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시 풍천면에 있는 하회마을이다. 풍산유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대대로 살아온 대표적인 양반마으로 경주 양동마을, 안동 천전마을, 봉화 닭실마을과 함께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길지로 손꼽혔던 곳이다. 원래는 허씨와 안씨가 살았던 집성촌인데, 조선초 인근 풍산에서 지방 호족인 향리였던 풍산류씨가 들어왔다. 마을에는 풍산류씨 입성조인 류종혜가 심었다는 수령 600년이 넘은 삼신당이 있으며, 그곳에서 한국탈춤을 대표하는 하회별신굿탈놀이가 시작된다. 낙동강이 동에서 서로 흐르면서 마을을 휘감아 돌고 있는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화산이 가로막고 있고, 남.서.북쪽으로 낙동강이 흐르는 고립된 곳이다. 마을 주변에는 아주 넓지는 않지만 자급자족할 수 있을 정도의 농토를 가지고 있다. 마을 북쪽 부용대에서 내려다 보는 하회마을과 낙동강의 경치가 빼어나며, 부용대 아래에는 유운용과 유성룡이 짓고 살았다는 정자인 겸암정사와 옥연정사, 류운룡을 모신 화천서원이 있다. 마을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화산 아래 낙동강변에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서원 중 한곳으로 유성룡을 모신 병천서원이 있다.
하회마을은 마을입구에서 종택에 해당하는 양진당과 충효당이 있는 서쪽끝으로 큰 길이 있는데 북쪽을 북촌, 남쪽을 남촌이라 부른다. 북촌은 종택인 양진당(보물)을 비롯하여, 마을에서 가장 큰 저택인 북촌댁 화경당, 작천고택같은 오래된 고택과 담연재같은 구한말에 크게 중건한 저택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또한 낙동강변과 부용대에 가까운 지역으로 빈연정사나 원지정사같은 정자와 마을의 중심이 되는 삼신당이 들어서 있다. 반면에 남촌은 서애 류성룡종택인 충효당(보물), 남촌댁이라 불렸던 큰 저택인 염행당을 비롯하여 가온당, 주일재, 하동고택, 지산고택 같은 고택들이 많이 남아 있다. 남촌은 주로 마을에서 분가한 후손들 중 경제적으로 성공했던 후손들이 지은 집들이 많아 보인다. 남촌은 하회마을 후손들이 증가하면서 마을이 확장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으며, 60~70년대 도시화를 거치면서 마을규모가 줄어드는 모습을 확인해 볼 수 있다.
하회마을이 양동마을과 함께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마을입구에 있었던 주차장이 마을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탈박물관 근처로 옮겼다. 부근에는 장터를 조성해 놓고 있으며, 장터를 걸어서 지나 셔틀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들어간다. 이곳에서 하회마을까지는 약 1.5km 정도 떨어져 있다.
원래 마을에 있었던 식당들과 민박집들은 이곳 장터로 옮겨 놓았으며, 마을은 원래의 모습을 보존할려고 하고 있다.
하회마을은 지방 권문세가들이 살았던 고택들과 그 일가들이 살아왔던 초가들이 그 원형을 보존하고 있으며, 삼신당.국사당.서낭당 같은 민속신앙과 서민들의 놀이인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선비들의 풍류놀이인 ‘선유줄불놀이’가 남아 있고, 양반들의 별장이었던 정자와 교육기관이었던 서원과 서당 등 전통양반마을이 갖추어야 할 구성요소 대부분을 갖추고 있다. 이런점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주거지로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마을 동쪽편에서 화산까지는 마을의 경제적 기반이 되는 농토가 펼쳐져 있다. 기본적으로 마을에 자급할 수 있을 정도의 농토이지만, 권문세가들의 집성촌이었던 하회마을 부자들은 강건너 평야에 농지를 소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을 입구에는 큰 저택 문간방이 있는 솟을대문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회마을이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 전 관광객을 상대로 음식을 팔았던 집들을 볼 수 있다. 지금은 대부분 주차장 부근에 조성된 장터로 옮기고 살림집으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입구에는 작은 시골마을 보건소가 있다.
마을에는 초가집을 많이 볼 수 있다. 서민들이 살았던 집도 있지만,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는 풍산유씨 후손이 사는 집들도 많다. 조선시대 양반들 중 기왓집에 사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하며, 초가집에 사는 것이 보편적이었다고 한다. 대체로 집의 규모나 구조 등으로 양반들이 살았던 집과 농민들이 살았던 집을 구분할 수 있다.
