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사회는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고 신분제가 동요하고, 서양의 학문과 기술이 유입되는 등 급격한 변화가 있었다. 부를 축적한 새로운 계층은 이국적이고 화려한 백자를 선호했다. 이 시기에는 독특한 형태와 기법에 조선의 미감이 더해진 그릇과 문방구가 제작되었다. 화려한 채색 기법과 고급 장식 기법도 개발되었다. 또한 행복, 장수, 재물 같은 세속적 소망을 담은 무늬가 청화백자에 등장했다. 그러나 왕실의 재정이 악화되고, 외국산 도자기가 물밀 듯이 들어오면서 관요 운영은 점점 어려워지고 결국은 경영권이 민간에 넘겨졌다.
왕실용 한글이 있는 청화백자
1830년대에서 1870년대까지 사용된 왕실용 청화백자 중에는 굽 안 바닥에 제작 시기, 사용처, 크기와 수량을 한글로 새긴 것이 있다. 이는 궁궐의 특정 건물이나 왕실 행사에 사용되는 백자임을 표기한 것으로, 단정한 기형이 특징이다. 이러한 글자가 있는 접시 안쪽에는 ‘壽’ 또는 ‘福;자가 적혀 있기도 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왕실용 보상화무늬 청화백자
19세기 왕실 청화백자 가운데 중국 청나라 자기의 영향을 받은 무늬로 장식된 것이 있다. 이전 시기에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보상화무늬가 그것인데, 이 무늬는 왕실용 그릇에만 장식된 점이 특징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청화 파도무늬 꽃모양 사발, 조선 19세기, 이홍근 기증
꽃모양 청화백자 사발로, 윗부분의 안팎과 내면 중심은 도안화된 파도무늬로, 몸체의 외면은 괴석과 풀꽃무늬로 장식했다. 이러한 그릇의 형태와 무늬는 19세기 일본 자기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굽 안 바닥에는 청화 안료로 ‘進’을 써넣어 왕실 진상품임을 표시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왕실용 영지무늬 청화백자
영지는 불로장생, 장수를 상징하는데 중국 민요에서 백자의 장식무늬로 많이 사용되었다. 그 영향으로 조선 청화백자에도 영지무늬가 등장한다. 영지무늬가 장식된 그릇 굽 바닥에는 ‘進’, ‘別進’, ‘大進’ 글자가 청화 안료로 써 있다. 이는 진상한다는 의미로 이러한 그릇이 왕실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왕실용 보상화 넝쿨무늬 청화백자
19세기 청화백자의 새로운 무늬 중에 중국 청나라 경덕진요의 영향을 받은 보상화 넝쿨무늬가 있다. 이 무늬로 장식된 청화백자는 굽 안 바닥에 왕이 거처하는 궁궐을 의미하는 ‘上室’, 1867년 경복궁을 중건하며 완성한 제수각을 뜻하는 ‘齊壽’, 고종의 잠저인 ‘雲峴’ 등 주로 왕실과 관련된 글자가 써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청화 용.봉황무늬 합, 조선 19세기
왕실을 상징하는 용과 봉황은 단독으로 장식되는 경우가 많은데, 19세기에는 용과 봉황을 함께 장식한 청화백자가 등장한다. 이 합에는 용과 봉황, 구름무늬를 그릇 전면에 가득히 장식해, 왕실의 위엄을 나타내는 동시에 상서로운 징조를 나타내는 ‘용봉정상’의 길상적인 의미를 담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이국적인 무늬가 표현된 접시이다. 굽 안바닥에는 청화 안료로 적은 ‘함풍년제’라는 명문이 이다. 함풍(咸豊)은 중국 청나라 7대 임금인 문종의 연호로 1851~1861년에 해당된다.
왕실용 다각형 청화백자 접시
19세기에 중국과 일본 자기의 영향으로 사각형, 12각형, 16각형 등 다각형 접시가 제작되었다. 이러한 접시는 봉황과 구름무늬, 용과 구름무늬로 장식되어 있어 왕실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접시 안쪽의 바닥면은 물론 측면과 뒷면에도 무늬가 있어 장식성을 높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운현궁에서 사용한 청화백자
흥선대원군이 거처한 운현궁을 뜻하는 ‘운현’이라는 글자가 있는 청화백자가 전해진다. 고종이 왕위에 오른 1년 뒤인 1864년에 운현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따라서 ‘운현’, 또는 ‘운현궁’의 글자가 있는 청화백자는 모두 1864년 이후 제작된 것이다. 운현궁 청화백자는 영지 넝쿨무늬가 가득 채워지거나 도안화된 보상화 넝쿨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조선 왕실의 마지막 도자기
19세기 조선 왕실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다양한 무늬로 장식된 청화백자를 사용했다. 구름과 용, ‘수복’글자, 보상화 넝쿨, 영지 넝쿨 등 격식을 갖춘 무늬로 장식된 청화백자가 왕실용으로 제작되었다. 한편 왕실 행사에서 청나라 자기가 사용되기도 했다. 19세기 왕실용 백자의 두드러진 변화는 그릇에 글자를 표기하는 방식이 다양해진 점이다. 청화안료로 굽 안 바닥에 궁궐 전각 이름 등을 표기하거나 끝이 뾰족한 도구로 굽 주변의 유약 표면을 쪼아 그릇이 사용되는 연도, 행사와 장소, 크기와 수량을 한글로 새겼다. 이는 관요에서 사적인 백자 제작이 늘어나자 왕실용 백자를 별도로 관리하기 위해 고안한 방책이었다. 이렇듯 조선 왕실도 국내외 생산 환경의 변화를 피할 수 없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양근’이 쓰여진 백자 통채 항아리, 조선 1848년 또는 대한제국 1908년
굽 안쪽에 ‘양근 무신 오월일 분원’이라고 적혀 있다. ‘양근’은 분원 관요가 위치했던 경기도 양근군 남종면(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을 가리킨다. ‘무신’은 1848년이다 1908년에 해당한다. 분원의 위치를 밝힌 내용이어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분원도소’가 새겨진 백자 인장, 대한제국
‘분원도소’ 중 ‘도소’는 조선시대 시전의 사무 회의 및 공사 처리를 위한 사무소를 뜻하는데, 분원에 이러한 명칭이 사용된 것은 1883년 민영화 이후 분원의 운영과 관련된 것으로 추측된다. (안내문, 중앙각물관, 2024년)
조선 백자의 대중화와 마지막 여정
19세기 조선 사회는 내부적으로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신분제가 동요하고, 외부적으로 서양의 학문과 과학기술이 유입되는 등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이러한 사회 변동은 관요의 백자 제작에도 영향을 미쳤다. 도시와 상업이 번성하면서 부를 축적한 새로운 계층의 사람들은 중국과 일본을 통해 조선에 유입된 외국 문물에 이끌려 이국적이고 화려한 백자를 선호했다. 독특한 형태와 기법에 조선의 미감이 더해진 다양한 그릇과 호사스러운 문방구가 제작되었다. 화려한 채색 기법과 고급 장식 기법도 개발되었다. 또한 행복, 장수, 재물 같은 세속적 소망을 담은 무늬가 청화백자에 등장했다. 이른바 ‘분원리 양식’이라고 하는 독특하고 개성 있는 분원 관요 백자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조선 왕실의 재정이 악화되고, 외국산 도자기가 물밀 듯이 들어오면서 관요 운영은 점점 어려워졌다. 결국 1883년 사옹원 분원의 경영권이 민간에 넘겨졌다. 왕실과 관청용 그릇의 시장 판매가 법적으로 공식화되면서 관요의 역사는 400여 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0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2023년/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