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청사기는 고려 상감청자를 계승한 도자기제작기법으로 ‘백토로 분장한 회청색의 사기’라는 뜻으로 20세기에 들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외형상 고려청자에 비해서 제작수법이 쇠퇴한 느낌을 주고 있지만, 투박하면서도 서민적인 면모를 보이는 등 한국적인 미를 잘 담아내고 있다. 분청사기는 고려말 청자의 주요 생산지였던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의 가마들이 왜구의 침략으로 피폐화되면서 장인들이 내륙으로 이동하면서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분청사기는 15~16세기에 걸쳐 약 150년의 기간 동안 만들어졌으며, 고려청자.조선백자와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도자기로 평가받고 있다.
고려 청자가 주로 귀족층에서 많이 사용되었으며 소량생산을 했던 것에 비해서 분청사기는 고려말 전국적으로 확산된 가마터 덕분에 대량 생산되었다. 작품의 완성도 측면에서는 양질의 것과 일반적인 것과는 수준차이가 상당히 많이 났던 것으로 보인다.
분청사기 상감 어룡무늬 병, 조선 15세기 전반
조선 초에 제작된 상감 분청사기의 특징이 잘 드러난 병이다. 용의 머리를 한 물고기 무늬가 상감 기법으로 표현되었는데, 고려시대 상감청자의 깔끔하고 정돈된 무늬와 달리 분청사기 특유의 자유분방한 모습이 돋보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분청사기 상감 파도.용무늬 매병, 조선 15세기 전반
매병은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그릇으로 술과 기름 등을 담는 용도로 사용했으며 조선 초까지 제작되었다. 매병의 형태는 시기별로 차이가 있는데, 조선 초에는 이처럼 몸체의 곡선이 아래로 갈수록 급하게 좁아진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분청사기 상감 연꽃.물새무늬 매병, 조선 15세기 전반, 이홍근 기증
분청사기 특유의 생략과 대담한 무늬 표현이 돋보이는 매병이다. 연꽃과 물고기를 전면에 배치해 강조했다. 흰 백로는 목이 유난히 기고 다리가 짧아 과장되어 있다. 단순하면서 정감 어린 무늬 표현이 특징인 이 매병은 조선 초기 상감분청사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분청사기 상감 모란무늬 편병, 조선 15세기
분청사기 편병은 둥근 병의 앞뒷면을 눌러 만들기 때문에 둥글납작한 모습을 하게 된다. 앞뒷면의 모란꽃은 무늬를 넓게 파내는 면 상감기법으로 표현했다. 비슷한 특징의 상감분청사기가 전라도 지역 가마터에서 많이 출토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덕천’이 새겨진 분청사기 상감 넝쿨무늬 대접, 조선 1392년 이후 ~ 1403년 이전
대접 안쪽 바닥면에 새겨진 ‘덕천’은 고려 후기 왕실 창고인 덕천고를 뜻한다. 덕천고는 1403년 제도 개편으로 폐지되었으로, 이 대접은 1403년 이전에 제작된 것이다. 고려 말 조선 초에 제작된 상감분청사기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대접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청자의 계승, 상감분청사기
상감분청사기는 고려 말 상감청자에서 발전한 도자기이다. 그릇 표면에 무늬를 새기고 흰색이나 적갈색 흙을 넣어 흑백의 선과 면으로 표현하는 상감 기법을 활용해 만들었다. 조선 초에 제작된 상감분청사기는 형태와 장식이 상감청자와 비슷하고 고려 관청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이후 그릇의 무늬와 기법이 다양해지면서 새로운 분청사기가 제작되고 점차 고려 상감청자와 구별되는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분청사기 상감 풀꽃무늬 둥근 고리 항아리, 조선 1412~1424년,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 정소공주 묘 출토
세종의 장녀인 정소공주 묘에 있었던 항아리이다. 일제강점기 정소공주 묘를 서삼릉으로 강제로 옮길 때 1424년 제작된 묘지석과 세 개의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풀꽃, 연꽃잎, 국화무늬가 상감 기법으로 자유분방하게 장식되어 있어 분청사기 초기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분청사기 상감.인화무늬 둥근 고리 항아리, 조선 1412~1424년경,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 정소공주 묘 출토
