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2024년 <서화 감상의 즐거움>이라는 제목으로 작품을 구성하여 전시하였다. 서화(書畵)은 그림(회화)과 글씨(서예)를 총칭하는 말이다. 회화는 인간의 삶에서 창조의 결과물로 오래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풍부한 의미를 갖고 있다. 중국에서는 “그림 속에 시가 있고, 시 속에 그림이 있다”라고 하여 시와 그림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그림에는 작가의 감정과 사상이 담겨 있으며, 그런 그림을 통해 예술적인 소양이 길러진다. 서예는 문자의 표현이지만 글쓴이의 정신이 표현되는 예술로 인정받고 있다. 그림과 글씨가 합쳐져서 서화(書畵)로서 작가의 정신세계가 표현된다.

자연을 그린 산수화(山水畵)는 조선시대 회화를 대표하는 분야이다. 동양화(東洋畵)라는 단어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 또한 산수화이다. 우리나라 산수화는 삼국시대의 무덤벽화나 백제의 산수무늬가 그려진 벽돌 등에서도 나타나듯이 아주 오래전 부터 그려졌다.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에도 산수화가 많이 그려졌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거의 없다. 오늘날 볼수 있는 산수화는 조선시대에 그려진 작품들이다. 산수화는 문인화로서 전문화가인 도화서 화원 뿐만 아니라 사대부계층에서도 많이 그렸다. 이는 자연의 이치를 담은 마음속의 산수를 그리는 중국 남종화(南宗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산수, 이흥효 (1537~1593), 조선 16세기 후반, 비단에 먹
화가에 따라 그리는 방식이 달라 그림에 화가의 서명이나 도장이 없어도 누가 언제 그렸는지 파악할 수 있다. 이 두 그림에서 15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안견의 화법이 보이지만, 새로운 기법도 보여 16세기 후반에 제작된 그림으로 본다. 화면의 무게 중심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가운데 공간이 비어 있고, 앞쪽에 언덕을 배치하고, 나뭇가지가 게의 발처럼 날카로운데 이는 안견 화풍의 특징이다. 그러나 먼 산의 능선에 더해진 짤은 먹선이 길어졌고, 산과 언덕을 흑백의 면으로 처리했다. 이러한 표현은 16세기 후반 산수화의 특징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화가 이징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전문화가로 다양한 종류의 그림을 남겨 놓고 있다. 별장과 주변의 경치를 엷게 그려 놓고 있다.


산수 , 이징, 조선 17세기 모시에 엷은 색
화가에 따라 전통적 기법과 새로운 기법을 활용하는 방식이 다르다. 17세기를 대표하는 화원화가 이징은 15세기 후분 유행한 절파 화풍의 요소를 가미했다. 이 두 그림에서 이러한 특징이 잘 나타난다. 화면 한쪽으로 무게가 치우치고, 나뭇가지를 날카롭게 그린 점은 안견파 화풍의 영향이다. 그러나 좀 더 복잡해진 화면 구성, 각이 진 산의 형태, 산과 언덕 표면의 분명한 흑백 대비는 절파 화풍의 특징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산길을 거니는 고사, 김두량, 조선 18세기, 종이에 먹
중국에서 유입되어 조선 16세기 후반에 유행한 절파 화풍이 18세기에도 지속되었음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산을 그릴 때 먹의 농담 대비가 강하고, 암벽을 묘사한 붓질이 과감하고 거칠며, 근경의 나무를 짙은 먹으로 표현한 점은 절파 화풍의 특징이다. 화면 왼쪽에 찍힌 ‘김두량인’으로 18세기 화원화가 김두량이 그렸음을 알 수 있다. 김두량은 절파 화풍 외에도 당시 새로 유입된 남종화풍을 잘 구사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봄풍경(오른쪽), 여름풍경(왼쪽), 김유성, 조선 18세기, 종이에 먹
