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이후 숙종대까지는 예송논쟁을 중심으로 한 붕당정치가 시대를 대표하는 현상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숙종대에는 국방의 강화를 위해서 강화산성과 돈대, 남한산성 등 오늘날 남아 있는 많은 성곽들을 크게 보강했으며,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지배계층의 저항이 극심했던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시행하였으며, 상평통보의 유통같은 조치를 통해 영.정조대 중흥기를 준비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대명의리를 주장한 송시열의 상소
송시열은 효종에게 올린 상소문 <기축봉사>에서 주자학 수용의 중요성과 대명의리론을 강조했다. 그는 명의 망국 이후 직접적 북벌이 아닌, 때를 기다리며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것으로 사상을 전환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대명의리론의 상징, 김흥하의 업적 기록
김응하는 후금과 명의 전투에서 명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광해군은 후금과 명 사이에서 실리적인 외교 정책을 취하여 전쟁 참여에 소극적이었다. 대신 의심을 덜기 위해 김응하의 업적을 높였다. 이후 대명의리론이 강화되면서 조선 사회에서 김응하 추모 열기가 지속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존명의식과 중화사상을 상징하는 그림
숙종은 명이 멸망한 지 60년이 되던 해인 1704년에 임진왜란 때 지원군을 보내준 신종과 명 마지막 황제 의조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대보단을 창덕궁 후원에 건립했다. 대보단은 큰 은혜를 갚는다는 뜻으로 강화된 존명의리와 조선이 유교문화를 계승한 유일한 문명국가임을 표방하는 중화사상을 반영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명나라 연호 사용에 대한 이익의 의견
‘숭정’은 명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연호이다. 조선 후기 지식인들은 청이 명을 물리치고 중국의 주인이 된 뒤에도 오랑캐의 나라라며 청을 부정했다. 명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청 황제들의 연호를 기록하는 대신에 ‘숭정기원’을 사용했다. 이익은 이러한 풍습이 청과의 관계에 미칠 부정적 영향에 대해 우려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종가의 제사를 이을 수 있도록 입양을 승인한 문서
1653년에 허방한이 양자를 입양하고자 하여 승인한 문서이다. 조선 전기 재산 상속의 권리와 제사의 의무는 자식들에게 균등하게 주어졌으나 성리학적 사회 질서가 정착되면서 종손에게 상속이 집중되고 적서의 구분이 엄격해졌다. 따라서 종손이 없는 종가에서는 동종의 후손을 양자삼아 제사를 잇게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품 김씨 가문의족보
청풍 김씨 청로상장군파의 족보이다. 청풍 김씨의 시조는 고려 말 김대유이며, 대표적인 인물은 대동법을 확산시킨 김육이다. 15세기 이후 조상을 기리고 계보를 정리하기 위해 족보가 간행되기 시작했는데, 양란 후 족보의 간행수가 증가했다. 조선 전기 족보는 친손과 외손의 차별 없이 구성되었으나, 점차 외손의 범위를 축소하여 기재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풍 김씨 가계도
조상을 기리고 계보를 정리하는 작업은 고려시대에도 있었으며 조선시대부터 족보를 본격적으로 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전란 이후 족보 간행이 매우 증가했습니다. 17세기 가장 중요한 인물로 김육을 들 수 있습니다. 김육은 청품 김씨 정로상장군파 14세입니다. 아들 김좌명도 대동법 확산에 힘썼고, 손자 김석주는 금속활자 한구자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숙종대 환국 정치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입니다. 당시 이 집안은 서인에 속해 있었는데 김석주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예의 정치학, 예가 삶을 지배하다
여러차례 사화를 거치면서 선조 대 이후 사림세력이 중앙 정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들은 기존 세력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동인과 서인이라는 붕당이 생겨났다. 동인에는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 많았고, 서인에는 이이와 성혼의 문인이 많았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추대하는 인조반정(1623)이 이후에는 서인이 대표적인 집권세력이 되었다.
