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박물관 중.근세관 조선실은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시점부터 대한제국기까지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고고학박물관 성격이 강한 이전 시대 유물과는 달리 조선왕조 오백년 동안 중요한 역사적 사건과 변화를 중심으로 유물을 배치하고 있다. 그 중 첫번째로 조선의 건국과 제도정비와 관련된 유물들이다. 조선사회를 특징지을 수 있는 것으로는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한 유교사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통치이념이 들어가 있는 법과 제도적 측면에서 법전격인 경국대전, 국조오례의 등이 전시되어 있다.
조선의 국호 “동방의 해가 뜨는 나라, 조선”
1392년 7월 새 왕조를 개칭할 때’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하겠다고 했으나 11월 29일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선과 화령으로 국호를 올렸습니다. 고려 공민왕 이래로 외교 문서에 조선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이라는 국호를 정해 올린 이유는 새 나라가 고조선의 계승자라는 위상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듬해 2월 국호가 조선으로 정해졌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동궐도, 조선 순조 28~30년(1828~1830), 부산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국보, 복제품
조선왕조의 여러 왕궁 가운데 가장 크고 으뜸으로 삼은 왕궁은 경복궁이여, 그 별명은 북궐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 하여 동궐이라 불렀다. 창덕궁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탄 이후 고종 4년(1867) 복원되기까지 270여 년간 경희궁과 함께 조선의 대표적인 왕궁이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함께 그린 이 동궐도는 왕궁의 그림을 담당한 관청인 도화서의 전문화가인 화원이 그렸다. 왕궁 주위의 산과 언덕은 전통 화법으로 그렸으나 건물 표현이나 원근 처리에서 일부 서양의 화법도 보인다. 이 그림은 조선 후기 왕궁의 모습과 궁중 회화의 높은 품격을 잘 보여준다. 특히 일제 강점기 이후 훼손된 동궐을 복원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조선 창업자의 초상화
왕의 초상화를 어진이라고 한다. 태조의 초상화를 조선시대에는 모두 26차례 제작하여 보존에 힘썼으나 현재 전주시 경기전에 보관되어 있던 초상화만 전하고 있다. 경기전 초상화는 1409년 경주 집경전 태조 어진을 모사하여 1410년 전주에 봉한했는데 1763년(영조 39) 한 차례 수리를 거친 후 1872년(고종 9)에 다시 원본을 그대로 옮겨 그린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아청색 곤룡포의 태조 어진
태조 어진은 익선관과 아청색 곤룡포 차림이다. 조선시대 왕의 곤룡포는 세종 때 명나라에서 사여받은 후에 착용했다. 세종 이전의 왕들은 고려의 유습에 따라 <태조 어진>처럼 아청색 곤룡포를 입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다섯발통의 용 문양
용은 왕이나 황제를 상징하는 문양이다. 황제는 다섯 발톱 용 문양을, 왕은 네 발톱 용 문양을 사용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태조 어진>처럼 왕의 지위에 있던 조선의 왕과 관련된 문양으로 다섯 발톱의 용을 사용한 예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태조 어진을 봉안한 전주 경기전
조선은 국초부터 창업자 태조의 위상에 맞게 서울을 비롯하여 이성계와 관련이 있는 영흥.평양.개성.경주.전주 지역에 전각을 세우고 태조 어진을 모셨다. 어진을 봉안하여 통치 영역을 확대하려는 의도가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궁궐의 닫집은 정전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닫집안에는 국왕이 앉는 의자인 어좌가 있고 뒷편에는 일월오봉도 병풍이 있다. 닫집(唐家)은 본래 존귀하고 신성한 분과 그 형상에 먼지.비바람.태양빛 등이 직접 닿지 않게 하기 위하거나 신성하고 위엄스럽게 보일 목적으로 건물 안에 설치한 작은 집이다.
