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미술은 북방 에트루리아 미술과 남부 그리스 식민도시의 영향을 받아서 발전했다. 로마는 현실적이면서 행동적인 면을 에트루리아로부터 받아 계승하면서 그리스적인 형식을 모방했다. 로마 미술에서 보여지는 사실주의 형태는 외형적으로는 그리스의 건축, 조각, 회화를 계승하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에트루리아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 기원전 2세기 후반 그리스를 정복한 이래 많은 수의 그리스 조각이 로마로 운반되었으며 다수의 그리스 예술가가 로마에 초빙되어 그리스 명작을 모방했다. 로마시대에는 개성적인 초상 조각이 발달하고 거대하고 실용적인 공공 건축이 지어진 것은 헬레니즘과 에트루리아 문화가 융합된 결과이다. 그 특징은 지리적 확대에 상응하는 규모의 크기, 주제의 다양성, 사실성 등을 들 수 있다.
프락시텔레스는 기원전 4세기 아테네에서 활동한 유명한 조각가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그의 작품은 없지만 로마시대에 복제한 작품들이 많이 남아 있다. 로마시대 플리니우스를 비롯하여 여러 작가들의 그의 작품에 대해 글을 썼으며, 그를 상징하는 동전이 존재한다.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 <헤르메스>, <도마뱀을 죽이는 아폴론>, <목신 사티로> 등이 있다.
아모르와 함께 있는 베누스, 대리석 전신싱, 로마, 기원전 2세기 ~ 기원전 1세기 헬레니즘 원작의 1~3세기 복제작, 오스트리아 비루눔 출토, 빈미술사박물관
‘정숙한 베누스’ 유형의 작품으로, 왼손으로는 음부를, 오른손으로는 가슴을 가린 채 목욕을 위해 완전히 옷을 벗기 전에 옷 한쪽 끝자락을 잡고 있다. 여신의 왼쪽 어깨와 몸 뒷면에는 본래 여신에게 기대고 있었을 아들 아모르의 작은 손과 몸 일부가 남아 있다. 고대에 수없이 복제되고 변형된 이러한 유형의 조각상은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유명한 조각가 프락시텔레스의 작품에서 유래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폴리클레이토스는 기원전 5세기에 활동한 그리스 조각가이다. 전기 고전주의파의 조각가로 사람 몸의 구성을 머리와 팔의 길이를 기준으로 나누어서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표준을 처음으로 만든 조각가로 할려져 있다. 작품으로는 <도리포로스(창을 잡은 남자의 상)>, <디스코포로스(원반을 든 사람)>, <디아두메노스(머리띠를 묶은 청년)> 등이 있다. 신체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상적 신체 비례의 탐구, 대리석 토르소상, 로마,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원작의 1세기 복제작, 빈미술사박물관
현재 토르소만 남은 이 청년의 누드상은 로마 제정 시대에 만들어졌다. 이러한 유형의 조각상은 비슷한 복제작이 여럿 전해져 내려온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그리스 고전기의 유명한 조각가 폴리클레이토스의 제자가 기원전 5세기경에 만든 청동상이 원작이었을 것이다. 폴리클레이토스의 대표작은 ‘도리포로스’라 불리는 창을 든 남성 청동상이다. 훌륭하다고 인정받은 그리스 청동상의 대리석 복제작을 진열하는 것은 로마 제국에서 유행하던 하나의 문화 현상이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남성의 신체, 석제 토르소상, 헬레니즘 시대, 기원전 2세기 초,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아프리카계 인물의 어두운 피붓빛을 표현하기 위해 어두운 색의 돌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등이 크게 휘어있고 오른팔이 왼쪽 어깨를 잡고 있으며 왼팔이 뒤쪽을 향하는 독특한 자세를 하고 있다. 오른쪽 등의 구멍은 본래 조각을 구성하던 다른 부위와 연결하는 데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히 어떠한 형태였는지는 왼팔과 마찬가지로 현재 재구성이 불가능하다. 비슷한 상과 비교해 볼 때 이 상의 주인공은 짐꾼, 하인 또는 죄수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기원전 2세기 후반 그리를 정복한 이래 많은 그리스 조각 작품들이 로마로 옮겨졌으며 그리스 예술가들이 로마로 초빙되어 그리스 명작들을 모방했다. 청동조각상들은 대리석으로 다시 조각되면서 로마인의 취향이나 헬레니즘 문화가 반영되기도 했다. 로마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존경했던 그리스 철학자나 시인의 조각상으로 저택을 장식하면서 자신의 교양과 취미를 드러내고자 했다. 로마인들은 전신상보다는 작은 규모의 흉상이나 헤르마를 선호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석고 두상, 근대,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원작의 1~2세기 대리석 복제작을 본뜬 석고상,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그리스 미술에서는 작품에 인물의 내면 상태나 정신적 가치를 표현하려고 했다. 현명한 철학자, 결단력 있는 사령관, 존경받는 정치인 등을 묘사하던 그리스 조각상은 후대로 갈수록 개인의 고유한 특성을 부각하는 방향으로 표현 방식이 변화했다. 그 초기의 사례로 그리스의 대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표현한 이 두상이 있다. 