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의 백자는 17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결과로 백자의 질이 많이 떨어졌다가 17세기말부터 다시 원래의 수준으로 질이 좋아져 순백의 백자가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18세기 전후 복구를 완료하고 경제 활동이 증가하면서 백자 수용층이 왕실과 사대부는 물론 부유한 일반 백성까지 확대되었다. 깨끗하고 기품 있는 백자가 다양하게 만들어졌고 특히 문인의 취향이 반영된 청화백자가 유행했다. 일본은 조선의 도자기 기술을 받아들여서 상당한 수준의 도자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에서 생산된 도자기는 유럽으로 수출되었으며, 유럽의 도자기 생산에 영향을 끼쳤다. 반면에 조선의 도자기 생산기술이 이전에 비해 그리 발전하지 못했으며 세계 도자기 교역에서도 소외되었다. 또한 국가에서 운영하던 관요가 민간에 이관되면서 원래의 기술도 크게 쇠퇴하여 구한말 왕실에서는 서구에서 도자기를 수입해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백자 철화 구름.대나무무늬 항아리, 조선 17세기
바람에 휘어진 대나무와 뭉게구름이 장식된 철화백자 항아리이다. 17세기에는 이처럼 둥근 형태의 항아리 제작이 늘어났다. 지방 백자 가마에서는 여기에 단순하면서도 지역 특징이 드러나는 무늬를 장식했다. 이 항아리는 17세기 지방 백자의 생산 경향을 잘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달항아리’, (2005-1,보물)는 흰 바탕색과 둥근 형태가 보름달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장식이 없는 순수한 백색의 순백자(純白磁)로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선호했던 정서를 잘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높이에 비해 몸통이 벌져 보이고, 입지름보다 굽지름이 작지만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다. 유약의 두께는 얇지만 태토에 완전하게 융착되었으며 황갈색을 아주 엷게 띠고 있다. 18세기 경기도 광주 가마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자 달항아리, 조선 17세기 후반, 보물
최대 지름과 높이가 거의 1:1 비율을 이루는 둥근 항아리다. 그 모습이 보름달을 닳아 ‘달항아리’라고 부른다. 반원형 몸체를 위아래로 이어 붙여서, 몸체 가운데에 접합 흔적이 있다. 좌우 대칭이 살짝 어긋난 느낌을 주지만, 자연스럽고 편안한 미감으로 조선 후기 백자의 조형성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
‘백자 철화끈무늬 병'(보물)이다. 조선중기인 15~16세기에 만들어진 술병으로 검은색 안료를 사용하여 줄무늬를 그려 놓은 철화백자이다. 목은 잘록하며 가늘고, 몸통은 서서히 넓어져 아랫부분이 볼록한 형태를 하고 있는데 여자의 날씬한 몸매를 연상시키는 곡선미가 있다. 몸통에는 마치 넥타이를 매고 있는듯한 모습으로 끈을 그려 놓고 있다. 마치 휴대하기 편하도록 끈을 매달아 놓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하는 그림이다. 현대미술같은 느낌을 주는 해악적이면서, 창의성이 넘치는 무늬이다. 굽의 바닥에는 한글이 적혀 있어 한글창제 이후인 16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자 철화 끈무늬 병, 조선 16세기, 1995년 서재식 기증, 보물
병의 목에 끈을 묶어 드리운 것 같은 모습의 백자 병이다. 철화 안료로 부드러우면서도 거침없이 그어 내린 무늬가 특징이다. 굽 안 바닥에 한글로 적힌 ‘니가히’는 사람 이름으로 여겨진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