화려하게 장식된 왕의 의자
경복궁 근정전 내부 중앙에 화려하게 장식된 닫집과 왕이 앉은 어좌가 놓여 있다. 어좌 뒤에는 태양, 달, 다섯 개의 산봉우리, 소나무를 그린 일월오봉병풍을 설치했다. 왕이 공식적으로 머무는 공간에 이 병풍을 설치하여 절대적이고 영원한 왕권을 상징했다. 근정전과 닫집 천장은 용 문양으로 장식하여 왕의 위엄을 높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경복궁(景福宮)은 1395년(태조4)에 가장 먼저 창건된 조선왕조 제일의 법궁이다. 경복궁은 궁궐배치의 기준이 되는 <주례고공기>의 원칙을 제대로 따르고 있다. ’3문3조(三門三朝)’의 원칙에 따라 국왕의 생활공간인 연조(燕朝), 국왕 집무공간인 치조(治朝), 신하들이 집무공간인 외조(外朝)가 담장으로 분리되어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궁궐의 정문인 광화문, 국가적인 행사를 치르던 정전인 근정전, 왕과 신하들이 정치를 논하던 편전인 사정전, 왕의 침전인 강녕전,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을 잇는 중심 영역을 주축선으로 건물들이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중심부를 제외한 건축물들은 비대칭적으로 배치되어 변화와 통일을 꾀하였다.
조선의 으뜸 궁궐
경복궁은 조선의 으뜸이 되는 법궁이다. 1395년에 창건되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건물이 소실된 후 빈터로 남아 있다가 1867년 중건되어 법궁으로 다시 사용되었다. 경복궁의 중심 전각은 근정전으로 넓고 높은 2층 기단 위에 세워 왕의 권위를 높이고 했다. 경복궁 외에도 광해군 때부터 법궁 역할을 한 창덕궁과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이 궁궐로 사용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15세기, 태조-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연산군
신진사대부와 신흥 무장 세력을 주축으로 건국된 조선은 성리학 사상에 바탕을 둔 정치를 지향하였다. 통치체제는 기본법전인 <경국대전>에 근거하여 국왕을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로 정비되었다. 조선 건국 15세기는 왕조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시기였다. 한양에 새 도읍을 건설하고, 천문도와 세계지도를 제작하여 하늘의 명을 받아 땅을 다스리는 왕의 권위에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천명사상을 담은 별자리 지도
천상열차분야지도에서 ‘차次’는 목성의 운행을 기준으로 하늘을 12개의 영역으로 나눈 것이고 ‘분야分野’는 땅을 말한다. 중앙의 원형에는 총 1,467개의 별을 표시했고 그 주변에 별자리 구획과 의미, 제작 경위 등을 설명한 글이 있다. 중국 천문도 형식을 따랐으나 14세기 말 조선에서 관측한 별자리 자료를 보완하여 제작했다. 동아시에서는 천명을 받아야 왕이 될 수 있었으므로, 세상을 통치할 권한을 준 하늘의 뜻인 천무을 이해하고 이를 세상에 반포하는 것이 권력의 상징이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조선 최초의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다. 현재 전시되고 있는 것은 복제본으로 원본은 일본 류코구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 일본을 비롯하여 당시에 알고 있던 지식을 총망라하여 만든 세계지도로 우리나라를 실제보다 크게 그려 놓고 있다.