마을입구에서 종택인 양진당과 충효당이 있는 서쪽끝으로 들어가는 길로 마을 중앙을 가로지르는 큰 길이라 할 수 있다. 이 마을은 조선 최고의 양반들이 살았던 세거지로 오늘날 강남처럼 지주들이 살았던 상당한 경제력을 가진 부촌이지만, 오늘날 사람들의 눈에는 전통기와집과 초가집, 흙담장, 텃밭이 어우러진 전통 농촌마을로 보인다.
하동고택은 조선후기에 지어진 전형적인 양반가옥으로 사랑채가 바깥쪽에 있고, 안채와 함께 안동지역의 ‘ㅁ’자형 구조를 하고 있는 저택이다.
최근에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새로 수리한 것으로 보이는 기와를 얹은 흙담이다. 실제 옛사람들이 살았던 집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 이런 규모의 담장을 쌓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안채가 있는 ‘ㅁ’자형 주택자체가 담장역할을 하기 때문에 사랑채는 바깥에 개방된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초가를 얹은 고택은 양반들이 살았던 보편적인 집으로 보인다. 초가를 얹은 지붕이지만, 문간방을 별도로 두고, 대문 또한 기와집과 비슷한 형태이다.
들판이 보이는 마을 남쪽편에 있는 마당히 상당히 넓은 지산고택이다. ‘ㅁ’자형 안채와 사랑채를 제대로 갖추고 있는 집이다. 마당 앞에 문간채나 부속건물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지금은 큰 장독들을 마당 앞에 내어놓고 있다.
골목길을 돌아서 마을 안쪽으로 들어오면 크고 작은 초가집과 기왓집들을 볼 수 있다. 이 고택은 낡아 보이는데 사랑채와 중문채가 없지고 안채가 남아 있다. ‘ㅁ’자형 한옥에서 안채는 생활공간이라 관람객들에게 공개를 잘 하지 않는데, 이 집은 안채만 남아 있어서 그 형태를 살펴볼 수 있다. 가운데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날개채를 두고 있는데, 안채의 규모가 적지 않은 편이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오면 북촉댁과 함께 하회마을에서 가장 큰 규모를 하고 있는 남촌댁을 볼 수 있다. 솟을대문과 문간채에서 이 고택의 규모를 가름해 볼 수 있다. 남촌댁이라 불리는 염행당은 18세기말 류치목이 분가하면서 지은 집인데, 현재의 집은 1905년에 그의 증손자인 류영우가 크게 확장한 것이라 한다. 마을에서 이런 형태의 솟을대문과 문간채를 두고 있는 집을 여럿 볼 수 있는데, 대체로 19세기말~20세기초에 크게 확장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이다.
남촌댁 염행당은 안채와 사랑채로 이루어진 ‘ㅁ’자 본채와 작을별당, 문간채,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안채와 사랑채는 1950년대 화재로 불탄것을 최근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양반이 살았던 초갓집은 기둥과 벽이 기와집과 큰 차이 없이 튼튼하게 지었는데 반해, 농민들이 살았던 집은 나무기둥을 많이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그 재질 또한 빈약하다.
‘-‘자형 초가 건물 2동 넓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ㄱ’자로 배치되어 있다. 초가지붕을 하고 있지만 규모가 꽤 큰 편이며, 목재기둥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중농 규모 정도의 경제력을 가진 농민가옥으로 볼 수 있다.
서애 류성룡 종택 뒷편에 위치한 고택인 양오당이다. 이 집은 류성룡의 증손 류인하(1624~1711)이 분가하면서 지은 집으로 그의 아들이 증축하였다. ‘ㅁ’자형 안채, 사랑채, 문간채, 사장으로 구성된 전통적인 양반가옥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고 그 형태가 거의 표준주택이라 할 수 있는 집이다.
가온당은 ‘ㅁ’자형을 이루고 있는 양반가옥으로 누마루가 있는 사랑채를 두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증축한 한옥은 솟을대문이 있는 문간채를 사용하고 있는데 반해 초가지붕을 얹은 문간채를 사용하고 있다. 사랑채에 누마루가 있는 것으로 볼 때 구한말에 증축한 것으로 보인다.
북촌댁의 원래 이름은 화경당이며 1797년(정조21)에 유사춘이 사랑채, 날개채, 대문채를 짓고, 증손자 유도성이 1862년(철종13)에 안채, 큰사랑채, 사당을 지었다고 한다. 유성룡을 비롯하여 많은 고관대착을 배출한 풍산유씨 집성촌인 하회마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솟을대문을 사용하고 있으나 문간채를 두고 있지 않다. 담장은 기와와 회백토로 쌓았는데, 화재를 막기 위함이다.