정소공주 묘에서 출토된 세 점의 항아리는 장식 기법이 조금씩 다르다. 하나는 상감 기법으로, 두 항아리는 주로 인화 기법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세 항아리에서 상감청자에 뿌리를 둔 분청사기가 인화분청사기로 변해가는 과도기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분청사기 상감 연꽃잎무늬 뚜껑, 조선 1438년 이전,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출토
세종의 둘째 아들인 세조의 태실에서 나온 뚜껑이다. 이 뚜껑은 1438년에 태를 묻었다는 글이 새겨진 지석, 태항아리와 분청사기 대접이 함꼐 출토되었다. 연꽃 봉오리 모양 꼭지가 달린 반구형의 뚜껑은 매우 드문 형태로, 경북 성주에있는 세종 왕자들 태실에서만 발견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장흥고’가 새겨진 분청사기 인화무늬 대접, 조선 1438년 이전,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출토
세조의 태실에서 나온 분청사기 대접이다. 대접 안쪽에 새겨진 ‘장흥고’는 궁중 물품을 관리하는 관청이다. 15세기 전반 왕실과 중앙 관청에 상납된 공납 분청사기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예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조선 왕실의 분청사기
조선 건국 후 고려 말에 제작되던 상감청자는 상감분청시와 인화분청사기로 새롭게 발전되었다. 조선 왕실에서는 왕자나 왕녀가 태어나면 건강과 복을 기원하며 태를 항아리에 담아 태실에 묻었는데, 조선 초에는 상감분청사기와 인화분청사기를 태 항아리로 사용했다. 왕실을 상징하는 용무늬가 상감된 분청사기 항아리는 왕실 의례 등 특수한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분청사기 인화무늬 매병, 조선 15세기 전반, 이홍근 기증
인화무늬로 정교하게 꾸민 매병이다. 무늬가 촘촘해서 그릇 표면이 백색을 띠는데, 이는 15세기 전반에 만든 최고급 인화분청사기의 특징이다. 밀접된 이노무늬 아래에 상감 기법의 큼직한 연꽃잎무늬가 있어 조화를 이룬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분청사기 인화무늬 접시, 조선 15세기 전반
인화분청사기의 단정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접시다. 접시 안쪽과 바깥쪽 모두 촘촘하게 인화무늬로 장식되었다. 조선의 전형적인 접시 특징을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분청사기 상감.인화무늬 대접, 조선 15세기 전반, 이홍근 기증
상감과 인화 기법을 적절히 활용해 무늬를 장식한 대접이다. 대접 안바닥에 보이는 소담한 풀꽃무늬가 붓으로 그린 듯 자연스럽다. 줄기는 상감 기법으로, 꽃과 이파리는 무늬 도장으로 나타내어, 상감과 인화 기법의 조화로운 모습을 잘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분청사기 인화 국화무늬 대접, 조선 15세기 후반
대접의 모든 면을 상감 기법과 인화기법으로 꾸몄으나, 제작 기법이 다소 성글고 거친 면이 있다. 인화분청사기의 전성기인 세종 시기를 지난 15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분청사기 인화무늬 귀때발, 조선 15세기
주전자 부리같이 생긴 귀때가 달린 사발로, 액체를 담아 따르는 데 사용했다. 안쪽 면은 인화 기법으로 꾸몄고, 바깥 면은 흰색 분장토를 빈틈없이 입혀서 백자처럼 꾸몄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무늬 도장으로 꾸민 인화분청사기
인화분청사기는 그릇 표면에 다양한 무늬가 새겨진 도장을 찍은 후 백토로 채워 장식한 분청사기이다. 초기에는 무늬의 짜임이 성글었으나 세종 때부터 촘촘해져 그릇 전체가 백색을 띠었다. 각 지방에서는 세금으로 납부하기 위해 단정하고 정형화된 인화분청사기를 제작했다. 그릇에 중앙 관청 이름과 생산지를 표기하기도 했다. 경기도 광주 관요 설치 이후 왕실에서 사용하는 그릇이 백자로 바뀌면서 인화분청사기는 장식이 단순해지고 품질도 점차 떨어지게 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장흥고 (1392~1894년)는 왕실에서 사용하는 돗자리, 종이 등 여러 물품을 공급하고 관리한 관청으로 호조 소속이다.