푹 꺼진 뺨, 듬성듬성한 머리카락, 기김하고 에너지 있는 모습이 표현된 이 작품은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주문으로 조각가 리시포스가 만든 조각상에 원형을 두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철학자 또는 이방인, 대리석 두상, 로마, 2세기, 후대에 코끝 추가,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이 조각상에는 인물을 이상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헝클어진 머리 모양, 정돈되지 않은 외모, 곁눈질하는 시선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처음에 연구자들은 이 조각상을 야성적인 이방인으로 보았지만, 이후에는 철학자로 보는 시각이 대두했다. 두가지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두 집단을 표현하는 도상이 서로 비슷하기 때무이다. 정돈되지 않은 모습은 이방인의 미개함을 상징하기도 하고, 철학자 등 지식인이 온전히 정신적인 삶에만 몰두한 모습을 의미하기도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라오콘, 대리석 두상, 고대 그리스 로마 원작의 16~17세기 복제작,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이 두상은 유명한 서양 고대 조각상인 라오콘상의 바로크 시대 복제작으로 트로이 사제 라오콘과 두 아들이 아폴론이 보낸 두 마리의 뱀에게 공격받아 결국 죽임을 당하는 극저인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16세기 초 로마에서 라오콘상이 발견되면서 근세 유럽 사회에; 고대 조각에 대한 관심과 열광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수많은 복제작이 만들어졌다. 작품 전체를 복제하지 않고, 이 두상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부분만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 사람들은 상의 얼굴에 나타나는 파토스, 즉 고통이나 슬픔의 감정 표현에 매료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헤르마는 보통 몸통이 사각형의 기둥으로 되어 있으며 그 위에 두상이 올려져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한 것은 로마인들 이 양식을 받아들여 사용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에 테름과 아틀라스 형식으로 부활하였다.
사포와 에린나, 대리석 양면 헤르마, 로마, 2세기 초, 18세기에 원형 받침대 추가,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그리스의 여성 시인 사포(기우너전 610년?~기원전 570년경)와 에린나(기원전 4세기 활동)로 추정되는 초상을 맞붙인 양면 헤르마이다. 이 상은 그리스 조각상을 자신들의 취향에 따라 변영하여 수용하던 로마인들의 방식을 잘 보여준다. 특히 1~2세기 로마의 상류층 저택에 세워진 양면 헤르마는 문학과 철학, 종교적 주제 안에서 서로 관련있는 역사적 인물과 신화적 인물을 맞붙여 조각하여 서사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통해 그리스 문화에 대한 집주인의 폭넓은 지식을 과시할 수 있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걸작과 복제작, 로마가 전하는 그리스 이야기
기원전 2세기경부터 그리스 미술품들이 전리품으로 로마에 집중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수많은 청동상과 대리석 조각상, 회화 작품을 공공장소와 개인 저택에 진열해 로마의 자부심을 북돋웠다. 로마 사회에서 그리스 미술품에 대한 수요가 폭발하자 복제작의 생산과 유통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특히 기원전 5~4세기에 만들어진 그리스 걸작들이 복제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리스 걸작 원본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그리스 고전기 작품들은 대부분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의 문헌과 후대 조각가들이 만든 복제작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로마 조각가들은 원작의 시대 양식과 유파를 추정할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한 복제 기술을 구사했다. 복제는 로마인이 그리스 문화를 자신들의 사회에 이식하고 소화하는 방법이었다. 로마 지식인들이 존경했던 그리스 철학자와 시인의 조각상은 로마 상류층의 저택을 장식하는 필수품이었다. 사각기둥 위에 두상을 올린 헤르마, 흉상, 전신상 등 다양한 형식의 초상 조각이 전시되었는데, 저택을 꾸미고 집주인의 취향을 전하는 데 소형상이 더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전신상보다 흉상, 헤르마를 선호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초상화(조각)는 로마 조각의 중요한 장르로 가족과 조상을 중요시한 로마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발전하였다. 중요 귀족 가문들의 현관에는 조상의 흉상이 전시되었다. 이상적인 모습을 추구한 그리스 조각과는 공화정 시기에는 다소 소박하과 사실적이며 자연스러운 경향이 있었다. 제국시대 초상화 조각은 종종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이상화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부유한 중산층의 묘비나 일반 시민들도 초상화를 부조로 조각하여 남기기도 했다.
