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에서 19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휴유증을 극복하고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 시기였다. 병자호란 이래로 송시열을 중심으로 계속되어온 당쟁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지만, 영조라는 사람의 개인적인 역량과 권위로 조금이나마 제압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또한 중국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중심으로 안정화된 시기를 누리고 있었다.
영.정조대를 대표하는 정책으로는 탕평책으로 대변되는 당쟁의 극복과 왕권의 확립, 균역법으로 대표되는 조세개혁을 통한 경제 안정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정조대는 규장각을 중심으로 활성화된 학문장려, 중국 문물됩과 함께 크게 융성한 실학, 대량 출판을 통한 지식의 확산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큰 변화를 겪었던 시기였지만, 당시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식민지 개척, 과학과 기술의 발전 등을 고려해보면, 중국.일본.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전쟁이 없는 안정된 사회를 구가했기 때문에 학문과 기술의 발전이 서구에 비해 많이 뒤쳐질 수 밖에 없었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을 것이다.
관권들이 갖춰야 할 자세에 대한 숙종의 말
숙종이 관직을 사직하고 물러나 있던 우의정 허목을 다시 조성으로 불러오는 과정에서 내린 글이다. 의정부의 세 정승과 육조의 판서 및 한성부,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관원에게 그 직책에서 갖춰야 할 자세에 대해 말했다. 여기에는 자신의 옆에서 허목이 우의정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를 바라는 숙종의 마음이 담겨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숙종
숙종은 사회 제도를 재정비하여 문화 발전의 기반을 마련한 왕입니다. 정국을 주도하는 집단과 이를 견제하는 집단을 급격히 바꾸는 환국을 적절하게 활용해서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여러 가지 사회.경제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이앙법을 보급하여 농업 생산력을 발전시켰고,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시행했으며 상평통보를 유통시켰습니다. 또한 오가작통법과 호패로 향촌사회를 통제했습니다. 숙종이 추진했지만 미처 마무리 하지 못한 정책은 상당 부분 영조와 정조 때 결실을 맺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호패는 신분증 역할을 자흔 작은 패로 16세 이상의 남자가 차고 다녔다. 호패는 중국 원나라에서 시작되어 고려 공민왕 때 도입되었으며 조선새대 전국적으로 제도가 정착하였다. 호패는 신분에 따라서 재질과 내용이 달랐다. 상아호패는 2품 이상의 관리가, 뿔 호패는 3품 이하의 관리, 나무 호패는 생원과 진사 및 일반 백성이 차고 다녔다. 양인 남성에 종이로 된 지패를 발급하기도 했다. 호패는 군역과 요역 부과하고자 누락.허위를 방지하는 데 큰 목적이 있었지만 실제 시행에는 큰 어려움이 있어 효과를 얻지는 못했다.
나무 호패에서 알 수 있는 청년 이정보의 삶
이정보는 계유년(1693)에 태어났으며 20세인 임진년(2)에는 동부학당에서 공부하는 동학생으로, 한성 5부 중 동부의 승교방(현재 혜화동) 1계 6통 4가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이 호패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부.방.계는 조선시대 한성의 행정구역
조선 초 한성 지역은 도성 안과 도성 밖 10리 이내였습니다. 도성 안을 동.남.서.북.중부 5부로 나누고 그 아래 방과 계.동을 두었습니다. 도성 밖 행정구역은 면 단위였는데, 인구가 점차 증가하면서 한성의 경계가 확대되어 방으로 포함시켰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상아 호패에서 알 수 있는 중년 이정보의 삶
이정보는 계유년(1693)에 태어났으며 40세인 임자년(1732)에 문과에 급제했고, 56세긴 무진(1748)에 2품 이상의 관직에 임명되었음을 이 호패에서 알 수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영조는 당쟁과 당화를 없애는 모든 방법을 강구한 적극적인 탕평책을 실시한 국왕으로 알려져 있다. 52년의 재위기간 동안 경연을 자주 실시하여 어느 왕보다 많은 경연을 통해 학문적으로도 신하들의 주장을 제어할 수 있었다. 천재지변에 근신하기 위해 음식을 줄이는 조치를 내리거나 금주령을 반포하고 사치품의 사용을 금하는 등의 조처를 자주 내렸다.