붕당 정치 계보
서경덕, 이황, 이이 등 지방에서 기반을 다진 성리학자들이 학파를 형성했습니다. 학파는 정파가 되어 붕당을 이루었는데, 붕당은 각각의 학설에 따라 예론, 정치.사회 정택을 논쟁하며 사회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상례 참고서
성리학자 신의경이 짓고 예학의 종장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이 보완하여 간행한 상례 지침서이다. 이 책은 <가례>를 기초하고 여러 학자의 해설을 덧붙여서 상례의 모든 단계를 상세하게 정리했다. 상례 때의 인간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제사하고자 그림과 도표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조선시대 제기의 변화
도자 제기는 시기에 따라 형태가 변했다. 조선 초에는 금속 제기를 본떠서 도자로 제기를 만들었으나 17세기 도자 제기에서는 금속 제기의 원형을 찾을 수 없고 추상적인 모양으로 변모했다. 18~19세기에 우리에게 익숙한 굽이 높은 사발과 접시 모양의 백자 제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조선시대 제사
전란 이후 부계 중심의 친족 제도가 정착해 가면서 부게 혈족 구성원의 결집이 강화되었다. 성과 본관이 같은 부계 혈연 집단인 문중 조직이 발달했다. 구성원들은 조상 제사를 함께 지내면서 결속을 다지고 문중의 위세와 권위를 드높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암행어사 제도는 국왕이 지방관을 관찰하는 제도이다. 국왕이 암행어사를 지방에 파견하여 백성들의 생활과 지방관리들의 시정 득실을 몰래 관찰하고 민심을 수습하여 국정에 반영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 걸리고, 신분이 노출되기 쉬우며, 지방 수령도 실권이 있는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조선후가 암행어사 중 영조 때 활동한 박문수 외에는 업적으로 알려진 인물이 많지 않다.
출장 가는 관원에게 준 역마 사용 허가증
관원이 출장 중 역참에서 말을 갈아탈 때 제시하는 표식이다. 상서원에서 발급하며, 고려시대에는 나무 호패였으나 파손이 심해 세종 때부터 금속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앞면에는 자호字號와 제작연월, 상서원인尙瑞院印을 새겼고 뒷편에는 관원의 등급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말의 수를 그림으로 표시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함경도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작성한 문서
함경도 무산 지역에 파견된 암행어사가 그 지역 주민 생활의 어려움을 조사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 등을 제시한 문서이다. 무산 지역은 북쪽으로 치우쳐 있는 지역으로서 백성들의 생활이 매우 어렵다고 하며 특히 세금의 폐단을 지적했다. 주요 폐해는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이자를 붙여 거두었던 환곡의 폐해, 백성들에게 고스란히 세금을 부담시키는 결포제의 폐해, 지나친 녹용 진상 요구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네 개의 중국 척이 새겨진 자
진유척은 놋쇠로 만든 자입니다. 네 면에 각각 후한 건초 연간에 제작된 건초척, <주례>에 규정된 주척, 1741년 청에서 제작된 영조척, 그리고 송에서 제작된 포백척이 새겨져 있습니다. 네 개의 자를 한꺼번에 새겨 넣은 이유는 척도의 기준으로 삼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자는 지방 관청으로 보내져 자의 기준이 되었고, 또한 암행어사가 관아의 형구를 검사하거나 검시를 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조선은 황종척을 단위의 기본으로 삼았으나, 국가의 문물 제도의 근원을 주나라에 두기 위해 주척으로도 척도의 체계를 세웠습니다. 영조척은은 목공과 건축에 사용했으며, 포백척은 직물의 길이를 재는 데 사용했습니다. 포백척은 세금으로 내는 면포 측량에 사용하므로, 나라에서 규제를 했으나 실제로는 자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암행어사
