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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조각 공예관] 고려청자로 꽃피운 도자문화

고려후기에는 몽골의 침입으로 오랜 기간 전쟁을 치르면서 국가적으로 경제가 상당히 어려웠던 시기이다. 이는 청자제작에도 영향을 미쳐 전반적으로 전성기의 청자에 비해서 고려후기에는 그 제작수법의 단순해졌으며, 이전의 세련된 기술들이 많이 쇠퇴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려후기 해안지역에는 일본의 왜구가 서남해안 지방을 침입하여 고려청자를 만들던 가마들이 있었던 전남 강진과 전북부안의 장인들이 내륙으로 피난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도자기 생산의 새로운 거점이 생기고 조선시대 분청사기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청자 상감 소나무.인물무늬 매병, 고려 12~13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청자 상감 소나무.인물무늬 매병, 고려 12~13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악기를 연주하는 인물과 학, 소나무로 꾸민 장식은 고려의 문학 작품에서 자연을 벗 삼아 신선 세계에 들기를 갈망하는 내용과 닮은 부분이 있다. 악기를 연주하는 인물과 곡조에 맞춰 춤추는 학은 중국 당나라 은제 향합이나 원나라 회화에도 등장할 만큼 인기 있는 소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 철채퇴화삼엽문 매병’ (보물)은 목이 짧고 각진 아가리를 가졌으며, 직선적인 느낌의 곡선미를 주고 있는 매병이다. 퇴화(堆花)기법으로 인삼잎 무늬를 그렸다. 검은색에 가까운 철채와 흰색으로 표현인 인삼잎이 대비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청자 철채.퇴화 풀잎무늬 매병, 고려 12~13세기, 보물>

청자 철채.퇴화 풀잎무늬 매병, 고려 12~13세기, 보물
매병은 청자뿐만 아니라 백자, 도기 등 다양한 소재로 만들어졌으며, 다채로운 장식 기법이 쓰인 기종이다. 표면 전체에 산화철 안료를 발라서 검은색을 띠는 철채매병은 전하는 예가 드물다. 검은 바탕과 하얀색 무늬가 대비되어 강렬한 인상을 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 상감 국화.대나무무늬 매병, 고려 12~13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청자 상감 국화.대나무무늬 매병, 고려 12~13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매병의 위와 아래에 문양대를 두고 그 사이의 네 곳에 국화와 대나무를 상감깁버으로 표현하였다. 국화와 대나무는 군자의 고상함과 지조를 상징한다. 고려 왕실 사람들과 귀족은 꽃과 나무를 키우고 감상하는 것을 즐겼으며, 그들의 취향이 고려청자에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굽 바당에는 ‘惠’로 추정되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 상감.동화 포도.동자무늬 주자와 받침, 고려 13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청자 상감.동화 포도.동자무늬 주자와 받침, 고려 13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동화 기법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을 구리 안료로 채색하는 장식기법이다. 그릇 전체를 구리 안료로 칠하는 동채 기법과는 차이가 있다. 일부 포도송이에 점을 찍듯이 구리 안료를 칠하여 농익은 포도를 표현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0

 ‘청자 철화양류문 통형 병'(국보)는 긴 통모양의 병 앞 뒤에 한 그루씩 버드나무를 붉은 흙으로 그려 넣은 소박한 병이다. 병은 전제적으로 직선적인 단순한 원통 모양을 하고 있다. 몸통에 그려넣은 버드나무 2그루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장식은 없는데 단순하면서도 품위있는 분위기를 주고 있다. 버드나무는 현대 회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그림처럼 버드나무의 특징을 잘 파악하여 단순화 시켰다. 도자기에서는 많이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청자 철화 버드나무무늬 병, 고려 12세기, 국보>

청자 철화 버드나무무늬 병, 고려 12세기, 국보
넓은 여백에 단순하게 표현한 버드나무무늬가 운치 있다. 버드나무 줄기의 굴고 얇은 마디와 몇 가닥의 늘어진 잎을 간략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묘사한 수준 높은 솜씨를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

 ‘청자 음각모란 상감보자기문 유개매병'(보물)는 상감기법으로 위쪽에 보자기무늬가 새겨져 있다. 넓은 아가리에 볼록한 곡선을 이루고 있는 몸통 등 전형적인 고려시대 매병(梅甁)의 형태를 하고 있다. 아가리 주위로 정사각형 보자기를 엎어두고 있는 것처럼 상감양식으로 보자지무늬를 장식하고 있다. 몸통에은 4면에 모란꽃과 모란잎, 구름무늬를 음각으로 새겨 놓고 있다. 

