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있는 병산서원(屛山書院, 사적)이다. 서애 유성룡(1542~1607)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원래 인근에 있던 풍악서당을 유성룡이 1575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그후 그의 제자들과 지역 유생들이 그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인 존덕사를 세우면서 서원으로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구한말 서원철폐령 때 남아 있었던 47개 서원 중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건물은 낙동강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복례문, 만대루, 강학공간인 입교당과 동.서재, 배향공간인 존덕사와 전사청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옆쪽에 서원 관리인의 숙소인 고직사가 있다. 서원의 전형적이며 모범적인 건물배치를 하고 있으면서도 권위적이지 않고 자연과 친화된 느낌을 주고 있다.
들어가는 길
병산서원은 낙동강 경치가 수려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하회마을이 인근에 있기는 하지만, 마을과는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지금도 하회마을과 직접 연결되는 자동차길은 없고, 하회마을 반대편으로 난 고즈넉한 길을 따라서 들어와야 한다. 병산서원 들어가는 고갯길에 올라서면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과 풍산읍 주변의 넓은 벌판이 넓은 평야로 안동지역 양반문화를 이끌어오는 경제적 기반이 되었던 곡창지이다.
병산서원은 낙동강 상류가 굽이치는 곳에 화산(花山)을 등지고 자리하고 있다. 경사진 지형에 복례문, 만대루, 입교당, 존덕사가 일렬된 배치되어 있어 권위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자연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어 아늑한 느낌을 준다.
‘한국의 서원’으로 전국 9개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병산서원은 만대루가 서원 누마루 건축을 대표하며, 서원의 역할이 교육기관에서 여론 수렴지로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유식공간
서원에서 유생들이 시를 짓고 토론 벌이며 휴식하고 공간을 유식공간이라 한다. 넓고 개방적인 만대루, 솟을대문인 복례문 등이 유식공간에 해당하며 병산서원을 대표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관아 객사나 누각처럼 손님을 접대하고 교류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광영지는 만대루 아래에 있는 작은 연못이다. 세상을 비추는 거울을 연상시키고 하는 곳이다.
광영지(光影池)
광영지는 선비들이 마음을 닦고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배려한 ‘서원 속의 정원’이다. 광영은 주자의 시 관서유람이란 시 중에서 ‘하늘빛고 구름이 함께 노닌다’라는 구절에서 인용하였다. 네모난 연못 가운데 둥근 섬이 있는데, 이러한 한국 전통 연못의 모습을 ‘천원지방’이라고 한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뜻으로, 동아시아 사회의 전통적인 우주관이자 세계관을 나타낸다. (안내문, 병산서원, 2023년)
만대루(晩對樓, 보물)는 아름다운 낙동강 풍경을 볼 수 있는 누각 건물이다. 건물은 앞면 7칸 규모로 사방이 뚫려 있다. 민간에서 지은 누각 건물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이다. 단정하면서 웅장한 느낌을 주는 관아 누각과는 달리 목재를 다듬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보여주는 독특한 조형미가 돋보인다.
격물치지(格物致知)
병산서원의 복례문과 만대루, 그리고 광영지가 있는 이곳은 서원의 사색을 위한 공간이다. 복례문은 극기복례를 통해 인(仁)을 실현하고자 하는 서애 선생의 학문의 뜻이며, 만대루는 병풍처럼 둘러쳐진 병산의 산수를 만니기 위한 ‘격물치지’의 공간이며, 광영지는 세상을 비추는 거울로서의 연못을 맑게 하기 위해 늘 신선한 물을 공급하듯이 생각의 근원인 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는 서애선생의 가르침이 담겨 있다. 맑은 날 거울 같은 연못으로 하늘빛과 구름이 내려오고, 저물 무렵 병풍처럼 둘러친 산수를 마주하며, 흘러가는 물처럼 한결같은 마음으로 학문하고, 예를 배우고 실천하는 가운데 인의 세계로, 세상의 마른 이치로 다가갈 수 있음을 상징화하여 드러낸 것이다. (안내문, 병산서원, 2023년)
강학 공간
강학 공간은 강당인 입교당을 중심으로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풍산 유씨 교육기관이었던 풍악서당에서 출발했던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병산서원은 제향보다는 교육이 중시되었던 곳이다. 반면 만세루와 강당사이 공간이 넓지 않고 사방이 뚫려 있어 공부에 집중하기 좋다고 보기는 힘들다. 교류를 중시했던 병산서원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입교당은 앞면 5칸 규모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강당 건물이다.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로, 양쪽에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오른쪽 명성재는 원장이 사용하고, 왼쪽 경의재는 교수와 선비들이 사용했다.
대청마루 양쪽에 온돌방이 있는데, 오른쪽 명성재는 원장이 사용하였고, 왼쪽 경의재는 교수와 선비들이 사용하였다.