조선 18세기에 남종화 기법으로 그린 산수화가 크게 유행했다. 물기 많은 먹을 쓰면서 산과 언덕 표면에 붓을 가로로 뉘여 점을 찍는 미점으로 처리한 남종화풍 영향을 이 두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다. 두 그림들 모두 왼쪽에 “서암이 그리다”라고 적혀 있어 18세기 화원화가 김유성이 그렸음을 알 수 있다. 그림 구도가 안정적이고 필치가 능숙한데, 특히 왼쪽 그림은 물기를 많이 머금은 짙은 먹으로 나무와 산을 미점으로 처리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은 정선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스스로 깨쳐 중국 남종화를 토착화시킨 인물로 김홍도와 함께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산수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심주의 뜻을 따른 산수, 심사정, 조선 1758년, 종이에 엷은 색
그림에 적힌 글은 그 의미를 새겨서 이해해야 한다. 화면 위쪽 글 중 왼쪽에서 두번째가 심사정이 쓴 글로 명나라 문인화가 심주를 ‘방倣’했으며, 1758년 가을 정영년을 위해 제작했다는 내용이다. 오른쪽에 18세기 서화 수장가 상고당 김광수가 쓴 글에도 이 그림이 심주를 계승했다고 평했다. 그러나 그림에서 심주의 화법은 찾을 수 없다. 동양 회화에서 ‘방’은 그 뜻을 따른다는 의미다. 즉, 심주로 대표되는 문인화의 고아한 경지를 추구한 그림으로 이해할 수 있다. 폭포가 있는 높은 산, 깎아지른 절벽, 계곡 근처의 초가, 나무 등으로 화면을 채우면서도 절묘하게 여백을 남겨 문인 취향을 살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소나무 숲 계곡에서의 담소, 이인문, 조선 18세기 말 ~ 19세기 초, 종이에 엷은 색
소나무와 물가를 배경으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은 이인문이 즐겨 그렸던 소재이다. 큰 부채 화면에 어울리게 키 큰 소나무를 활달한 필치로 그렸다. 비가 온 뒤인 듯 계곡에 물이 불어 힘차게 흐르고 있다. 여름 계곡의 정경을 시원하게 표현했다. 이인문은 동갑이었던 김홍도와 가깝게 지냈고, 그와 함께 명성이 높았던 화원화가였다. 강세황, 신위 등 사대부 화가들과도 교류했다. 그는 산수화와 인물화를 많이 남겼으며, 화면 구성이 치밀하고 표현이 세밀한 것이 특징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단원유묵첩, 김홍도, 조선 18세기 말 ~ 19세기 초, 종이에 먹
김홍도의 외아들 김양기가 아버지의 시문과 편지 글을 모아 만든 서첩이다. 모두 40면으로, 표지에 “못난 아들 양기가 삼가 꾸몄다.”라고 적혀 있다. 김홍도의 인간적인 면모와 생활상, 서예 기량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오른쪽 면의 시 <산거만음>에는 전성기를 보낸 후, 명예와 부귀의 덧없음을 느끼는 그의 심정이 드러나 있다. 붓을 자유자재로 다루었던 화가였던 만큼, 그의 슬씨 또한 자연스럽게 흐르는 서예의 묘미를 보여 주며, 몇 자에는 필획에 살을 붙여 변화를 더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실제 생존했던 인물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는 당대의 상류층에서 가장 많은 공을 들여서 그렸던 그림이다. 이는 서양의 회화에서도 볼 수 있는 비슷한 경향으로 레오나르드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를 비롯하여 많은 걸작들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초상화는 왕의 초상을 그린 어진에서부터 관복을 입고 그린 사대부들의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들이 그려졌다. 인물화는 작가의 주관보다는 현재의 사진과 같은 의미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아주 세밀하고 정성스럽게 그려졌다. 인물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그 인물의 정신적인 특징을 반영하고자 하는 노력이 많았다.
조선후기 유학자 서직수(1735 ~?)를 그린 초상로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인 이명기가 얼굴을 그리고 김홍도가 몸체를 그렸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대부분 앉아 있는 좌상인데 비해 이 그림은 서 있는 모습을 그렸으며,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참여한 작품이다. 형태묘사가 매우 뛰어나며 높은 품격을 보여주고 있다. 1796년 작품이다.

