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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그리스 로마, 그림자의 제국

사후 세계에 대한 로마인의 믿음은 다양하며, 철학적인 견해를 표현하는 지식인 계층을 통해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에 대한 전통적인 돌봄과 사후 지속되는 그들의 지위는 로마 종교의 오래된 관습이다. 로마에서 죽은자들을 위한 봉헌물들은 사후 세계에 대한 기대와 신과의 교제을 기대하고 있다. 로마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공화주의 귀족들은 장례식과 사후세계에 대한 건축에 투자보다는 공공 건물 기부나 지역사회에 대한 기념비적인 기부에 더 투자하는 경향이 있었다. 장례식과 추모의례는 재산, 지위, 종교적 맥락에 따라 다양했다.

<다섯 사람의 흉상이 있는 묘비, 석회암 묘비, 로마, 1세기 후반, 이탈리아 북부 파도바 출토,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다섯 사람의 흉상이 있는 묘비, 석회암 묘비, 로마, 1세기 후반, 이탈리아 북부 파도바 출토,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건축 모형 안에 다섯 사람의 흉상을 위아래 2단으로 대치한 묘비이다. 얼굴 생김새가 크게 다르지 않은데, 여기서는 개개인의 개성보다는 죽은 이의 성별과 나이를 알아보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상단의 왼쪽 남성과 가운데 여성은 서로 손을 잡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 결속을 의미하는 동작으로 이 둘이 결혼한 부부임을 나타낸다. 모두 전형적인 로마인 옷차림인 튜닉과 멋스러운 토가를 입었고, 당대 최신식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로마는 초기 역사에서 매장과 화장이 같이 사용되다가 공화국 중기에는 화장으로 대체되었으며 제정로마시기에는 매장으로 바뀌었다. 묘지는 마을 경계 바깥에 위치했는데 성문 밖 대로에 웅장한 기념물과 무덤들이 모여 있다. 무덤에는 살아있는 친적들인 음식과 와인을 받치고 축제일이나 기념일 등에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올바른 장례식과 제사는 죽은 세대의 그림자가 살아 있는 후손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으로 믿어졌기 때문이다.

<소년의 관, 대리석 석관 파편, 로마 2~3세기,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소년의 관, 대리석 석관 파편, 로마 2~3세기,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일부분만 남은 석관 가운데에 튜닉과 망토를 입은 소년을 묘사한 둥근 방패 ‘클리페우스’가 있다. 클리페우스를 든 두 인물은 로마인들이 특정 인물이나 장소를 보호한다고 믿는 일종의 수호신이다. 메달 속 소년의 오른쪽 귀 두리 ‘호루스의 머리’라고 불리는 묶음 머리가 보인다. 어린이를 묘사한 이 도상은 이집트에서 유래했다. 이로서 죽은 아이는 이집트 여신 이시스의 보호를 받는다. 다른 문화권에서 온 신들과 마찬가지로 이시스에 대한 숭배도 로마 제국에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남매의 무덤 부조, 석회암 부조의 파편, 팔미라 지역 제작, 2세기 전반, 시리아 팔미라 출토,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남매의 무덤 부조, 석회암 부조의 파편, 팔미라 지역 제작, 2세기 전반, 시리아 팔미라 출토,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오늘날의 시리아 팔미라에서 출토된 무덤 부조이다. 1세기 로마 제국에 편입된 팔미라는 동서 교역을 통해 번영한 오아시스 도시였다. 팔미라 사람들은 탑 또는 신전 형태의 구조를 갖춘 대형 무덤을 짓고 망자의 모습을 새긴 판으로 무덤 입구를 막았다. 명문에 따르면 이 부조 속 망자는 예다벨이라는 남자의 아들과 딸이다. 여성이 찬 화려한 보석은 로마 시대에 유행했던 형태이며 손에 든 실패와 물렛가락은 그년가 덕망이 이는 정숙한 여성이었음을 드러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로마시대 여유가 있는 가족들은 무덤과 기념물에 많은 소비를 했다. 석관에는 우화적, 신화적 또는 역사적 장면이나 개인의 취향 등이 반영된 부조 조각으로 장식되었다. 정교하게 제작된 예술작품이거나 일상 생활의 장면일 수도 있다. 석관에 새겨진 부조와 비문은 죽인자와 가족, 중요한 사건에 대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아래에 있는 석관에는 보드게임을 하고 있는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

<보드게임의 고수, 편히 잠드소서, 석회암 유골함, 로마, 1~2세기, 이탈리아 북부 출토,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옆에서 본 모습>

