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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부소산성 (사적), 사비 왕성 배후 산성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에 있는 ‘부여 부소산성'(사적)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 또는 소비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보통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백제 사비시대의 도성을 구성하는 산성으로 부소산의 자연 지형을 활용하여 흙으로 성벽을 쌓았다. 부소산성은 왕궁 북쪽에 위치한 비상 방어시설이지만 군사적인 기능뿐 아니라 왕궁 배후자로서 후원의 역할도 함께 수행했다. 부여 시가지 전체를 조망하는 곳에 위치한 부소산성은 관북리로 추정되는 왕궁지와 연결되어 있다. 백제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태자골 숲길은 옛날 왕궁의 정원처럼 아름다워 사계절 산책하기 좋고, 구드래 나루터에서 황포돛배를 이용해서 오를 수도 있다.

<관북리 유적 일대에서 보이는 부소산성>

부소산성은 군창지 일대 테뫼식 산성과 사자루 일대 테뫼식산성, 그리고 이를 둘러싸고 있는 포곡식산성으로 이루어져 복합식산성이다. 백제시대 포곡식 산성은 2,496m이며, 통일신라시대의 사자루 테뫼식산성은 410m이고, 반월루 테뫼식산성는 1,420m이다. 조선시대의 군창지 테뫼식 산성은 760m로 구성되어 있다. 최초의 축성은 백제시대 사비천도(538년) 이전이며 대부분 흙으로 다진 토성이다.

<부소산성 위성 사진>
<부소산성 공간배치도>

출입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관북리 유적’ 에 해당하는 건물터를 볼 수 있다. 마당에서 서쪽 탐방로를 따라서 낙화암과 사자루에 오를 수 있으며, 동쪽으로는 부소산성 성벽을 따라서 부소산성 일대를 탐방할 수 있다.

<부소산성 출입문>
<출입문 안쪽 광장>

부여 부소산성 아래 옛 부여현 관아와 옛 부여박물관이 있었던 곳이 백제 왕궁이 있었던 ‘부여 관북리유적(‘사적)이다. 여러 차례의 발굴조사과정을 통해 대형 전각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터, 연못, 우물터, 기와로 만든 배수관 등이 확인되었다. 

<출입문 안쪽 관북리유적 건물터>
<사자루와 낙화암으로 오르는 길>
<부소산성 동쪽 성벽으로 연결되는 길>

‘부여 삼충사’는 백제의 충신 성청, 흥수, 계백을 기리기 위한 사당으로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 지어졌다.

<삼충사 앞>
<부여 삼충사>
<삼충사 내부>

삼충사에서 동쪽으로는 옛 백제 때 쌓은 토성 성벽을 따라서 길이 이어진다. 백제시대 성벽은 약 2,496m 정도이며 부소산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이다. 중간쯤에 부소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테뫼식산성이 있다.

<삼충사 옆 남문지 부근>

부소산성 성벽은 외곽을 두르고 있는 포곡식 산성 내부에 남쪽, 서북쪽의 테뫼식 산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쪽의 테뫼식 산성은 남북방향의 성벽에 의해 이분되어 있다. 외곽의 포곡식 산성이 백제 시대에 축성되고 산성 내부 남쪽 및 서북쪽의 테뫼식 산성이 통일신라 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남쪽의 테뫼식 산성을 이분한 성벽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축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산성 둘레는 2.5km, 성벽에는 동문지, 남문지가 있으며 남문지에는 아직도 문기둥을 세웠던 초석 2개가 동서로 나란히 있다. (안내문, 부여군청, 2024년)

<동쪽 성벽으로 연결되는 길>
<바깥쪽으로 보이는 성벽>

백제 때 쌓은 부소산성을 둘러싼 성벽과 통일신라대 쌓은 부소산 정상부를 둘러싼 테뫼식 산성 성벽이 만나는 지점이다.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성벽을 쌓아 테뫼식 산성을 구성했다.