서직수 초상, 이명기, 김홍도, 조선 1796년, 비단에 색, 보물
62세의 서직수(1735~1811)가 두 손을 모으고 곧게 서 있다. 그는 선비로서의 자아를 도포와 동파관 차림의 초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이 그림은 당대 최고의 도화서 화원인 화산관 이명기(1756~1802년 이후)와 단원 김홍도가 합작한 초상이다. 이명기는 얼굴에 옅은 안료를 여러 번 붓칠하여 사실적으로 묘사했으며, 눈동자의 홍태가 생생하게 빛나도록 표현했다. 김홍도는 탄력있는 선으로 옷의 구김을 자연스럽게 포착한 후 옅은 음영을 넣어 입체감을 나타내었다. 서직수는 화면 위쪽에 “한 조각 정신은 그려내지 못했다.”라는 평을 썼는데, 실제로 만족하지 못했다기보다 그림이라는 매체 자체가 지닌 한계를 지적하고 내면의 수양에 매진하겠다는 다짐으로 읽을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대나무, 이정, 조선 1625년, 비단에 먹, 이홍근 기증
그림 각 폭마다 ‘탄은’이라는 서명과 인장이 있어 대나무를 잘 그리기로 유명했던 탄은 이정의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중 눈이 쌓인 대나무를 그린 <설죽도>에 “천계 을축년 여름에 탄은이 오여완을 위해 그렸다”라고 적혀 있어 1625년 72세 이정이 당시 명필가 오준에게 그려준 그림임을 알 수 있다. 대나무의 여러 모습의 특색을 잘 살린 그림으로 이정의 기량을 확인할 수 있다. 새로난 잎이 대각선 방향으로 힘차게 뻗은 신죽, 안개에 가려 운치 있는 연죽, 수직으로 당당하게 서 있는 통죽, 눈이 소복이 쌓여 가지가 아래로 늘어진 설죽 그림에서 대나무가 놓인 공간의 계절적 분위기까지 느낄 수 있다. 노련한 필치로 대나무를 유려하게 그리고, 빠른 붓질로 바위와 지면을 대담하게 처리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조선시대에는 화원들이 국가의 중요한 행사 장면 등을 그려서 기록으로 남기고, 참석자들에게 기념으로 나누어 주기도 했는데 의궤나 민간에서 소장한 그림에서 이런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조선후기에는 민간에도 확산되어 양반이나 중인들의 시모임이나 집안행사 등을 그림으로 남겨놓고 있다. 오늘날 행사장면을 기념사진으로 남겨놓은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한성부 관리들의 모임, 작가 모름, 조선 16세기 중반 이후, 비단에 먹
조선시대 수도 한성의 행정구역은 크게 중.동.서.남.북부로 나뉜다. 세조 대부터 영조 대까지 한성부 각 부에 종6품 주부와 종9품 참봉이 근무했다. 이 그림은 한성 각 부의 참봉들이 모임을 갖고 제작한 계회도이다. 화면 상단에 ‘부계회도’라는 제목이 있는데, 화면 상단의 월래 명칭 ‘오부계회도’ 중 ‘오’글씨가 소실된 상태다. 제목 아래 모임 장면을 그리고, 다시 줄을 그어 참석자 명단을 적었다. 이는 조선 15~16세기 계회도의 전형적인 형식이다. 강가 나무 아래 참석자들이 모여 앉은 장면 표현 방식도 당시 계회도 형식과 동일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공조 관원들의 모임, 작가 모름, 조선 17세기 중반 이후, 비단에 색
조선시대 관리의 모임을 기념해 제작한 계회도는 일반적으로 강가 나무 아래 또는 관청 건물에 사람들이 모여 앉은 장면으로 표현된다. 먹으로만 그리거나 색을 엷게 칠한 계회도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계회도는 마치 옛 이야기를 그린 그림처럼 강가 누각에 바둑을 두는 노인들의 모습을 진한 색으로 표현했다. 그림 아래 참석자 명단이 없다면 계회도가 아닌 옛 그림으로 보일 정도이다. 참석자 홍만희, 이두환, 임일유, 임질 모두 17세기 인물로 공조에서 일했다. 그들은 실제 모임 장면이 아니라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그림으로 자신들의 모임을 기념하고자 했을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0

김생원에게 보낸 편지, 김정희, 조선 1831년, 종이에 먹
