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청사기의 전성기는 15세기로 왕실에서부터 일반서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약 150여년간 생산되었던 분청사기는 조선 중기에 들어서면서 광주지역에 관요가 설치되고 국가에서 백자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게 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여 16세기 중엽에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순백의 백자를 선호했던 조류와 구리를 가공해서 만든 유기제품에 밀려서 역사의 무대에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분청사기 철화 넝쿨무늬 항아리, 조선 15세기 후반 ~ 16세기 전반
흰 흙을 그릇에 바르고 철화 안료로 넝쿨무늬를 소용돌이치듯이 속도감 있게 표현했다. 초서체로 쓴 서예 작품을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활달하게 붓을 움직여 무늬를 장식하는 충청남도 계룡산 학봉리 철화분청사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분청사기의 종류는 그릇을 흰 흙으로 어떻게 꾸미는가에 따라 인화(印花).상감(象嵌).조화(彫花).박지(剝地).철화(鐵畵).귀얄.분장(粉粧)의 7가지로 형태가 있으며, 각기 독특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분청사기는 지역에 따라 특색을 보이는데 경상도에서는 인화 분청사기, 전라도에서는 박지.조화 분청사기, 충청도에서는 철화 분청사기가 유행하였다. 분청사기의 기형은 고려말 청자이 기형을 바탕으로 생동감 있는 형태로 변화했으며, 실용적인 기형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공주 계룡산 학봉리 가마터와 철화분청사기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가마터는 《세종실록》<지리지> 공주목 부분에 기록된 ‘주 동쪽 동학동 중품 자기소’로 추정된다. 1927년에 처음으로 학봉리 가마터 조사가 시작된 이후 1992년부터 2년간 국립중앙박물관이 진행한 발굴 조사에서 15세기에서 16세기 전반에 걸쳐 생산된 소량의 청자, 다양한 분청사기, 백자, 흑유자를 비롯해 예빈시, 내자시 등 관청 이름이 새겨진 공납용 철화분청사기 조각이 출토되었다. 이 중에 학봉리 가마터를 대표하는 도자기는 ‘계룡산 분청사기’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철화분청사기이다. 철화 안료로 그려진 무늬는 대담한 생략, 추상적인 묘사, 힘찬 필력, 익살스러운 표현이 돋보여 자유분방하면서도 예술성이 뛰어나다고 평가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박지기법는 백토분장하거나 백토물에 담갔다가 꺼낸뒤 무늬를 그리고 배경을 긁어낸 생기는 무늬이다. 태토의 검은색과 백토무늬가 선명히 대비되는 효과를 나타낸다.
분청사기 박지 모란 넝쿨무늬 항아리, 조선 15세기 후반
박지 기법은 흰 흙을 바른 위에 무늬를 새기고 다시 무늬 바깥 주변을 긁어내기 때문에 바탕흙과 흰색 무늬가 대비를 이루게 된다. 이 항아리 역시 흰색 모란 넝쿨무늬와 회흑색 바탕이 선명하게 대비를 이루었다. 특히 거친 붓질 흔적에서 분청사기 특유의 질감이 느껴진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분청사기 박지철채모란문 자라병’ (국보)은 분청사기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로 15~16세기에 만들어졌다. 납작한 몸체에 주둥이가 달린 형태로 자라를 닮아 ‘자라병’이라 불리는 이병은 실생활에 여행용 물병이나 술병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조형성이 뛰어나며 흑백의 대조가 멋스러운 작품이다.
