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성종대부터 고려말 이색이 문인이었던 김종직을 중심으로 신진관료였던 사림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림은 대체로 조선을 건국한 주체세력이었던 신진사대부에 속하지만 조선초에 벼슬에 진출하지 않고 향리로서 지방에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계층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연산군대와 중종, 명종대에 걸쳐서 여러번의 사화에도 불구하고 16세기에는 새로운 주도세력으로 성장하여 조선의 정치.사회.문화 전반을 이끌었다. 중종대 조광조가 성리학을 조선에 맞게 변형시키고 이를 현실정지에 적용하는 도학정치를 주장했다. 조광조 이후에 이황.조식.이이와 같은 뛰어난 학자들이 조광조의 도학정치를 계승하여 성리학을 현실정치에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했으며, 다향한 학파가 형성되면서 조선후기 붕당정치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묘지에 기록된 3년상과 여묘살이
묘지란 묘 주인의 삶에 대해 돌이나 도자기에 기록한 것으로 무덤 주변에 묻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도자기로 제작했다. 이 묘지는 예종의 둘째 아들 제안대군 이연의 것이다. 1498년 모친 안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무덤 옆에 초가를 짓고 3년을 지내는 여묘 살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 중시된 유교적 상장례 풍습인 3년상과 여묘살이는 점차 확산되어 갔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성리학 이론의 심화와 철학적 논쟁
퇴계 이황과 그의 제자 고봉 기대승은 7년에 걸쳐 사람의 기본 감정인 사단칠정에 대해 토론을 했다. 두 사람은 인간의 선한 도덕적 본성인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의 ‘사단四端’과 자연적인 감정인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의 ‘칠정七情’을 깊이 탐구해 각각의 기원과 발현 과정을 논했고, 이를 통해 사람의 본성과 감정에 대한 이론을 정립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제사를 잘 모신 사례를 기록한 묘지
성종의 셋째 아들 안양군의 부인인 능성구씨의 묘지이다. 안양군은 1504년에 연산군에 의해 사사되었다. 구씨는 위험을 무릅쓰고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죽을 때까지 제사를 정성스럽게 모셨다. 상례와 제사를 바로 세우는 것이 불교의 폐단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는 주자의 말에 따라 상례와 제사는 지곳적으로 중시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필수 윤리 교육서
<소학>은 1187년 주희의 제자 유자징에 의해 편찬되었다. 이후 어린 학동이 성리학의 기초를 배울 수 있는 교과서가 된 <소학>은 일상 생활의 예의 범절, 격언, 충신이나 효자의 이야기 등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유학의 도덕규범을 담고 있다. 특히 조광조, 김안국 등의 사람은 <소학>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김안국은 한글로 번역한 <소학언해>를 간행하기도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성리학
성리학은 12세기 남송의 주희가 집대성한 새로운 유학입니다. 이기론으로 인간과 사회, 자연을 설명하려 했다는 점이 기존 유학과 다릅니다. 성리학에서는 사람의 마음속에 이理라는 도덕적인 본성과 기氣라는 욕심에 이끌리기 쉬운 성질이 있기 때문에 수신하여야 이상적인 성리학적 인간, 즉 군자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오륜의 실천이 중요하고 오륜 중에서도 부모에 대한 효孝가 근본이 됩니다. 모든 사람이 효자가 되었을 때 가정, 신분, 정치 질서가 모두 안정될 수 있습니다. 유교적 상례와 장례의 실천은 효자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행동 규범이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충신.효자.열녀의 바른 행실을 모은 책
삼강은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한다. 세종이 명으로 삼강의 실천에 모범이 될 만한 사례를 뽑아 1434년(세종 16)에 <삼강행실도>를 편찬했다. 성종대에 분량을 줄인 산정본과 한글 언해본이 처음으로 간행되었고 이후 지속적으로 보급되어 유교윤리 전파에 활용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주희가 지은 가정의례 서적