조선시대에 지방 통치 제도를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왕의 특명 사신을 군현에 파견하여 지방관을 감찰하도록 했습니다. 왕의 명을 받고 비밀리에 임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암행어사라고 했습니다. 지방 수령이 정치를 잘 하고 있는지, 백성의 어려움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 암행어사의 임무입니다. 암행어사는 역참에서 말을 갈아탈 수 있는 허가증인 마패, 공평함을 상징하는 자尺, 명령서를 지니고 목적지로 향했습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조사한 내용과 개선책을 문서로 작성하여 왕에게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거리가 멀어 목적지에 도착하는 데에도 오래 걸리고, 신분이 노출되기도 하고, 지방 수령이 활동을 방해하기도 하는 등 암행어사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지방 읍의 기록
<지례현읍지>는 지금의 경북 김천시 지례면 관련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읍지는 조선 전기에는 <세종실록>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 전국적인 관찬지지 편찬을 위한 1차 자료로서 작성되었으나, 19세기에는 토지.인구 등 각 지방의 현황 파악 및 각종 행정 자료의 수집을 위해 제작되었다. 읍지는 조선시대 각 읍의 지지인 동시에 지방사이자 정책자료가 되는 중요한 행정 사례집이라고 할 수 있다. 고종 대에 가장 많은 읍지가 편찬되었으며, 산천.도로.강계를 채색하여 알기 쉽게 만들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지방 통치 제도
조선 초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고을 크기에 따라 부.목.군.현으로 구분했습니다. 전국 약 330여 개이 군현 아래에 면.리.통이라는 하위 행정 단위를 두었습니다. 각 도에 파견된 종2품 관찰사는 도내의 모든 군사와 민사를 지휘했고, 병마절도사를 겸하여 지방 병권까지 장악했습니다. 군현에는 종2품 부윤, 정3품 목사, 종3품 부사, 종4품 군사, 종 5품 현령, 종6품 현감 등의 지방관을 파견했습니다. 지방관은 왕의 대리인으로서 행정.사법.군사.교육 등 광범위한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지방관의 권력 집중을 막기 위해 고향 등 연고가 있는 지역에는 근무하지 못하게 하는 상피제를 적용했습니다. 지방 관서의 서리와 향리는 수령의 행정 실무를 보좌했습니다. 이처럼 조선은 전국의 모든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명실상부한 중앙 집권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조선후기에는 국가적인 필요에 따라 실록자와 정리자같은 금속활자를 만들어 사용했다. 민간에서는 금속활자를 만들어 사용하기는 했으나, 일반적으로는 나무로 만든 목활자가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많은 수량의 조선시대 활자가 소장되어 있다. 이 활자는 국가 주도로 제작된 수백만 자 가운데 현존하는 것으로, 주로 17~20세기 초까지 중앙관청과 왕실에서 사용했다.
갑인년의 글자체로 임진년에 다시 만든 활자
임진자는 1434년(세종 16)에 만든 갑인자의 글자체로 1772년(영조 48) 임진년에 다시 만든 활자입니다. 정조는 갑인자의 글자체로 세손 시절인 1772년에 임진자 15만자, 즉위한 해인 1777년 정유년에 정유자 15만자를 만들었습니다. 현존하는 갑인자체 활자는 대부분 임진자이지만 정유자를 비롯해 다른 시기에 제작된 활자도 일부 남아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정유자로 간행된 선왕들의 업적
태조에서 영조까지 선대 국왕들의 행적에서 모범이 되는 내용을 뽑아 엮은 책이다. 이복원 등의 정조의 명으로 간행했다. 제목은 요임금이 돌아가시자, 순임금이 밥 먹을 때는 국 그릇에서, 앉으면 담벽에서 요 임금이 나타났다는 고사에서 따왔다. 선왕의 교훈을 아침저녁으로 살펴 따르고자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세종이 만든 갑인자는 조선의 대표활자로 여러 차례 다시 주조되어, 유교 통치에 필요한 서적 간행에 주로 사용되었다. 정조가 <갱장록>을 갑인자체 활자인 정유자로 간행하도록 명한 것은 선왕들의 업적을 기리면서 왕실의 권위를 드높이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갱장록> 권5 선왕들이 천지와 조상에 제사를 지낸 행적을 모은 <비사>의 마지막 면 영조 부분을 재현했다. 앞선 왕조가 있어 조선왕조가 존재할 수 있었다고 하여 단군에서 고려까지 역대 왕조의 묘역 등을 정비하고 그 자손들을 대우하란느 내용을 담았다. 재현에 사용된 활자는 원본에서 사용된 정유자와 똑같은 활자는 아니다. 현존하는 갑인자체 활자는 대부분 1772년에 주조한 임진자이지만, 1777년에 주조한 정유자와 육안으로 구분하기 어렵다. 식자판에 종이를 얹어 인쇄한 후 반으로 접어 제본했기 때문에 완성된 책에서 앞 뒤장이 한면을 이룬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정조가 계획하여 개량한 활자