살림집인 안채와 작은 사랭채인 화경당이 함께 ‘ㅁ’자를 이루고 있다. 본채 오른편에는 이 저택을 크게 중건한 철종대 유도성이 세운 바깥사랑채인 북촌유거가 있다.북촌유거는 앞면 7칸에 이루는 큰 건물로 왼쪽에 부엌, 그 옆으로 방과 대청마루, 누마루가 배치되어 있다. 누마루에서는 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낙동강과 북쪽편 절경인 부용대를 비롯하여 마을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뒤편 뜰에는 화회마을 낙동강이 흐르는 모습을 닮은 수령 300년의 하회마을 소나무가 심어져 있다.
하회마을 입구에서 종택인 양진당과 충효당으로 연결되는 큰 길 주변에 있는 고택. 큰 길 주변에는 경제적으로 성공한 후손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신당은 하회마을 입향조 류종혜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왔을 때 심은 것으로 수령이 600년이 넘은 나무이다. 화산 중턱의 서낭당, 국사당과 함께 마을 주민의 소망을 비는 삼당을 이룬다고 한다. 정월대보름 밤에 마을의 안녕을 비는 동제를 서낭당과 국사당에서 지내고, 그 다음 이곳에서 제를 올리는데 하회별신굿탈놀이가 시작된다고 한다.
양진당 옆 큰 규무의 저택은 구한말 또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솟을대문이 있는 큰 문간채와 본채로 구성되어 있다. 건축의 양식에서 구한말 서울의 주택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풍산류씨 집성촌인 하회마을에서 종갓집에 해당하는 양진당(보물)이다. 이집은 풍산에 살던 류종혜가 하회마을에 들어와 최초로 집을 지은 곳이다. ‘ㅁ’자형 구조를 하고 있는 안채와 별채형식으로 본채 오른편에 사랑채가 붙어 있는 구조이다. 별채의 규모는 앞면 4칸, 옆면 3칸의 큰 규모로 앞면 3칸은 대청마루, 1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입암고택이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는 별채건물은 ‘ㅁ’자형을 이루고 있는 본채건물 오른쪽에 별채 형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대청마루가 상당히 큰 이 건물은 일반 양반가옥의 사랑채건물보다는 서원이나 향교의 강당건물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하회마을 풍산유씨 종택으로 문중회의나 행사 등이 열리는 장소 이기도 하다. 행사를 위해 개방된 마당을 상당히 넓게 두고 있으며, 음식을 나르기 위해 안채와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종택인 양진당과 함께 하회마을을 대표하는 유성룡 종택인 하회충효당(보물)이다. 원래 서애 유성룡이 살던 집은 작은 초가집이었는데, 그의 손자와 제자들이 그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지은 것이라 한다. 이 가옥의 큰 특징인 12칸의 행랑채는 유성룡의 8세손 유상조가 병조판서를 제수받고 수행원들을 수용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 한다.
안채 남쪽으로 달아내어 놓은 ‘-‘자형으로 지은 긴 사랑채. 앞면 6칸의 큰 건물로 가운데 2칸은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오른쪽에는 안채와 연결된 온돌방으로, 왼쪽에는 난간이 있는 누마루나 정자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마루와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애 류성룡의 유품들을 전시하는 공간인 영모각이 충효당에 세워져 있다.
마을 서쪽에는 유성룡이 상봉대라 이름 붙인 언덕에 세운 정자인 상봉정이 있다. 이다. 대홍수로 유실된 후 여러차례 중건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진당과 충효당에서 북쪽으로 연결되는 골목길에서 첫번째로 볼 수 있는 작전고택이다. 이 건물이 지어진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았다. 처음에는 두채였으나, 1934년 대홍수로 문간채가 쓸려나가고 지금은 ‘-‘자형 안채만 남아 있다.
작천고택 앞 골목길을 들어서면 배우 유시원이 살았던 고택인 담연재를 볼 수 있다. 상당히 큰 규모의 문간채와 솟을대문을 두고 있는 집으로 내부는 일반인에 공개하지 않고 있다.
담연재 맞은편에 있는 한옥으로 ‘-‘자형으로 지은 사랑채와 안채를 나란히 있다. 사랑채에 중문을 두어 안채로 출입하게 하고 있다. 중부지방에서 볼 수 있는 한옥구조이다.
골목에는 큰 규모의 고택을 볼 수 있다. 가옥도 ‘-‘자형 안채과 사랑채가 ‘ㄱ’자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가 대청마루가 넓은 일반가옥과는 달리 서원 강당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부용대가 보이는 마을 북쪽에는 정자인 빈연정사와 원지정사가 있으며 그 아래는 비교적 큰 규모의 초가집들이다. 집의 규모나 구조, 형태 등으로 볼 때 양반들이 살았던 집인 것으로 보인다.