백자 철화 구름.용무늬 장군, 조선 17세기
17세기에는 전란의 영향으로 청화안료가 부족해 철화 안료를 대신 사용했다. 철화백자 무늬는 청화백자보다 피선이 간략하고 다소 거칠게 장식된 것이 특징이다. 이 장군은 왕실과 중앙 관청에서 술을 담는데 사용한 그릇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철화 구름.용무늬 항아리, 조선 17세기
의례용 백자 용준은 대개 몸체가 긴 입호에 청화 안료를 사용해 공들여 장식했다. 17세기 중반 이후에는 둥근 항아리에 철화 안료로 매우 간략하게 그린 구름 용 무늬가 등장해, 경기도 광주 관요 인근의 가마에서도 이와 같은 철화백자를 생산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철화 국화.벌레무늬 고족배, 조선 17세기, 서울 종로구 중학동 발견
안 바닥에 철화 안료로 국화와 곤충 무늬를 장식한 고족배이다. 고족배는 중국 원나라 자기의 영향을 받아 고려 13세기 후반부터 제작되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왕실 의례나 국가 행사 때 술이나 차를 담는 용도로 사용됐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壽’가 쓰여진 백자 철화 완과 잔, 조선 17세기, 서울 종로구 중학동 발견
그릇 안쪽에 철화 안료로 쓴 ‘수’자가 있다. 15~16세기 청화백자 잔 안바닥에 ‘수’나 ‘복’자와 같은 좋은 뜻을 지닌 글자르 썼는데, 이를 따른 것이다. 백자 고족배, 백자 철화 구름 용무늬 항아리와 같은 생활 유적지에서 발견됐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0
백자 철화 대나무무늬 편병, 조선 17세기, 이홍근 기증
이 백자 편병은 조선시대 백자 편병의 전형적인 형태로 몸체를 눕혀 한 번에 성형한 후 여기에 주구와 굽을 따로 만들어 붙였다. 17세기에는 철화 안료로 백자 편병의 앞뒤면에 대나무, 국화, 포도무늬 등으로 꾸몄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철화 풀꽃무늬 병, 조선 17세기
간략한 필선으로 풀꽃무늬를 장식한 철화백자 병으로, 지방 백자 가마에서 제작했다. 17세기에는 백자 제작지가 지방으로 확대되면서 전국적으로 철화백자가 유행했고, 지역적 특색이 드러난 무늬를 장식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전란 이후의 백자 제작
왜란과 호란 이후 왕실용 백자를 생사나던 관요에서는 원료 조달과 운영이 힘들어져 회백색 백자를 생산했다. 17세기 후반 중국 청나라와의 무역이 안정되기 전까지 안료 수입이 필수적인 청화백자는 생산이 거의 중단되었고, 대신 철화백자 제작이 성행했다. “옛날에는 도자기의 그림이 석간주(철호)였는데 요즘은 회청(청화)으로 무늬를 그린다.”라는 1754년 <영조실록>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17세기부터 18세기 전반까지 철화백자가 제작되었다. 경기도 광주 관요의 17세기 가마터에서 출토된 철화백자 조각으로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림 표현이 회화적인 솜씨를 갖춘 철화백자도 있지만, 대부분 단순화되거나 추상적인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지방 가마에서도 소박하게 장식한 철화백자가 생산되었다. 관요가 재정비되는 17세기 후반부터 백자의 태토와 유색이 맑고 깨끗해졌으며 청화백자 생산이 점차 늘어났다. (안내문, 중앙박물관,2024년
청화백자는 코발트가 주성분인 안료를 사용하여 푸른색 무늬를 그린 백자를 말한다. 17~18세 청화백자는 여백을 살리면서 간결하게 그린 산수, 사군자 등의 무늬가 유행하였다. 19세기에는 청화 백자가 더욱 대중화되어 새로운 그릇들이 제작되고 무늬도 다채로워졌다.