정조는 통치 이념을 담은 서적을 널리 배포하고자 출판과 인쇄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습니다. 1796녀(정조 20)에 완성된 정리자는 총 30만여 자로, 정조가 계획한 활자 개량의 결과물이자, 정조를 상징하는 활자입니다. 1857년(철종 8) 주자소 화재로 정리자 상당수가 불에 타자 다음 해 12만 8천여 자를 다시 만들었습니다. 현재 두 시기의 활자가 함께 남아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정리자로 간행한 화성 건설 기록
1794년(정조 18)에서 1796년(영조 20)까지 화성 건설 과정을 기록한 의궤로 김종수 등이 정조의 명으로 편찬하였다. 정조는 1797년 정리자로 사도세자의 묘소인 화성 현륭원에 어머니를 모시고 행차한 기록인 <원행을묘정리의궤>를 제일 먼저 간행하게 하고 이어서 <화성성역의궤> 역시 정리자로 간행하게 했다. 화성은 정조의 새로운 정치에 대한 의지를 상징하는 곳이어서, 두 의궤를 정리자로 간행하여 자신의 뜻을 널리 전하고자 한 것이었다. 정리자는 정조가 직접 편찬한 책이나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 등을 간행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관보> 등 근대 인쇄물 간행에도 사용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화성성역의궤> 권2에 수록된, 정조가 화성에 행차하여 지은 글들을 모은 어제의 첫번째 면을 정리자로 재현했다. 장안문루에서 화성 건설을 총괄한 총리대시과 주고받은 시, 팔달문루와 동장대에서 좌의정과 주고받은 시 등이 실려 있다. 현존 정리자에는 1858년에 다시 주조한 것이 혼재되어 있어 인쇄본의 활자와 똑같은 활자를 식자한 것은 아니다. 식자판에 종이를 얹어 인쇄한 후 반으로 접어 제본했기 때문에 완성된 책에서 앞뒤장이 한 면을 이룬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왕세자와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활자
조선의 공식 문자는 한자여서 조선시대에 만든 활자도 대부분 한자 활자입니다. 하지만 왕세자 교육이나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 필요한 유교 서적 언해본 등을 간행하려고 한글 활자를 만들었습니다. 17세기에 금속활자를 새로 만들면서 한글 금속활자도 만들었습니다. 백성들에게 배포하는 언해본에는 주로 목활자를 사용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한글 금속활자로 간행한 유교 경전 언해본
한자로 된 원문에 구결을 달고 한자와 한글을 함께 사용한 번역문을 넣었다. 한자 아래에는 한글로 독음을 넣었다. 한자는 1668년 갑인자의 글자체로 네번째 주조한 무신자로 인쇄하고, 한글은 17~18세기 무신자와 함께 사용한 한글 활자인 ‘무신자 병용 한글 금속활자’로 인쇄했다. 세자궁을 뜻하는 춘궁 도장이 찍혀 있어 왕세자 교육을 위해 간행한 책에 한글 금속활자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활자들은 17~18세기에 왕명으로 간행한 유교 경전을 비롯한 여러 언해본에 두루 사용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한글 목활자로 간행한 정조의 명령
원춘도(강원도)에 흉년이 들자 해당 지역 백성의 세금을 감해준다는 정조의 윤음을 한글로 풀이한 부분이다. 정조는 재위 기간에 여러 차례 윤음을 내렸는데, 한문으로 된 원문은 대부분 임진자로 간행했으며,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에게 내리는 윤음에는 한글 번역문을 뒤에 붙였다. 번역문에는 ‘무진자 병용 한글 금속활자’도 일부 사용하고 모자라는 글자는 금속활자와 같은 글자체로 목활자를 만들어 사용했다. 한글 활자를 만들어 윤음을 번역하고 배포한데에는 백성들에게 직접 본인의 뜻을 전달하려는 정조의 의지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문집간행에 널리 사용된 명조체 활자
