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황룡사 구층목탑 사리장엄구’이다. 황룡사 구층목탑 심초석 아래는 사리공과 함께 ‘지진구’라 불렸던 많은 공양품 들이 발견되었다. 예전에는 큰 건물을 세울 때 땅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땅에 묻는 물건으로 지진구라 불렸으나 최근에는 공양품이라고 한다. 황룡사 심초석 아래에는 목탑을 처음 세울 때 묻은 공양품과 이후 수리과정에서 다시 묻은 공양품들이 있다. 그 종류는 청동그릇, 침통, 칼, 가위, 청동거울, 중국에서 수입한 백자 등 일상생활용품을 비롯하여 귀걸이, 팔찌, 허리띠 장식, 곱은옥 등 장신구, 금동관불 등 매우 다양하다. 그 중 사리공은 872년 중수할 때 그 이력을 적은 ‘찰주본기’와 함께 묻은 것이다.
사리공 안에는 사리 외함이 있었고, 외함 안에 다시 사리 내함(찰주본기)를 봉안하고 덮개돌을 놓았다. 덮개돌은 도굴될 때 깨지면서 손상되었다.
황룡사 구층목탑 사리공 덮개돌과 내부에 안치한 사리 내함, 신라~통일신라,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터 심초석 사리공
황룡사 구층목탑 심초석 사리공 안쪽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사리공 안에는 사리 외함이 있었고, 외함 안에 다시 사리 내함(찰주본기)를 봉안하고 덮개돌을 놓았다. 덮개돌 가운데를 뚫어 둥근 손잡이를 연결하고 돌 아랫면에는 금동판을 붙였는데, 1964년 사리공 안에 있던 사리장엄구가 도굴될 때 덮개돌이 깨지면서 손잡이 등이 손상되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내함 (찰주본기)은 4개의 금동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연결하여 상자를 만들었다. 1면에는 문고리는 문이며 다른 3면에는 탑을 조성한 경위와 871년에 중수한 내용을 새겨놓고 있다.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터 심초석 아래에 있던 공양품 중 1) 의례용기, 2) 꾸미개, 3) 낫, 도끼, 가위, 4) 가락바퀴, 5) 금실, 6) 운모, 7) 은판.청동판.아연판, 8) 허리띠 꾸미개이다. 땅의 기운을 누리기 위해 묻었던 지진구로 불렸던 물건들이다.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터 심초석 아래에 있던 공양품 중 1) 거울, 2) 고리, 3) 팔찌, 고리, 4) 꾸미개, 5) 손칼, 침통, 6) 합, 7) 대접, 8) 뚜껑, 접시이다. 일상 생활용품으로 대표적인 지진구 성격의 물건들이다.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터 심초석 아래에 있던 공양품 중 1) 대접, 2) 구슬, 유리, 3) 방울, 4) 수정, 5) 곡옥, 6) 손칼이다.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터 심초석 아래에 있던 공양품 중 1) 대접, 2) 꾸미개, 3) 손칼, 4) 수정 곡옥, 5) 백자 항아리, 6) 귀걸이이다.
황룡사 구층목탑터에는 64개(가로 8 x 세로 8)의 초석과 심초석이 남아 있다.
황룡사 구층목탑 사리장엄구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절로 <삼국유사>에서 말한 신라의 세가지 보물 중 두 가지인 장육존상과 구층목탑이 있었다. 553년(진흥왕 14)에 월성 동쪽에 궁궐을 짓던 중 황룡이 나타나자 계획을 바꾸어 절을 세우고 황룡사라고 이름 붙였다. 진흥왕 대에 기초 공사를 하고 담장을 세웠으며 장육존상을 만들었다. 진평왕 대에 3금당을, 선덕여왕 대에 구층목탑을 만들었다. 1238년에 몽골이 침입하여 절이 다 타 버릴 때까지 구층목탑은 여러 번 기울거나 불이 났고, 여섯 번을 고쳐 세웠다. 탑을 여러 번 고쳐 세우면서 목탑 심초석 윗면에 사리를 넣는 사리공에는 사리장엄구를 추가로 넣었다. 사리장엄구 중에는 사리 내함에는 구층목탑을 세우고 872년(경문왕 12)에 수리한 내용을 담은 <황룡사찰주본기>가 안팎에 새겨져 있어서 주목을 끈다. 심초석 아래쪽에서 발견된 공양품은 탑을 세울 때 넣은 것이다. 조개껍데기를 담은 백자 항아리를 비롯하여 다양한 그릇, 금속으로 만든 장식구, 구슬 등이 발견되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출처>
-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1년/2024년
- ‘보물 황룡사 구층목탑 찰주본기’,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