분청사기에 새겨진 관청 명칭
조선 15세기 한양의 관청에서는 전국에서 세금으로 거둔 분청사기를 사용했다. 태종 때부터 그릇에 관청 이름을 새겨서 관리하기 편하도록 했는데,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다.
“장흥고에서 다른 관청에 그릇을 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겨우 1/5만 돌아옵니다. (중략) 앞으로 세금으로 납부하는 그릇에 ‘장흥고’라고 새기고, 다른 관청에 납부하는 그릇에도 관청이름을 새기도록 하여 관청 이름이 있는 그릇을 사사로이 쓴자를 벌하도록 해주소서.”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내자시 (1401~1882년)는 왕실에 쌀, 술, 기름, 채소 등 식품과 국가 잔치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며 직물을 만드는 일을 담당한 관청으로 호조 소속이다.
예빈시 (1392~1894년)는외국 사신 접대가 주 업무이면서 국왕이 신하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음식을 내릴 때 육회와 탕을 담당한 관청으로 예조 소속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내섬시(1403~1882년)는 조선 전기 2품 이상 관리들에게 술을 내리거나 여진족과 일본 사신들에게 식사를 제공한 관청으로 호조 소속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인수부 (1400~1465년)는 왕세자로 책봉된 이방원을 위해 설치된 부서로 즉위 후 폐지되었다가 상왕으로 물러난 후 다시 운영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공안부 (1400~1420년)는 정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후 정종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담당한 비서실 역할을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덕녕부 (1455~1457년)는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후 단종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담당한 비서실 역할을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분청사기에 새겨진 관청 명칭
분청사기 중에는 관청 명칭을 새긴 것이 있다. 이는 1417년 이후 관청의 물품을 개인이 감추거나 간직하는 폐단을 방지하고자 공납용 분청사기에 그 그릇이 사용될 중앙 관청의 이름을 새기도록 조치한 결과이다. 분청사기에서 확인되는 관청 중에는 15세기 전반에 임시로 운영된 관청도 있어서 제작 시기를 파악할 수 있다. 관청 이름을 표기하는 데 주로 상감기법을 썼으나 도장을 찍기도 했다. 관청 이름이 새겨진 도장을 반복해서 찍어 장식적인 효과를 내기도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분청사기에 새겨진 생산지
한양의 관청에 세금으로 납부한 분청사기에는 제작지의 명칭이 새겨져 있다. 그릇의 품질 관리를 위한 것으로 관련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진상하는 그릇은 대개 튼튼하게 제조하지 않아 오래 가지 않아서 파손되니, 지금부터는 그릇 밑바닥에 만든 장인의 이름을 써 후일으 참고로 삼고, 마음을 써서 만들지 않은 자에게는 그 그릇을 물어 넣게 하소서.” <세종실록>, 1421년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나라의 세금으로 거둬들인 분청사기
