사용했다.

상아홀(象牙笏),

조선시대 관원이 왕을 알현할 때 손에 들던 물건으로 관리가 조복.제복.공복 등에 사용하였다. 1~4품관은 상아홀, 5~9품관은 목홀을 사용했다. 향리는 공복에만 목홀을 사용했다.

옥서진, 벼루,

1577년 학봉이 중국 사신으로 갔을 때 가지고 온 벼루이며, 직각형 단계석이다.

문갑,

선비들이 문구나 문서 등을 넣어 두거나 완상품을 진열하는 가구이다. 책을 올려 놓고 공부할 때도 사용했다.

고비,

편지 등을 꽂아 두는 것으로 쉽게 손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벽에 걸어 놓고 사용했다.

학봉종택에 전해오는 유품들.

학봉종택

<참조>
1.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학봉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