유행의 변화
황실 인물들의 초상은 로마 제국 전역의 취향을 바꾸어 놓았다. 민간에서도 당시 유행하던 통치차 초상의 스타일을 따라 선조들의 초상 전시 공간이나 무덤에 놓을 기념상을 만들었다. 초상에서 노화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경향은 당시 로마 사회에서 나이가 든 남녀의 상에 성공, 성취라는 가치를 부여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수염 난 남성의 초상, 대리석 두상, 로마, 2세기,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이 초상 조각의 주인공은 어떤 인물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황실 일원이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시민이었을 것이다. 이 조각상에 보이는 풍성한 곱슬머리와 수염은 안토니우스 왕조(138~193년) 때 유행했던 것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기원전 27년 ~ 기원후 68년) 때 보이는 특정한 표현 방식을 일반 시민들도 그대로 모방하곤 했다. 이러한 두상은 전신상이나 흉상의 일부로 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사제의 초상, 대리석 두상, 로마, 2세기 후반,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이 남성의 초상은 가운데가 갈라진 제멋대로 자란 턱수염과 짧고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특징이다. 머리에는 담쟁이넝쿨 관을 썼다. 이마 위로 메달리온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달모양의 부적이 있다. 남성의 외모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으 아들인 콤모두스 황제(재위 180~192년)를 연상시키지만, 메달리온이나 담쟁이넝쿨 관은 황제 초상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소재이다. 따라서 재현된 인물은 사제와 같이 종교 제의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토가를 입은 남성의 초상, 대리석 전신상, 로마 1~2세기, 후대에 왼손, 오른팔, 코, 쇄골, 옷주름 일부 추가,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로마의 전신상에서 신체와 옷에는 일정한 유형이 있어 주인공의 신분과 상의 성격을 전달하는 기능을 했다. 후기 공화정기에 토가를 입은 모습의 상은 주인공이 로마의 시민이라는 뜻이다. 군장을 갖추거나 짧은 망토를 입으면 관료이거나 군인이다. 누드나 세미누드상은 초월적인 존재를 나타냈다. 이 조각상의 주인공은 ‘제1시민’의 역할을 부각하고 싶었던 로마 황제이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시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들은 극장이나 분수 등 공공건축을 짓는 데 기여한 사람을 기념하기 위해 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귀부인의 초상, 대리석 흉상, 로마, 130년 이후, 18세기에 코, 뒤통수, 귀, 가슴과 받침대 추가,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존경받는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높은 사회적 명망을 누렸던 로마 귀부인 초상의 전형을 보여주는 상이다. 눈가와 입가, 미간에 노화의 징후가 엿보이지만 품위를 잃지 않은 모습이다. 머리 모양은 당대에 유행했던 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머리카락을 땋아 터번처럼 머리에 두르는 이러한 스타일은 트라야누스황제 시대(98~117년) 황실 여성들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시대마다 다른 머리 모양은 로마 제국의 남녀 초상 모두에서 연대를 확인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카라칼라 황제의 스타일로 묘사된 남성의 초상, 대리석 흉상, 로마, 3세기, 후대에 코, 가슴 부분, 받침대 추가,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반세기 이상 풍성한 수염과 머리 모양을 선보였던 황제의 초상은 카라칼라 황제(재위 211~217년) 때 그 양식이 급격히 달라진다. 