조선의 위상을 드러내는 세계지도
중국 원나라 때 제작된 세계 지도에 조선과 일본을 덧붙여 만든 것으로 동아시아에서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세계 지도이다. 중국과 조선을 실제보다 크게 표현했다. 중국과 함께 조선도 문화대국임을 표방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조선 초기 관리를 임명하는 문서
1396년 3월 7일 조숭을 의주등처의 도병마사.지안무영전사.판의주목사를 겸하도록 하는 임명장이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같은 날 중추원의 관리 8명을 서북면의 수령을 겸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숭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지만 이 문서로 가정대부.도평의사사사 등 고위 관직을 역임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에는 왕이 내리는 임명장을 “왕지王旨”로 시작하였는데 왕이 내리는 명령이라는 뜻이다. 이는 고려 때부터 사용해오던 용어로, 조선은 세종대 이후 “교지敎旨”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조선 초기 관제와 고문서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권근의 시문을 모아 펴낸 문집
권근은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양촌은 권근의 자호이다. 조선 건국 초기 불안정했던 명나라와의 외교를 잘 처리하였고, 정종대에는 사병제도의 혁파를 건의하는 등 정치적으로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또한 성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로써 그 학문적 성취 또한 뛰어났다. 정치.외교.사상적으로 조선왕조의 기틀을 닦는데 기여한 인물이다. 이 문집은 권근이 직접 지은 시 980수를 비롯하여 <동국사략>, <동현사락> 등 권근의 사상과 역사관을 살펴볼 수 있는 주요 저술을 수록하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권근이 편찬한 성리학 입문서
<입학도설>은 조선전기 문신이자 학자인 권근이 성리학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편찬한 성리학 입문서이다. 권근이 직접 쓴 서문에 따르면, 권근은 1390년(고려 공양왕 2)에 금마군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주변 지역 학자들이 권근에게 성리학을 배우기 위해 찾아왔으나 새로운 학문인 성리학의 학설을 쉽게 전달할 수 없어 그림과 그 해석을 붙여 이 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사서오경의 성리학적 주석서를 기반으로 다양한 도설을 제시하여 이론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1397년과 1425년에 진양(현재 경남 진주)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되어 널리 읽혔고, 이 책은 조선후기에 간행된 목판본이다. 조선 건국세력인 신진사대부의 성리학에 대한 이해와 조선초 성리학 연구의 심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통치 체제의 정비
조선 창업 후 100여 년 동안 건국의 정당성과 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성리학 이념에 따라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여 통치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조선은 행정.의례.군사 권력을 중앙에 집중시키는 체제를 확립했습니다. 태종 때 이룩한 왕권과 정치.사회적 안정에 힘입어 세종부터 성종까지 통치의 근거가 되는 법전.의례서.지리서.역사서 등을 편찬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오랜 시간 동안 국왕과 신하가 함께 이루어낸 성과입니다. 이처럼 국가 정책을 수립하고 실현하는 데에는 전문가들이 모여 충분히 협의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통치 제제 기반 마련, 법전. 의례서를 편찬하다.
<경국대전>은 조선왕조의 기본 법전이다. 세조의 명으로 편찬을 시작하여 성종16년(1485) 완성되었다. 의정부와 6조가 중심이 되고 전국 8도에 수령을 파견하는 등 조선의 통치체제는 <경국대전>을 바탕으로 정비되었다.
조선의 기본 법전
<경국대전>은 세조의 명으로 편찬하기 시작하여 성종 때 완성된 법전으로 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열 분야의 법규를 포괄적으로 수록했다. 의정부와 6조가 중심이 되고 전국 8도에 수령을 파견하는 통치 체제와 성리학적 종법 질서에 관한 규정들이 명시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법전 편찬
조선은 나라를 안정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통일 법전을 편찬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정도전이 저술한 <조선경국전>과 1397년에 반포된 조선 최초이 법전 <경제육전>을 기본으로 하여, 1485년 <경국대전>을 완성했습니다. <경국대전>은 육조 업무를 기준으로 수많은 관서의 기능과 구조를 명시한 법전으로 관료 제도 운용을 위한 제도적 장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국조오례의>는 조선시대 주요 의례와 관련된 기본 규칙과 절차를 오례로 나누어 정리한 책이다. 오례는 길례(제사),빈례(손님맞이),가례(결혼),군례(군사),흉례(장례)를 말한다. 서례는 시행을 위한 참고서적으로 그림으로 설명한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다.
