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시 법흥동 법흥사(法興寺) 옛 절터에 남아 있는 칠증전탑(국보)이다. 현존하는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이다. 탑은 1층의 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을 쌓아 올렸다. 높이 17m, 기단너비 7.75m의 거대한 규모에도 안정적인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탑의 기단부에는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천왕상과 팔부중상이 새겨져 있다. 탑의 중앙에는 계단을 설치하여 1층 몸돌에 설치된 감실과 연결하고 있다. 탑의 지붕에는 기와를 얹은 흔적이 있어 전탑이 목탑을 모방하여 만들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탑(塼塔)은 흙으로 만든 벽돌을 쌓아 올린 탑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탑의 형식이다.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지는 했지만 거의 남아 있있지 않으며 이 탑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탑이다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국보),>
낙동강 본류와 반변천이 합류하는 지점이 내려다 보이는 법흥사 옛 절터에 홀로 남아 있다. 절터에는 고흥이씨 탑동파종택이 자리잡고 있다. 원래는 이 지역을 지나가는 여행객들에게 이정표가 되었지만, 지금은 중앙선 철도에 가려 마치 숨어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옆에서 본 모습>
<반대편에서 본 모습>
탑은 1층 기단에, 탑신을 7층으로 쌓아 올린 전탑이다. 높이 17m에 이르는 거대한 탑이지만 비례가 충실하여 안정감이 있다. 예전에는 “안동 신세동7층전탑”이라 불렸다.
<기단부>
기단은 1층으로 높지 않은 편이다. 기단 각면에는 화강석에 사천왕상과 팔부중상을 새겨 놓고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기단부에 시멘트를 발라 놓았다. 여러 차례 수리과정에서 원래의 모습과는 다른 것으로 보인다.
<감실이 있는 정면 오른쪽 기단에 새겨진 조각상>
부조로 돋을새김하였는데 조각수법은 양호한편이다.
<정면 왼쪽편 조각상>
<동쪽 기단부에 새겨진 조각상>
<서쪽 기단부에 새겨진 조각상>
<탑신 1층>
불상을 올려 놓는 감실이 마련되어 있으며, 계단을 통해 오르도록 되어 있다.
<탑신부>
지붕돌에는 기와를 얹은 흔적이 남아 있어, 전탑이 목탑을 모방하여 만들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안동시 법흥동은 안동시내에서 낙동강변을 따라서 안동댐으로 연결되는 길에 위치하고 있다. 탑이 있는 마을이름이 법흥동인 것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법흥사(法興寺)가 있었다는 것으로 추측된다. 기록에는 조선중기까지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옛 절터에는 고성이씨 탑동파(塔洞派) 종택이 자리잡고 있다. 낙동강과 반변천이 합류하는 경치가 뛰어난 곳에 자리잡은 탑으로 조선시대까지 이곳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이정표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중앙선 철도가 건설되면서 고택인 임청각, 고성이씨탑동파 종택과 함께 철로에 갇혀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법흥사지 칠층전탑과 고성이씨 탑동파종택>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法興寺址 七層塼塔), 국보, 경북 안동시 법흥동
이 탑은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이다. 탑의 높이는 16.8m, 기단 폭은 7.75m이며, 단층기단에 7층의 몸돌을 차츰 크기를 줄여가며 쌓아올려 놓았다. 이 탑이 있는 일대가 법흥동인 점으로 미루어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건립되었다는 법흥사(法興寺)가 있었다는 것으로 추측되나, 탑 이외의 유물은 남아 있지 않다. 현재 이 터에는 고성이씨 탑동파(塔洞派) 종택이 있다. 이 탑은 기단부와 탑신부 및 탑두부로 되어 있었으나, 현재 탑두부는 노반(露盤)이 남아 있고, 상륜부(相輪部)는 유실되었다. 기단부에는 네모꼴로 팔부중상(八部衆像)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 한 판석이 축조되어 있으며, 팔부중상과 사천왕상의 조각수법에는 서로 차이가 있다. 각층 지붕 윗면에는 기와를 이었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는 목탑이 전탑보다 앞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자료로 평가된다. 안동의 역사서인 『영가지(永嘉誌)』에는 ‘조선 성종 18년(1487)에 고쳐졌고, 당시까지 법흥사가 3칸 정도 남아 있었다’고 한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5년)
<출처>
1.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3. 두산백과,
4.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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