셉티미우스 세레루스 황제의 아들인 카라칼라는 공동통치자였던 남동생 게타를 잔인하게 살해한 후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그의 공식 초상은 이 남성상처럼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촘촘하게 덮인 머리모양과 짧은 수염, 분노가 끓어오르는 듯 눈썹과 미간을 찌푸린 표정을 특징으로 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위 관리 또는 시민의 초상, 청동상의 얼굴과 손, 로마, 2세기, 중공식 주조, 금도금,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이 얼굴과 손은 로마 제국이 고위 관리나 시민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이는 금동 전신상의 일부이다. 손가락 가운데 검지, 중지, 약지와 육중한 크기의 반지가 남아 있다. 남성의 얼굴은 깊은 주름과 아래로 처진 입가가 특징이다. 눈의 윤곽선이 선명하고, 눈동자는 심지어 반짝거리는 효과를 내는 작은 부분까지 표현했다. 금도금이 된 전신상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문헌 기록에는 남아 있다. 그중 상당수는 기마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심포지엄은 고대 그리스에서 음악, 춤, 공연 또는 대화가 수반되는 즐거움을 위해 술을 마시는 연회의 일부였다. 심포지엄은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인 거실에 해당하는 인 아드론에서 열렸다. 참가자는 보통 14~27명 정도였다. 음식과 와인이 제공되었으며 여러가지 오락이 함께 제공되었다. 그리스에서는 남성만 참석했으나 로마시대에는 여성들도 참여하였다. 심포지엄에서는 다양한 주제를 논의했는데 그중 철학적인 주제도 많았다.
그리스에서는 심포지엄이라 불리는 연회에서 크라테르를 방 중앙에 놓았다. 크라테르는 꽤 컸기 때문에 쉽게 옮길 수 없었다. 심포지엄 의장은 참석자들에 의해 선출되었고 그는 와인의 희석 정도를 조절하면서 과도한 음주를 자제하고 순조로운 진행이 될 수 있게 하였다.
- 크라테르 세 개의 술이 적당하다, 적회식 꽃받침형 크라테르, 아테네, 기원전 5세기 후반,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포도주용 그릇에는 종종 디오니소스와 관련된 인물과 상징들이 그려졌다. 이 크라테르에는 정욕에 찬 사티로스에게서 도망치는 마이나스가 있는가 하면, 서로 대화를 나누는 사티로스와 마이나스, 리라와 쌍피리를 연주하는 인물도 있다.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표현된 디오니소스가 포도주를 따라 주는 세일레노스를 돌아보고 있다. 심포시온에서도 과음하지 않는 절제의 미덕이 강조되었지만 참석자들은 종종 취기를 빌려 사회가 부과한 엄격한 역할에서 벗어나 다른 모습이 되는 자유를 누렸다. 반쯤 짐승인 것은 세일레노스 뿐만 아니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연회에 사용된 용기
연회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으로 포도주가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포도주를 희석하지 않고 마시는 것은 야만적이라 생각하여 물과 섞어 마셨다. 포도주를 담는 용기는 점토, 금속, 유리, 돌로 만들어졌는데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멧돼지 모양의 잔처럼 동물이나 인물 형태의 잔이 매우 인기 있었다. 연회에는 술과 곁들일 치즈, 올리브, 무화과, 빵, 생선 요리가 접시에 제공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심포시온과 심포지움
그리스어로 연회를 의미하는 심포시온은 그리스 남성들이 다양한 주제에 대해 토론하고 의견을 나누는 중요한 장이었다. 대화 주제, 행사 순서, 음식의 종류가 정교하게 연출되었고, 여성은 참석할 수 없었다. 연회 참석자들은 안드론’이라 불리는 방에 모여 담쟁이넝쿨 관을 쓰고 의자에 앉아 디오니소스에게 경의를 표하는 첫 잔으로 심포시온을 시작했다. 연회의 좌상은 그날 밤에 마실 포도주의 양과 희석 비율을 공표했는데, 물과 포도주의 비율은 3:1, 5:3, 3:2로 다양하게 정할 수 있었다. 하인들은 크라테르에 물과 와인을 섞은 뒤 주전자로 옮겨 손님들의 잔에 따라 주었다. 음주와 대화에는 연주, 노래, 오락이 함께 했다. 로마 시대에도 ‘심포지움’이라는 이름으로 연회의 전통이 이어졌는데, 여기에는 여성도 참석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심포지움이 학문적인 모임이나 대규모 사업을 위한 대중 토론을 일컫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로마 제정 시기에는 황제들이 정치적인 의도를 담은 초상 조각을 만들었다. 황제의 상은 황제가 스스로 만들어 세우는 것이 아니라 원로원, 관료, 시민 등 사회 전체가 황제에 대한 충성과 공경을 나타내기 위해 건립했다. 물론 디자인에는 황제의 요구 사항이 반영되었다. 이들 조각들은 중요한 전쟁의 승리나 작위 수여 같은 특별한 계기가 있을 때 대량으로 만들어 졌다.