<국조오례의> 시행을 위한 참고 서적
통치 이념을 반영하여 국가 의례를 정비하는 작업이 통치 체제 정비의 완성 단계이다. 다섯 가지 국가 의례의 절차를 규정한 <국조오례의>를 간행했고 이를 시행하는 데 필요한 참고 사항을 정리하여 도판도 수록하여 이 책을 만들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동물모양 제기
준尊은 제사 때 술이나 물을 담았던 제기이다. 조선 초 상준과 희준은 코끼리와 소 문양이 있는 그릇 형태였으나 성종 때 <국조오례의서례>가 간행된 이후 수록된 도판의 모습대로 코끼리와 소의 형상을 본뜬 제기가 제작되었다. 국가의례에서는 금속제기를 사용했으나 지방 향교에서 지내는 소규모 제례에서는 점차 도자기를 사용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국가 의례 정비
통치이념을 반영한 국가 의례를 정비하는 작업은 중앙 집권 체제의 완성 단계에 해당됩니다. 다섯 가지 국가 의례인 국조오례는 왕을 중심으로 차등적 질서 체계를 보여주고 왕의 권위를 의례라는 법적 장치로 구현하는 것입니다. 세종 때 정리한 《세종실록》<오례>를 기반으로 수정과 보완을 거쳐 의식 행사와 절차를 자세하게 규정한 <국조오례의>를 성종 때 발간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통치 체지 기반 마련, 지리서.역사서를 편찬하다.
각 도의 지리와 풍속 등을 기록한 인문 지리지
1481년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은 전국을 양경 8도로 나누고 각 도의 역사, 지리와 풍속, 물산, 인물 정보에 문사들의 시문을 첨가한 인문 지리서이다. 1530년(중종 25)에 <동국여지승람>을 보완하여 책을 간행했는데, 기존 내용을 기술한 뒤 새로 증보된 내용을 각 항목의 끝에 ‘신증’이라고 밝히며 덧붙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지리지 편찬
국가 통치의 기본은 지리, 인구, 물산을 잘 파악하는 것입니다. 세종은 국가 경영에 필요한 실용적인 정보를 수집하고자 전국의 호구.군정.조세 항목을 담은 지리지 편찬을 지시했습니다. 성종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은 지리지에 시문을 결합한 구성으로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하여 통치의 기반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성종 때 완성한 고대부터 고려까지의 역사 기록
조선 왕조에서 공식적으로 편찬한 최초이 통사이다. 1458년(세조 4)에 편찬을 시작하여 1485년(성종 16)에 완성하였다. 세조는 조선 이전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목적으로,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역사 전체를 연대순으로 기록한 편년체 통사를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세조대에 완성을 보지 못하고, 1484년(성종 15)에 완성하였다. 오늘날 전해지는 것은 이듬해인 1485년 편찬자들의 사론을 붙여 새롭게 편찬한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녀)
한글 창제, 백성을 위해 글자를 만들다.
조선전기 세종대를 중심으로 조선은 천문학은 물론 수학, 도량형, 의약학, 농학, 화약과 무기제조 등 모든 과학 기술분야에서 괄목할만한 발전을 보였다. 그 중 가장 뛰어난 발전은 우리고유의 문자인 한글을 창제했다는 것이다. 표의 문자인 한자를 대신한 표음문자를 사용할려는 의도는 신라시대 이두를 비롯하여, 일본어, 북방유목민의 문자인 거란어, 몽골어, 만주어 등 다양한 시대가 있었고 실생활에도 많이 사용되기도 했지만, 한글만이 거의 유일하게 민가생활에 깊게 뿌리내리어 오늘날까지 공식적인 문자로 자랑할만한 발자취를 남겨오고 있다.