탕평에 대한 영조의 큰 뜻
영조가 경종의 왕통에 대한 문제 제기로 인해 발생한 신임사화의 주동자들을 처벌한 후, 신하들을 가르치고 타이르기 위해 직접 지은 글이다. 국가의 기강을 바로 세우교 당쟁을 그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신임사화는 경종대 발생한 사건이었지만, 영조가 탕평책을 추진하는 중에도 계속 논란이 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궁중 상례에 관한 기록
홍계희 등이 영조의 명으로 <국조오례의>의 상례에 관한 부분을 보충하여 간행한 책이다. 상례의 상세한 절차와 의식, 왕의 지시 사항 등이 수록되어 있는 왕실의 상례 지침서이다. 영조는 상은 갑자기 당하는 일이므로 그 법도를 잃기 쉽다고 생각하여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책을 편찬하라고 했다. 특히 검약을 강조하는 영조의 정치 철학이 반영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큰 가르침으로 반역자들을 처단하고 윤리를 바로 세우리라. <에제대훈> 수록
영조의 준천 사업 대한 기록
<국보보감>은 역대 왕들의 선정 가운데서 중요한 것을 뽑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 수록된 영조의 대표 업적 중 하나가 물이 잘 흐르도록 개천 바닥을 깊이 파는 준천 사업이다. 당시 청계천에는 모래가 많이 쌓여 비만 오면 개천이 범람해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었다. 영조는 준천 사업에 백성들이 동원되어 고통을 겪는 것을 막기 위해 인부를 고용해서 진행했고, 이는 백성들의 홍수 피해도 줄이고 실업 문제도 함께 해결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영조 임금의 초상화
영조 51세 때의 초상화이다. 정면을 향하지 않고 특이하게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자세이다. 이는 초상화가 영조의 모친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인 육상궁에 봉안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영조
영조(재위 1724~1776)는 백성의 입장에서 정책을 고민하고 추진한 왕입니다. 정치 세력 간 균형을 유지하는 탕평책을 주도하여 국정을 안정시켰고 왕도정치를 펼치기 위해 왕실 교육에 힘썼습니다.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의례를 정비했습니다. 그는 세제로 책종되기 전 궁궐 밖에서 생활했던 경험을 토대로 백성을 위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백성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던 군대와 관련된 양역이 개혁안인 균역법을 실시했으며, 잔인한 형벌 제도를 개선했습니다. 그리고 개천 바닥을 깊이 파는 준천 사업을 실시하여 홍수 피해를 줄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목숨을 잃게 된 사도세자의 묘지명이다. 사도세자가 죽게된 이유를 영조가 직접 지은 글이다.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던 사도세자 무덤터에서 발견되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장하면서 고의로 버리고 간 것으로 생각된다.(?)
영조가 지은 사도세자의 묘지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목숨을 잃게 된 사도세자의 묘지이다. 이 그을 직접 지은 영조는 아버지가 이렇게 만고에 없는 일을 하게 만든 이유는 사도세자의 그릇된 행동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다양하게 조명되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가 10세 무렵에 쓴 글씨이다. 어린 시절 총명했던 사도세자는 영조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이 첩에 쓴 글은 사도세자가 <천자문>과 <효경>의 문장을 합하여 만든 것이다. 이 명함에 영조는 흐뭇해하며 이를 모사하여 첩으로 만들어 신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쉬지 말고 공부하라는 영조의 훈계
세자시강원에 걸렸던 현판 중 하나로, 영조가 강의를 자주 건너뛰는 세자를 훈계하는 내용이다. 조선시대 세자에 대한 교육을 서연이라 하며, 세자시강원에서 담당했다. 영조는 어린시절 총명했던 사도세자에게 많은 기대를 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그 기대를 저버려 훗날의 비극을 초래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정조는 탕평정치를 계승하면서 왕실의 친인척을 인사에서 배제하고, 규장각을 세워 학문정치의 기틀을 다졌다. 또한 궁궐을 지키기 위해 설치한 장용위를 장용영으로 발전시켜 군사력을 집중시켰다. 노론과 소론을 견제하며 남인을 등용하는 정조 탕평론의 기초 위에서 사도세자 묘의 천봉과 화성성역을 추진하였다.