황제의 초상 제작
로마 제국 모든 도시의 광장, 신전, 공공건물, 거리, 빌라에서 로마 황제들의 전신상과 흉상을 볼 수 있었다. 황제의 상은 황제가 스스로 만들어 세우는 것이 아니라 원로원, 관료, 시민 등 사회 전체가 황제에 대한 충성과 공경을 나타내기 위해 건립했다. 물론 디자인에는 황제의 요구 사항이 반영되었다. 두상과 흉상에서는 수염과 머리 모양, 표정이 황제의 개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이시스 여신으로 표현된 클레오파트라 2세의 조각상, 대리석 전신상, 헬레니즘 시대, 기원전 2세기, 후대에 팔, 왼쪽 무릎, 왼발 받침대 앞, 오른발의 발가락, 코, 턱, 머리카락 일부 추가,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이 상의 주인공은 기원전 2세기경 재위한 클레오파트라 2세로 추정된다. 그녀는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뒤를 이어 이집트를 통치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출신이다. 바닥까지 내려오는 키톤 위에 히마티온을 걸쳤는데 가슴께에 이시스 여신상에 자주 보이는 독특한 매듭이 있다. 여신상과 같은 형식을 취함으로써 여왕은 가장 위계가 높은 이집트 여신인 이시스와 동일시되었는데, 여기에는 통치권을 정당화하고 굳건히 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여왕 자신이 드러내고 싶은 이미지를 조각상의 형식으로 말한다는 점에서 후대 로마 황제의 초상과 맥을 같이 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초상, 대리석 흉상, 로마, 기원전 1세기 ~ 기우너후 1세기, 16세기에 코와 가슴, 받침대 추가,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로마 장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100년 ~ 기원전 44년)는 갈리아 전쟁을 비롯한 여러 정복 전쟁의 공적과 원로원에서 살해된 사건으로 유명하다. 이 작품은 로마 시대에 제작한 두상을 르네상스시대에 고풍스러운 흉상으로 보완한 것이다. 두상은 카이사르가 죽은 뒤에 만들어진 초상 유형이며 수척한 얼굴이 특징이다. 이 초상 조각은 개인의 얼굴 특징이 거의 보이지 않은 신격화된 모습의 ‘디부스 율리우스(율리우스 신)’상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드루수스의 초상, 대리석 두상, 로마, 1세기,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아들인 소 드루수스(기원전 15년 ~ 기원후 23년)를 표현한 두상이다. 짧고 곧은 단정한 머리카락, 낫 모양의 둥근 앞머리, 수염 가닥들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윗입술이 약간 튀어아논 좁은 입이 특징적이다. 원래의 채색이 남아 있어다면 눈이 한층 더 크게 보였을 것이다. 황제의 친척을 위해서도 공식 초상을 제작했는데, 가족 관계인 이들의 초상은 닮은 부분이 많았다. 드루수스는 승계를 앞두고 경쟁 세력에게 암살당해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하드리아누스의 초상, 대리석 흉상, 로마, 117~138년, 후대에 가슴과 둥근 받침대 추가,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하드리아누스(재위 117 ~ 138년) 통치기는 대체로 평화로웠고 황제가 특히 그리스 문화를 좋아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초상 조각은 수염이 있고 섬세하게 치장한 머리가 특징으로, 꼬불꼬불한 머리카락을 선보여 네로 시대(재위 54~68년)나 플라비우스 왕조(69~96년)의 화려한 머리 모양을 재유행시켰다. 하드리아누스 시대 이후로 남성 초상에서 수염이 빠지지 않는 요소가 되었다. 이 상에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갑옷을 입고 사령관의 망토인 팔루다멘툼을 두른 뒤 화려하게 장식한 핀으로 오른쪽 어깨에 고정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초상, 대리석 흉상, 로마, 161 ~ 180년, 후대에 의복의 장식용 편과 오른쪽 어깨, 원형 받침대 추가,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 ~ 180년)는 철학에 대한 높은 관심과 그리스어로 쓴 <명상록> 때문에 철인 황제로 불렸다. 그의 초상은 굵고 곱슬곱슬한 머리 모양과 비슷한 형태의 수염, 튀어나온 큰 눈, 처진 눈꺼풀이 특징이다. 황제의 초상에는 특정한 가치를 전달할려는 정치적 의도가 들어 있다. 