백자 청화 인물무늬 항아리, 조선 18세기
몸체 가득 오동나무 그늘 아래 술에 취해 꿈을 꾸고 있는 도인의 모습을 청화로 그려 넣었다. 그 앞에서 암.수사슴이 노닐고, 나무 뒤에 서 있거나 날고 있는 두마리 학이 보인다. 조선 후기 청화백자에는 이처럼 민화풍의 인물화와 장생도의 도상이 그려지기도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시가 쓰인 백자 청화 산수 인물무늬 병, 조선 18세기, 이홍근 기증
몸체 앞뒷면에 청화로 크게 능화창을 배치하고, 한 화면에는 강가에서 흰 새 두마리를 바라보고 있는 인물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다른 화면에는 피리를 불며 소를 타고 가는 사람이 있다. 능화창 사이에 조선시대의 문신 김정국의 시를 적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시가 쓰인 백자 대나무무늬 연적, 조선 18세기
여덟 면으로 된 몸체에 윗면은 대나무를, 옆면에는 장방형의 구획 안에 시를 써넣어 장식했다. 먹을 갈 때 물을 공급하는 용도인 연적에 대한 감상을 적은 시와 사군자의 하나인 대나무를 배치해 격조높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시가 쓰인 백자 청화 병, 조선 18~19세기
조선시대의 문신 오도일의 시를 몸체에 여덟 줄로 나누어 청화로 써넣었다. 시는 술을 내린 임금에 대한 감사함을 담았다. 조선 후기 시문으로 장식한 청화백자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청화투각모란당초문 항아리'(보물) 높이 26.7cm 백자 항아리로 몸체를 뚫음새김하였다. 안쪽과 바깥에 항아리가 이중으로 있는 구조이다. 바깥 항아리는 뚫음새김으로 모란꽃, 줄기, 잎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안쪽 항아리에는 문양이 없다. 외형은 일반적인 항아리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백자 투각 청화 모란 넝쿨무늬 항아리, 조선 18세기, 보물
몸체에 투각 기법으로 커다랗게 모란 넝쿨무늬를 장식했다. 모란은 일찍부터 그림과 도자기에 등장하는 전통적인 소재이며, 조선 후기에 특히 문인 사대부들의 사랑을 받았다. 활짝 핀 모란의 화려함이 잘 드러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청화 난초무늬 병, 조선 18세기, 이홍근 기증
여덟 면으로 각이 진 몸체에 각각 세 종류의 들꽃과 난초로 구성한 무늬를 간결하게 장식했다. 각진 병 형태와 우윳빛의 유색, 난초와 들꽃의 장식 소재에 선으로 지표면을 표현한 점 등은 18세기에 유행한 청화백자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청화 난초무늬 항아리, 조선 18세기, 이홍근 기증
공간 배치는 전체적으로 여백을 살려 서정적인 느낌을 주며, 청화 안료의 농담과 붓의 굵기가 절제되어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가는 붓으로 여백을 많이 두어 간결하게 무늬를 그려 넣는 방식은 임진왜란 이후 다시 부흥을 맞은 18세기 청화백자의 특징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청화 풀.벌레무늬 항아리, 조선 18세기, 박병래 기증
둥근 몸체의 다섯 곳에 굵은 음각 선을 넣어 굴곡을 살리고, 네 개의 원 안에는 바위틈에 핀 여뀌, 난초, 국화, 그리고 벌과 나비를 장색했다. 단아한 형태에 작은 정원 같은 서정적인 풍경을 간결하고 운치있게 표현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청화.투각 포도무늬 필통, 조선 18세기 후반 ~ 19세기 전반
음각과 투각 기법으로 포도무늬를 장식하고 부분적으로 청화 안료를 채색해 무늬의 입체감을 살렸다 윗부분은 칠보무늬를 그려 포도무늬와 함께 길상적인 이미를 더했다. 조선후기에 길상무늬를 장식한 청화백자 문방구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투각.청채 모란무늬 필통, 조선 18세기 후반 ~ 19세기 전반
다섯 곳에 구멍을 내어 붓을 꽂도록 한 형태가 독특하다. 몸체 중앙부에 모란꽃과 이파리를 음각과 투각 기법으로 장식하고 청화 안료로 셈세하게 채색했다. 조선 후기 문인의 사랑방에 격조를 높이는 용도로 백자 문방구를 선호했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철화포도원숭이문 항아리'(국보) 조선 후기 1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조선 백자를 대표하는 걸작이다. 백자 항아리로 청자매병처럼 적당한 높이에서 어깨부분이 볼록하고 아래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를 하고 있다. 아가리 둘레에도 무늬를 두르고 몸체에는 검은색 안료로 포도 덩쿨을 그려 넣었으며, 포도덩쿨 사이를 뛰어넘는 원숭이를 그려 넣었다. 포도넝굴 잎과 줄기의 생생한 표현 등으로 볼 때 도화서 화원이나 전문적인 화가가 그림을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백자는 산화철 안료를 사용하여 무늬를 그린 철화백자(鐵花白磁)로 전면에 푸른색이 감도는 유백색의 백자유약이 고르게 칠해져 있다.