<부소산 정상으로 연결되는 테뫼식산성>
<성벽이 만나는 지점>

테뫼식산성
이곳은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조선시대에 각각 건설한 성벽이 서로 겹치거나 관통하는 지점이다. 가장 아랫부분은 견고하게 다져진 판축토층으로 이루어진 백제 성벽이고, 기와나 토기 파편이 섞인 중간층은 통일신라시대 성벽이다. 가장 위쪽 성벽은 산 정상부를 둘러쌓은 형식인 테뫼식 산성으로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에 축성되었다. (안내문, 부여군, 2024년)

성벽은 흙을 견고하게 다져진 판축토층으로 이루어진 백제 성벽이다. 서울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에서 볼 수 있는 성벽과 비슷해 보인다.

<흙을 견고하게 다져 쌓은 백제 성벽>
<성벽을 따라 이어지는 길>
<성벽>

성벽 축조 방법은 대체로 점질토와 마사토를 교대로 다져 올린 판축기법이 사용되었다. 토루가 조성될 구간에 토사 밀림 방지용 판목을 고정시킬 목주를 130cm 가량의 간격으로 두 줄로 열지어 영정주를 세우고, 그 안쪽에 점질토와 마사토를 번갈아 가며 고른 두께로 다져 올렸다. 여기에 횡장목과 종장목이 사용되었다. 동성벽과 남성벽에는 중심 토루가 완성된 후 성 내측에 배수 기능 등의 역할을 하는 부석시설이 마련되고 이와 함께 중심 토루 안쪽 보강용 다짐층이 형성되었다. 성 외측에는 급경사로 인한 외부 토루 밀림 방지를 위하여 외부 보축이 준판축 방식으로 덧붙여지며 일부 할석을 이용한 간단한 석축이 보강되기도 했다. 축성재로 사용되는 흙은 비교적 정선된 것을 사용하였다. 체성벽 외벽에 토루를 보호하기 위한 석축시설이 확인되는데 이 석축은 다듬지 않은 작은 활석들을 이용하였다. 주로 경사가 심한 부분의 보완 조치로 볼 수 있으며 토루와 동시에 축조한 것으로 판단된다. 토루 보완용 석축시설은 통일신라 시대 토성에서 일반적으로 차용되는 방법이지만 이미 백제 시대부터 사용되었다고 하겠다. (안내문, 부여군, 2024년)

<동문지로 이어지는 성벽>
<성벽 안쪽>
<군창지로 이어지는 길>

영일루는 홍산관아 정문인 집홍루를 1964년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이곳은 부소산성 정상부 군창지와 건물 등이 있던 곳이다. 테뫼식 산성으로 주위가 둘러져 있다.

<영일루>

영일루
영일루는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누각으로 백제 시대의 영일대가 있던 곳이다. 지금의 건물은 1871년에 세운 홍산 관아의 정문인 집홍루를 1964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운 뒤 영일루라고 고쳐 불렀다. 이곳은 사비도성 전역을 볼 수 있는 장소로서 지금은 메워졌지만 해와 달을 비추던 월함지의 경관을 감상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동쪽으로 청마산성과 나성을 살필 수 있어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부소산 서북쪽 봉우리에 달이 지는 모습을 보던 송월대와 동남쪽 봉우리에서 해를 맞이하던 영일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백제인의 서정적인 멋을 알 수 있다. (안내문, 부여군, 2024년)

부소산정 정상부에 있는 군창지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군사용 창고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불에 탄 곡식, 토기 및 기와조각 등이 발견되었다. 조선시대 분청사기와 백자조각이 출토되어 조선시대까지 부소산성이 활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군창지>
<군창지 발굴조사 현장>

군창지
군창지는 백제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부소산성의 군사용 창고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 터이다. 이곳에서 1915년에 불에 탄 곡식(쌀.보리.콩)이 발견되어 창고 터로 알려지게 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에서 불에 탄 쌀이 다량으로 수습되었으며, 가운데 공간을 두고 동서남북에 건물을 배치한 백제시대 ‘ㅁ’자형 대형 창고 건물의 기단부가 발견되었다. 각 건물 터에서 백제 시대에 가공된 주춧돌이 확인되었으며, 토기 및 기와 조각 등이 수습되어 백제 시대 군창이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또한 조선 시대 분청사기와 백자 조각이 출토되어 후대까지 부소산성이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안내문, 부여군, 2024년)

<군창지 북쪽 태자골 숲질>

태자골 숲길
부소산성의 아름다운 사계절과 태자천을 간직한 이 숲길은 옛 백제 태자들의 산책로로 추정되는 곳이다. 부소산은 22세기를 위해 보존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됐을 만큼 구석구석 아름다운 곳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태자골 숲길이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안내문, 부여군, 2024년)

군창지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은 통일신라 때 쌓은 테뫼식 산성 성벽이다. 흙으로 쌓은 백제 성벽과는 달리 기와나 토기 파편 등이 섞여 있다.