한글 창제 원리
세종은 1443년(세종 25) 한글을 창제했습니다. 우리의 말이 중국과 다르다고 인식하여 우리에게 맞는 문자를 만든 것입니다. 한글은 획기적인 발명품이며 세계 문자 중 만든 사람과 반포 시기, 창제 원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글자입니다. 한글 기본자음인 ‘ㄱ,ㄴ,ㅁ, ㅅ,ㅇ’은 ‘혀, 입술, 치아, 목구명’ 등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 떠 만들었고, 기본 모음인 ‘·, ㅡ, ㅣ’는 각각 ‘하늘, 땅, 사람’의 모양을 기반으로 만든 것입니다. 기본 자음과 모음에 획을 더하거나 글자를 포개어 다른 글자를 만드는 원리는 현대 디지털시대에 적합한 방식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한글로 엮은 최초의 책으로 15세기 언어와 문학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한글로 지은 최초의 문학작품
태조의 4대조와 태조, 태종까지 6대의 행적과 조선의 건국 과정 및 관련 설화 등을 담은 장편 서사시이다. 총 12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글로 지은 본문 뒤에 한문으로 주석을 달았다. 한글을 사용하여 처음으로 지은 글로, 15세기 언어와 문학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세종의 명으로 간행했으며 권제 등이 편찬에 참여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국조보감>에 수록된 훈민정음 관련 기록
본받을 만한 역대 왕의 선정을 모아 편찬산 <국보보감> 세종편에 세종의 업적으로 훈민정음 창제 관련 내용을 수록했다. 세종은 일반 백성이 글자를 몰라서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음을 마음 아프게 여겼다. 그는 백성을 가르치능 바른 소리라는 뜻을 가진 훈민정음을 1443년에 만들어서 1446년에 반포하였다. 세종의 훈민정음의 창제는 고유어의 표기 수단으로 만든다는 실용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바른 소리를 가르친다는 목적도 있었다. 훈민정음은 유과 불교 서적의 번역, <농사직설>과 같은 실용서, <내훈>같은 교화서 등의 편찬에 활용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한글 금속활자로 간행한 불경언해
세조가 번역하고 1461년(세조 7) 간경도감에서 간행했다. 온전한 불교 경전 중 가장 먼저 언해한 것으로 15세기 국어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한자로 된 본문은 1455년(세조1)에 강희안의 글씨체로 만든 을해자로 찍었다. 함께 사용한 한글 활자는 ‘을해자와 함께 쓴 한글 활자’ 또는 ‘을해자 병용 한글 활자’라고 하며, <능엄경언해>에 처음 사용하여 ‘능엄한글자’라고도 한다. 이 활자는 <능엄경언해>를 간행한 1461년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30여 자가 남아 있다.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현존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을해자는 세조 때 (1461년)에 간행된 <능엄경언해>에 사용된 한글 활자이다. 제작 시기는 세조1년(1455)과 세조7년 사이로 추정된다. 활자의 글자체가 조선 후기의 것과 다르며, 활자의 모양도 조선 후기와 달리 활자의 뒷면이 평평한 것이 주를 이룬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조선시대 활자이다.
편경은 국악기 조율의 기준이 되는 악기이다. 타악기의 하나로 16개의 경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의 모양은 모두 같고 두께에 따라 음의 높낮이가 정해진다.
궁중 음악 아악의 기준음
국가 제례 음악인 아악을 정리하고 조선의 실정에 맞게 악기를 제작하는 일은 국가 권위를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아악에 사용하는 편경은 돌로 만든 악기로 온도에 따라 형태가 변하지 않으므로 음의 기준이 됩니다. 건국 초기에는 편경을 쇠나 흙으로 만들었기에 음을 제대로 조율할 수 없었습니다. 1430년(세종 12) 경기 남양(현 화성 남양동)에서 발견한 경석으로 편경을 제대로 제작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과학 기술 발전, 백성에게 시간과 계절을 알려주다.
해시계
세종 때 만들어진 앙부일구는 전하지 않는다. 현재 남아 있는 앙부일구는 모두 1654년 시헌력 시행 이후에 제작된 해시계이다. 이 앙부일구 테두리에 ‘북극고삼십칠도삼십구분일십오초’라고 적혀 있어서 1713년(숙종 39) 한양의 북극 고도가 37도 37분 15초임을 실측으로 알게 된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앙부일구, 백성이 함께 사용하는 해시계
1434년(세종 16) 10월, 해시계 앙부일구를 백성이 많이 다니는 한양 종로의 혜정교(현 광화문 우체국 부근)와 종묘의 남쪽 거리에 설치하여 누구나 시간과 계절을 알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오목한 솥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앙부일구라고 합니다. 솥 안에 있는 뾰족한 영침의 그림자가 해가 떠서 질 때까지 원 내부의 가로선과 세로선에 놓이게 되는데 이 위치로 절기와 시간을 알 수 있습니다. 원 내부 가로선은 24절기를, 세로선은 시간을 표시한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휴대용 앙부일구'(보물)는 구한말 고종 때(1871년) 강건이 만든 휴대용 해시계와 나침반이다. 앙부일구는 세종 때 처음 만들어진 해시계로 오목한 솥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세로 5.6cm, 가로 3.3cm, 두께 1.6cm의 작은 크기이다.