분청사기 박지.철채 모란무늬 자라병, 조선 15세기 후반, 국보
자라 모습을 닮은 ‘자라병’은 조선시대에 생활용기로 사용되었으며 분청사기와 백자는 물론 옹기로도 제작되었다. 병 윗면에는 조화기법으로 모란꽃과 이파리를 표현했고, 무늬 주변의 흰 흙을 긁어 내고 그 위에 철화 안료로 칠했다. 조형성이 뛰어나며 흑백의 대조가 멋스러운 작품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
조화(彫花)기법(음각기법)은 백토분장한 표면에 음각으로 무늬를 그려 넣는 것으로 박지기법과 함께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분청사기 조화 모란무늬 편병, 조선 15세기 후반
백토를 칠한 표면에 음각선으로 무늬를 새기는 조화 기법으로 모란 무늬를 큼직하게 새긴 편병이다. 유사한 특징을 가진 분청사기 조각이 전라북도 고창군 용산리 등 전라도 일대 가마터에서 출토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분청사기 조화.박지 연꽃무늬 편병, 조선 15세기 후반, 이홍근 기증
조화 기법은 단독으로도 쓰이지만, 박지 기법은 조화 기법과 함께 장식되는 경우가 많다. 이 편병과 비슷한 무늬와 형태를 가진 분청사기가 전라북도 고창군 용산리 가마터에서 출토된 바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철화기은 회흑색의 태토위에 백토를 분장한 후 철사안료로 무늬를 그리고 유약을 입힌 것읏을 말한다. 청자에도 사용되었던 인화나 상감기법보다 다소 늦은 15세기 후반경부터 만들어졌다. 당초.연꽃.모란 등 식물무늬가 많이 그려졌으며, 무늬의 재구성 및 추상화를 통해 현대미술같은 느낌을 준다.
분청사기 철화 모란무늬 장군과 병, 조선 15세기 후반 ~16세기 전반
충청남도 공주 계룡산 학봉리 가마에서 만든 철화 분청사기의 조형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철화 안료로 짙게 칠한 모란은 철화 분청사기를 대표하는 무늬 중 하나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분청사기 철화무늬 제기 ‘보’, 조선 15세기 후반 ~ 16세기 전반
금속제기 ‘보’를 모방한 분청사기 제기이다. 조선 초부터 금속의 공급이 부족했기 때문에, 금속 대신 도자기로 제기를 만들어 각 지역의 의례에 사용하도록 했다. 금속제기 ‘보’의 서수 장식, 번개.물결무늬 등이 철화 안료로 거칠면서도 단순하게 표현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분청사기 철화 넝쿨무늬 항아리, 조선 15세기 후반 ~ 16세기 전반
철화 기법은 백토를 입힌 그릇 표면에 철화 안료로 무늬를 그린 것을 말한다. 사실적으로 무늬를 나타내기도 하고 간략하면서도 추상화된 무늬를 표현하기도 한다. 이 항아리에는 추상적인 형태의 넝쿨무늬를 율동감 있게 그려 넣은 것이 특징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귀얄기법은 분청사기의 모든 백토분장의 기초가 되는 기법으로 다른 무늬를 첨부하지 않은 것을 기얄기법 분청사기라고 한다. 태토위에 귀얄로 힘있고 빠른속도로 바르기때문에 운동감 뿐 아니라 회화적인 무늬효과를 주고 있다. 분장기법은 백토에 담갔다가 꺼낸 뒤 유약을 입힌 것으로 조용한 분위기를 준다. 16세기 백자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분청사기 귀얄 병과 대접, 조선 15세기 후반 ~ 16세기 전반
귀얄 기법이란 돼지털이나 말총으로 만든 ‘귀얄’이라는 붓을 사용해 그릇 표면에 흰 흙을 발라 장식하는 것이다. 귀얄의 거친 붓 자국은 회전하는 물레의 속도감이 더해져 그 자체만으로도 장식 효과가 뛰어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분장기법은 백토를 탄 물에 그릇을 담갔다가 꺼내어 유약을 바른 것이다. 주로 굽 언저리에는 백토가 묻지 않아 회흑색을 띠는 바탕흙과 대비를 이루게 된다.