김정희는 중국과 우리나라 옛 글씨체를 연구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만들어 갔다. 그는 글자를 쓰는 데 점과 획 굵기를 달리하며 변화와 조화를 중시했다. 1831년 그가 46세 때 쓴 이 편지의 서체는 붓을 빠르면서 부드럽게 움직인 점이 특징이다. 가로획과 세로획의 굵기 차이를 많이 두는 말년의 서체와는 많이 다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삿갓쓰고 나막신 신은 소동파, 조선 19세기 중반, 종이에 엷은 색
감상평, 김정희, 조선 19세기 중반, 종이에 엷은 색
청나라 문인 옹방강은 북송대 문인 동파 소식을 추모해 그의 모습을 그림으로 제작했다. 옹방강을 흠모한 김정희에 의해 소식의 모습을 그린 여러 그림이 조선에 들어왔다. 그중 하이난 유배 중 삿갓 쓰고 나막신을 신고 비를 피하는 소식의 모습을 그린 ‘동파입극도’가 가장 많이 전한다. 이 그림은 옹방강 서재에 있던 ‘동파입극도’를 주학년이 모사해 김정희에게 보내 준 것을 다시 모사한 것이다. 이 그림의 유래를 적은 글은 김정희가 썼다. 글에 찍힌 인장은 김정희가 말년에 사용한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제 1, 2폭, 근정전 외진찬도
경복궁의 중심 전각 근정전에서 왕이 주인공으로 문무백관을 초청한 행사이다. 와으이 자리 동족에 왕세자 자리가 있다. 행사 참석자와 담당 관원은 모두 남성이었으며, 어린 소년들이 춤을 추고 있다. 신식 군복을 입은 호위병이 눈길을 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제 3,4폭 강녕전 내진찬도
경복궁에서 왕의 생활공간인 강녕전에서 열린 연회로 왕과 왕비가 모두 참석하였다. 동쪽에 왕의 자리가, 서쪽에 왕비 자리가 놓인다. 왕비 오른쪽 아래 왕세자비 자리가 있다. 왕세자 자리는 붉은 장막 사이 공간 오른쪽에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제5.6폭 강녕전 야진친도
내진찬이 끝나면 당일 밤 새로운 연회가 열렸다. 행사의 주인공인 왕과 주관자인 왕세가가 독대하는 자리로, 왕세자빈과 내명부, 종친 등은 참석하지 않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제7폭 강녕전 익일회작도
강녕전 진찬 다음날 진찬을 주관한 왕세자가 주빈이 되어 베푼 잔치이다. 연화를 준비한 관원들을 격려하는 행사다. 붉은 장막 왼쪽에 내명부 자리가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임진진찬도, 박용훈 등 7인, 조선 1892년, 비단에 색, 이건희 기증
조선시대 여러 궁중 행사가 있었고 이를 그림으로 남겼다. 1892년 고종 즉위 30년과 41세를 경축하는 궁중 연회 진찬이 열렸다. 여러 날에 걸쳐 연회가 열렸고, 이 중 네 가지 행사 그림과 주요 담당자 명단으로 이루어진 8폭 병풍을 제작했다. 이 그림은 1890년 대왕대비였던 신정왕후 사망 후 3년상을 마친 고종이 비로소 독자적으로 왕권을 행사하게 되었음을 알리고자 개최한 궁중 연회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어 가치가 높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철종어필 행서 대련, 철종, 조선 19세기 중반, 종이에 먹
조선 제25대 왕 철종이 쓴 서예 작품으로 짜임새가 긴밀하고 살이 많이 붙은 필획이 특징이다. 붓을 조심스럽게 진행하며 정중하게 쓴 것으로 보인다. 서로 대응하는 글씨를 두 폭에 나누어 쓰는 방식이 중국 청나라에서 유행했는데, 19세기 조선 서예가들도 이를 많이 따랐다. 금.은박으로 장식한 냉금지를 사용했는데, 이는 중국에서 수입한 종이로 특히 19세기에 많이 사용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예서 대련, 김석준, 대한제국 1898년, 종이에 먹, 이홍근 기증
19세기 후반 시 짓기와 서예 실력을 겸비한 역관들이 많이 등장했다. 이러한 역관의 성장에는 김정희의 역할이 컸다. 중국어 역관 소당 김석준은 20대 때, 과천에 머물고 있던 김정희를 찾아가 직접 서화 지도를 받았다. 김정희는 그가 중국 당나라의 대표적인 서예가 안진경의 고풍스러운 뜻을 터득했다고 평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연광정, 부벽루 시, 문재 그림, 홍경모 시, 조선 1834년 이후, 종이에 엶은 색, 종이에 엷은 먹