교서관인서체자는 17~18세기에 명나라 판본에 사용된 새로운 글자체인 인서체(붓으로 쓴 드산 글자체와 구분되는 각진 글자체)를 본떠 교서관에서 만든 활자입니다. 유력가들의 문집 간행에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교서관인서체자로 간행한 송시열의 문집
숙종의 명으로 간행한 조선 후기의 문신 우암 송시열의 문집이다. 이 책의 간행에 사용된 교서관인서체자는 서적의 출판 등을 담당한 교서관에서 명나라 판본에 사용된 새로운 글자체인 명조체를 모방해 만든 활자이다. 왕명으로 통치에 필요한 책을 간행하는데 사용되었으나, 사대부가의 문집 간행에 더 많이 사용되어 ‘문집자’로 부르기도 한다. 이 활자로 간행한 문집은 대부분 후손이나 제자들이 사적으로 간행했으나 송시열의 문집은 왕명으로 간행되었다. 17세기 후반 처음 주조된 후 여러 차례 보충 주조됐는데, 글씨체에 따라 크게 전기와 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한구의 글씨체로 만든 활자
한구자는 17세기 후반 김석주가 명필 한구의 글씨체로 만든 활자입니다. 정조의 명으로 1782년(정조 6) 8만여 자를 다시 만들었으며, 1857년 주자소 화재로 불에 타자 다음해 3만여 자를 더 만들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한구자로 간해안 규장각 문신들의 글 모음
정조가 선발하여 규장각에서 교육한 초계문신들이 지은 문장 가운데 뛰어난 것을 골라 편찬한 책이다. 당대의 모범이 되는 문장들을 모아 간행함으로써, 문예를 진흥시키고 후학들을 분발시키고자 하는 정조의 의지를 담고 있다. 여기에 사용된 한구자는 1792년에 정조의 명으로 다시 만든 것으로 재주 한구자 또는 만든 해의 간지에 따라 임인자라고 한다. 한구자의 글자체는 가는 붓으로 쓴 행서체에 가까우며, 글자 크기도 다른 활자에 비해 작다. 정조는 문집이나 규모가 작은 책을 찍을 활자가 필요하다고 여겨 한구의 글씨체로 다시 활자를 주조하게 한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실록 간행을 위해 만든 활자
실록자는 1677년(숙종 3) <현종실록> 간행에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1673년 이전에 낙동계(한성 동부지역 유력가들의 모임)에서 만든 금속활자와 실록을 간행할 때 추가로 만든 활자가 섞여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실록자로 간행한 이인좌의 난의 전말
1728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이 평정된 후, 영조의 명으로 송인명 등이 난의 진행 과정과 원인 등을 여러 자료에서 뽑아 편찬했다. 영조가 쓴 서문에 이 사건의 원인을 붕당에서 찾고, 이러한 변란의 재발을 막기 위하여 이 책을 편찬한다고 명시했다. 낙동계에서 만든 활자와 <현종실록> 간행 때 만든 활자, 이후 실록 등을 간행할 때 만든 활자들을 함께 사용했다. 실록을 간행할 때마다 필요한 글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실록자의 글자체는 동일하지 않다. 남아 있는 실록자 중 상당수는 19세기 초에 주조한 활자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금속활자 제작과 서적 간행
조선의 왕들은 금속활자를 만들어 유교적 통치에 필요한 서적을 간행하는 일을 주도했습니다. 1403년 태종이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를 만든 후, 세종부터 중종까지 수차례 활자를 만들었으나, 전란을 거치면서 대부분 불에 타고 사라졌습니다. 전란 후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는 데 필요한 서적을 간행하기 위해 17세기 중반부터 다시 금속활자를 만들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17~18세기에 중앙 관청과 왕실 등에서 만든 금속활자 50만여 자, 목활자 30만여 자가 있습니다. 한 왕조에서 만든 활자가 이처럼 많이 남아 있는 사례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활자들은 유교 통치 이념을 실현하고자 했던 조선 통치자들의 포부의 상징이자 조선시대 금속공예와 인쇄 기술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정리자 주조 기록이 있는 서랍