휴대용 앙부일구, 보물, 강건, 조선 1871년, 대리석
이 앙부일구는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된 것이다. 지남침을 활용해 방향을 맞추고 시간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앙부일구에는 24절기를 나타내는 13개의 계절선과 30붙 간격의 시각선이 새겨져 있다. 바닥면에 “동치 신미년(1871) 맹하(4월) 하순에 진산인 강건이 만들었다”라고 적혀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조선통보, 조선 최초의 동전
건국 초에 닥나무 껍질로 만든 지폐를 사용했으나 가치가 떨어지자 만든 동전이 조선통보입니다. 조선통보 10푼의 무게는 1냥(약 40g)이었습니다. 구리 1근을 조선통보 1백 60푼으로 교환해 주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널리 통용되지 못하고 한시적으로 유통되는데 그쳤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저울추, 저울 정비 및 보급
도량형을 통일하는 일은 국가를 통치하는 데 중요합니다. 세종 때 새 저울을 만들어 보급하고 정비했습니다. 1427년(세종9) 공조에서 제작한 이 저울 추에 ‘근’과 ‘냥’이라는 무게 단위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1근(약 641g)은 16냥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삼총통, 화약 무기 개발
세종은 화약 무기를 개량하는 데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 시기에 여러 총통을 새로 만들어 실전에 활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 전기 총통은 탄환이 아니라 화살을 발사했습니다. 당시 화포 내부에 강선이 없어서 포탄은 포 안에서 자유 운동을 하면서 날아가기 때문에 정확성이 매우 떨어졌습니다. 반면에 화살을 재워 쏘면 비교적 안정적으로 날아갈 수 있었습니다. 삼총통의 사정 거리는 약 960m로 추정됩니다. 이와 같이 무기를 개랑하여 4군과 6진을 설치했습니다. 4군과 6진의 개척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잇는 북쪽 국경선이 확정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조세 정책, 백성의 여론을 수용하다.
15세기 공납용 자기
조.용.조 제도에 따라 각 지역에서는 특산물을 왕실과 관청에 납부했습니다. 15세기 중반까지 지방에서 도자기를 납품했습니다. 지역과 관청 이름이 새겨져 있는 분청사기가 그러한 예이니다. 특히 지역으로는 경주, 군위, 영천, 밀양 등 경상도가, 관청으로는 장흥고와 인수부가 많습니다. 그릇에 관청 이름을 새긴 이유는 장흥고에서 다른 관청에서 사용할 그릇을 나누어 주고, 행사가 끝난 뒤 다시 거둬들이는 일을 담당했는데, 반납 비율이 1/5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1417년에 관청에 납품할 사기와 나무 그릇에 관청 이름을 새기도록 명을 내렸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조선전기 조세제도
조선 전기 조세 제도는 조.용.조입니다. 조는 토지에 부과하여 쌀과 콩을 거두는 방식, 용은 성인 남자의 노동력을 징발하는 것이며, 조는 고을에 따라 특산물을 거두는 제도입니다. 세종은 공평한 토지세 정책 수립을 위해 1430년 5개월 동안 전 인구의 4 분의 1에 해당하는 17만 2,806명을 대상으로 여론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찬성이 57% 나왔으나 반대도 많았다는 이유로 꾸준히 세법을 가다듬어 144년에 토지 비옥도와 풍흉에 따라 구분하는 전분 6등제와 연분 9등제를 시행했습니다.
전분6등제는 토지바옥도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어 세금을 내는 제도입니다. 1등전은 같은 면적의 6등전보다 수확량이 4배 많습니다.