각 지역 특사물을 세금으로 거둬들이나는 공납제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시행되었다. 조선 초부터 전국 각지의 가마에서 만든 도자기는 공물로 관리되었고 나라에서는 공남용 도자기의 품질 유지에 힘썼다. 1414년 이후 견본에 따라 각 지역의 특산물을 만들도록 해, 일정한 수준과 규격을 갖추 중앙에 세금으로 납부하게 했다. 공납용 분청사기가 여러 지역에서 제작되었음에도 품질이 일정한 이유는 중앙에서 각 도에 내려준 견본을 기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1417년부터 도자기에 해당 관청 이름을 새겨 생산지에서 한양까지 운반되는 동안 유실되지 않도록 관리했다. 1421년에는 도자기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생산을 담당한 장인의 이름을 남기도록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지리지에 기록된 도자기 생산지, 자기소와 도기소
조선 초 효율적인 국가 통치를 위해 제작된 지리지에는 전국의 도자기 생산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에 실린 <지리지>에는 1424년에서 1432년 사이에 조사된 자기소 139곳과 도기소 185곳의 위치 및 각각의 품질이 상중하로 구분되어 있다. 자기와 도기를 나누고, 품질을 정한 기준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당시 도자 생산 경향을 파악할 수 있다. 139곳의 자기소 중 네 곳의 상품 자기소에서 최고급 백자와 분청사기를 제작했다. 상품 자기소는 경기도 광주 1곳, 경상도 지역에 3곳이 있었다. 그런데 1469년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에는 경상도 지역에 상품으로 선정된 자기소가 한 곳도 없었다. 이는 1467년 무렵 백자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관요가 경기도 광주에 설립되어 경상도에서는 백자를 더 이상 생산하지 않게 된 결과일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합, 조선 15~16세기, 남정숙 기증
조선 왕실은 세종 때부터 은그릇 대신 백자를 임금이 사용하는 어기로 선택했다. 형태가 단정하고 유색이 아름다운 이 합은 경기도 광주 관요에서 왕실용으로 만든 것이다. 왕실 행사에서 고급 음식을 담는 데 사용되었을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분청사기 인화무늬 합, 조선 15세기 전반
조선 15~16세기에 제작되던 합 모양으로 분청사기는 물론 금속기나 백자로도 많이 만들었다. 조선시대에 합은 음식을 담는 생활 용기로 사용했다. 이 합은 뚜껑 안쪽에도 인화 기법으로 빈틈없이 무늬를 채웠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천’이 새겨진 백자 사발, 조선 15세기 후반 ~ 16세기 전반, 이홍근 기증
국영 도자기 제작소인 경기도 광주 관요에서 생산된 경질 백자이다. 이 사발처럼 굽 안 바닥에 ‘천’, ‘현’, ‘황’ 글자가 새겨진 백자가 16세기 전반까지 제작되었다. 이 글자는 제작 공정에 관한 기호이거나 궁궐.중앙 관청에서 그릇 관리를 위한 표식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분청사기 인화무늬 대접, 조선 15세기 전반
입구 가장자리가 밖으로 살짝 벌어진 대접이다. 이러한 형태는 조선 15~16세기에 유행했으며, 분청사기 뿐 아니라 백자로도 많이 만들어졌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병'(보물)은 희고 단단한 경질 백자로 순수한 흰색의 무늬가 없는 순백자이다. 아가리에서 긴 목을 지나 몸통까자 유연하면서 풍만한 몸체를 이루고 있다. 단정한 형태와 고르게 입혀진 맑은 백자 유약이 잘 어울린다. 단정하면서도 절제된 미(美)를 추구했던 조선전기 사회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백자로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백자이다.