정조가 신하에게 내려 준 자
정조가 지은 시가 은으로 적혀 있는 자입니다. 당나라의 덕종 정원 연간에는 음력 2월 초하루인 중화절마다 대신과 동친들에게 공평함을 의미하는 자를 내려 주고, 관료들은 농서를 올려 농사에 힘쓰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를 본받아 정조도 매년 2월 1일을 중화절로 삼고 신하들에게 자를 내려 주었습니다. 이 자에는 모두 다섯 개의 눈금을 새겼는데, 한 눈금의 길이는 대략 5cm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화성 건축 종합보고서
<화성성역의궤>는 공사 일지, 동원된 장인의 명단, 사용된 물품의 종류와 수량 등 화성 건축과 관련된 자료를 수록한 책이다. 수원 화성은 주거와 군사 기능을 모두 갖춘 계획 도시이다. 전통적 축성 기법에 실학자 정약용이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서 개발한 거중기 등을 활용하여 공사 기간을 단축하고 공사비를 줄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정조가 당대 노론의 대표 인물이었던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것이다. 당시 정치적 현안들을 용의주도하게 조정하여 정국을 이끌어 가고자 했던 국왕 정조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이 편지에서 정조는 인사 문제, 세간의 풍문, 주요 인물과 집안에 관한 정보, 민심의 동태, 형벌 문제 등 국정 전반에 대해 구체적인 행동을 지시하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모범이 되는 이야기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가지 윤리의 모범이 되는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엮은 책이다. 효자와 충신,열녀, 믿음을 지킨 벗 등 150명의 이야기를 실었다. 수록된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인이고, 우리나라 사람도 17명이 등장한다. 판화와 함꼐 한글 풀이를 넣어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성을 교화하기 위한 정조의 가르침
윤음은 국왕이 백성들에게 내리는 가르침이다. 조선의 왕은 정월 초하룻날이나 국가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윤음을 내렸다. 여기에서는 노인을 봉양하고 농사에 힘써야 한다는 내용과 풍속을 교화하기 위해 <소학>, <오륜행실도>, 향약에 관한 책을 간행하여 반포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반 백성들에게도 알리기 위해 한글로 번역한 윤음을 뒤에 덧붙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정조
정조(재위 1776~1800년)는 제왕학을 실천하려고 노력한 왕입니다. 규장각에서 인재를 육성하는 한편, 지방 인재를 선발하고 실력이 있는 서얼을 등용하여 권력이 일부 세력에 집중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계획 도시 화성을 세웠습니다. 화성은 동서양의 축성법과 과학 기술이 조화를 이룬 결과입니다. 화성행차에는 금난전권 폐지로 활동 공간이 넓어진 경강 상인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조가 추진한 개혁들은 그가 갑작스럽게 죽으면서 미완으로 남았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실학은 17세기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서 대두된 현실개혁적인 조선시대 유학의 학풍을 말한다. 당시 청나라의 고증학과 더불어 실제적인 사물에서 진리를 찾아낸다는 뜻에 그 근원을 두고 양국에서 다른 방향으로 진행된 면이 있다. 청대의 고증학은 경서의 해석에 치중한데 반해 조선의 실학은 서구문물의 영향과 함께 농업에서 부터 사회전반의 개혁을 추구한 학문으로 그 세부적인 내용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기록한 묘지
상고당 김광수는 문벌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지식인이다. 그러나 벼슬보다는 골동품 수집에 취미를 가져 일생을 그림, 글씨와 옛 물건에 푹 젖어 자기만의 멋을 가지고 살았다. 이 묘지명은 김광수가 자신의 삶을 기록한 것으로, 가장 친했던 친구이자 서예로 이름을 날리 ㄴ이광사에게 부탁하여 글씨르 쓰게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열하일기는 북학파 박지원이 1780년 청나라 북경을 방문하여 보고 들은 것을 적은 견문기이다. 당시 현실에 대한 고민 뿐만 아니라 문체나 그 내용의 파격성으로 당대에 큰 비난을 받았다. 학술서적으로서 뿐 아니라 문학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조선과 청의 문화를 비교한 기록
박지원은 그의 종형제인 사신 박명원을 따라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잔치를 축하하기 위해 북경을 방문했다. 이 책은 건륭제의 피서이인 열하를 여행하고 북중국과 남만주 일대를 둘러본 후 그 곳의 문인, 명사들과 교유한 이야기를 기록한 여행기이다. 특히 청과 조선의 문화 차이에 대해 상세히 기록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경화세족과 북학파
