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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모형)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모형)’이다. 신라 제일의 보물이었던 황룡사 구층목탑은 선덕여왕 12년(643) 당나라에서 유학한 자장의 권유로 지었다고 한다. 목탑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바램으로 지었는데 9층은 신라를 둘러싸고 있는 적국을 상징하고 있다. 황룡사 목탑을 세운 내력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출토된 목탑의 조성경위를 기록한 찰주본기에 적힌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백제 장인 아비지가 주도로 건축한 이 목탑은 높이가 80m나 되는 거대한 건축물로 현재 기준으로 30층 정도의 높이라 한다. 찰주본기에 따르면 경문왕 13년(873)에 크게 중건된 것으로 비롯하여 몽고군에 의해 완전히 불타버릴 때까지 여섯차례에 걸쳐서 중수되었다고 한다.

<황룡사 구층목탑 (모형)>

전시된 모형은 황룡사지 절터에 남아 있는 목탑 건물터를 기준으로 당시 건물들에 대한 자료, 오늘날 남아 있는 목탑 건물 등을 참조하여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있었던 목탑의 실제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옆에서 본 모습 (오른쪽)>
<옆에서 본 모습 (오른쪽)>
<뒤에서 본 모습>

황룡사 9층목탑은 경주 중심가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으면서 천년 가까이 이정표 역할을 했던 거대한 건축물로 당시 경주를 처음 방문한 사람이 황룡사 구층목탑을 처음 봤을 때 감동은 우리가 파리에 갔을 때 에펠탑은 보고 느끼는 감동보다 훨씬 웅장한 감동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경주 황룡사지 절터 (사적)>

한가운데에 사리함을 모셔두었던 심초석을 덮은 큰 돌이 보인다. 황룡사구층목탑을 세운 내력은 삼국유사와 이곳에서 발견된 찰주본기에 적혀 있다.  선덕여왕 때인 645년에 승려 자장의 권유로 세운 높이 80여m에 이르는 거대한 건축물로 몽고의 침입으로 1238년에 불타버리기까지  약 600여년의 세월 동안 경주 도심에 우뚝서 있으며 경주의 랜드마크가 되었던 웅장한 구조물이었다.

<황룡사지 구층목탑 건물터>
<건물 아래층 (모형)>

선덕여왕때 완공된 이후 몽골에 의해 불타버리기까지 천년 가까운 세월동안 경주의 이정표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황룡사 구층목탑 모형. 목탑의 9개층은 신라 변방이 나라들을 의미하며, 탑을 세움으로써 이런 위협을 누를 수 있었다고 한다. 목탑은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유지되어 왔으나 1238년 몽고의 침입으로 건물 전체가 불타버렸다고 한다.

<높이 80m에 이르는 9층 건물을 지탱하였던 커다란 초석들>

목탑터에는  64개(가로 8 x 세로 8)의 초석과 심초석이 남아 있다.

<부처의 사리를 모셨던 심초석>

 황룡사 구층목탑 심초석 아래는 사리공과 함께 ‘지진구’라 불렸던 많은 공양품 들이 발견되었다. 예전에는 큰 건물을 세울 때 땅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땅에 묻는 물건으로 지진구라 불렸으나 최근에는 공양품이라고 한다. 황룡사 심초석 아래에는 목탑을 처음 세울 때 묻은 공양품과 이후 수리과정에서 다시 묻은 공양품들이 있다. 그 종류는 청동그릇, 침통, 칼, 가위, 청동거울, 중국에서 수입한 백자 등 일상생활용품을 비롯하여 귀걸이, 팔찌, 허리띠 장식, 곱은옥 등 장신구, 금동관불 등 매우 다양하다. 그 중 사리공은 872년 중수할 때 그 이력을 적은 ‘찰주본기’와 함께 묻은 것이다.

<황룡사 구층목탑 사리공 덮개돌, 신라~통일신라,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터 심초석 사리공>

내함 (찰주본기)은 4개의 금동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연결하여 상자를 만들었다.  1면에는 문고리는 문이며 다른 3면에는 탑을 조성한 경위와 871년에 중수한 내용을 새겨놓고 있다.

<사리 내함, 황룡사 찰주본기, 통일신라 872년,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터 심초석 사리공, 보물>

황룡사 심초석 아래에는 목탑을 처음 세울 때 묻은 공양품과 이후 수리과정에서 다시 묻은 공양품들이 있다. 그 종류는 청동그릇, 침통, 칼, 가위, 청동거울, 중국에서 수입한 백자 등 일상생활용품을 비롯하여 귀걸이, 팔찌, 허리띠 장식, 곱은옥 등 장신구, 금동관불 등 매우 다양하다. 그 중 사리공은 872년 중수할 때 그 이력을 적은 ‘찰주본기’와 함께 묻은 것이다.

<사리기>
<사리기>
<공양물>
<공양물 중 낫, 도끼, 가위>
<연꽃모양 받침>
<거울>
<백자항아리>

<출처>

  1.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1년/2024년
  2. ‘보물 황룡사 구층목탑 찰주본기’,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