1796년에 주조한 정리자 수량, 1857년 주자소에 화재가 났을 때 불탄 활자 수량과 새로 만든 활자 수량을 기록했다. 또한 남촌 균역청에서 활자를 새로 만들었다는 사실과 제작 기간, 새로 지은 주자소 판당에 활자를 보관한다는 내용도 기록했다. 1857년 주자소 화재 후 정리자와 한구자를 새로 주조했다. 이 때 정리자 보관장도 다시 만들었는데, 이 서랍에는 “정리자 주조가 함풍 무오년에 이루어졌다.”라고 기록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활자 보관 방식을 알려주는 기록이 있는 서랍
정리자 정간판에 칸별로 넣은 글자를 적어 측면에 붙였다. 자전에 子, 广, 斗, 气 皿, 米, 网, 襾, 采부에 수록되어 있으나, 조선시대 자보에는 米부, 皿부, 西부로 나누어 6장에 보관했다. 衛夫人字(갑인자의 별명, 17~18세기에 갑인자체로 다시 주조한 활자)으로 보관했던 정간판이다. 칸마다 <주자목록>의 4장 정간판에 기록된 것과 일치하여 실제 활자를 보관했던 방식을 알려준다. 깊이가 앝고 칸막이가 없는 서랍에는 같은 부수에 속하는 글자들을 비슷한 형태별로 분류하여 보관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정리자를 보관한 장
금속활자인 정리자를 보관했던 장이다. 오른쪽에 ‘정리자 패찰이 있고 안쪽 측널에 “소목장 송흥룡, 박은문이 무오년(1858년)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1857년에 활자를 보관하던 주자소에 화재가 나 정리자 등이 불에 타자 1858년에 활자를 다시 만들었다. 안쪽 측널의 기록으로 이 활자보관장을 이 때 송흥룡과 박은문이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장에 꽂은 서랍은 총 39개이며 13개씩 삼등분하여 배치했다. 11단까지는 서랍의 깊이가 얕고 내부에 칸살이 없는 서랍을 끼우고 아래 2단는 서랍이 더 깊고 각자형 칸살이 있는 정간판을 끼웠다. 서랍에는 자주 쓰지 않는 글자를 형태별로 구분하여 보관하고 정간판에는 자주 쓰는 글자를 글자별로 구분하여 보관했다. 아래 위 쇠목에 잠금장치를 끼웠던 흠이 남아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활자보관장
조선시대 금속활자는 ‘나라의 보배’라고 할 만큼 왕권을 대표하는 것이었으므로 철저하게 보관하고 관리했습니다. 활자를 7개의 장에 나누어 보관하고, 활자마다 수량을 기록한 목록인 자보를 만들어 각 장에 들어간 활자수를 기록하고 책임자를 두어 관리했습니다. 활자는 보관과 사용에 편리하도록 한자 자전 방식과 달리 부수를 통폐합하여 축소하고, 획수보다는 글자의 생김새에 따라 분류했습니다. 또 자주 쓰는 글자와 그렇지 않은 글자를 각각 정간판과 설바에 나누어 보관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임상 경험을 덧붙인 두창 전문 의서
현종 때 박진희가 지은 두창 전문서다. 전반부는 <동의보감>을 인용하여 두창에 관한 총론을 다루고 후반부는 자신의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두창의 진행 단계에 따른 치료법을 정리하였다. 임상 경험과 함께 의안을 정리해 붙이는 방식은 <두창경험방> 간행 이후 크게 유행하였다. 본문에는 대부분 한글풀이가 달려 있어 민간에 널리 보급할 목적으로 간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두창의 치료를 무속의 영역으로 여겨 의학적으로 필요한 음식을 섭취하지 않는 환자를 비판하기도 했다. 기존의 관습이나 금기에 얽매이지 않고 실제 임상경험을 통해 그 판단을 검증한 것이 특징적이다. 여러 이본이 존재하고 <고시촬요부록>, <산림경>와 같은 백과사전류 책이나 다른 의서에서 꾸준히 언급되고 있어 그 파급력을 짐작할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버려진 아이들을 나라에서 돌보는 법
1783년 흉년과 가난으로 버려진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정조의 명으로 반포한 법령집이다. 총 아홉 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문과 한글을 함께 썼다. 정조는 <자율전칙>을 제정한 이유를 강조하며 조성과 지방 수령들이 책임지고 버려진 아이들을 기르게 하였다. 실제로 한양5부에서 4~10세 걸식 아동들을 진휼청에 보고하면 이곳에서 아이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했다. 우선 이들을 진휼청 밖 빈터에 흙집을 지어 살게 하고, 세 살 이하의 버려진 영아들에게 젖먹일 수 있는 유모를 차자주거나 지원자를 물색해 양육에 필요한 양식과 의복을 지급하며, 병에 걸리면 혜민서에 치료했다. 또 해당 관청에서는 친척이 있는 아이는 친척에게 보냈고, 아예 버려진 아이들은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돌보도록 했다. 이러한 조치는 이 해 2월 강원도에서 시작되어 서울과 전국으로 확산되었던 역병과도 관련이 있다고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경상감영에서 간행한 두창 전문의서