분청사기 분장무늬 사발, 조선 15세기 후반 ~ 16세기 전반, 이홍근 기증
분장기법은 백토를 탄 물에 그릇을 담갔다가 꺼내어 마치 백자처럼 그릇 전체를 하얗게 장식하는 것이다. 손으로 굽다리를 잡고 거꾸로 담가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흰 흙 자국이 남는다. 흰 흙이 발라진 부분과 글 언저리의 회흑색 바탕흙이 대비를 이룬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분청사기 조화 물고기무늬 편병, 조선 15세기 후반
백토를 발라 장식한 편병에 음각선으로 물고기 무늬를 그려 넣었다. 물고기 무늬는 부귀, 다산, 번영을 상징하며 공예품에 널리 쓰였다. 주로 편병, 병, 장군, 항아리에 등장한다. 전라북도 고창군 용산리 가마터에서 이와 비슷한 분청사기 조각이 여러 점 나왔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분청사기 조화 물고기무늬 장군, 조선 15세기 후반, 이홍근 기증
장군은 물이나 술 등을 담는데 썼던 그릇이다. 원통형 몸체의 앞뒤면에 물고기의 특징을 살려서 큼직하게 나타냈다. 물고기의 슬며시 웃는 듯한 표정과 힘찬 지느러미가 잘 표현되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생동감이 넘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분청사기 조화.박지 연꽃.물고기무늬 병, 조선 15세기 후반
박지 기법은 그릇 표면에 백토를 바른 뒤 무늬 주변 부분을 긁어내어 무늬는 흰색을, 그 주변부는 회청색 바탕흙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이 병은 반대로 연꽃과 물고기 부분을 박지 기법으로 장식해 회청색을 띠고, 배경이 되는 파도무늬가 흰색이어서 색다른 대비 효과가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분청사기 철화 연꽃.물고기무늬 병, 조선 15세기 후반 ~ 16세기 전반, 이홍근 기증
계룡산 학봉리 가마에서 만든 분청사기에는 독특한 물고기무늬가 많다. 지느러미를 한껏 펼친 얼룩무늬 물고기는 쏘가리로 추측된다. 쏘가리는 한자로 궐어라 하는데, 궁궐의 궐과 음이 같아서 귀하게 여겨졌고, 시문과 회화 등에도 자주 등장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다양한 분청사기에서 백자로
분청사기는 지역마다 뚜렷한 개성을 보이며 발전했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정교한 무늬가 돋보이는 인화 기법의 분청사기가 주로 생산되었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백토를 바르고 무늬를 새긴 조화기법, 무늬 주변의 백토를 파내어 무늬를 도드라지게 하는 박지 기법이 많이 쓰였다. 철화 기법의 분청사기는 충청남도 공주 학봉리에서 생산되었으나 전라남도 고흥 운대리 가마에서도 소량 제작되었다. 무늬가 비교적 규칙적인 인화 기법 분청사기와는 달리 조화 기법, 박지 기법, 철화 기법의 분청사기는 무늬를 과감하게 생략하거나 추상화하는 등 자유분방하고 생동감 있는 표현이 특징이다. 15세기 후반 이후에는 그릇 표면에 백톨르 바르거나 백토 물에 그릇을 직접 담가 백토를 입히는 분장 기법이 사용되었다. 분청사기는 점차 백자와 비슷한 모습으로 바뀌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화백자는 코발트가 주성분인 안료를 사용하여 푸른색 무늬를 그린 백자를 말한다. 조선에서는 명나라의 영향을 받아 15세기 중반부터 청화 백자를 직접 제작하기 시작했다. 청화 안료는 값이 매우 비싸고 구하기도 어려워 백자에 청화 안료로 그리는 일은 궁중에 소속된 전문화가가 맡았다. 청화 안료의 수입이 어려울 때는 철화 안료로 그린 철화백자가 만들어 졌다. 15~16세기의 청화 백자에는 작품성이 상당히 높고 우아한 품격을 갖춘 무늬들이 그려졌다.