<청자 상감 보자기무늬 매병, 고려 12~13세기, 보물>

청자 상감 보자기무늬 매병, 고려 12~13세기, 보물
매병이 어깨 윗면에 화려한 조각보 장식이 상감되었다. 이 무늬는 뚜껑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파손을 막고 장식이 돋보이도록 부드러운 비단 조각보를 올려 놓았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

<청자 상감 국화.모란무늬 병, 고려 12~13세기>

 ‘청자 상감매죽학문 매병'(보물)은 넓은 아가리에 볼록한 곡선을 이루고 있는 몸통 등 전형적인 고려시대 매병(梅甁)의 형태를 하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매화와 대나무, 그 사이에 3마리의 학들을 그렸다. 흑백상감기법으로 대상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청자 상감 매화.대나무.학무늬 매병, 고려 12~13세기, 경남 하동군 출토, 보물>

고려청자로 꽃피운 도자문화
12세기 중반에는 청자 제작 기술이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 다양한 도자 문화를 일구었다. <고려사>에는 1157년 의종이 궁궐 정원에 양이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청자 기와를 올렸다고 하여 당시 화려한 도자문화의 일면을 엿볼 수 이다. 바탕흙에 무늬를 새기고 다른 흙을 메워 넣는 상감 기법은 13세기에 크게 꽃을 피웠다. 1170년(의종24)부터 시작된 무신집권기에는 전라북도 부안과 전라남도 강진을 비롯하여 해남 등에서 도자 생산이 이루어지면서 청자의 화려함과 정교함이 절정에 달했다. 1231년(고종18) 몽골의 침략을 받은 고려 조정은 1232년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상감청자와 같은 고급 청자를 사용한 정황이 강화도의 여러 유적에서 확인된다. 이 시기에는 청자뿐만 아니라 백자와 검은색을 띠는 흑유자, 적갈색을 띠는 철유자, 연리문자기 등 다양한 종류의 자기를 제작했다. 고려백자는 전라북도 부안 유천리 가마터에서 주로 확인된다. 장식 기법으로는 산화철 안료를 사용한 철화와 철채를 비롯하여 구리 안료로 장식한 동화와 동채, 유약 위에 금을 칠한 금채 등 여러 방법을 활용했다. 한편, 고려인은 찻사발, 술잔, 주자 등 다양한 차도구와 술그릇을 제작했다. 이 시기 문학작품에도 하늘의 솜씨를 빌려 만든 아름다운 청자에 술을 담아 즐겼다는 내용의 시가 전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 상감매죽학문 매병'(보물)은 넓은 아가리에 볼록한 곡선을 이루고 있는 몸통 등 전형적인 고려시대 매병(梅甁)의 형태를 하고 있다. 흑백상감기법으로 앞.뒷면 매와와 대나무를 큼직하게 배치고 그 사이 새와 학, 풀을 표현하고 있다. 붓으로 그린듯한 회화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청자 상감 매화.대나무.학무늬 매병 고려 12~13세기, 보물>

청자 상감 매화.대나무.학무늬 매병, 고려 12~13세기, 보물
서정적이고 우아한 분위기가 돋보인다. 여유로운 공간 배치와 붓으로 그린 듯 섬세한 상감무니가 뛰어나다. 전라북도 부안 유천리 가마에서 주로 만들어졌다.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

<청자 주자와 승반, 고려 12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청자 주자와 승반, 고려 12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차와 술 문화가 발달하면서 청자 주자도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또 끓인 차나 따뜻하게 데운 술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승반을 두기도 했다. 깊은 발처럼 생긴 스안에 주자를 넣고 뜨거운 물을 채워 넣으면 차나 수을 보온하는데 유용했다. 동물모양 장식이 달린 뚜껑에 깊은 승반을 갖춘 주자는 중국 북송대 경덕진 가마의 청백자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벽화나 그림에도 주자와 승반이 함께 그려진 예가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 잔과 잔 받침, 고려 12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청자 완(찻그릇), 고려 12~13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청자 완(찻그릇), 고려 12~13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고려시대에 차 문화가 발달했지만 차 도구와 사용 방법은 구체적으로 남아 있지 않다. 찻그릇은 마시는 방법에 따라 형태를 달리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완의 제작이 감소하고 발이 증가한 원인을 차 마시는 방법의 변화와 관련 지어 보는 견해도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 완(찻그릇)>
<청자 꽃모양 완, 고려 12세기><청자 꽃모양 잔 받침, 고려 12세기>