청화백자에 담긴 왕실과 문인의 취향
18세기 중국 청나라와의 교류와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유입된 다양한 문물과 문화는 조선 사회에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절제와 근검을 미덕으로 삼던 18세기 조선 왕실은 사치 풍조의 확산을 우려해 화려하게 장식한 그릇과 청화백자의 제작을 금지하고, 동시에 청나라로부터 수입되는 사치품의 소비를 규제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그럼에도 18세기 후반에는 왕실과 상류층은 불론 일반 백성에게까지 고급 도자기 소비가 확산되었다. 차를 즐기며 서화를 감상하고 문방구, 골동품, 서책 등을 수집하는 문인 문화는 조선 청화백자 제작에 큰 영향을 주었다. 18세기에는 왕실 및 문인의 미의식과 절제된 품격을 보여주는 뛰어난 청화백자가 만들어졌다. 깨끗한 설백의 유색과 담백한 무늬 표현이 이 시기 청화백자의 특징이다. 대나무, 난초, 분재 등 문인 취향의 소재가 간결하게 그려졌고, 서정적 정취를 담은 시가 쓰여지기도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조선 왕실에서는 궁중의 연례와 제례에서 술을 담거나 꽃을 꽂아 장식할 때 여러 도자기 항아리를 사용하였다. 그 중 용준(龍樽)은 장식효과 뿐만 아니라 그릇을 쓰는 사람의 권위나 신성함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왕실 백자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다.
백자 철화 구름.용무늬 항아리, 조선 17세기, 서울 종로구 중학동 발견
전쟁을 겪으면서 청화 안료 공급에 문제가 생기자 17세기 왕실 의례용 용준을 철화 안료인 석간주로 제작하게 된다. 용과 구름의 표현은 경직된 모습이지만 뚜껑의 매화가지와 대나무무늬에는 이전 시기 장식의 여운이 남아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철화 구름.용무늬 항아리, 조선 17세기
15~16세기 항아리 형태에 철화 안료를 사용해 용의 당당한 기세를 능숙하게 그렸다. 구름무늬는 형시고하된 ‘卍’자 형태이고, 어깨는 도안화된 꽃잎무늬를, 아래쪽은 파도무늬로 꾸몄다. 왕실 의례 떄 술을 담는 주준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조선초 의례서 그림 속 용준
조선 15~16세기에 만든 온전한 용준은 전해지지 않으나 문헌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종과 성종 임금 때의 의례서에 용준 그림이 수록되어 있다. 그림 속 용준은 뚜껑이 있어서, 의례용 술을 담아 보관하는데 사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세종실록》<오례>와 <국조오례의서례>에 수록된 용준은 항아리의 형태와 용의 표현이 다르다. 용무늬를 그릴 때 용의 얼굴 형태, 두 발의 방향, 발톱 수에 있어서 정해진 규범은 없지만 왕실 의례의 종류에 따라 용 주변을 다르게 장식한 것으로 생각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청화 구름.용무늬 항아리, 조선 17세기 후반
17세기 후반에 청화 안료의 수입이 가능하게 되면서 의례용 청화백자 용준을 다시 제작하게 되었다. 이 항아리는 다른 용준에 비해 크기가 작은 편이지만 청화백자로 만든 희소한 사례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청화 구름.용무늬 항아리, 조선 18세기 후반
높이 50cm가 넘는 크고 당당한 몸체에 역동적인 자세의 용을 장식했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전반에 간행한 <산릉도감의궤>의 청룡과 유사해 도화서 화원이 격식에 따라 용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왕실의 행사 때 꽃을 꽂는데 사용한 화준으로 여겨진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청화 구름.용무늬 항아리, 조선 18섹 후반 ~19세기 전반
용의 모습은 다소 둔중하나 여의주를 쫓는 장면을 숙련된 필치로 그렸다. 몸체의 어깨와 아랫부분은 여의두무늬로 마무리했다. 용준의 용무늬 표현은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이 용은 1872년 다시 그린 <태조어진> 중 보의 용무늬 표현과 유사한 점이 많다. 이 용준은 왕실 행사에서 술을 담는 주준의 용도로 사용했을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청화 학.공작무늬 항아리, 조선 18세기