한양에 대대로 거주한 양반인 경화세족은 현실에서는 최고 권력자였지만, 세속을 벗어난 고아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책, 서화, 골동품을 수집하고 감상했으며, 그 감정을 문학과 예술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그들은 종종 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청나라의 수도 연경은 실용적이고 발전된 지식을 갈망하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중국 문물 뿐마나 아니라 서양의 문물도 볼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들은 연행에서 알게 된 외국의 발전된 학문과 기술을 수용하여 이용후생의 도구로 삼자는 북학을 주장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대를 이은 두 가문의 우정
김수항과 그의 셋째 아들 김창협이 유창과 그의 아들 유득일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것이다. 이를 통해서 두 가문이 대를 이어가며 교유했음을 알 수 있다. 이 편지에서 김창협은 유득일이 보낸 선물에 대한 감사를 전하고 있는데 특히 좋은 먹과 붓에 감탄하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나라까지 알려진 조선의 시집
이 책은 유금이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네 사람의 초기 시 작품을 약 100수씩 엮은 시집이다. 유금은 1776년 사신 일행을 따라 북경에 다녀왔는데, 그때 이 시집을 가져가 청나라 문인들에게 서문과 평어를 받았다. <한객건연집>으로 청대 문학과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의 학자들이 조선 문인들에게 보낸 편지
청나라 학자들이 조선의 문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간찰첩이다. 조선 후기 청과 조선 문인들 사이의 교류 양상을 잘 보여준다. 단순한 안부 등의 일상에 대한 내용 뿐만 아니라 서화금석에 대해서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이 편지는 철옹 오승량이 김정희와 김명희에게 보낸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18~19세기 조선 지식인
18~19세기 조선 지식인들은 발달된 기술과 새로운 문화에 대한 관심을 백과사전, 총서, 개인 저술에서 표출했습니다. 당시에는 개인의 내면과 일상에 주목하는 소설과 소품문도 유행했습니다. 문체가 정신을 반영한다고 여긴 정조는 성리학적 거대 담론을 담은 고문을 진작하고자 했지만, 소품문의 유행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18세기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은 청나라 문인과 교유하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에는 이러한 교유가 역사와 문화, 풍속, 학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부분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의궤란 조선시대 왕실과 국가의 중요 의식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주요 의식으로는 국왕의 혼인을 비롯한 세자의 책봉, 왕실의 잔치와 장례, 궁궐의 건축 등이 있으며, 이러한 행사가 끝난 뒤 임시기구인 도감을 만들어 편찬하였다. 도감에서는 담당한 업무 내용을 정리하였고 필요한 경우 도설과 반차도 같은 그림자료를 정리하였다. 의궤는 그 내용의 자세함으로 인해서 조선을 대표하는 문화의 하나로 여겨진다. 실제로는 그전부터 의궤가 있기는 하지만 영.정조대 이후에 많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인원왕후의 왕비책봉 50주년을 경축하는 존승의례
인원왕후는 숙종의 두 번째 왕비이다 1702년에 인현왕후의 뒤를 이어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숙종의 세 번째 왕비였다. 16세에 왕비가 된 인원왕후는 숙종이 승하한 뒤 경종대 왕대비, 영조대 대왕대비로,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다. 특히 1721년에 경종의 후사로 당시 연잉군이었던 영조를 왕세제로 책봉하는 사안에 대하여 언문으로 교서를 내려 왕세제 책봉을 지지하였다. 이어 연잉군을 입후하여 아들로 삼았고, 영조가 왕위에 오르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의궤는 인원왕후가 왕비로 책봉된 지 50년을 경축하는 존숭의례로 영조의 각별한 전교로 시작된다. 이 때 인원왕후는 ‘정덕’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이 의궤는 수록된 반차도는 보통의 반차도와 달리 사람이 없이 의장과 기마가 나열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반차도
의궤는 문자 기록만으로는 알 수 없는 의식과 행사의 여러 상황을 그림을 그려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했다. 반차도는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의장물의 수, 위치 등을 정해 놓은 그림이다. 반차도는 이동하는 행렬을 행렬도 형식으로 그리거나, 일정 공간 내의 위치를 글자로만 표기한 형식으로도 그렸다. 반차도는 행사 거행 전에 왕의 열람을 위해 제작되었으며 실제 행사 전에 반차도에 따라 몇차례 예행 연습을 하여 실제 행사 때 최대한 시행착오를 줄이도록 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왕실의 최고어른 대왕대비와 왕대비의 존숭의례