청자 꽃모양 완, 고려 12세기
한 송이 꽃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감상용으로도 손색이 없다. 고려 조정에서는 중상서와 상의국 등 관청을 두어 왕실 의례나 행사에 사용할 꽃을 관리했고, 왕실 정원을 다양한 꽃과 나무들로 장식했다는 기록도 있다. 문인들 사이에서도 개인 정원에 여러 꽃과 나무를 심고 감상하는 취미가 유행했다. 왕실과 문인의 꽃 애호 풍조는 청자의 주요 장식무늬로 꽃이 활용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 양각 꽃무늬 잔, 고려 12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청자 음각 연잎무늬 주자, 고려 12세기>
<‘삼배시’가 새겨진 청자잔>
<시가 새겨진 청자 조롱박모양 병>
<시가 새겨진 청자>
<찻물을 담아놓은 항아리, 고려 12세기><찻잎을 버리는 항아리, 고려 12세기>
<뜨거운 물을 담는 주자, 고려 12세기><찻그릇, 고려 12세기><차 가루를 덜 때 쓰는 숟가락, 고려>
<찻자리 분위기를 돋우는 향로, 고려 12세기><찻그릇을 올려두는 받침, 고려 12세기>

청자에 담긴 차와 술 문화
<고려사>에는 차가 귀한 약이나 향과 함께 왕실 하사품이나 의례의 필수품으로 기록되었다. 고려에서는 ‘다소’를 두어 차를 재배했고, 왕실과 국가의 다례를 전담하는 ‘다방’을 설치하여 팔관회와 연등회 등 국가 주요 행사에 차를 올렸다. ‘다점’은 만남과 휴식의 장소로 애용되었다. 덩이차를 곱게 갈아서 뜨거운 물을 붓고 휘저어 거품을 내서 마시는 음다법이 유행했으며, 각종 청자 차도구가 발달했다. 또한 고려인은 무덤 부장품으로 청자 차도구를 넣기도 했다. 한편, 술과 관련된 청자로는 주자, 술잔, 병 등을 다양하게 제작했다. 왕실과 국가 행사에 필요한 술을 제조하고 관리했던 관청인 ‘양온서’ 또는 ‘사온서’의 이름이 새겨진 청자도 전한다. 청자 술병과 주자에는 고려인의 풍류와 인생관을 담은 시를 새기기도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 상감 구름.학무늬 병, 고려 13세기 후반 ~ 14세기>
<청자 상감 국화무늬 조롱박모양 주자, 고려 13세기 후반 ~ 14세기>

청자 상감 국화무늬 조롱박모양 주자, 고려 13세기 후반 ~ 14세기
국화무늬 도장을 세로로 촘촘하게 찍어서 상감하고 구슬무늬를 염주처럼 배치했다. 구슬무늬는 중국 원나라 양식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하는 13세기 후반 이후에 등장한다. 술을 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 상감.동화 구름.학.모란무늬 판, 고려 13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청자 상감.동화 구름.학.모란무늬 판, 고려 13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벽에 붙일 수 있도록 뒷면에 유약을 바르지 않은 장식 타일이다. 동화 안료로 무늬의 일부를 붉게 강조했다. 이러한 타일은 전라북도 부안 유천리 가마에서 주로 만들어졌고, 왕이 나들이 때 머무는 별궁이었던 경기도 파주 혜음원 터 등에서도 나왔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 상감 집.인물무늬 항아리, 고려 13세기 후반 ~ 14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청자 상감 집.인물무늬 항아리, 고려 13세기 후반 ~ 14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옆면에는 보상화 넝쿨무늬를 가득 상감했고 어깨 부분은 구슬과 매듭무늬로 장식했다. 13세기 후반 원나라와 활발히 교류하면서 새롭게 등장하는 요소이다. 고려시대 가옥의 형태를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예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 상감 구름.봉황.학무늬 합, 고려 13세기 후반 ~ 14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청자 상감 구름.봉황.학무늬 합, 고려 13세기 후반 ~ 14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13세기 후반 이후 등장하는 그릇이다. 원나라와 빈번하게 교류하면서 새로운 음식 문화가 들어왔고 이때 새로운 그릇도 함께 제작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국보로 지정된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청자 상감 용.봉황무늬 합>은 숟가락과 한 벌로 구성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 상감 용.봉황 넝쿨무늬 항아리, 고려 13세기 후반 ~14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청자 상감 용.봉황 넝쿨무늬 항아리, 고려 13세기 후반 ~14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여의주를 쫓는 가늘고 기다란 형태의 용무늬는 중국 원대 경덕진에서 새로 만들기 시작한 청화백자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구름과 용, 옆면에 장식된 보상 넝쿨과 봉황 무늬 모두 흰색으로 화려하게 상감되어 청자의 푸른 유색과 대조를 이룬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 상감 보상화 넝쿨무늬 잔, 고려 13세기 후반 ~ 14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청자 상감 보상화 넝쿨무늬 잔, 고려 13세기 후반 ~ 14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굽 높은 잔은 고려 후기부터 등장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 전기간에 걸쳐 만들어졌다. 중국 원대 용천이나 경덕진 가마에서 청자나 백자로 제작된 굽 높은 잔이 우라나라에서 발견된 예는 극히 드물다. 고려청자로 만들어진 것은 사찰 유적에서 주로 나온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 상감 봉황무늬 대접, 고려 13세기 후반 ~ 14세기>
<청자 상감 봉황무늬 대접, 고려 13세기 후반 ~ 14세기, 이홍근 기증>