이종인이 편찬한 인두법에 관한 의서이다. 19세기 이후 인두법을 수용한 중국 의서들의 이론 체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사용하기 쉽게 편집하였다. 이때 사용한 인두법은 두창 환자의 딱지를 이용하는 시묘법이 아니라 종두 후 생겨난 딱지를 이용하는 숙묘법으로, 독성을 줄일 수 있었다. <시종통편>에는 일반적인 두창의 증세 외에 종두로 인하여 나타나는 증세, 종두하는 방법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종인은 박제가, 정약용과 함ㄲ 인두법의 보급에 기여했다. 인두법은 1800년 봄 이종인이 한양 북부 지역에서 처음 실시한 후 1807년 경상도 상주에도 보급되었다. 이는 당시 두창이 성행했던 상황에서 효과를 확인하는 절차없이 인두법 보급이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경상감영에서 간행한 두창 전문의서
청나라 적옥화가 저술한 두창전문서로, 1807년 경상도 관찰사 윤광안이 대구의 경상감영에서 간행했다. 19세기 전반 경상도에서 <두과휘편>을 비롯한 여러 종의 두창 전문서가 간행된 까닭은 영남까지 잘 오지 않던 두창이 이 시기에 해마다 유행하여 심각한 피해를 입혔기 때문이었다. <두과휘편>을 우선 간행한 것은 1799년 내의원에서 간행한 종합 의서 <제중신편>에서 인용된 단 두 편의 전염병 전문 의서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러한 중국 서적을 조선에서 간행하는 것은 조선의 임상경험을 주로 하는 경험방류와 다른 흐름으로, 인두종법 등 중국 두창학의 성과를 수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임진왜란 후 간행한 대표적인 의학 서적
임진왜란으로 많은 의서가 사라지자 선조가 허준에게 의서를 짓도록 명했다. 이 책은 병의 치료보다 예방에 우선을 두고 편찬되었으며, 중국과 조선 의학의 핵심 정리와 도설을 포함하고 있다. 조선뿐만 아니라 청나라와 일본에서도 크게 인기를 얻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약재를 가루로 빻거나 찧는 도구
약연은 타원형 홈이 파인 연과 그 안에 넣고 굴리는 연알로 이루어져 있다. 연알 구멍에 나무 축을 질러서 축의 양쪽을 잡고 굴리면서 사용한다. 약연은 나무, 돌, 옥, 쇠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들었는데, 이는 약재의 종류에 따라 피해야할 재질이 있기 때문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한의학의 중요한 치료 기구
한의학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침을 사용했으며 형태와 기능에 따라 9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침을 제일 많이 사용한다. 가장 특이한 침은 칼처럼 생긴 피침으로 곪은 곳을 째고 고름을 뺄 때 사용하는 외과용 처치 도구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선대 왕의 글씨 보존을 위해 제작한 탑본첩
조선시대에는 선대 왕의 자취를 기리는 여러 사업의 하나로 왕이 남긴 글씨를 간행하는 관례가 있었다. 전란 이후 현종 때부터 선대 왕의 글씨를 모아서 돌에 새기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후 석각에 먹을 묻혀 두드리는 탑본 작업으로 첩을 만들어 보존하거나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글씨마다 왕의 개성과 필력이 드러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선대 왕의 글씨를 돌에 새기다
이 어필 석각은 성종이 형님인 월산대군의 초상화를 보며 느낀 감상을 쓴 글을 대리석에 새긴 것이다. 석각된 돌 가장자리는 탑본을 할 때 종이를 쉽게 분리할 수 있도록 세모지게 떼를 두었다. 현종 때부터 양란 이후 손실된 왕실 수장품을 정비하고 선대왕의 글씨를 모아서 돌에 새기는 작업을 진행했으므로, 이 무렵 석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유교 국가 조선에서는 특히 선대왕의 위업을 소중히 간직하고 계승한다는 자세로 역대 임금들의 글씨를 보존했다. 임금의 필적 보존은 유교의 조상 존숭 자세와 연결되었으며, 후손들이 선대왕에 대해서 사후에 갖는 효도와 같은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선대 왕의 글씨를 돌에 새기다.