송나라 성리학자 주희가 관혼상제 관련 각종 의례와 실천 규범을 정해 놓은 책으로 그림을 넣어서 예의 원리, 의복 제도, 기물의 모습을 이해하기 편리하도록 했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 주자 성리학을 신봉한 사대부들이 이 책을 도입하여 유교식 상장례를 널리 보급하려고 노력했다. 이 책에서는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가묘를 세우고 불교적 의식에서 벗어나 유교적 예의범절의 실천을 중시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조선의 소형 부장품
명기는 죽은 후에도 현세와 같은 생활이 계속된다는 믿음에서 무덤에 묻었던 기물을 말한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유교 질서를 정착시키기 위해 무덤에 기물을 묻는 부장 제도를 강화하고, 생활 용기, 인물과 동물형상을 별도로 작게 제작하여 묻기 시작했다. 왕실을 비롯한 일부 지배계층에서는 순백자 명기를 사용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주자가례 수용과 확산
조선은 건국한 해부터 <주자가례>에 따라 집안에 사당인 가묘家廟를 설치하고 유교식 상례와 제례를 정착시키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쉽게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태종과 세종 때 실록을 보면 가묘 설치 시행을 촉구하고 가묘 설치 유예 기간을 두는 논의를 여러 차례 확인할 수 있습니다.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대부분의 사대부 집안에 가묘가 설치되어 유교식 제례가 행해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국가 정책이 정착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조선의 대표적인 백자 항아리
‘달항아리’라는 명칭은 둥근 달을 연상시킨다 하여 높이 40cm가 넘는 백자 항아리에 붙이는 이름이다. 커다란 대접 두 개를 잇대어 만들기 때문에 달항아리의 선은 정형화된 원이 아니라 살짝 이지러져 실제의 달과 같이 자연스럽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16세기, 연산군.중종.인종.명종.선조, 사림의 성장과 유교 사회화
통치 체제 정비가 마무리되었던 15세기 말 세조 때 공을 세운 훈구 대신 세력이 더욱 커져갔습니다. 이들을 견제하고 성종은 성리학과 윤리 규범을 중시하는 살미을 등용했습니다. 주로 언론직을 맡았던 사림은 훈구파와 대립하다가 물러났으나 중종 때 다시 정계에 등장하여 사회 전반에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사림은 군주도 신하처럼 ‘치인治人’을 위한 ‘수기修己’에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군주의 절대권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대의와 명분을 내세우며 여론을 활용한 사림 정치는 점차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선조 즉위 후 학문과 정치 견해에 따라 무리를 지어 토론하는 붕당정치가 전개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조선의 대외교류와 임진왜란, 병자호란
조선 전기 동아시아는 명나라 중심의 국제질서 속에서 북방의 몽골과 여진, 한반도의 조선 그리고 일본이 존재했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에는 상당히 안정적인 국제 질서 속에는 조선은 명과 조공책봉관계를 기본으로 교류를 하였고, 고려시대 이후 한반도와 중국 해안을 괴롭혀 왔던 일본은 조선이 대마도 정벌 등의 강격책과 삼포개항 같은 회유책을 함께 사용하여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일본의 혼란기인 전국시대가 토요토미히데요시가 통일하고 한반도를 침범함에 따라 동북아 질서가 상당히 혼란스러워졌으며, 조선과 명나라는 상당한 국력을 소비하고 사회질서가 무너지는 경향이 발생했으며, 북방에서는 여진족이 청나라가 등장하여 중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명나라 사행
조선은 지속적으로 명에 사신을 파견했습니다. 1392년부터 1494년까지 평균 6~7차례 사행를 갔습니다. 사행단의 주요 임무는 외교 문제 해결과 조공품의 진상입니다. 사행단은 정부, 부사, 서장관과 역관, 의원, 화원 등의 정식 인원 30명과 개인 수행원을 포함해서 대략 70~250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육로와 해로 사행