<군창지 북쪽 테뵈식 산성 성벽>
<셩벽을 따라 이어지는 길>

군창지 서쪽에는 남북을 쌓은 성벽이 있다. 고려시대에 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남쪽 성벽과 연결된다.

<남쪽으로 연결되는 테뫼식산성 성벽>
<바깥쪽 성벽>
<남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수구 아래>

부소산성 수구
부소산성 수구는 부소산성에 물을 대거나 빼는 시설이다. 수구는 고려 말 ~ 조선 초에 쌓은 테뫼식 산성의 서편 성벽에 위치하는데, 지하 암거형으로 입구에 깬 돌을 깔아 들어오는 물에 섞인 불순물과 토사를 걸러내도록 하였다. 아울러 물의 흐름이 원활하도록 수구 바닥의 경사도는 8º가 되게 하였다. (안내문, 부여군, 2024년)

<북쪽 테뫼식 산성 성벽>
<서쪽으로 이어지는 성벽길>
<성벽길>
<성벽>
<수혈 건물지 전시장>

이 모형은 부소산성 내 수혈건물지 및 목책공 주변 유적을 모형화 한 것으로 1983년 발굴조사된 것이다.

<수혈건물지 모형>
<수혈건물(재현)>

수혈건물지란?
수혈은 아래로 곧게 파내려 간 구멍이나 구덩이를 말하며 수혈건물은 움집을 말한다. 움집은 땅을 30cm에서 1m 정도를 평면이 되게 파낸 다음 둘레에 나무 벽을 쌓아 놓고 중앙에 모닥불을 피우며 사는 반지하식 집이다. 수혈건물지에서 발견되는 기둥자리 화덕 및 연도의 흔적, 출토 유물 등의 유구는 당시의 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안내문, 부여군, 2024년)

<제3호 수혈 건물지>

제3호 수혈 건물지
1983년도에 발굴 조사한 3개소의 수혈건물지 중 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이다. 지표 아래 풍화암층을 깊이 70~90cm 정도 깎아 내려가 건물 바닥을 이루었다. 평면은 네모반듯한 방형으로 한 변의 길이가 약 4m이다. 남쪽 벽 중앙에는 2단의 출입계단 시설이 있고, 가운데에는 기둥을 세웠던 4개의 구멍이 네모꼴로 위치하고 있다. 이 수혈건물지 안에는 2줄의 ‘구들’ 시설이 있는데 남쪽 끝에서는 구들 골의 옆 방향에서 불을 지폈던 아궁이가, 북쪽엔 집 밖으로 난 굴뚝이 시설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이 수혈건물지 남쪽으로 좀 떨어진 비탈 아래에 저장 구명과 목책을 세웠던 유구가 발견되었다. 아궁이 바닥에서 출토된 백제 토기 뚜껑과 집 주위에서 출토된 무구류의 유물 등으로 보아 5~6세기 백제 군사들의 병영 터로 추정된다. (안내문, 부여군, 2024년)

저장공은 움집의 내부나 어깨 부분에 직경 1m 안팎의 구덩이를 파서 곡식이나 열매 등의 식량을 저장하는 곳이다.

<목책공과 저장공>

목책공
목책은 산비탈 또는 계단에 통나무 말뚝을 잇달아 박아 만든 울타리를 말하며 목책공은 목책을 박은 구멍을 말한다. 가장 오래된 목책은 부여 송국리 유적이며 청동기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쓰였다. 한국의 성곽은 토성.석성이 흔히 알려져 있으나 목책으로 방어시설을 대체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임시로 성을 만들 경우나 짐승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설치하는 경우도 있었다. (안내문, 부여군, 2024년)

부소산성 목책시설
1983년도에 조사된 제3수혈건물지 남편 경사지의 목책시설은 경사지 아래 서편으로 120cm 간격의 8개소 구덩이 열이 발견되었고, 중앙에서 동편으로 5개소, 서편 연장 선상으로 5개소가 발견되었다. 1985년에 조사된 서문지 내 광장 지역에서는 남북 35m 거리 내에 120 cm ~ 130cm의 간격을 이룬 구덩이 열이 확인되었다. 형태는 말각방형이며 크기는 긴 변이 약 90 ~ 110cm, 너비는 70cm ~ 90cm이다. 이러한 목책공은 부소산성 축성에 대한 변천 과정과 삼국시대 성책 연구에 중요한 유구로 평가되고 있다.