보드게임의 고수, 편히 잠드소서, 석회암 유골함, 로마, 1~2세기, 이탈리아 북부 출토,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작은 신전 형태를 한 이 유골함은 화려한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유골함의 한쪽 면에는 보드게임을 하는 망자가 조각되어 있고, 반대쪽에는 솔방울이 달린 지팡이(티르소스)를 든 바쿠스가 아내 아리아네와 침상에 있는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 보드게임은 고대에 인기 있던 놀이로, 유골함에 이 장면을 새긴 것은 망자의 실력이 좋았음을 알려 주려는 의도로 보인다. 부조 속 건물과 옷, 각종 소품에는 원래 채색을 했을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기억에 대한 갈망
그리스.로마인들은 산 자가 계속 기억해 준다면 망자는 영원히 산다고 믿었다. 따라서 망자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오가는 도로에서 가깝고 눈에 잘 띄는 무덤 자리를 선호했고, 무덤이 도로를 향하도록 배치했다. 인물 조각상, 묘비, 화병, 신전 모형 등 다양한 표지물도 세웠다. 도시로 드나드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유력한 가문들이 경쟁적으로 무덤을 호화롭게 꾸미면서 거대한 봉분을 올리거나 건물 모양으로 무덤을 짓기도 했다. 무덤은 신성하게 여겨져 유족과 후손들이 계속 방문해 관리했고, 장례 기간과 기일에는 공양물을 바쳤다. 유골함과 석관에 새긴 글과 이미지도 망자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주로 망자와 가족의 이름과 관계, 그리고 그들의 모습이 새겨졌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신과 함께, 대리석 석관, 로마, 1~3세기,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신과 함께, 대리석 석관, 로마, 1~3세기,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날개가 달린 사랑의 신 아모르가 ‘클라페우스’라고 부르는 크고 둥근 방패를 들고 있다. 여기에 본래 망자의 이름을 물감으로 적었을 것이다. 석관 앞면의 왼쪽과 오른쪽 끝에도 아무르가 연인 프시케와 함께 나타난다. 아모르와 프시케의 이야기처럼 신에게 사랑받아 불멸의 삶을 얻는 인간을 주제로 한 장면은 장례 미술에서 행복한 사후 세계를 기원하는 포현으로 해석된다. 그밖에도 석관 앞면에 두 마리의 스핑크스를,옆면에 두 마리의 그리핀을 장색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안녕히, 대리석 묘비, 헬레니즘 시대, 기원전 2세기 후반, 그리스 델로스섬 출토,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어린 헤르쿨레스의 상, 대리석상, 로마, 헬레니즘 시재 원작의 2세기 복제작,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땅에 닿는 긴 망토를 두르고 왼손으로 곤봉을 잡은 어린 소년이 상이다. 정수리 부부느이 머리를 묶고 머리띠를 둘렀는데, 이는 로마 시대에 유행하던 아이들의 머리 모양이다. 이 조각상은 헬레니즘 시대 원작을 모델로 한 것이지만 원작에는 곤봉이 없다. 로마 시대에 복제작을 만들면서 곤봉을 추가한 듯하다. 헤르쿨레스의 상징물인 곤봉 덕분에 이소년은 ‘어린 헤르쿨레스’로 불렸다. 로마 시대에는 죽은 이를 기리기 위해 이러한 유형의 조각상을 무덤에 두리도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안녕히, 대리석 묘비, 헬레니즘 시대, 기원전 2세기 후반, 그리스 델로스섬 출토,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안녕히, 대리석 묘비, 헬레니즘 시대, 기원전 2세기 후반, 그리스 델로스섬 출토,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아치형 건물 안에 키톤을 입은 망자가 친척에 둘러싸여 앉아 있다. 아랫부분에 새겨진 그리스어 명문에 그가 아스클레 피아데스의 아들이며, 아테네 출신이고 이름이 ‘고르기아스’라고 쓰여 있다. 맞은편에는 아내로 보이는 여성이 애정을 표현하듯이 그에게 오른손을 내밀고 있다. 손을 건네는 동작은 결속의 표현으로 고대 미술에 자주 등장하는데, 묘비에서는 작별을 고하는 의미가 있다. 그리스인들이 망자와의 이별을 묘사하는 방식은 이렇듯 침착하고 담담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하데스로 가는 문, 대리석 묘비, 로마, 3세기, 튀르키예 마르마라에레일리시 출토,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하데스로 가는 문, 대리석 묘비, 로마, 3세기, 튀르키예 마르마라에레일리시 출토,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망자의 초상을 새긴 그리스.로마 시대의 많은 장례 기념물과 달리 이 묘비에는 문 형태의 건축물을 표현했다. 계단을 세 개 오르면 아름다운 문양띠로 장식된 문에 이르는데 이 문은 지하 세계인 하데스의 입구를 상징한다. 문 위의 그리스어 명문에는 무덤 주인의 이름과 함께 다른 사람이 무덤을 차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내용과 관련 벌금이 적혀 있다. 마지막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인사말이 쓰여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루키우스 아틸리우스 글라브리오의 유골함, 대리석 유골함, 로마, 1세기, 이탈리아 로마 출토 추정,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루키우스 아틸리우스 글라브리오의 유골함, 대리석 유골함, 로마, 1세기, 이탈리아 로마 출토 추정,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이 유골함의 표면은 다양한 잎사귀 장식으로 덮여 있는데, 위쪽에는 월계수와 꽃 넝쿨이, 아래쪽에슨 아칸서스 잎이 보인다. 양옆으로 로마 신 유피테르와 이집트 신 아몬이 결합하여 토착화한 유피테르-아몬의 머리가 붙어 있다. 유피테르의 곱슬곱슬한 턱수염과 아몬의 숫양의 뿔이라는 각 신의 독특한 도상을 명확하게 묘사했다. 네모난 구획 안에는 망자 루키우스 아틸리우스 글라브리오의 이름이 라틴어 문자로 새겨져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율리아 베라의 유골함, 대리석 유골함, 로마, 1~2세기, 이탈리아 로마 출토 추정,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율리아 베라의 유골함, 대리석 유골함, 로마, 1~2세기, 이탈리아 로마 출토 추정,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무덤 제단 모양을 한 로마 시대의 유골함이다. 뚜껑에 있는 장미 모양 장식 사이에 ‘티아니아’라는 끝 달린 화환이 있다. 실제로 천으로 타이니아를 만들어 무덤을 장식하기도 했다. 옆면에 새긴 단지와 접시는 모두 죽은 이를 기리는 의례에 사용하던 물품으로, 이 유골함에 경건함을 더한다. 라틴어 비문에 따르면 이 유골함은 19세에 사망한 율리아 베라를 위해 그녀의 부친이 마련한 것이다. 명문은 초상과 더불어 죽은 이에 대한 기억을 불러오는 수단이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소년의 초상, 청동 두상, 로마, 1~2세기, 중공식 주조, 금도금, 빈미술사박물관>