백자 병, 조선 15~16세기, 보물
조선 15~16세기 관요에서 만든 최고급 백자 병이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병으로, 그릇의 부드러운 곡선미와 풍만한 부피감이 일품이다. 순백색 표면과 당당하고 절제된 형태가 조선 왕실과 사대부가 추구했던 미감을 느끼게 해준다. ‘옥호춘(玉壺春)’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
분청사기 인화무늬 병, 조선 15세기 전반
인화분청사기를 대표하는 걸작 중 하나로 절제된 세련미와 우아함이 돋보이는 병이다. 단정한 형태와 반복적인 인화무늬가 깔끔하게 조화를 이뤘다. 병의 목과 굽 바깥 부분에는 작은 국화꽃무늬를 한 줄 돌려서 변화를 주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상감연화당초문 대접'(국보)는 조선초인 15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상감기법이 적용된 연질백자로 완성도가 매우 높은 작품이다. 바탕흙은 석고와 같은 질감이며, 벽이 얇다. 안쪽에는 단순화된 덩굴무늬가 있으며, 바깥면에는 위, 아래에 띠를 두르고 연꽃 덩굴 무늬를 상감기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조선초 상감 기법으로 만들어진 백자가 대개 유약이 거칠고 상감 솜씨도 미숙한데 비해 이 대접은 마무리가 깔끔하고 부드러운 질감을 느끼게 하며 무늬를 나타낸 수법도 섬세하다.
‘분청사기 상감운룡문 항아리’ (국보)는 조선전기에 만들어진 분청사기로 투박하면서도 서민적인 모습을 잘 보이고 있다. 높이 49.7cm의 큰 항아리로 어깨에서부터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서서히 좁아진 형태나 새겨진 무늬는 세련되지는 않지만 투박하면서 힘이 넘치는 외형을 하고 있다. 도장을 찍듯이 무늬를 새기는 인화(印花)기법과 상감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몸통에는 네발달린 용과 구름을 활달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여의두, 당초, 용무늬 등이 새겨 있어 15세기 초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분청사기 상감 인화 구름.용무늬 항아리, 조선 15세기 전반, 국보
상감과 인화 기법이 조화를 이루는 15세기 전반 분청사기의 정수이다. 상감기법의 역동적인 용을 중심으로 작은 국화무늬를 인화기법으로 꾸몄고, 크고 당당한 형태는 분청사기 고유의 조형성이 돋보인다. 용무늬가 그려진 이 항아리의 용도는 왕실 의례와 관련된 것으로 짐작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
‘분청사기 상감어문 매병'(보물)은 매병 전체에 인화무늬를 촘촘하게 넣었다. 높이 30cm의 매병으로 고려청자 매병 형태를 따르고 있지만 흰흙으로 꾸며진 부분이 많아 청자에서 분청사기로 바뀌는 과도기적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양이 복잡하고 변형된 구름, 연꽃무늬 등 분청사기에서 볼 수 있는 문양들이 주로 사용되었다. 몸통의 4면에는 동심원을 그리고 그 안에 2마리의 물고기가 있는 ‘쌍어문(雙魚紋)’을 표현하고 있다.
분청사기 상감 물고기무늬 매병, 조선 15세기 전반, 보물
매병 전체에 촘촘하게 인화무늬를 넣어서, 회청색 바탕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 매병의 생김새는 고려 말 상감청자에 가깝지만, 무늬는 흰 흙으로 꾸며진 부분이 많아 흰색의 비중이 늘어가는 분청사기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
조선의 도자기, 분청사기와 백자