능화창 안에 괴석과 모란, 한 쌍의 학 또는 공작으로 장식한 둥근 항아리다. 능화창 주변에는 마름모 형태로 ‘壽’, ‘福’, ‘康’, ‘寧’ 의 도안화된 글자로 꾸몄다. 능화창 안의 학, 공작, 괴석, 모란무늬는 불로장생이란 도교적 주제를 담은 ‘요지연도’ 등에서도 확인된다. 길상적인 의미의 여러 무늬가 화려하게 장식된 이 항아리는 왕실 행사용으로 추측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조선 왕실과 의례용 백자
조선 왕실의 대표적인 의례 용기로 ‘용준’이 있다. 용준은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백자 항아리에 청화나 철화 안료를 써서 용무늬를 그린 것으로, 조선 왕실 연회와 제례에서 술을 담거나 꽃을 꽂아 장식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조선 초 명나라 용무늬 청화백자를 본떠서 청화백자 용준을 제작했고 이는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에 운영된 경기도 광주 관요 가마터에서 나온 용준 조각으로 알 수 있다. 온전한 형태로 전하는 용준 중에서 가장 연대가 이른 것은 17세기 전반의 철화백자 용준이다. 사회가 안정되기 시작한 17세기 후반부터 다시 청화백자 용준을 제작했다. 1754년 기록에 “청화 안료로 그림 그리는 것은 사치한 풍속이므로 일제 금하지만, 용준의 예외로 한다:라고 했을 정도로 용준은 조선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했다. 조선 왕실을 상징하는 또 다른 도자기인 봉황을 청화 안료로 그린 항아리는 청화백자 용준과 양식 변화를 함께 하며, 왕실 의례를 비롯해 궁중의 일상 생활에서 사용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는 무늬를 표현하는 수법이나 안료에 따라 분류할 수 있는데, 조선백자는 상감청자를 계승한 백자상감(白磁象嵌), 무늬가 없는 순백자(純白字), 코발트 안료를 사용하여 푸른색 무늬를 그린 청화백자(靑畵白磁), 산화철 안료를 이용한 철화백자(鐵畵白磁), 산화동으로 무늬를 그린 동화백자(銅畵白磁, 진사백자)가 있다. 중국의 백자에는 이외에도 다양한 색갈을 내는 오채(五彩), 분채(粉彩), 두채(斗彩)백자 등이 있다. 조선백자가 검소하면서 절제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면, 중국 백자는 다양하고 화려한 색감과 섬세한 표현 등이 돋보인다.
백자 통모양 병.사각병, 조선 19세기, 박병래 기증
19세기에는 중국과 일본 등 외국 자기의 영향을 받아 이전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병이 제작되었다. 사각병은 사각형 판으로 네 면을 서로 부착해 만든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병에 청화 안료로 무늬를 그리거나, 병 전체를 채색해 꾸미기도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주자, 조선 19세기, 박병래 기증
항아리 형태의 몸체에 부리와 손잡이, 뚜껑을 갖춘 주자이다. 목 부분과 뚜껑의 양쪽에 구멍을 내고 긴 자물쇠를 연결할 수 있는 장치를 두었는데, 약과 같은 특수한 용도의 액체를 담는 용기로 사용했을 것이다. 주자에 살짝 도는 푸른색의 유약이 아름답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양각 매화무늬 사발, 조선 19세기, 이홍근 기증
18세기 말 정조 임금이 청화백자 제작을 금지하자 무늬를 도드라지게 장식하는 양각백자가 제작되었다. 이 기법은 중국 청나라 백자의 영향을 받았으며, 채색 안료 없이 백자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효과가 있다. 19세기 말에는 양각 기법의 매화무늬 반상기 한 벌이 청화백자보다 값이 더 비쌌다고 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양각 매화.문자무늬계영배, 조선 19세기
‘가득 참을 경계하는 잔’의 의미를 지닌 계영배이다. 잔 안쪽에 관이 있어 압력에 의해 어느 정도 액체가 채워지면 넘치지 않고 밑으로 흘러나가도록 만들었다. 수압과 대기압의 상호작용으로 액체를 흐르게 하는 과학적 원리가 담겨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양각 매화무늬 잔과 나비무늬 받침, 조선 19세기
양각 기법을 써서 꾸민 최고급 잔과 잔받침이다. 무늬틀을 사용해 잔의 매화무늬와 잔 받침의 나비무늬를 도드라지게 표현했다. 이처럼 양각 기법은 백자의 유색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화려하게 장식할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양각 상서로운 동물무늬 지통, 조선 19세기 박병래 기증