중국에 갈 때는 육로와 해로를 모두 이용했습니다. 육로로 북경에 갈 때는 한성에서부터 약 3천 1백리(약 1,217km)였고, 오가는 데 50~60일이 소요되었습니다. 그러나 명이 수도가 남경에 있었던 14세기말과 요동과 요서 지역에 분쟁이 있었던 17세기 전반에는 배를 타고 가야 했습니다. 바다를 건너갈 떄는 1천여 석의 식량, 4백여 명의 노를 젓는 군사가 필요할 정도로 비용이 많이 들고 이동거리도 5천6백60리(약 2,223km)에 달했습니다.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나라 사행
사행단 구성과 사행로는 명나라 때와 크게 다르지 않으나 규모가 조금 늘어났습니다. 사행 인원은 정식 인원 30~40명을 포함해서 200~300명 정도였습니다. 사행 기간은 총 5개월로 북경에서는 1~2개월 정도 체류했습니다. 청나라 떄는 사신들이 북경에서 보다 자유롭게 다닐 수 있어서, 공식 일정이 없으면 만리장성, 국자감, 천주당, 그리고 서적과 물화가 집결되던 유리창에도 가 볼 수 있었습나. 청 학자와는 필담으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사행단 숙소에서 무역이 이루어져서 17세기 역관들은 인산 8포(2,400근)씩을 무역 자금으로 가져갔고 이후 은 2,000냥을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집현전 학사들과 명나라 사신의 문학 외교
명나라 7대 황제 경제의 즉위를 알리러 온 명나라 사신 예겸과 그를 맞이한 집현전 학사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가 주고받은 시를 모은 것이다. 예겸이 정인지에게 “그대와 하룻밤 이야기하는 것이 10년 동안 글 읽는 것보다 낫다.”라 말할 정도로 당시 문화 교류의 수준이 매우 높았다. 친필이 거의 전하지 않는 집현전 학사들이 직접 쓰고 찍은 글씨와 인장을 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중국과의 외교
중국이 조공을 바치는 주변국에 그 나라의 왕가의 정통성을 인정해 주는 책봉 체제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근간이었습니다. 조선은 태종 때부터 사대 외교 질서 아래에서 외교적으로 안정을 유지하고, 국가 통치의 자율권을 행사했습니다. 정기적으로 중국 사신을 맞이하거나 중국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문화 교류와 함께 공적인 무역을 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일본인이 그린 조선 통신사
조선 왕의 국서를 가지고 가는 통신사 일행이 오사카의 요도 강 하구에서 도쿠가와 막부가 제공하는 하천용 누선으로 바꾸어 타고 이동하는 장면을 그린 총 1,524cm에 달하는 두루마리이다. 부사선이 앞서고, 다음에 국서를 든 정사가 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국서선, 그리고 종사관선이 뒤를 잇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일동시문, 조태억 편집, 조선 1711년 이후, 종이에 먹
1711년 통신사의 정사 조태억이 일본에 머물 때 일본인 관료, 문사로부터 받은 시와 펴니 등을 편집하여 만든 첩으로, 현재 총 8첩이 남아 있다. 에도 막부의 관리로부터 승려에 이르기까지 여러 인물들과의 필담과 창화의 흔적이다. 당대 막부의 관료이자 유학자인 아라이 하쿠세키, 대마도 번에 소속되어 조선과의 외교와 무역을 담당했던 아메노모리 호슈 등으로부터 받은 필담과 창화시가 남아 있어 통신사와 일본인 사이의 소통과 문화교류를 엿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일본과의 외교
조선은 일본.류큐 등과의 외교를 교린이라 했습니다. 조선은 이들에 대해 강경책과 회유책을 병행했습니다. 조선은 임진왜란 후 복잡한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일본을 포용하는 정책을 취했습니다. 일본에 있는 조선인 포로를 조선으로 데려오고 기유약조를 체결하여 일본과의 국교를 재개했습니다.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여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문화 교류를 이어갔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통신사
통신사란 조선과 일본 양국 간에 신뢰를 통하게 하여 교류하기 위해 조선에서 파견한 사절단입니다. 규모는 300~500명이고 기간은 짧게 5개월, 길게는 10개월까지 걸렸습니다. 여정은 날씨에 따라 달랐습니다. 폭풍을 만나 배가 부서져 침몰하기도 하고, 화재가 나서 배가 전소하기도 했습니다. 병이 나서 도중에 사망하는 수행원도 있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통신사의 위상