분청사기와 백자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도자기이다. 분청사기는 회청색 흙으로 만든 그릇에 백토를 입힌 뒤 여러 기법으로 장식한 도자기이다. 분청사기는 고려 말 상감청자에서 유래했으며, 16세기 중엽까지 만들어졌다. ‘분청사기’라는 용어는 미술사학자 고유섭이 1930년대에 ‘분청회청사기’라고 이름 지으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백자는 순백의 흙으로 그릇을 만들어 유약을 입힌 다음 1,300℃가 넘는 높은 온도에서 구워 낸 도자기이다. 청자보다 더 우수한 기술로 제작된 백자는 조선시대에 널리 쓰였다. 조선 백자는 절제미와 우아한 품격을 갖춘 뛰어난 품질의 도자기이다. 조선 건국 후 15세기 중반까지 전국의 자기소와 도기소에서 제작된 분청사기와 일부 지역에서 생산된 백자가 중앙관청에 공물로 바쳐졌다. 1467년 무렵 조선이 도자기 생산체제는 크게 달라졌다. 경기도 광주에 국영 도자기 제각소가 설치되어, 나라에서 관리하는 관요(官窯)체제가 확립되었다. 이에 따라 전국의 가마에서는 공물로 분청사기를 제작할 피리요성이 줄어들었고 16세기 중엽 분청사기의 제작이 중단되었다. 조선시대 백자는 관요를 중심으로 제작되었다. 관요에서 15세기 중엽부터 청화안료로 그림을 그린 최고급 청화백자를 제작했다. 그러나 17세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영향으로 백자 생산이 정체되었다. 18세기 무렵 농업과 상업의 발달로 경제력이 축적되고,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져 백자 제작 기술이 향상되었다. .특히 왕실과 문인의 취향이 반영된 청화백자가 유행했다. 19세기에 청화백자가 대중화되고 일상용 각종 그릇이 백자로 새롭게 제작되었으며, 장식 기법도 다채로워졌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는 왕실 재정이 악화되고 외국산 도자기와의 경재에서 밀려나 조선 백자는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1883년, 400여 년의 역사를 지켜온 관요는 마침내 민영화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와 마찬가지로 백자는 다양한 형태와 무늬들이 있는데 그 중 순수한 흰색의 자기를 순백자(純白磁)라고 한다. 순백자에는 무늬가 없는 것을 비롯하여, 음각, 양각, 투가 등으로 장식한 백자들을 포함한다. 유교사회를 추구했던 조선사회에서는 순백의 절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순백자는 검소와 절제를 중요시하는 사대부들의 취향과 맞아 떨어졌다. 이는 조선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와 멀리 유럽까지 순백의 도자기들이 크게 선호되었던 시대적 배경도 백자가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도자기가 될 수 있었던 주요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자 상감 모란.나비무늬 편병, 조선 15세기
15세기 백자는 고려 백자의 전통을 잇는 유백색 연질 백자와 중국 명나라 백자의 영향을 받은 단단한 경질 백자로 구분할 수 있다. 이 납작한 편병은 무른 연질 백자로 은은한 살굿빛이 돈다. 이러한 연질 백자는 경상도를 비롯한 지방 가마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상감 연꽃 넝쿨무늬 대접, 조선 15세기, 이홍근 기증
조선 초에 제작된 단단한 경질 백자로, 상감백자 무늬에 많이 사용된 연꽃 넝쿨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고려 말 상감청나나 조선 초 상감분청사기와는 달리, 음각 선에 적갈색 흙이 아닌 철화 안료를 채색하듯 넣은 점이 독특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상감 나무.연꽃무늬 병, 조선 15세기
이 병은 상감 기법으로 장식한 경질 백자이다. 병의 한 면은 나무를, 다른 한 면에는 연꽃을 간략하게 새긴 후 적갈색 흙으로 채워 무늬를 장식했다. 나무무늬의 윤곽선 안쪽으로 점무늬가 불규칙하게 배렬된 것이 이채롭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대접.백자 접시, 조선 15~16세기
옅은 노란빛을 띠는 대접은 바탕흙과 유약이 덜 정선되거나 가마 내 굽는 온도의 차이 등으로 질이 단단하지 않은 연질 백자이다. 고운 흰색을 띠는 대접과 접시는 전형적인 경기도 광주 관요산 경질 백자로, 갑발에 한 점씩 넣고 구워낸 최고급품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손잡이가 있는 잔, 조선 15세기, 이홍근 기증
