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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서화관] 서예, 문자의 예술

우리나라 서예는 기원전 2세기무렵, 중국의 한자문화를 수용하며 한국 서예문화 시작하였다. 삼국시대의 글씨는 중국 남북조시대 글씨 영향을 받았으며, 7세기 중반부터 당의 구양순 해서체 유행하였다. 8세기에는 저수량, 안진경 해서, 왕희지 행서 유행하였다. 또한 이시기는 서예가 김생 활동하였다. 김생의 글씨는 후대에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조선시대까지 계속 유행했다. 고려시대에는 미불, 소식 등 중국 북송 서예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중앙박물관 2층 서화관>

문장을 돋보이게 하거나 높이 기리기 위해 명필들의 글씨를 집자하였는데 주로 비석을 세우는데 많이 이용하였다. 집자비석 중 고려시대(10세기)에 세워진 <태자사 낭공대사 비석>은 신라의 명필 김생(金生)의 글씨를 집자해서 새겨 넣은 것으로 8세기에 활동했던 통일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를 볼 수 있다. 비석들은 명필들이 살았던 시기와 멀지 않은 시기에 글자를 집자하여 새겼기 때문에 원본 글씨와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중요한 영향을 끼친 서예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한 <흥법사 진공대사 비석>에는 당태종의 행서를 집자하여 만들었으며, <무장사 아미타불 비석>은 왕희지의 행서를 집자하여 만들었다.

<태자사 낭공대사 비석, 고려 945년, 행서, 김생 글씨 집자, 보물>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보물)이다. 통일신라 승려 행적을 기르는 탑비로 고려 광종 때 (954년) 경북 봉화군 태자사에 세워졌다. 김생(金生, 711~791년?)의 행서를 집자해서 새긴 것으로 유명하다. 비문은 최치원의 사촌동생인 최인연이 지었고 글씨는 낭공대사의 제자인 승려 단목이 김생이 행서를 집자한 것이다. 오늘날 김생의 글씨는 전하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 낭공대사 비석은 어느 작품보다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반대편>
<가까이서 본 글씨>
<옆면 글씨>

태자사 낭공대사 비석, 고려 954년, 행서 김생 글씨 집자, 보물
이 비는 신라 말의 선승인 낭공대사 행적(832~916)을 기리고자 고려 광종 5년(954)에 세워졌다. 앞면에는 낭공대사의 생애와 그 찬시가, 뒷면에는 본 비의 건립과정이 각각 새겨져 있다. 비문은 최치원의 사촌동생인 최인연이 지었고 글씨는 낭공대사의 제자인 승려 단목이 김생이 행서를 집자한 것이다. 김생은 신라 최고의 명필이자 우리나라 신품사현의 하나로 높이 평가 받는데, 특히 ‘신라의 왕희지’로 불릴 정도로 중국의 서성 왕희지의 글씨에 뛰어났다. 오늘날 김생의 글씨는 전하는 것이 거의 없기 떄문에, 신라 말 서예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태자사는 경북 안동에 위치했던 사찰로, 오늘날 터가 전하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흥법사 진공대사 비석, 고려 940년, 행서, 당 태종 글씨 집자>
<가까이서 본 글씨>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보물)>
<흥법사 진공대사 비석 탑본, 당 태종 행서 집자, 고려 940년>

흥법사 진공대사 비석, 고려 940년, 행서, 당 태종 글씨 집자
신라 말 ~ 고려 초의 선승인 진공대사 충담(869~940)을 기리고자 세운 비석으로, 조선 중기에 파손되어 비석 내용의 전몰ㄹ 알 수 없으며 전체 비석 중 아랫면이다. 비문은 고려 태조가 지은 것으로 유일무이하며, 글씨 또한 최광윤이 중국 당 태종의 행서를 집자한 것으로 유일하게 전하다. 비의 뒷면에는 진공대사의 글이 구양순의 엄정한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서성(書聖)으로 일컬어지는 동진의 명필 왕희지의 글씨를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당나라 이후 왕희지의 글씨가 한반도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장사아미타불상을 만든 내용을 새긴 비석, 통일신라 801년경, 행서>
<윗부분>
<아랫부분 가까이서 본 글씨>

무장사아미타불상을 만든 내용을 새긴 비석, 통일신라 801년경, 행서
신라 39대 소성왕의 왕비 계화왕후가 소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무장사 아미타전에 아미타불상을 봉안한 내용과 그 과정을 새긴 비석이다. 중국 왕희지의 행서품으로 능숙하게 글씨를 새긴 이 비석은 흩어졌다가 18세기 이후 조선시대 때 발견되며 재조명되었다. 가장 큰 비편은 홍양호가 발견하였고, 그 후 김정희가 작은 비편들을 찾아 그 감흥을 비편 옆면에 새겨 기록하였다. 금석학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삼천사 대지국사 비석 조각, 고려 11세기, 해서>
<윗부분>
<아래 부분>