청자 상감 봉황무늬 대접, 고려 13세기 후반 ~ 14세기, 이홍근 기증
상상의 동물인 봉황은 중국 송대 건축 기술서인 <영조법식>에 등장하며, 원나라에서는 장식 무늬로 유행했다. 고려청자에 무늬가 가득히 장식되고 봉황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원나라와의 교류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 상감 용무늬 접시, 고려 14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청자 상감 용무늬 대접, 고려 14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청자 상감 물가풍경무늬 잔과 잔 받침, 고려 13세기 후반 ~ 14세기, 이홍근 기증>

청자 상감 물가풍경무늬 잔과 잔 받침, 고려 13세기 후반 ~ 14세기, 이홍근 기증
잔 받침은 1291년을 뜻하는 ‘신묘’라는 연대가 새겨진 틀이 남아 있어서 13세 후반 이후에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최고 권력을 상징하는 용이 장식되어 왕실용으로 여겨진다. 금속기로도 만들어진 예가 전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 상감 물가풍경무늬 주자, 고려 13세기 후반 ~ 14세기>
<청자 상감.동화 용무늬 병, 고려 14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청자 상감 물가풍경무늬 귀때발, 고려 14세기>

청자 상감 물가풍경무늬 귀때발, 고려 14세기
중국 원나라에서는 고리를 달아서 휴대용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에서는 의례용이나 차도구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0

<청자 상감 버드나무.대나무무늬 매병, 고려 14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청자 상감 버드나무.대나무무늬 매병, 고려 14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14세기 매병은 전성기의 유려한 곡선이 사라지면서 과장된 모습의 S자 형태로 변했다. 이 시기에는 국가 주도의 관리 체제가 소흘해지면서 그릇의 품질이 떨어졌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 상감 버드나무.대나무무늬 병, 고려 14세기>

청자 상감 버드나무.대나무무늬 병, 고려 14세기
같은 형태의 병에 술과 관련된 시가 상감되어 있어서 술병으로 여겨진다. 한편, 충청남도 아산 동화리 유적에서는 건물을 지을 때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병의 목을 꺠서 출입구에 묻어 놓은 사례가 있어, 제례용으로도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 제작의 다변화
13세기 중반 고려 조정이 강도(강화)에서 개경으로 돌아온 이래, 고려와 원나라 간에 교류가 확대되면서 고려청자에도 여러 변화가 나타났다. 앞뒤가 납작한 항아리, 굽이 높은 잔, 입구가 밖으로 벌어진 대접, 뚜껑 있는 발과 받침 등 새로운 그릇 종류가 등장했다. 아울러 원나라의 용무늬, 봉황무늬, 물고기무늬 등이 고려청자에 일부 반영되었다. 그 결과 고려후기에는 고려 전통의 기형과 무늬를 가진 청자, 그리고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기형과 무늬의 청자가 공존하게 되었다. 14세기 중반 <고려사>의 기록에는 왕의 총애를 받았던 은천옹주 임씨가 자기 판매를 업으로 하던 상인의 딸이나는 내용이 있다. 당시 자기가 상품으로 매매되면서 돈을 번 이들이 생겨났던 정황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후기에는 이르면 간지(干支)가 상감된 청자가 많이 제작된다. ‘기사(己巳)’, ‘경오(庚午)’, 임신(壬申)’, ‘계유(癸酉)’ 등이 알려져 있다.