별모양 손잡이 달린 잔은 연질 백자이고, ‘J’자 모양 손잡이가 달린 잔은 경질 백자이다. 《세종실로》<오례> 가례 준작 도설에 옥과 금으로 만들어진 고리가 달린 잔 그림이 있어서 이 두 잔 모두 금속기를 모방해 만든 제기로 추정할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전접시, 조선 15~16세기, 경기도 파주시 교하동 출토
조선 15~16세기에 유행했던 접시 형태로 전접시라고 부른다. 경기도 관요에서 만든 경질 백자이다. 넓고 편평한 안 바닥을 화폭 삼아서 청화 안료로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쓴 백자가 전해진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항아리, 조선 15~16세기
광택이 풍부하고 푸른빛이 감도는 회백색 유약을 입힌 정갈한 경질 백자이다. 어깨가 넓게 벌어지고 아래로 갈수록 완만하게 좁아드는 조선 15~16세기 항아리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뚜껑에는 연꽃 봉오리 모양 손잡이가 달렸다. 이 항아리는 경기도 광주 관요에서 만든 최고급 백자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희고 단단한 백자의 완성
조선 초 제작된 백자는 자기의 견고한 정도에 따라 연질백자와 경질 백자로 구분할 수 있다. 고려백자의 전통을 이은 연질 백자는 바탕흙이 무른 재질이며 유백색을 띤다. 상감기법으로 무늬를 장식하기도 했으며 15세기까지 생산되었다. 희고 단단하며 투명한 유약을 입힌 경질 백자는 15세기 전반에 중국 명나라 백자의 영향을 받아 완성되었다. 1425년에 조선 출신의 명나라 사신 윤봉이 백자를 요구해 경기도 광주에서 굽도록 했다는 <세종실록> 기록과 1440년대 경기도 광주와 경상도 고령 등지에서 백자를 만들었다는 개인 문집의 기록으로 경질 백자가 15세기 전반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15세기 후반 경기도 광주에 관요가 설치되면서 경질 백자는 조선을 대표하는 도자기가 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0
백자 항아리, 조선 15~16세기, 서울 중구 남대문로 발견
푸른 기가 살짝 감도는 순백색 대형 항아리이다. 입구 부분이 둥글게 말리고 몸체의 무게 중심이 어깨에 있는데, 이는 조선 15~16세기 백자 항아리의 특징이다. 경기도 광주 관요에서 만든 최그급 백자로 왕실 행사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조선의 건국과 새로운 도자 문화
조선 건국 후 고려의 청자에서 분청사기와 백자라는 새로운 도자 문화가 이루어졌다. 전국 각지의 가마에서 제작된 분청사기와 경기도 광주, 경상도 고령과 상주 등 일부 지역에서 만든 백자가 중앙 관청으로 보내졌다. 이처럼 왕실과 중앙 관청에서 필요한 도자기를 세금으로 바치게 하는 제도가 15세기 중반까지 시행되었다. 분청사기는 세종 떄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으며 세조 때에 전성기를 맞이 했다. 이 시기에 고려 말 제작된 상감청자가 상감분청와 인화분청사기로 새롭게 발전했다. 상감분청사기는 왕실 의례용 등으로 사용되었고, 무늬가 비교적 규칙적인 인화분청사기는 왕실과 중앙 관청에서 평상시나 외교 사절을 접대할 때에 쓰였다. 아울러 무늬를 새기거나 파내는 조화분청사기.박지분청사기도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백자는 중국 명나라와 교류하면서 발전하고 유행하기 시작했다. 세종 때부터는 백자가 임금이 사용하는 그릇이 되었고, 이 무렵 정선된 백토와 유약을 단단하게 구워 낸 경질백자가 완성되었다. 1467년 무렵 경기도 광주에 사옹원의 분원이 국영 도자기 제작소로 설치되었다. 나라에서 백자 생산을 관리하는 관요 체제가 확립되면서 백자가 앉어적으로 공급되었다. 이에 따라 15세기 후반부터 백자는 조선에서 최고의 자기가 되었고 가장 많이 생산되어 조선 도자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2023년/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