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있는 ‘부여 궁남지'(사적)이다. 백제 무왕 때 조성된 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연못은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고 불린다. 긴 수로를 통해 물을 끌어들여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섬을 만들었다. 현재의 연못은 1970년대에 복원 공사를 통해 조성된 것으로 실제로는 현재의 모습보다 큰 규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궁남지 서쪽 화지산에서는 건물터 등이 확인되어 별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궁남지 서쪽에는 절터인 군수리사지(사적)가 있다. 경주 동궁과 월지(안압지)는 이곳 궁남지와 별궁을 참조하여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화지산은 궁남지 동쪽에 있는 해발 10~18m 정도의 낮은 야산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망해정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발굴.조사 결과 건물터 초석과 기와조각 등이 다량으로 출토되었으며 건물터, 토광묘, 석축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궁남지와 함께 백제 마지막 수도였던 사비성 남쪽에 있던 이궁(離宮)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궁남지 연못은 1970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가운데 섬이 있으며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궁남지의 모습은 방장선산이 비기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주 월지처럼 삼신산을 조성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현재는 하나의 섬만 있다. 원래 규모에 비해 축소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3월에 궁궐 남쪽에 못을 파고 20여 리에서 물을 끌어들였으며, 사방 기슭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물 가운데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方丈仙山)에 비기었다.
(삼국사기 권 제27백제본기 제5 무왕(武王),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4년)
1995년 궁남지 발굴 조사시에는 ‘서부후항(西部後巷)’이라는 글자가 있는 목간 등이 발굴되었다.
군수리사지(사적)는 궁남지 서족에 위치하고 있다.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축으로 일직선에 배치된 전형적인 백제의 1탑 1금당식 가람배치가 확인되었다. 목탑터 심초석 부근에서 금동미륵보살입상(보물)와 석조여래좌상(보물)가 출토되었으며, 칠지도를 비롯하여 다양한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부여 궁남지, 사적
궁남지는 부여 시가지 남쪽에 위치한 백제시대의 별궁에 딸린 연못이다. ‘궁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시기>의 기록을 따라 궁남지라 부른다. <삼국사기>에 ‘무왕 35년(634년) 궁 남쪽에 연못을 파고 20여 리나 되는 긴 수로로 물을 끌어 들였으며, 물가 주변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 가운데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본떴다’라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궁남지와 인접해 왕실의 별궁으로 추정되는 화지산 유적이 위치하는데, 이곳에서 초석건물지, 팔각우물 등 위계 높은 유구와 유물이 조사되었다. 궁남지에서는 1990년부터 2006년까지 총11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백제시대의 도로와 건물지, 수전, 수로, 우물, 저수조 등을 확인하였다. 현재의 궁남지는 1965~1967년, 1971년 실시된 복원 공사를 통해 조성된 모습으로 백제시대 당시의 궁남지는 이보다 훨씬 규모가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궁남지는 조성 기록이 남아 있는 몇 안되는 백제시대 조경기술을 엿볼 수 있는 중요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안내문, 부여군, 2024년)
<출처>
- 안내문, 부여군, 2024년
- ‘사적 부여 궁남지’, 국가문화유산포털, 국가유산청, 2024년
- ‘부여 궁남지’, 위키백과, 2024년
- 삼국사기 권 제27백제본기 제5 무왕(武王),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