연분9등제는 매년 농사의 풍흉을 9등급으로 나누어 토지 1결당 적게는 4두, 많게는 20두를 내는 제도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세종의 민본 정치
조선 제4대 임금, 세종대왕
역대 왕의 본받을 만한 업적을 모아 편찬한 <국조보감>에는 세종대왕의 성품과 업적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왕실 연구기관인 집현전을 개편하여 유능한 학자를 육성하였고 우리말을 과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글자인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또한 과학기술이 나라의 기틀이라 생각하여 측우기, 해시계, 물시계 등 각종 과학 기구를 발명하였다. 국토 확장에도 힘써 남쪽으로는 왜구를 격퇴하고 북쪽은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했으며, 백성들의 교화에도 관심을 기울여 <삼강행실도> 등의 서적을 편찬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세종의 민본 정치
세종은 조선시대에 가장 훌륭한 업적을 남긴 왕입니다. 그의 업적에는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민본 사상과 우리 풍토에 맞는 문물을 만들겠다는 현실 인식이 담겨 있습니다. 세종은 백성이 쉽게 글을 쓸 수 있도록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도록 측우기.물시계.해시계를 고안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에 맞는 역법서를 만들고 우리 풍토에 맞는 농법을 수합했습니다. 그리고 여론을 조사하여 백성의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조세 정책을 만들었습니다. 세종은 신분에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하고 신권과 왕권의 조화를 중시했기 때문에 이러한 업적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세종은 인사와 군사 분야에서 이조와 병조의 직계를 용인하고 나머지는 신하들에게 맡기는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하여 신하들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한 진정으로 힘이 있는 왕이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유교 국가의 친불교 정책
유교국가를 지향한 조선왕조는 억불정책을 근간으로 국가를 운영했지만, 삼국시대부터 국민들의 생활에 깊게 뿌리내린 불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특히, 조선의 개국에 크게 공헌한 무학대사, 월인석보상절을 저술하는 등 불교를 크게 후원한 세조, 조선중기 불교를 크게 중흥시키고 오늘날의 불교를 있게 만든 중종의 계비인 문정황후 등이 있어서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조선 왕실과 불교의 관계는 국가적으로 후원을 받은 양주 회암사, 세조가 크게 중장한 오대산 상원사, 왕릉을 지키면서 선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 등을 두어서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게 하고 있다. 중앙박물관 조선실에는 조선왕실과 관련된 불교 유물로 회암사 절터에서 출토된 청동금탁, 기와, 잡상을 전시하고 있는데 전시할 유물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왕실의 불교 후원
조선 왕실의 후원을 받은 회암사 보광전에 매달았던 전체 높이가 31.8cm나 되는 규모가 매우 큰 풍경으로 회암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풍경에는 134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글에서 풍경을 ‘금탁’으로 지칭했기에 이 풍경을 금탁으로 부릅니다. 금탁 상단 표면에 ‘왕사, 묘엄존자, 조선국왕, 왕현비, 세자’라는 글자가, 테두리에 조선이 만세토로 전해질 것을 발원한 내용과 시주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서 조선 왕실과 사찰의 친밀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 국왕은 태조 이성계, 왕현비는 신덕왕후 강씨, 세자는 이방석입니다. 왕사 묘엄존자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무학대사입니다. 유교 국가 조선에서도 승려를 임금의 스승으로 두는 고려의 왕사 제도를 유지했고 왕실 인사들이 불교 관련 활동을 지속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금탁 테두리의 글
천보산에 있는 회암사 보광전 네 모퉁이는 금벽으로 화려하게 꾸미어 천궁보다 훌륭하다. 금탁을 달아놓고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기 바란다. 우리가 이 신묘하고 아름다운 연기를 받들어 조선의 국호가 만세에 전해지도록 하소서.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효령대군 명칭과 ‘정통병진’이라는 글씨와 봉황무늬가 새겨져 있어 왕실과 관계깊었던 사찰임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효령대군’ 글자가 있는 수막새 제작 시기