백자 청화 매화 대나무무늬 항아리, 조선 15세기 후반 ~ 16세기
조선 15~16세기에는 청화백자의 무늬로 군자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세한삼우인 소나무, 대나무, 매화무늬가 유행했다. 그중에서 매화와 대나무를 그린 작품이 많이 전해진다. 이 항아리에 장식된 세련된 필치의 매화나무는 궁중 화원의 솜씨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철화매죽문 항아리’ (국보)는 조선중기에 16~17세기에 만들어진 백자 항아리이다. 높이 41㎝의 큰 항아리로 16세기 분청사기나 명대(明代) 항아리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검은색이 나타나는 안료로 목과 어깨에 구름과 꽃잎 무늬를 돌렸다. 몸체 한 면에는 대나무, 다른면에는 매화를 각각 그려 넣었다.몸체에 그린 대나무와 매화은 그림 솜씨가 뛰어나서 도화서 화원이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매화, 대나무의 모양이나 밝은 유약색 등으로 볼 때 16세기 후반 경기도 광주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자 철화 매화.대나무무늬 항아리, 조선 16세기 ~ 17세기 전반, 국보
품격 있는 장중한 형태와 뛰어난 그림으로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철화백자이다. 백자의 품질과 그림의 표현 수준으로 보아 도화서의 궁중 화원이 무늬를 그린 왕실용 철화백자로 생각된다. 당시 하단의 사군자 표현 기법을 가늠할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청화매조죽문 유개항아리'(국보)는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청화백자로 격조높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 항아리이다. 몸통의 어깨는 벌어졌으며 허리는 잘록하게 만들어 바닥에서 도드라지는 느낌을 준다. 뚜껑 손잡이에 꽃잎 4장을 그리고 그 주위에 매화와 대나무를 그렸다. 몸체의 한면에는 한쌍의 새가 앉아 있는 매화와 들국화를, 다른 면에는 대나무를 그렸다. 문양의 배치나 그림 수법 등에서 명나라 청화백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도화서 화원이 직접 그린 격조높은 그림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자 청화 매화.새.대나무무늬 항아리, 조선 15세기 후반 ~ 16세기, 국보
조선 15 ~ 16세기 청화백자를 대표하는 항아리이다. 매화나무 위 한쌍의 새와 들국화, 그리고 대나무를 마치 한 폭의 화조화처럼 운치있게 그려냈다. 처음에는 중국 명나라 청화백자의 영향이 컸지만, 차츰 이 항아리와 같이 조선의 정서와 미감이 담긴 청화백자로 발전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청화 꽃무늬 합, 조선 15세기 후반 ~ 16세기
청화 안료로 도안화된 꽃과 원무늬를 장식한 합이다. 그릇의 형태는 중국 명나라 청화백자의 영향을 받았는데, 연꽃 봉오리 모양 손잡이가 달린 점이 다르다. 뚜껑 윗면과 옆면, 합 옆면의 원무늬는 조선 청화백자의 특징이다. 굽 안 바닥에 청화 안료로 ‘동’자를 써 넣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청화 연꽃 넝쿨무늬 손잡이 잔, 조선 15세기 후반 ~ 16세기
연꽃 넝쿨무늬는 중국 명나라 청화백자의 영향을 받은 장식 소재이다. 잔의 안쪽에는 전서체로 적힌 ‘복’자가 있다. 경기도 광주 도마리 관요 가마터에서도 ‘수’자가 적힌 청화백자 조각이 출토된 바 있다. 15~16세기 청화백자에서는 ‘수’, ‘복’과 같은 글자 무늬가 드물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시가 쓰인 백자 청화 전접시, 조선 15세기 후반 ~ 16세기
전접시의 편평한 바닥을 화폭 삼아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적기도 했다. 술과 관련되 시가 많이 남아 있어, 전접시는 술잔받침으로 사용됐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전접시에 적힌 시는 달밤의 흥취를 읊은 것으로 조선 15~16세기 왕실과 문인의 취향과 문화가 반영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태화배’가 쓰인 백자 청화 꽃모양 잔, 조선 15세기 후반 ~ 16세기, 서울 중구 장교동 발견
청화 안료로 꽃잎의 윤곽을 따라 선을 그리고, 안 바닥에 ‘태화배’라고 적었다. 크게 화합하는 잔이란 뜻으로, 여기에는 태평성세를 이루자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의미 있는 문자나 시 등을 써서 백자의 가치를 더한 조선 청화백자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철채 뿔잔'(보물)는 고대 이래로 전해 내려오는 ‘각배’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뿔잔이다. 길이 17cm, 아가리 지름 5.3cm 정도 크기이다. 순백의 바탕흙에 청색을 띠는 백자 유약을 칠한 것이다. 조선시대 백자 중에는 보기 드문 형태이다.