빈연정사는 하회마을 서쪽 낙동강과 부용대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유운룡이 은퇴한 후 지은 정자로 원래는 양진당 근처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만송정 숲은 부용대 아래 하회마을 낙동강변에 조성된 소나무 숲이다. 조선중기 유운룡이 부용대 절벽의 거센 기운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1만그루의 소나무를 심었다는데서 유래한다. 낙동강이 범람하여 마을을 덮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재림 역할을 하고 있다.
부용대는 하회마을 북쪽 낙동강 건너편에 있는 언덕이다. 부용대는 하회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으로 하회마을에서 보이는 부용대의 풍경도 아름답지만, 부용대에서 마을을 내려다 보는 것이 더 큰 즐거움이라고 한다. 부용대 아래에는 류운룡, 류성룡 형제가 세운 겸암정사와 옥연정사가 있는데 부용대 아래에는 마을의 번잡함을 피하고 조용한 곳에서 독서를 하며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마을 바깥쪽 제방에서는 마을을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을 볼 수 있다. 이 마을 좋은 입지를 하고 있지만, 큰강을 끼고 있어 홍수를 피해갈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방을 쌓고 있으며, 제방에는 방풍림을 심어두고 있어 산책하기에 좋다.
옥연정사(玉淵精舍)는 서애 유성룡이 만년이 <징비록>을 집필한 유서깊은 장소로 1586년에 지어졌다. 원래 있던 하회마을 원지정사가 마을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편안하게 독서를 하면서 즐길 여유를 찾지 못하여 마을 건너편 부용대 아래 외진 곳에 터를 옥연정사를 마련하게 되었다.
화천서원 (花川書院)은 유운룡(1539~1601)의 기리기 위해 조선후기 정조 때(1788년)에 세워졌다.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강당과 주사만 남아 있던 것을 1996년에 복원하였다. 문루인 지산루에 올라 밖을 내다보면 넓게 펼쳐진 모래사장과 낙동강, 하회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겸암정사(謙菴精舍)는 유운룡이 1567년에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을 위해 지은 서당 성격의 건물이다.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부용대 동쪽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다. 동생 유성룡이 지은 옥연정사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 마루에 앉으면 절벽 아래로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과 강 건너 하회마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병산서원(屛山書院, 사적)은 서애 유성룡(1542~1607)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원래 인근에 있던 풍악서당을 유성룡이 1575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그후 그의 제자들과 지역 유생들이 그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인 존덕사를 세우면서 서원으로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만대루(晩對樓, 보물)는 아름다운 낙동강 풍경을 볼 수 있는 누각 건물이다. 건물은 앞면 7칸 규모로 사방이 뚫려 있다. 민간에서 지은 누각 건물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이다. 단정하면서 웅장한 느낌을 주는 관아 누각과는 달리 목재를 다듬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보여주는 독특한 조형미가 돋보인다.
강학 공간은 강당인 입교당을 중심으로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풍산 유씨 교육기관이었던 풍악서당에서 출발했던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병산서원은 제향보다는 교육이 중시되었던 곳이다.
제향 영역은 향사를 지내고 준비하는 공간으로 내삼문, 사당인 존덕사, 전사청으로 구성된다. 병산서원은 서애 유성룡과 셋째아들 유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존던사는 1614년에 세워졌으며 비교적 늦은 시기인 구한말 철종 때(1863년) ‘병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안동 하회마을
하회(河回)라는 마을 이름은 물이 돌아 흐른다는 뜻을 담고 있다. 낙동강 상류인 화천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 데서 생겨났다. 하회마을은 태극모양 혹은 연꽃이 물에 떠 있는 형상으로 예로부터 좋은 땅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하회마을은 고려 중기에 김해 허씨와 광주 안씨, 14세기 고려 말에 풍산 류씨가 들어와 씨족마을을 이루었다. 이후 풍산 류씨를 중심으로 마을이 번성하였다. 또한 조선 시대의 문신이며 학자인 류운룡과 류성룡 형제가 태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하회마을에 있는 집들은 삼신당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강을 향해 배치되어 있어서 바라보는방향이 일정하지 않다. 또한 큰 기와집을 중심으로 주변의 초가들이 원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 것도 독특하다. 하회마을에는 우리나라의 고건축 양식과 전통적인 생활모습을 보여주는 문화유산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류씨 문중의 고택에서는 조선 시대 양반집의 전통과 의례가 유지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하회 별산굿 탈놀이, 선유 줄불놀이 등 서민과 양반들이 함께 하는 놀이를 현재까지도 온전히 이어오고 있다. 하회마을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3년)
<출처>
- 안내문, 안동시청, 2023년
- ‘안동 하회마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