회암사 보광전 터에서 출토된 기와 중에 ‘옴마니반메홈’의 ‘옴’자가 있고 주변에 ‘효령대군’ 아래에 ‘선덕갑인오월’글자가 있는 수막새가 있습니다. 효령대군은 세종의 둘째 형으로 대표적인 친불교적 왕실 인사입니다. 이 수막새의 글자로 인해 그가 선덕 연간(1426~1435) 갑인년인 1434년(세족 16) 5월에 기와 제작에 관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효령대군’ 글자가 있는 수막새 제작 배경
이 수막새가 제작되기 한달 전 1434년 4월 회암사 보광전 중수를 반대하는 성균관 유생이 상소가 올라왔습니다. 세종의 모친 원경왕후가 수놓은 불화를 보관하던 보광전에 비가 새자 회암사에서 수리비를 모금했습니다. 회암사는 왕실 후원 사찰로 명성이 높았기에 많은 재화가 몰렸습니다. 유학자와 신하들은 회암사 중수를 반대하는 의견을 내놓으면서 조정에서 여러 차례 논의가 이어졌습니다. 세종은 처음에는 왕실과의 관련성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결국 왕실과의 관련성을 인정하고 보광전 중수 규모를 최소화하겠다고 하면서 효령대군에게 이 뜻을 전달하겠다고 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천순경진’ 글자가 있는 암막새와 수막새 장식 문양
천순 연가 중 경진년은 1460년(세조 6)으로 이 때 기와를 제작한 것입니다. 수막새는 봉황 문양으로, 암막새는 용 문양으로 장식했습니다. 용과 봉황은 왕과 왕비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왕실 원찰로서의 회암사 지위를 나타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조선왕실의 원찰인 양주 회암사는 태조 이성계의 후원으로 크게 번성한 사찰이다. 이 곳에서 무학대사가 주지를 지냈으며,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이 또한 이곳에서 불교공부를 했었다고 한다. 조선전기에는 크게 번성했다가 문정왕후의 불교중흥에 반감을 가진 유림들에 의해 임진왜란 이후에 폐사되었다고 한다.
왕실 원찰 회암사의 규모
회암사는 고려 1328년 창건되어,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최대 왕실 사찰이었습니다. 1424년(세족 6) 이 절에 250명의 승려가 있었고, 경내가 약 33,057㎡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회암사 중심 전각 보광전에는 다란 사찰에서 보기 힘든 월대가 있습니다. 월대는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강녕전 등 궁궐의 주요 전각에 설치하는 시설물로, 왕실 사찰 회암사의 위상을 보여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유교 국가의 친불교 정책
조선은 국초부터 불교를 약화시키는 정책을 펼쳤으나 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불교 신앙은 쉽게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왕실도 계속 불교를 후원했습니다. 태조, 세조 등은 친불교 성향의 군주였고, 특히 세종은 배불 정책과 호불 정책을 적절히 시행하며 불교의 인적.물적 자원을 국가 사업에 활용했습니다. 16세기에는 사림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하면서 불교가 약화되었습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승려들이 의병으로 활약하고 전란 이후 사회적인 요구가 커지면서 불교의 영향력은 지속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조선, 1392 ~ 1897년
14세기 말 고려는 내적으로 왕권이 흔들리고 외적으로 원에서 명으로 교체되는 불안정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사대부와 이성계로 대표되는 무인 세력이 1392년 7월 17일 조선을 세웠습니다. 조선은 숭유척불, 존명사대, 중농주의를 국가 경영 원칙으로 삼고 이를 지키고 500여 년 존속했습니다. 이는 왕과 사대부가 성리학을 기반으로 어진 마음과 바른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는 왕도 정치를 추구하였기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조선은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제도의 변화를 모색하여 유교 질서 체제를 견고하게 만들었습니다. 조선의 역사는 세기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5세기에 성리학 이념을 반영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했고, 16세기에는 사림이 정치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했고 성리학 이론이 정교해졌습니다. 1592년 일본과, 1636년 청과 전쟁을 치른 후 17세기 후반에는 개혁적인 조세 제도인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시행하고 화폐를 본격적으로 사용하면서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게 됩니다. 18세기는 탕평 정책을 펼쳤고 문예가 부흥한 시기입니다. 그러나 19세기는 동서 문명이 충돌하는 전환기로 조선은 서양의 개방 요구에 직면했습니다. 기존 체제의 유지와 서구 문물의 수용이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결국 개항과 변화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