삼천사 대지국사 비석 조각, 고려 11세기, 해서
삼천사는 고려시대 남경에 있던 법상종의 중심 사찰로 지금의 서울 은평구 북한산에 위치하였다. 이 비석의 조각들은 당시 고려 불교계를 대표하던 삼천사 주지를 지낸 대지국사 법경의 것이다. 대지국사비의 비액은 고려의 제11대 임금 문종이 직접 쓴 것으로 추정되며, 비문은 이영간이 지었다. 비의 앞면과 뒷면의 글씨는 모두 최홍검이 구양순 풍의 반듯한 해서로 썼는데, 윗면에 전시된 앞면보다 뒷면의 글자가 더 큰 것이 특징이다. 삼천사는 11세기 고려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크게 융성했으나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 폐사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비록 사찰은 남아 있지 않고 비 역시 파편으로만 전해지지만 고려 전기 불교계의 동향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 초 문인 채인범을 위해 세운 묘지명이다. 현재 전해지는 고려시대의 묘지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채인범 묘지명, 고려 1024년, 해서>
<가까이서 본 글씨>

채인범 묘지명, 고려 1024년, 해서
고려에 귀화한 중국 남당 출신의 문인 채인범을 위해 세운 묘지명이다. 묘지명이란 무덤의 주인공의 행적과 품성 및 그 찬시를 새겨 무덤에 넣은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어졌다. 본 묘지명은 현재 전해지는 고려시대의 묘지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글씨는 빗돌에 가로세로로 정간을 친 다음 단정한 해서로 새겼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숭복사 비석 조각, 통일신라, 해서, 국립경주박물관>

숭복사 비석 조각, 통일신라, 해서, 국립경주박물관
신라 헌강왕이 대대적으로 중창한 숭복사의 사적비이다. 비문은 최치원이 헌강왕의 명으로 지었으며, 글씨를 쓴 사람은 알 수 없다. 비석이 일찍이 파손되었기 때문에 비의 온전한 탑본이 전하지 않는다. 다만 조선시대 떄 해안이 최치원의 문집에서 4개의 비문을 뽑아 ‘사선비명’이라고 불렀는데, 이 숭복사비도 그 중 하나이다. 최치원은 중국 당나라로 건너가 빈공과에 급제하고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후 귀국하여 뛰어난 문장과 저술을 남겼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흥덕왕릉 비석 조각, 통일신라, 요극일, 해서, 국립경주박물관>

흥덕왕릉 비석 조각, 통일신라, 요극일, 해서, 국립경주박물관
이 비편들은 경북 경주에 위치한 신라 제42대 임금 흥덕왕의 능에서 수습된 것이다. 같은 장소에서 전서로 ‘흥덕’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비편이 발견되면서 흥덕왕릉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흥덕왕의 성은 김이고, 이름은 수종.경휘이다. 비편의 내용으로 흥덕왕의 생몰년과 책봉시기 뿐만 아니라 신라의 김씨 왕조가 태조 성한을 시조로 모셨음을 알 수 있다. 비에 글씨를 쓴 인물은 신라의 명필가 중 한명인 요극일로, 그는 구양순의 필법을 터득하여 필력이 힘찼다고 전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영원히 기억하고자, 돌에 새긴 글
개인을 위한 비석은 통일신라 때 본격적으로 등장했습니다. 처음에는 국왕을 위한 비석이 건립되었고 8세기 후반부터는 불교 고승들을 위한 기념비가 세워집니다. 고려시대에는 고승의 기념비가 계속 제작되는 가운데 무덤에 묻는 묘지명이 출현했습니다. 조선시대가 되면 죽은 이의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가 제도적으로 정착됩니다. 이처럼 다양한 목적으로 돌에 새긴 글인 석문은 오랜 서예사의 흐름과 위대한 명필을의 흔적을 전해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순화각첩, 중국 북송 992년>

순화각첩, 중국 북송 992년
중국의 역대 글씨를 정리한 법첩으로, 북송 태종 순화 3년(992)에 처음으로 제작되었다. 왕희지와 왕헌지를 중심으로 역대 황제, 명신, 명필 등의 글씨까지 포괄하여 수록하였다. 이 서첩은 훗날 순화각첩 자체를 모각하거나 증보.수정한 첩들이 꾸준히 제작되며, 서예 학습서로 동아시아 서예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금석청완, 조선 17세기 이후>