임진왜란 후 일본은 조선과의 관계 회복이 필요했기 때문에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고 통신사를 접대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대규모 수행단을 위해 숙소를 새로 짓고 조선 사신이 선호하는 음식을 마련했습니다. 쓰시마 번에서 만든 조선인 선호 음식 목록을 보면, “소금에 절인 물고기나 민물고기는 먹기는 해도 좋아하지 않는다.”, “대체로 술 종류는 모두 좋아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1655년을 기준으로 대략 100만 냥(약 500억 엔)을 통신사 수행에 썼습니다. 1709년 에도 막부 세입이 76~77만 냥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통신사 접대 비용이 얼마나 부담이었을지 짐작이 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임진왜란
임진왜란 초기에는 병력과 무기의 열세로 조선군이 밀렸으나, 수군의 승리와 각 지방 사림의 의병 활동으로 일본군에 타격을 주었고, 명나라의 참전으로 평양성을 탈환하며 전세가 역전되었다. 국제전으로 진행된 임진왜란은 1598년 일본이 물러나며 끝났지만, 조선.일본.명나라 모두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조총, 일본군의 소형화기
조총은 포르투갈 사람들에 의해 일본에 전해진 화승총의 일종으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사용한 주력 화기입니다. 날아가는 새도 맞힐 수 있다고 하여 조총이라고 이름 지었을 만큼 매우 우수한 개인 화기였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조총의 위력을 실감한 조선은 이후 조총의 제조기술을 확보하고 개량하여 주력무기화 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비격진천뢰, 대량 살상 폭탄
비격진천뢰는 임진왜란 직전에 화포장 이장손이 발명한 폭탄입니다. 폭발할 때 우뢰와 같은 소리가 난다고 해서 진천뢰라고도 불렀습니다. 폭판 안에 뇌관에 해당하는 목곡을 넣어 화약을 터뜨려 안에 있던 쇳조각이 사방으로 퍼지는 원리입니다. 목곡에 감는 도화선의 길이에 따라 폭파 시간 조절이 가능한 일종의 시한 폭탄입니다. 1592년 9월 경주읍성 탈환ㅇ;ㅔ 처음 사용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세발을 한 번에 쏠 수 있는 총
삼안총은 총구가 세 개여서 연달아 발사할 수 있는 소형 화기이다. 임진왜란 때 명을 통해 도입하여 더 간편하고 효율성 높게 개발했다. 이 총은 총신에 제작연대와 제작한 장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만력 계사년 12월 제조하다. 무게는 5근 7량으로 매 총구멍에 화약 6전, 철환 2개를 사용하며 장인은 전신금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조선의 휴대용 화기
승자총통은 1583년 김지가 개발한 소형화기이다. 총구에서 화약과 실탄을 장전하고 손으로 약선에 불씨를 점화하여 발사하는 방식이다. <화포식언해>에 따르면 한 번에 철환 15개를 발사할 수 있고 사거리는 600보에 달한다. 이 총통의 손잡이에는 ‘만력 17년’이라고 새겨져 있어서 1589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조선의 장거리 화포
조선의 총통은 크기, 화약의 양, 발사 거리에 따라 천자.지자.현자.황자 총통으로 구분된다. 현자총통으 그 가운데 세 번째에 해당하며 발사거리가 최대 1,500보에 달했다. 제조에 따른 경제적 부담이 적으면서도 높은 성능을 발휘하여 임진왜란 이후 19세기까지 수군의 주력 화포로 쓰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조선의 대표 무기
조선의 주력무기는 활과 화살이었다. 활쏘기는 무관을 뽑는 무과에서 핵심적인 과목이었다. 무과 초시 과목인 6기 중 4기가 활쏘기와 관련된 것이었다. 활은 평소에는 유생들의 심신수련을 위한 수단으로, 전쟁시에는 주력무기로 사용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조선군의 주력무기였으나 조총에 비해 사거리가 짧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전쟁의 무기
활을 주력무기로 삼았던 조선군은 임진왜란 당시 신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화약무기로 반격을 가했습니다. 살상력이 높은 대형화포를 판옥선이나 거북선에 실어 일본 군선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독창적인 화약무기인 비격진천뢰도 활용했습니다. 일본의 조총을 노획하여 제조기술을 확보했고 명나라 무기술을 수용하여 삼안총과 불랑기 등을 개발했습니다. 전쟁은 무기 기술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임진왜란(1592~1598)