전쟁을 겪으면서 왕실 소장품은 소실되거나 흩어졌다. 현종 때부터 선대 왕의 글씨를 모으고 돌에 새기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는 왕실 보물인 어필을 항구적으로 보존하며 선왕의 위업을 계승하려는 의도이다. 이 석각은 세조의 글씨체로 만든 병진자로 집자하여 <효경>의 일부를 새긴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대동법은 각 지방의 특산물로 바치던 공물을 쌀로 징수하도록 한 것으로 옷감이나 돈으로 대신 납부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직후 광해군 때 이원익의 주장에 따라 경기도에서 대동법이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이후 효종대에 김육의 주도로 충청도에 대동법이 실시되었고, 숙종 때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대동법은 토지에 기반한 징수체제로 토지를 소유한 지주계층과 공물 납부 과정에서 이익을 편취했던 세력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여러가지 사회,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대안이 되었기때문에 전국적으로 정착될 수 있었다.
<국조보감>에 수록된 대동법 관련 기록
본받을 만한 역대 왕의 선정을 모아 편찬한 <국조보감> 효종편에 효종의 업적을 대동법의 시행 관련 내용을 자세하게 수록했다. 대동법은 특산물을 바치던 것을 쌀로 바치게 하고, 땅에 있는 사람에게 부과하는 개혁적인 조세 제도이다. 기득권의 반대로 전국적 시행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1651년 8월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육은 적극적으로 건의하여 호서지역에 대동법을 시행하게 되었다. 김육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호남으로 확대 실시를 꾀하였고, 호서대동법의 성공적인 시행에 힘을 얻어 1658년에 호남 지역에도 대동법을 시행했다. 김육 사후에 백성들은 돈을 모아 부의를 하였으나 후손들이 받지 않자 평택에 대동법 시행 기념비를 세웠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지식인의 현실 인식
조선후기 학자인 유형원의 사회모순 비판이 담긴 <반계수록>의 <전제후록>부분이다. 그는 토지문제, 정치, 국방, 학제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개혁을 주장했다. 수세와 세금의 지출을 다룬 <전제후록>에서는 공납의 폐단을 상세히 언급하고 그에 대한 개혁안인 대동법을 옹호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대동법
대동법은 조선 최고의 개혁입니다. 대동법은 특산물 대신 쌀.옷감.화폐로 세금을 내면, 공인 이라는 상인이 공가를 받고 국가가 필요한 물품을 구입해 각 기관에 공급하는 세금 제도입니다. 이 제도로 국가 재정이 계량화되었고 화폐와 상품이 활발하게 유통되었습니다. 대동법은 마을이 아닌 토지에 세금을 부과하여 땅이 없는 백성의 부담이 줄어드는 장점이 있었으나 지주층의 반반로 시행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광해군 때 이원익, 효종 때 김육 등의 노력으로 대동법이 시행될 수 있었습니다. 대동법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른 사람들의 의지와 노력의 결과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용무늬 항아리
용은 신성하고 절대적인 힘을 지닌 동물로 여겨져서 제왕의 권력을 상징한다. 조선시대 전 기간 동안 용무늬 백자 항아리를 꾸준히 제작했다. 이는 용무늬 항아리가 임금의 절대적인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용무늬 항아리의 용도
용무늬 항아리는 왕실 웃어른 생신 등의 긴며일, 사신 접대 등 왕실 잔치에서 꽃을 꽂거나 수을 담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도자기의 용문양은 의궤에 수록된 청룡이 모습과 유사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17세기, 선조.광해군.인조.효종.현종.숙종
사회 재건을 위한 노력
전란을 겪으면서 사회가 혼란해지고 국가 기강은 해이해졌습니다. 국가와 지배층은 유교 윤리를 더 강조하여 이러한 위기를 타개 했습니다. 유교적인 신분제를 강화하고 성리학적 종법 질서를 생활화하여 사회를 재정비했습니다. 예학을 중시하는 분휘기가 형성되었습니다. 북벌론과 대명의리론이 대두되었는데, 이는 유교의 정통을 계승하겠다는 의지이자 사회를 통합하려는 전략이었습니다. 피폐해진 국가 재정과 조세 제도의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대동법을 시행했습니다. 상평통보가 유통되면서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는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전쟁으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