<수혈건물지 앞 마당>
<서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부소산 정상 군창지 테뫼식산성 서쪽 끝 전망이 좋은 곳에는 반월루라는 정자가 있다. 부여읍과 백마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군창지 테뫼식산성 서쪽 끝>
<반월루>
<반월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

반월루
반월루는 부소산 서남쪽 언덕 위에 자리잡은 누각이다. 이곳에서는 부여읍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원래 이곳에는 수루가 있었다고 전하느는데 오래전에 없어지고 빈터만 남아 있었는데, 이 자리에 1972년에 반월루를 세웠다. 반월루는 부소산성의 옛 이름인 반월성에서 따온 이름으로 반월은 멀리 흐르는 백마강의 모습이 마치 달과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안내문, 부여군, 2024년)

<서쪽 성벽>
<서쪽 성벽>

부소산성 서북쪽에 있는 사자루 부근 정상부에도 통일신라 때 쌓은 테뫼식산성이 둘러싸고 있다.

<사자루가 있는 정상부>
<사자루>

사자루
사자루는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인 송월대에 있는 누각이다. 조선시대 임천의 관아 정문(개산루)을 1919년에 이곳으로 옮겨와 사자루라 하였다. 건물 앞면에는 대한제국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이 쓴 ‘사자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백마강 쪽으로는 김규진이 쓴 ‘백마장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을 옮겨 세울 때 ‘정지원’이란 이름이 새겨 있는 백제 시대의 ‘금동정지원명석가여래삼존입상'(보물)이 발견되어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안내문, 부여군, 2024년)

<사자루를 둘러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
<주변 성벽>
<낙화암으로 연결되는 길>
<낙화암으로 내려가는 길>
<백화정>

낙화암은 부여 부소산성 서쪽 백마강변 낭떠러지에 있는 큰 바위이다. <삼국유사>에 백제가 멸망할 때 궁녀들이 이곳에서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하여 ‘타사암’이라고 하였다. 후대에 궁녀들을 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고 고쳐 불렀다. 

<낙화암>
<부소산성 북쪽 백마강 (상류방향)>
<고란사 내려가는 길>

고란사(皐蘭寺)는 부소산성 북쪽 낙화암 아래 백마강변에 자리잡고 있다. 사찰 내력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삼국시대 백제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 삼천궁녀을 추모하는 사찰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고란사>
<서문지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
<백제시대 성벽>
<서문지 부근>

서복사지는 부소산성 중턱 서문 바깥에 있던 사찰이다. 높이 10여미터의 급경사로 이루어진 계단을 통하여 절로 진입하는 산지구릉상의 가람입지를 하고 있다. 규묘는 비교적 작은 편이며 목탑자리에서 금동제 과판(銙板)이 출토되어 백제왕실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여 서복사지>
<백마강과 부소산성>

부여 부소산성,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사적
부소산성은 백제시대의 중심을 이룬 산성으로 도성을 방어하는 핵심시설이며, 백제가 사비로 도읍을 옮긴 백제 성왕 16년(538) 이전에 이미 축조되었다. 부소산성은 군창지와 사자루의 산봉우리를 머리띠를 두르듯 쌓은 테뫼식 산성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포곡식 산성만이 백제시대의 것이고 나머지 두 테뫼식 산성은 통일신라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확인된다. 대부분 흙으로 다진 토성으로 평상시에는 궁궐의 후원으로 이용되었으며 유사시에 도성의 방어거점으로 사용되었다. (안내문, 부여군, 2024년)

<출처>

  1. 안내문, 부여군, 2024년
  2. ‘사적 부여 부소산성’, 국가문화유산포털, 국가유산청,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