이 초상은 성찰적인 지식인의 모습을 강조했는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삶을 보면 결코 과장은 아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초상, 대리석 두상, 로마, 2세기 후반,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지금은 두상만 남아 있지만 조성 당시에는 관례대로 흉상이나 전신상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얼굴의 골상학적 특징이나 곱슬머리, 수염이 오른쪽에 놓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초상과 닮았다. 통치자의 특징을 로마 제국 전역에 전파해 일관된 모습으로 초상을 조각하던 관습을 이 두개의 초상이 잘 보여준다. 눈동자의 자리를 파내 모양을 만들었고, 눈꺼풀은 살작 처져 있다. 이러한 초상 조각에 채색을 하여 제국 전역 로마인들에게 황제의 생생한 모습을 전달했을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초상, 대리석 흉상, 로마, 3세기 초, 후대에 코끝과 둥근 받침대와 가슴 추가,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재위 193~221년)는 아프리카의 로마 속주였던 렙티스 마그나 출신으로, 오늘날의 이란 지역에서 세력을 크게 확장하던 파르티아와 싸워 승리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승리를 기리기 위해 세운 개선문이 지금도 로마의 중앙 광장인 포로 로마노에 남아 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초상은 풍성한 곱슬머리와 턱수염이 특징으로 곱슬머리 가닥 하나하나가 세심하게 표현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로마의 초상 미술, 자기 표상에 대한 열망
로마 미술이 이룬 특별한 업적으로 사실적인 초상을 발전시킨 점을 꼽을 수 있다. 로마의 패권이 지중해로 확장되면서 그리스 조각을 모델로 한 초상 조각이 만들어졌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과 달리 노화를 존경스럽게 바라보았다. 나이 든 모습을 시실적으로 묘사해 초상의 주인공을 성공적인 삶의 본보기로 여기고 칭송했다. 로마 제정이 시작되면서 황제들은 정치적 의도를 담은 초상 이미지를 제작했다. 중요한 전쟁에서의 승리나 작위 수여와 같은 특별한 계기가 있을 때 대량으로 만들었다. 가장 새로운 공식 초상이 탄생하면 그 이미지는 주화의 도안, 대리석 흉상과 진신상으로 복제되었다. 이런 과정으로 황실 초상의 앞선 양식이 로마 제국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는데, 여기에는 환조의 석고 모델을 이용한 복제 방식이 큰 몫을 했다. 로마인들은 측정 기준점과 컴퍼스를 활용해 새로운 재료에 원본을 정확하고 빠르게 복제할 수 있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인간의 세상
인간의 모습을 재현한 인물상들은 당시의 사회와 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 조형 예술품이다. 고대 그리스 초기 인물상의 기본 형태와 비례는 이집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아르카익기(기원전 750년 ~ 기원전 500년) 에 그리스는 빠른 속도로 팽창하여 지중해 전역과 흑해 주변까지 식민 도시를 세우고 자신들의 문화를 전파했다. 전쟁으로 만난 페르시아와 인도의 미술에서 새로운 영감을 받기도 했다. 이후 기원전 2세기에는 로마에 정복당해 로마와 흥망성쇠를 같이했다. 로마의 미술 역시 그리스 문화를 밑거름으로 발전했다. 신화, 종교, 철학, 문확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형예술 분야에서 큰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그리서 고전기(기원전 500년 ~ 기원전 336년) 미술의 이상화된 표현 양식은 중요한 모델이 되었다. 로마의 귀족 사회에서는 그리스 미술품을 수집하고 그리스 미술의 양식과 주제를 차용했다.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정복당한 그리스가 사나운 승리자를 정복했다”라는 표현은 로마에 퍼진 그리스 문화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그리스 문화를 취하선택하고 재해석하여 새로운 문화의 흐름을 만들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 위키백과,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