조선에서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은 직접 본 경관에 대해 시를 짓거나 화가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1830년과 1834년 중국에 간 홍경모가 지은 여러 시와 ‘문재’라는 호를 지닌 인물이 그리린 그림들을 모은 화첩이라고 전한다. 연광정 아래 대동강에 많은 사람을 태운 배가 여러 척 있는데, 아마도 대동강을 따라 동북쪽으로 올라가 ‘부벽루’를 다녀왔을 것이다. 부벽루에 대해 읊은 시가 왼쪽 면에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진귀한 그릇, 꽃, 과일, 조석진, 대한제국 1905년 비단에 엷은 색
옛 청동기와 같이 진귀한 그릇과 꽃, 과일, 채소를 함께 그리는 기명절지도는 복, 장수, 평안함을 상징한다. 조선에서는 그림 수요자가 확대된 19세기 후반부터 기명절지도가 유행했다. 조석진은 먹으로 사물의 특징을 간략ㅎ게 묘사하고 색을 엷게 칠하는 방식으로 그렸다. 기명절지도에는 다양한 꽃, 과일, 채소가 등장하고 시기에 따라 새로운 요소가 나타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말을 잘 보고 고르는 백락, 소나무를 어루만지는 도연명, 조석진, 대한제국 20세초, 비단에 엷은 색
소림 조석진은 19세기 말에서 20세 초 화단을 대표하는 인물로 할아버지 조정규의 기법을 이어 물고기 그림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중국 인물을 그릴 때는 얼굴이 길고 눈이 가늘며 눈매가 올라가게 그리는 등 이전과는 다르게 표현했다. 중국의 옛 이야기를 그린 이 두 그림 중 오른쪽은 중국 춘추시대 말을 잘 감정한 백락처럼 훌륭한 인재를 잘 알아보고 등용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왼쪽은 동진의 시인 도연명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소나무를 어루만지는 모습이다. 당시 새로 유입된 중국 화보를 따라 그렸기에 인물 표현은 중국적이다. 그러나 엷은 색채를 부드럽게 표현하는 기량이 탁월했던 그의 장점이 잘 발휘되어 그림에서서는 서정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바위에 절하는 미불, 이도영, 1927년, 비단에 색
시서화에 능했던 북송의 문인 미불은 조선시대 문인들이 자주 언급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기이한 바위를 보면 도포를 입고 홀을 들고 절을 했다고 한다. 이 ‘미불배석’고사가 그림으로 제작되었는데, 조선에서는 18세기 후반에 그려진 것이 가장 이른 예다. 19세기 말부터 중국의 인쇄된 화보가 많이 유입되면서 조선 화단에서 고사인물화가 크게 유행했다. 안중식, 조석진 등 여러 화가가 ‘미불배석도’를 그렸으며, 안중식 제자 이도영도 미불배석도를 여러 점 남겼다. 이 그림은 이도영 특유의 선명한 윤곽선과 색감이 두드러지는 그림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서화 감상의 즐거움
서화書畵, 한 글자씩 떼어 읽으면 글씨와 그림일 뿐이지만 붙여 놓으면 먹 향기 그윽한 낱말이 됩니다. 상고시대 사람들이 그림같은 갑골문으로 하늘의 뜻을 점친 이후 동아시아에서 글씨와 그림은 늘 짝을 이루어 왔습니다. 서화 감상은 즐겁습니다. 종이와 비단 위를 쓸고 간 붓 흔적을 더듬어 보아도 좋고, 솜씨 부린 채색의 맛을 보아도 좋습니다. 서화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문학과 상상, 현실과 소망이 한데 뒤섞인 옛 서화가의 마음자리가 드러납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서예와 산수, 화조와 궁중장식화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 서화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옛 사람들이 누린 서화 감상의 즐거움을 오늘 당신의 마음에 담아 가시기 바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