금석청완, 조선 17세기 이후
삼국시대에서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역대 금석문 120 점의 탑본을 모은 첩으로, 17세기 후반의 것까지 수록하였다. 이 첩은 인조의 손자인 낭선군 이우의 <대동금석서>와 더불어 우리나라 탑본첩으로는 편찬 시기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금석청완’은 총 3가지 다른 본이 전하고 있는데, 전시된 본은 10권으로 구성되어 조속의 사후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이래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금석문 가운데 일찍 망실되었거나훼손이 심해 알아볼 수 없는 탑본도 다수 수록되어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육일첩, 조선 18세기 이후>

육일첩, 조선 18세기 이후
조선시대 역대 명필가들의 글씨를 중심으로 엮은 서첩이다. 총 16책 중 중국 서예 모음과 김생의 글씨를 제외하고, 안평대군에서부터 김수증 등 조선 전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인물들의 필적으로 구성되었다. 서첩에는 간찰이나 시문 등 사사로운 내용들도 포함되어 있어 흥미롭다. 이 서첩은 제작연유와 편집구성 등에 대해 알 수 없으나, 구성으로 보아 당시 안목 높은 수장가에 의해 편집된 것으로 보인다. 방대한 분량과 풍부한 내용으로 조선시대 서예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허목 인장, 조선 17세기>
<허목 인장, 조선 17세기>
<허목 인장, 조선 17세기>
<인장, 19~20세기, 손세기.손창근 기증>
<인장, 19~20세기, 손세기.손창근 기증>
<인장, 19~20세기, 손세기.손창근 기증>
<한구자, 조선 18~19세기>
<한구자, 조선 18~19세기>
<한글 목활자, 조선 18~19세기>
<한글 목활자, 조선 18~19세기>
<한글 금속활자, 조선 17~18세기>
<한글 금속활자, 조선 17~18세기>

문자의 아름다움
사람들은 아름다운 글씨를 동경하며 좋은 글씨를 쓰고자 과거의 명필들을 가까이에 두고 감상하기를 원했습니다. 법첩(法帖)은 모범이 되는 글씨들을 모아 편리하게 접할 수 있도록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이는 문자의 아름다움을 익히는 학습교재이자, 감상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서예는 중국의 서예를 받아들이고 재해석하여 독창적인 미감을 추구하며 발전해 나갔습니다. 특히 1443년 한글이 창제되면서 한자와는 또 다른 한글 서예만의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또한 옥이나 돌에 글자를 새겨 인장을 제작하는 예술인 전각은 서화와 어우러진 문자의 미를 잘 보여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조선시대 국왕들은 어릴적부터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아 대체를 글씨를 잘 썼다. 선조는 조선시대 국왕 중에서 명필에 속할 정도로 글씨를 잘 썼으며, 한석봉을 발굴할 정도로 서예에 대한 안목도 뛰어났다.

<선조의 글씨>
<성종의 글씨>
<문종의 글씨>
<효종의 글씨>
<인조의 글씨>
<선조, 효종, 현종의 글씨>
<현종의 글씨>
<현종의 글씨>

왕의 글씨, 어필
조선시대 임금들은 서예를 가까이 하면서 교양을 넓히고 덕성을 길러 나갔습니다. 새로 즉위한 임금은 선대 임금의 어필을 수집하고 편집하여 돌에 글씨를 새긴 이른바 ‘어필 석각’을 제작하였습니다. 이는 역대 임금의 글씨를 보전하고 위업을 소중히 계승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를 탑본하여 <열성어필>이라는 책으로 엮어 역대 임금의 글씨를 널리 보급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선조는 스스로가 명필가 였을 뿐만 아니라, 석봉 한호라는 당대 최고의 명필가를 발탁할 만큼 서예에 대한 식견이 높았습니다. 이처럼 왕의 글씨는 한국 서예의 흐름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여 서에 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문자의 예술, 서예
문자는 삶과 역사를 기록하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한자를 사용하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문자를 표현하는 예술, 즉 서예가 오래 전부터 발달하였습니다. 역대 명필가들은 다양한 서풍으로 각 시대의 미감을 드러냈고, 후학들은 이들의 글씨를 거울 삼아 전통을 입히고 계승하고 학습해 나갔습니다. 여기에 각자의 개성과 예술성이 덧입혀지며 다양한 서체들이 등장하여 서예의 발전을 이끌어 갔습니다. 명필가의 글씨는 서예를 연마하는데 좋은 교본이 됩니다. 사람들은 대가의 글씨를 모아 첩으로 엮거나 비석을 세웠습니다. 금석에 새겨진 옛 선현의 아름다운 글씨는 시대별 서체를 연구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이처럼 서예는 시.화와 함께 예술의 한 영역으로 자리매김 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2023년/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