소년의 초상, 청동 두상, 로마, 1~2세기, 중공식 주조, 금도금, 빈미술사박물관
금도금을 한 소년의 청동 두상으로 죽은 소년을 기리는 초상 조각으로 보인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몸체에 끼워 본래 하나의 전신상을 구성했을 것이다. 작은 입과 통통한 볼이 어린아이 같은 이목구비를 보여준다. 머리 오른쪽 부분에 보이는 ‘호루스의 머리’형태도 주인공의 나이가 어리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값비싼 도금상은 소년이 왕자와 같이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인물이었음을 드러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장례 문화
장례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를 공간적.정서적으로 분리하는 의식이다.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깨끗하게 씻긴 뒤 향유를 바르고 옷을 입혀 집 안의 높은 침상에 안치했다 이후 정화를 마친 가족과 지인들이 죽은 이를 대도했다. 그리스에서는 하루, 로마에서는 최대 7일이었던 조문 기간이 지나면 시신을 도시 밖의 공동묘지로 옮겼다. 대개 성문에서 도시 외곽으로 난 큰 길을 따라 무덤을 조성했다. 그리스.로마의 장례 의식에서는 매장과 화장이 모두 이루어졌다. 그리스에서는 지역에 따라 두 방식의 비율이 달랐으며, 화장 방식도 계속 변화했다. 로마에서는 기원전 400년경부터 주로 화장을 했는데 2세기부터는 매장이 우세해지면서 유해를 담는 유골함이 점차 석관으로 바뀌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그리스 로마, 그림자의 제국>

그림자의 제국
고대 그리스.로마인은 죽음으로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로 이행하거나 전환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문헌에서 죽음을 변화, 여행, 잠, 이별 등의 단어로 표현했다. 무덤 조각에서도 문을 통해 저승으로 이동하거나 죽은 이가 가족과 악수를 나누는 모티프를 찾아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저승을 ‘그림자의 제국’이라고 표현했는데, 저승에서 만난 영웅 아킬레우스가 “저승의 모든 영혼을 다스리는 자가 되느니 이승에서 가난한 노예로 사는 편이 낫다”고 탄식했다고 하였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권에서는 사후 세계를 어둡고 비참한 곳으로 이해했다. 죽음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신과 구별되는 궁극적인 한계이다. 사람들은 이 한계를 받아들이면서 무덤과 장례 의식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친족들은 장례를 치르면서 죽은 이에 대한 애정과 석별의 고통을 어루만짐과 동시에 죽은 이에게 예를 다하지 않으면 그들이 부정적인 힘을 행사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해소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로마에게 그리스가 없었다면, 그리스에게 로마가 없었다면
우리는 흔히 그리스 신화와 로마 신화를 함께 묶어 그리스.로마 신화라고 부르지만 둘은 별개였다. 다만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하게 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로마가 그리스 신화를 수용하고 모방하여 두 나라의 신화가 많은 공통점을 갖게 되어 우리는 두 신화를 자연스럽게 묶어 부르게 되었다. 신화는 구술 문화의 시대에 한 공동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던 지식, 정보, 지혜를 모아 구성원들의 생존과 행복을 도모하여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따라서 신화에서 공동체의 역사와 함께 그들이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이 담겨 있다. 이러한 신화를 공유했기에 그리스와 로마라는 거대한 두 문화가 하나로 묶일 수 있었다. 이는 신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로마에게 그리스라는 자양분이 없었다면, 서구의 철학과 예술, 문학이 지금처럼 꽃필 수 있었을까. 그리스에게 로마가 없었다면, 그리스의 문화가 지금처럼 우리에게 알려졌을까. 이 전시에서는 신화, 초상미술, 장례 등의 주제를 통해 마치 이인삼각처럼 얽혀 있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가 함께 나누고 또 따로 이루었던 예술과 문화와 역사의 장면들을 이야기해 보려고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2. 위키백과,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