<간지가 새겨진 상감청자, 기사>
<간지가 새겨진 상감청자, 경오>
<간지가 새겨진 상감청자, 임신>
<간지가 새겨진 상감청자, 계유(1333년)>

간지가 새겨진 상감청자,
제작 연대를 의히하는 간지를 그릇의 안 바닥에 상감한 청자를 ‘간지명 청자’라고 한다. 간지명 청자는 형태와 무늬가 규격화.정형화된 특징이 있다. 왕실용 물품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막고 통합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정릉’이 새겨진 청자 상감 연꽃 넝쿨무늬 대접, 고려 1365~1374년>

정릉’이 새겨진 청자 상감 연꽃 넝쿨무늬 대접, 고려 1365~1374년
‘정릉’은 공민왕의 왕비인 노국공자의 무덤 이름이다. 노국공주가 사망한 1365년부터 공민왕이 세상을 떠난 1374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제사 등에 사용된 의례용 그릇으로 여겨진다. 14세기 왕실 청자의 양상을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0

<청자에 새겨진 관청 명칭, 소전색>

소전색 (1278~1392년)은 도교 의례를 운영하던 관청이다. ‘소전’은 돈을 태우는 의례 행위를 말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에 새겨진 관청 명칭, 보원고>

보원고 (1363~1392년)는 궁궐의 귀중품을 보관하던 창고이다. 기우제를 지내는 등 왕실 관련 행사도 담당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에 새겨진 관청 명칭, 양온>

양온, (고려 문종대~ 1372년)은 궁궐에 술을 바치는 일을 담당했다. 1308년부터 여러 번 명칭이 바뀌다가 1372년에 사온서가 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에 새겨진 관청 명칭, 준비색>

준비색 (1355~1390년)은 왕실 물품과 관련된 관청으로 추정된다. ‘색’으로 끝나는 관청은 왕실 의례나 행사 등을 위해 설치하는 임시 기구였는데, 왕실 재정으로 운영됐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에 새겨진 관청 명칭
‘소전색’, ‘보원고’ 등 글자가 새겨진 청자는 고려 후기에 주로 제작되었다. 도교 의례를 포함하여 왕실 전용 창고나 음식과 관련된 관청의 이름이다. 왕실과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해당 관청이 직접 조달하는 체제로 변하면서 그릇에 명칭을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의 쇠퇴와 새로운 길
14세기 대내외적인 변동 속에서 국가 주도의 청자 생산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자기의 품질이 다변화되는 한편, 나라의 세금으로 거둬들이는 청자에 ‘기사(1329)’, ‘경오(1330)’, ‘임신(1332)’ 등 제작 연대를 뜻하는 간지를 새겨서 관리하고자 했다. 또 술을 관리하는 ‘양온’, 왕실 물품 등을 담당하는 ‘준비색’ 등 해당 관청의 이름을 그릇에 새기는 관청명 청자를 만들었다. 14세기 중반 이후, 고려 사회의 혼란이 더해 가는 가운데 왕실과 조정이 생산을 주도했던 전라남도 강진과 전라북도 부안 중심의 자기 가마가 전국 각지로 흩어지고 품질이 더욱 낮아지는 변화를 맞았다. 이와 같은 자기 제작 환경은 조선 초 분청사기의 생산으로 이어졌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 항아리>
<청자 항아리>
<청자 합,>
<청자 합>
<청자 유병>
<청자 병>
<청자 연적><청자 주자>

고려청자의 변모
13세기 후반 고려와 원나라의 무역 및 문화 교류가 빈번해 지면서 고려청자 제작에도 변화가 생겼다.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앞뒤가 납작한 항아리, 굽이 높은 잔, 입구가 밖으로 벌이진 대접, 뚜껑 있는 발과 받침 등 새로운 형태의 그릇이 등장했고, 그릇 전체에 상감 무늬가 가득 채워지며 복잡하고 화려해졌다. 14세기에는 나라의 세금으로 거둬들이는 청자에 ‘기사(1329)’, ‘경오(1330)’, ‘임신(1332)’ 등 제작 연대를 뜻하는 간지를 새겨서 관리하고자 했다. 또 술을 관리하는 ‘양온’, 왕실 물품을 담당하는 ‘준비색’ 등 해당 관청의 이름을 그릇에 새겼다. 14세기 후반 조준의 상소문에는 전국에서 세금으로 바친 자기들이 운반 도중 유출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전국 각지의 가마에서 왕실과 조정에 바치는 자기를 생산하던 정황을 보여준다. 고급 청자 생산의 중심지였던 전라남도 강진과 전라북도 부안의 가마는 고려 사회 질서가 혼란한 와중에 전국으로 흩어졌고 자기의 품질은 더욱 떨어졌다. 이와 같은 고려 말 자기 제작 환경은 조선 초 분청사기의 제작으로 이어졌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2023년/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