1592년 4월 일본은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이 명을 정벌하기 위한 길을 빌려달라는 국서를 조선에 보냈음에도 조선 조정은 상황을 심각하게 보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군은 실전 경험이 많고 신무기를 앞세운 일본군을 저지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전란을 대비했던 이순신과 수군은 해전에서 승리했고, 의병이 곳곳에서 일본군에 타격을 주었습니다. 1593년 명이 참전하여 평양성을 탈환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습니다. 1596년 명과 일본의 강화 협상이 결렬되면서 1597년 일본은 정유재란을 일으켰고 1598년에서야 전쟁이 끝났습니다. 이 전쟁으로 조선은 인구가 크게 줄고 농지가 감소하는 국가적 위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류성룡이 기록한 임진왜란
<징비록>은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내며 국정을 이끈 서애 류성룡이 지은 임진왜란 기록이다. 제족인 ‘징비’는 <시경> 소비편의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전란의 원인과 전황을 밝히고 반성하여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치 책의 저술 목적이 함축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곽재우의 시문집
망우당 곽재우의 시문을 모은 책이다. 곽재우는 임진왜란 당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키고 낙동강 일대를 막아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등 전쟁 초기 불리했던 전세를 만회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망우당집>에는 1592년 의병을 일으키면서 임금에게 올린 <창의시자명소>와 의병을 일으킨 내력이 기록된 <용사별록> 등이 수록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전쟁의 기록
전쟁은 계층을 가리지 않고 참혹한 상처를 남겼습니다. 조선사람들은 그 상처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전쟁을 미리 대비하지 못한 위정자는 통렬한 자기반성을 기록하였습니다. 도망간 관군을 대신하여 지역의 백성을 지킨 의병장도 있었습니다. 백성은 피란살이를 하면서 삶의 터전을 잃고 가족과 헤어지는 등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러한 전쟁의 생생한 경험은 기록으로 남아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40년)
무덤으로부터 온 편지, 묘지명
묘지명은 무덤의 주인에 대한 일종의 기록물이다. 생년, 가족관계, 행적 등을 돌이나 도자기에 새겨 무덤에 함께 묻었다. 이 묘지명의 주인공은 삼학사 중 한 명인 홍익한의 딸 남양 홍씨이다. 이 묘지명에는 홍씨 부인이 어린 시절 병자호란으로 눈앞에서 가족을 잃는 비극을 겪고도 아버지의 뜻을 기리며 꿋꿋하게 살아간 삶이 기록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소설
<임진록>은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필자미상의 고전소설이다. 이순신, 곽재우, 사명당을 비롯한 많은 영웅들이 도술로 눈부신 활약을 하여 왜적을 굴복시킨 내용을 더욱 과장하기도 하고, 패배한 전투를 승리한 전투로 바꾸는 등 허구적인 내용을 기술하기도 했다. 7년간 이어진 참혹한 전쟁 후 국토는 황폐화되고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긴 전쟁으로 상처받은 백성들이 마음을 치유한느 소설들이 당시에 큰 인기를 끌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병자호란을 소재로 한 영웅 소설
<유충렬전>은 영웅의 일생을 소설로 엮은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군담소설이다. 주인공 유충렬은 간신 정한담의 모함으로 가족과 헤어져 고난을 겪게 된다. 유충렬음 무예를 배우며 때를 기다리다가 남적과 북적이 쳐들어 와 천자가 항복하려고 할 때 등장하여 천자를 구출한다. 이후, 호왕에게 잡혀간 황후, 태후, 태자를 구출하여 공을 세우고 높은 벼슬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줄거리이다. 두 번에 걸쳐 호국을 정벌하고 호왕을 죽인다는 내용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대한 강한 적개심이 표현된 것으로 해석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병자호란 (1636~1637)