10면 각각에 상서로운 동물인 용.봉황.호라이.사슴.학.거북 등을 도드라지게 새겨서 장식했다. 이처럼 장수나 행복 등 좋은 뜻을 담고 있는 동물과 식물 무늬의 백자가 19세기에 많이 제작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2024년)
백자 투각 파초무늬 필통. 고리무늬 필통, 조선 19세기, 이홍근 기증
투각 기법은 도려내거나 파내어 무늬를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18세기 후반에는 투각 기법이 항아리, 화분 받침대 등 비교적 제한된 기종에 활용되었다면, 19세기에는 이처럼 고급 문방구를 장식하는 기법으로 다채롭게 쓰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동채 삼층합, 조선 19세기
중국 단색유 자기의 영향을 받았으나, 안료를 칠하고 그 위에 다시 투명 유약을 입혀 구운 점이 중국 자기와 다르다. 삼층 합의가운데는 병으로, 위아래는 잔으로 구성되어 있어 휴대하기에 편리하게 만들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동채 생황모양 연적, 조선 19세기
문인의 풍류를 상징하는 관악기인 생황 형태를 본떠 만든 연적이다. 전체를 동화 안료로 칠했는데 자주색을 띠는 윗부분은 제대로 발색된 반면, 아랫부분에는 산소가 들어가 녹색빛을 띤다. 19세기에는 이처럼 사물의 모양을 본떠 만든 상형 연적의 제작과 수집이 유행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2024년)
새로운 취향과 백자 제작의 다양화
19세기에는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부유층이 늘어나고 중국.일본과의 교류가 확대되면서 이전에는 없던 다양한 백자 그릇이 제작되었다. 이 시기에 저술된 백과사전류 책인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정조 때 청화백자 제작을 금지한 뒤로 백자 위에 꽃무늬를 불룩학 구워내더니, 오래지 않아 다시 청채를 사용하게 되었다.”라고 하여 당시 고급 백자의 유행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점차 중국과 일본에서 수입된 화려한 도자기가 왕실은 물론 일반 백성의 생활 속에 폭넓게 자리를 잡아 갔고, 이러한 취향은 관요 백자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또한 차와 술을 소비하는 문화가 확산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주자와 잔이 만들어졌고 각이 진 병 등 새로운 형태의 그릇이 등장했다. 무늬를 도드라지게 표현하거나 청화나 철화 안료로 그릇 전면을 칠하는 등 장식 기법이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청화 물고기.파도무늬 병, 조선 19세기, 이홍근 기증
파도무늬를 배경으로 오리, 물고기, 게, 새우, 조개 등 수중 생물이 자유롭게 표현되었다. 유사한 무늬를 동시기 중국 청나라 공예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19세기 조선 청화백자는 무늬를 단순하고 자유롭게 표현한 차이가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청화 연꽃.물고기.새무늬 접시, 조선 19세기, 박병래 기증
연꽃 주변에 모여든 물고기와 새우는 해마다 풍요로운 삶을 기원하는 ‘연년유여’를 상징한다. 여기에 연꽃의 연밥을 쪼아 먹는 까치를 함께 표현해 과거 시험의 연이은 합격을 바라는 ‘회득연과’의 의미를 더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행복의 염원을 담은 청화백자
19세기에 청화백자의 소비계층이 확대되면서 행복, 장수, 재물 등 대중의 염원이 담긴 무늬가 성행했다. 모란, 석류, 불수감, 십장생, 잉어처럼 당시 유행한 길상화의 소재 외에도 영지, 보상화, 밤, 소나무, 그물망 무늬 등 중국과 일본 자기의 다양한 길상무늬가 조선 관요 백자에 장식되었다. 여기에 관요 장인들이 사사로이 백자를 제작하는 사번까지 확대되면서 관요 백자의 무늬가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하고 다채로워졌다. 또한 ‘크락 양식’이라고 하는 중국과 일본의 수출용 자기에서 보이는 능화창, 이국적인 꽃무늬 등이 그려진 조선 청화백자도 있어 동아시아 무역 도자기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나무, 꽃, 열매무늬 청화백자
나무, 꽃, 열매는 조선 청화백자의 기본 장식 무늬이다. 매화, 대나무, 포도는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사랑받은 소재였다. 18세기에는 당대 문인들이 애호했던 난초, 파초, 국화, 패랭이 무늬 등이 유행했다. 여기에 더해 19세기가 되면 행복과 장수를 염원하는 길상무늬가 유행해 그 종류가 더욱 다채로워졌는데 소나무, 밤나무 등을 비롯해 모란, 철쭉, 불수감, 복숭아, 석류 등이 새롭게 등장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0