앞마당에는 유생들이 공부하는 기숙사인 동.서재가 있다. 동재에는 상급생이 기거하며 ‘동직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서재는 하급생이 기거하며 ‘정허재’라 부른다. 서재 작은 방은 책을 보관하는 곳으로 ‘장서실’이라 한다.
입교당의 서쪽 뒤편에는 목판과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이 있다.
강학 영역, 입교당, 동재, 서재
강학 영역은 학문을 배우는 공간으로, 강당인 입교당과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로 구성되어 있다. 입교당은 유생들이 배우고 원장과 교수가 거처하는 서원의 중심 공간이다. ‘입교’는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뜻이다. 강학당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이 있는데, 오른쪽 명성재는 원장이 사용하였고, 왼쪽 경의재는 교수와 선비들이 사용하였다. ‘명성’은 ‘밝음으로 성실을 가르친다.’는 뜻이고, ‘경의’는 ‘항상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앞마당 좌우에 마주보고 선 두 건물이 동재와 서재이다. 동재에는 ‘동직재’라는 현판이, 서재에는 ‘정허재’와 ‘장서실’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동재의 큰 방에는 상급생들이 기거하였고, 작은 방은 학생회장인 유사가 사용하는 독방이다. 서재의 큰 방에는 하급생이 기거하였으며, 작은 방은 책을 보관하기 위해 온돌은 높지 않고 마루를 깔았다. (안내문, 병산서원, 2023년)
제항 영역
제향 영역은 향사를 지내고 준비하는 공간으로 내삼문, 사당인 존덕사, 전사청으로 구성된다. 병산서원은 서애 유성룡과 셋째아들 유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존던사는 1614년에 세워졌으며 비교적 늦은 시기인 구한말 철종 때(1863년) ‘병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구한말 서원철폐령 떄 남아 있었던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제향 영역,내삼문, 존덕사, 전사청
제향 영역은 향사를 지내고 이를 준비하는 공간이다. 강학 영역과 제향 영역을 구분하는 입구인 내삼문, 사당인 존덕사, 향사 음식과 제기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존덕사에는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으로 국란을 슬기롭게 극복한 류성룡과 류진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에 향사를 지낸다. 위패를 모신 사당은 신성한 공간이므로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또한 입구인 내삼문에는 붉은 색칠을 하여 부정한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주변에 담장을 둘러 제향 영역을 보호하였다. 향사를 준비하는 전사청은 보통 사당과 한울타리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병산서원의 전사청은 별도의 담장을 둘러 각각 독립된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는 향사에 올리는 음식을 철저히 지휘하고 감독하려는 목적이다. (안내문, 병산서원, 2023년)
호계서원은 퇴계를 모시기 위해 세워진 처음으로 세워진 서원으로 인조대(1625년)에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을 추가 배향하면서 이황의 왼편에 누구를 모시느냐는 논란이 크게 벌어진 것으로 유명하며 이를 ‘병호시비( 屛虎是非)’라 한다. 두사람의 학덕과 업적이 비슷하기 때문에 류성룡의 제자들은 관직의 높낮이로 따져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이, 김성일의 제자들은 연장자를 왼쪽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류성룡을 왼쪽, 김성일을 오른쪽에 배향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고 한다.(반대로 정해졌다고 설명되는 자료도 있어 헷갈리는 면이 있음)
병산서원, 사적
서애 류성룡(1542~1607)이 선조 8년(1575)에 지금의 풍산읍에 있던 풍악 서당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 병산서원의 처음 모습이다. 류성룡은 선조 때 도체찰사와 영의정을 지냈던 정치가이며 유학자로, 1607년 타계한 뒤 1614년 그를 따르던 제자와 유생들이 이곳에 위판을 모시는 사당을 세웠다. 이로써 학문을 연구하는 강학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을 모두 갖춘 정식 서원이 되었으며, 철종 14년(1863)에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고종 때 흥선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에도 헐리지 않고 그대로 살아남은 47개 서원과 사당 중 하나이다. 서원의 정문인 복례문과 만대루를 지나면 강당과 동재, 서재가 있다. 동재 뒤편으로 서 있는 것은 서원 관리인이 살았던 고직사이고, 입교당의 서쪽 뒤편에 서 있는 것은 목판과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이다. 입교당의 동쪽 뒤편에 있는 계단을 오르면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과 사당인 존덕사가 있고, 내삼문 동쪽에는 전사청이 있다. 열려 있는 복례문 앞에 서서 안쪽을 바라보거나, 서원 안에서 만대루를 통해 바깥을 내다보면 어디 하나 막힘이 없이 탁 트여 있어 건물과 건물 밖의 자연이 하나인 듯 느껴진다. 병산서원은 서원이 번성하던 시기의 한 본보기로 여겨질 만큼지은 솜씨가 빼어나고 보존이 잘 되어 있으며,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지은 점에서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로 이름나 있다. (안내문, 병산서원, 2023년)
<출처>
- 안내문, 안동 병산서원, 2023년
- ‘사적 병산서원’,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4년
- ‘병산서원’, 위키백과,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