백자 철채 뿔잔, 조선 15세기 후반 ~ 16세기, 이홍근 기증, 보물
의례용으로 추측되는 뿔 모양 잔이다. 《세종실록》 <오례> 군례 부분에는 뿔 모양으로 생긴 ‘치(觶)’라는 술잔에 대한 글과 그림이 있다. 여기에 그려진 것은 활쏘기 시합에서 진 사람이 벌주를 마실 때 쓰는 술잔으로, 백자 뿔잔의 형태와 매우 유사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청화 매화무늬 항아리, 조선 15세기 후반 ~ 16세기, 이홍근 기증
청화 안료로 능숙하고 우아한 필치의 매화무늬는 궁중 화원이 직접 백자에 청화 안료로 그림을 그렸다는 옛 기록을 입증해준다. 경기도 광주의 15~16세기 관요 가마터 출토품에서 볼 수 있는 옅은 푸른색의 유색을 띠고 있다. 기존에 철화백자로 알려졌으나, 발색이 짙게 표현된 청화백자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청화 매화.새.대나무무늬 항아리, 조선 15세기 후반 ~ 16세기
15~16세기 청화백자에는 조선의 정취와 격조를 보여주는 회화적인 무늬가 많다. 좌우로 뻗은 매화 가지와 나뭇가지에 앉은 새를 향해 날아드는 새, 댓잎이 돋아나는 대나무 그림이 우아하고 아름답다. 한폭의 화조화 같은 청화백자 무늬는 도화서의 궁중 화원의 솜씨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조선 백자의 품격, 청화백자
청화백자는 당대 최고급 도자기로 왕실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도자기였다. 조선 초에는 중국 명나라에서 들여온 청화백자를 사용했으나 15세기 중반부터는 직접 제작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장식성이 강한 중국 명나라 청화백자를 모방했으나 점차 조선 고유의 색채를 띤 우아한 청화백자가 제작되었다. 청화백자 제작에 사용된 청화 안료는 고가의 수입품으로 이를 관리하고 백자에 그림을 그리는 일ㅇ르 궁중에 소속된 전문 화원이 담당했다. 성현의 <용재총화>와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매년 사옹원의 관리가 궁중 서화 담당 화원을 인솔해 관요에서 도자기 그림을 그리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청화 안료의 수입이 어려울 때에는 철화 안료로 그린 철화백자가 만들어졌는데, 청화백자와 마찬가지로 우아하고 세련된 화원의 솜씨가 담겨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조각, 조선 15세기 후반 ~16세기 전반,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도마리 출토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도마리 가마터는 조선초기 관요에서 제작된 백자의 수준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곳이다. 1964년 국립중앙박물관의 발굴 조사로 도마리 가마에서 품질이 뛰어난 순백자를 생산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에 제작된 무늬없는 순백자, 청화백자, 상감청자, 중국 명나라 청화백자 조각이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특히 ‘천’, ‘지’, ‘현’, ‘황’ 등의 글자가 굽 안에 새겨진 순백자와 도화서 화원이 그린 것으로 생각되는 매화와 새, 한시, 소나무와 별자리, 물고기 무늬가 있는 청화백자 조각은 당시 백자 제작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또한 청화 안료의 색을 확인하기 위해 시험 삼아 구운 백자 조각들도 여럿 확인되어 도마리 가마의 위상을 파악할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관요 설치 이후 조선 도자기
15세기 전반부터 왕실에서 백자를 많이 사용하게 되자 기존 공납 체제로 백자를 확보하는 데 한계에 이르렀다. 1467년 무렵 나라에서 직접 백자 생산을 관리하는 관요가 경기도 광주에 설치되었다. 이 지역은 좋은 흙과 땔감이 풍부하고 한양에서 가까워 관요 설치에 최적의 장소로 이미 최상품 자기가 생산되고 있었다. 관요는 궁중의 음식과 그릇을 조달하는 관청인 사옹원에서 관리했다. 1485년에 완성된 법전인 <경국대전>에 의하면, 129개 직종의 중앙 관청 수공업에 2,807명의 장인을 두도록 했다. 이 중 사옹원 소속 장인이 380명으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할 만큼 백자 생산은 국가적으로 중요했다. 고급 자기인 백자를 생산하는 관요가 설립된 후 분청사기는 지방 관청과 민간에서 사용되었다. 전라도의 조화 기법 및 박지 기법 분청사기와 충청도의 철화분청사기 등 지역 특색이 있는 개성적인 분청사기가 만들어졌다. 이후 귀ㅣ얄 기법과 분장 기법의 분청사기가 제작되었으나 16세기 중엽부터는 더 이상 분청사기가 생산되지 않았다. 15세기 후반 관요에서는 불에 구우면 푸른색을 띠는 청화 안료로 무늬를 그린 청화백자가 생산되었다. 청화백자는 최고급 도자기로 인식되었으나 고가의 수입품인 청화 안료를 구하기 쉽지 않아 왕실과 국가 행사를 위해 소량 제작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2023년/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