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군 쌍북리 부소산에 있는 낙화암이다. 부여 부소산성 서쪽 백마강변 낭떠러지에 있는 큰 바위이다. <삼국유사>에 백제가 멸망할 때 궁녀들이 이곳에서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하여 ‘타사암’이라고 하였다. 후대에 궁녀들을 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고 고쳐 불렀다. 암벽에는 송시열이 쓴 ‘낙화암’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 다고 힌다. 낙화암 위에는 1929년 궁녀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백화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다. 아래에 있는 고란사와 함께 백제의 멸망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명소로 부소산성을 찾은 관광객들이 꼭 들러는 명소이다.
낙화암은 부소산 서쪽 백마강변 절벽에 위치하고 있다. 부소산송의 대표적인 명소로 입구에서 산성을 한번 둘러보고 고란사와 함께 마지막으로 방문하게 된다. 절벽 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과 주변 경치를 감상하기 좋은 명소이다.
백화정
백화정은 낙화암(타사암) 위에 있는 정자이다.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사비성이 함락될 때 이곳에서 목숨을 버린 궁인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세운 것으로 전한다. 백화정이란 이름은 중국 북송 새대의 시인 소동파가 혜주에 귀향 갔을 때 성 밖의 호수를 보고 지은 ‘강금수사백화주’라는 시에서 유래한다. 이곳을 감싸고 도는 백마강과 주변의 산들이 어우러져 한폭의 산수화 같은 풍경이 펼쳐져 부여를 찾는 관광객이면 반드시 들르는 명소이다. (안내문, 부여군, 2024년)
전하는 말에 의자왕과 후궁들이 떨어져 죽었다는 타사암이 있지만 왕은 당에서 죽다
백제고기(百濟古記)에 이르기를 “부여성(扶餘城) 북쪽 모서리에 큰 바위가 있는데, [바위의] 아래는 강물과 만난다. 서로 전하여 내려오기를 의자왕과 여러 후궁들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서로 일컬어 말하기를 ‘차라리 자진을 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 하여 서로 이끌고 이곳에 이르러 강에 몸을 던져 죽었으므로 속칭 타사암(墮死岩)이라 한다.”라고 했으나, 이것은 속설이 와전된 것이다. 다만 궁인들은 그곳에서 떨어져 죽었으나 의자왕이 당나라에서 죽었음은 당사(唐史)에 명백히 쓰여 있다. (삼국유사 권 제1 제1 기이 태종춘추공,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4년)
왕흥사지(사적)는 부여 부소산성 맞은편 금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백제의 옛 절터이다. 왕흥사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여러 문헌에 남아 있다. 여러 차례의 발굴 조사를 통해 사찰의 가람배치가 확인되었으며 기와편을 비롯하여 여러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고란사(皐蘭寺)는 낙화암 아래 백마강변에 자리잡고 있다. 사찰 내력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삼국시대 백제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 삼천궁녀을 추모하는 사찰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낙화암
낙화암은 부소산 북쪽 백마강을 향해 우뚝 서 있는 큰 바위이다. 바위는 50m 정도 높이의 절벽을 이루고 있으며 강물에 이르러 한 번 꺽인 단이 있다. 이 단을 이룬 암벽에 송시열이 ‘낙화암’이라고 쓴 글씨가 새겨져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가 멸망할 때 궁인들이 화를 피하지 못할 줄 알고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며 부여성 북쪽 모퉁이 큰 바위에 올라 몸을 던져 순절하여 ‘타사암’이라고 하였다. 훗날 사람들이 궁인을 꽃에 비유하여 이곳을 낙화암으로 불렀다. (안내문, 부여군, 2024년)
<출처>
- 안내문, 부여군, 2024년
- ‘낙화암, 국가문화유산포털, 국가유산청, 2024년
- ‘낙화암’, 위키백과, 2024년
- ‘낙화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4
- 삼국유사 권 제1 제1 기이 태종춘추공,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