임진왜란으로 명의 요동 지역 통제가 약화되자 여진족은 힘을 키워 청을 세웠습니다. 청은 스스로 황제국이라 칭하며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했습니다. 조선은 오랑캐와 화의할 수 없다며 그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1636년 12월 청 태종은 12만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쳐들어왔습니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했으나 그곳에서 청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습니다. 당시 조선 관료들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청과 화의하자는 주화파와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로 나뉘어 논쟁했습니다. 결국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청에 항복했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은 사대의 대상을 명에서 청으로 바꾸어야 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무관, 2024년)
우암 송시열이 지은 삼학사의 전기
<삼학사전>은 1671년 송시열이 편찬한 삼학사의 전기이다. 삼학사는 병자호란 때 척화론을 주장하다가 이듬해 심양으로 잡혀가 죽은 홍익한, 윤집, 오달제를 말한다. 이 책에는 삼학사가 보인 불굴의 저항 정신과 비극적 최후가 묘사되어 있다.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효종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해 북벌을 추진하는 한편 순절한 인물을 현창하고 그 후손을 등용하는 정책을 펼쳤다. 척화신과 순절자에 대한 추모와 현창은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 전쟁의 기억을 재생산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신하에게 내린 문서
위성공신은 임진왜란 때 세자였던 광해군을 따르며 공을 세운 80명에게 내린 공신 칭호이다. 박진은 임진왜란 당시 밀양부사로 일본군을 맞아 저지하고자 노력했다. 전쟁 초반 관군이 연이어 패배를 거듭하던 상황에서 박진은 경상좌병사로 제수되어 무너진 지휘체계를 복구하고 일본군에 점령당했던 영천성과 경주성을 탈환했다. 그 공을 인정 받아 사후 3등 공신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공신 자격을 박탈당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 연호 대신 명 연호를 쓴 태합
출한 후 태를 넣어 묻는 태합이다. 이 태합에는 “숭정기원후 195년 기묘년 3월 22일에 묻었다”고 새겨져 있다. 숭정기원후란 명의 마지막 황제였던 의종의 연호인 숭정을 사용하여 기년하는 방식이다. ‘숭정기원후 195년 기묘년’은 1628년을 기준으로 195년 후라는 뜻인데, 간지년을 기준으로 1819년 임을 알 수 있다. 병자호란 이후 공식적인 문서에는 청의 연호를 써야했지만 민간에서는 청에 대한 반감으로 명의 연호를 계속 썼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전쟁의 기억
전쟁이 끝난 뒤 나라에서는 전쟁에서 공을 세운 사람을 공신으로 책봉하여 그 공적을 기렸습니다. 민간에서는 장수, 의병장, 순절자의 이야기를 소설과 전기로 만들었습니다. 전쟁 영웅의 활약상을 주제로 한 소설을 읽으며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기도 하고, 전란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하고 추모했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 기억은 계속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조선은 16~17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쟁을 겪었습니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되어 조선, 명, 일본이 참전한 동아시아 국제전이었습니다. 조선은 7년간 이어진 전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조선에 군대를 보낸 명은 북방에서 성장한 후금을 견제하지 못하고 명청교체기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에도막부로 정권이 바뀌었습니다. 병자호란은 임진왜란 이후 격변한 동아시아 국제정세 속에서 힘을 기른 청의 침입으로 일어났습니다. 조선은 세력을 키운 청에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였고 다시 큰 전쟁을 겪고 굴욕적인 패배를 경험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