길상무늬 대유행
행복, 장수, 부귀영화의 바람이 담긴 길상무늬는 19세기 청화백자의 장식무늬로 크게 유행했다. 왕실부터 일반 백성까지 모두 길상무늬를 애호했는데, 이러한 경향은 도자기분만 아니라 회화, 목공예품, 건축장식까지 의식주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청화 십장생무늬접시, 조선 19세기 박병래 기증
십장생은 죽지 않고 오래도록 산다는 열 가지 사물을 의미한다. 19세기 궁중을 비롯해 일반에 까지 널리 유행했던 무늬로,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 19세기 청화백자에 표현된 십장생무늬는 주로 사슴, 학, 거북, 소나무, 불로초, 영지 등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청화.동화 십장생무늬 항아리, 조선 19세기
한 폭의 민화를 마주하듯 십장생무늬의 구성과 표현이 뛰어난 19세기 항아리이다. 청화 안료로 전체적인 그림을 그린 뒤 대상의 특징에 따라 선별적으로 동화 안료를 채색했다. 특히 사선으로 길게 뻗은 소나무 줄기에 자주빛 동화 안료를 채색해 강조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청화 밤무늬 대접, 조선 19세기 후반
19세기에는 일본 자기의 영향으로 자손번창의 의미를 담고 있는 밤무늬가 새롭게 등장한다. 이 대접처럼 나무에 밤송이가 매달린 모습으로 표현되는 밤무늬는 일본의 조선 수출용 자기에 나타났고, 이후 조선 청화백자도 그 영향을 받아 밤무늬가 장식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수복 글자무늬 청화백자
복을 누리며 건강하게 오래 사는 삶은 최고의 미덕으로 여겨져 왔다. 수복 무늬는 이런 바람이 반영된 것이다. 수복무늬는 생활 속 다방면에서 쓰였는데, 공예품에 시문된 경우는 전서체나 도안화된 글자가 많았다. 수복무늬도안은 원형이나 장방형의 윤곽 속에 글자를 넣은 형태가 유행했다. 수복무늬는 다른 길상무늬와 함께 장식되거나, 여기에 ‘강’과 ‘녕’ 두 글자를 함께 표현한 경우가 많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능화창무늬와 직물무늬 청화백자
19세기 청화백자에 보이는 능화창무늬는 그릇 표면에 여러 칸으로 공간을 나누고 그 안에 능화창을 배치한 후 이국적인 꽃가지와 직물무늬를 그려 넣은 것이다. 이러한 능화창무늬는 중국과 일본의 유럽 수출용 청화백자의 특징 중 하나로, ‘크락 양식’이라고 한다. 19세기 조선 청화백자 역시 일본의 수출용 청화백자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경복궁과 창덕궁 발굴에서 이러한 무늬의 청화백자가 많이 나와 왕실과 국가 행사용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로 꽃피운 도자문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연이은 전쟁으로 17세기 조선 사회는 어려움에 처했다. 궁중에서는 의례용 기물을 고쳐 쓰고 관요에서는 품질이 떨어진 회백색 백자를 제작했다. 수입품인 청화 안료 대신 쉽게 구할 수 있는 철화 안료로 장식한 철화백자를 제작해 궁중 의례와 외국 사신 접대에도 사용했다. 17세기 후반부터는 관요에서 일하는 장인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사적인 백자 제작을 허용하는 변화가 있었다. 18세기 전후 복구를 완료하고 경제 활동이 증가하면서 백자 수용층이 왕실과 사대부는 물론 부유한 일반 백성까지 확대되었다. 깨끗하고 기품 있는 백자가 다양하게 만들어졌고 특히 문인의 취향이 반영된 청화백자가 유행했다. 광주 지역에서 땔감을 찾아 10년 주기로 옮겨 다녔던 관요 운영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1752년 지금의 분원리에 관요가 자리를 잡으면서 관요의 운영은 더 체계적으로 바뀌었다. 18세기 중국 청나라와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청의 화려한 도자기가 조선으로 들어왔다. 절제 근검을 미덕으로 삼던 영조와 정조는 이를 사치품으로 규제했으나 중국 도자기를 애호하는 풍조는 여전했고, 조선 청화백자에도 이러한 영향이 반영되었다. 점차 청화백자의 기형, 장식, 소재와 기법이 다양해져 다채로운 백자 문화를 이루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2023년/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