1837년 순조의 비 순원왕후와 익종의 비 신정왕후에 존호를 올리는 의례를 기록한 의궤이다. 이 때 순조와 익종의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고, 당시 대왕대비 순원왕후에는 ‘문인’, 왕대비 신정왕후에는 ‘효유’라는 존호를 올렸다. 국왕의 사후 왕비에서 왕대비로 혹은 대왕대비로 신분이 재조정될 때 이와 같이 존호를 올렸다. 당시 국왕인 헌종은 효명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8세에 즉위하였고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있었다. 이 의궤에는 두 왕후에게 올리는 새로운 존호를 새겨 만든 옥책과 옥보를 궁궐로 가져올 때 행렬을 보여주는 반차도가 실려 있다. 두 벌의 책보가 들어오는 행렬이므로 같은 구성의 행렬이 두 번 반복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기록문화의 꽃, 의궤
의궤(儀軌)는 왕실의 중요한 행사와 의식을 글과 그림으로 상세하게 기록한 책입니다. 의궤에는 행사의 절차와 내용, 소요 경비와 참가 인원, 포상 내욕 등을 상세하게 수록하고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물품과 행렬 모습은 그림을 그려 훗날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했습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편찬된 조선왕조의 의궤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국가의 주요 행사와 의식이 변화한 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왕을 위해 제작한 어람용 의궤는 고급 종이를 사용하여 매 장마다 붉은색으로 윤곽선을 그은 후 정성껏 글씨를 쓰고 곱게 그림을 그렸습니다. 반면 보관하기 위해 제작한 분상용 의궤는 일반 종이를 사용하고 목판으로 윤곽선을 찍고 글자를 쓴 뒤 보관처 도장을 찍었습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가져갔다가 2011년 우리나라에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는 대부분 어람용 의궤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시전은 일제강점기 이전 성읍이나 도시에 있었던 상설점포를 말한다. 조선을 건국하고 수도 한양을 새로 건설하면서 중국의 국가 경영의 기본이 되었던 <주례> ‘고공기’를 참조하여 궁궐과 종묘.사직을 건설하고, 도시를 구성하는 한양도성을 쌓았으며, 도시내에는 행정.사법기능을 갖는 관청을 궁궐 정면 대로인 육조거리에 짓고, 국가경제의 중추라 할 수 있는 공설시장인 시전은 동.서를 연결하는 대로에 지었다. 운종가의 범위는 처음에는 육조거리에서 육의전이 있던 종각부근까지였으나 상업이 발달하면서 동쪽으로 계속 확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성의 시전과 독점적인 권한
족두리전은 정부가 공인한 도시 상점인 시전 중 하나입니다. 시전은 정부가 필요로 하는 물자를 조달하는 국역을 부담하는 대가로 독점적 상품유통권을 부여 받았습니다. 시전은 주로 상류층의 사치품 수요를 충족시키는 역할을 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물건을 판매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평시서, 시전을 관리하는 관청
평시서는 시전을 보호하고 감독하는 관청입니다. 시전에서 사용하는 자.말.저울 등 도량형을 관리하고, 물가의 높고 낮음을 검사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허가 받지 않은 상인인 난전이 늘어나면서 시전 중심의 유통구조를 유지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수세패에서 알 수 있는 조선시대 상업과 세금 징수
이 수세패는 여인의 머리 장식품을 판매하는 족두리전이 관할하는 점포로부터 세금을 거둘 때 사용한 패입니다. 족두리전을 담당하는 관청인 평시서에서 계해년 9월에 발급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시전과 난전
조선 초 국가에서 영업을 허가받은 시전이 종로에 설치되었는데, 이곳에서는 주로 왕실과 관청의 수요품을 다루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한양의 상품 유통 경제가 크게 발달하자 허가받지 않은 난전 상인이 등장했습니다. 도성 안에도 두 곳의 난전 시장이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이현(지금의 광장시장 근처)에서 채소가, 칠패(지금의 서울역 뒤)에서 한강 포구에서 가져온 어물과 소금이 거래되었습니다. 독점적인 구매권과 유통권을 허가받은 시전 상인은 난전 상인의 자유로운 매매 행위를 규제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정조 때 시전의 특권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려 상업이 더욱 발달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조선시대의 한강은 서울로 모여드는 조운과 상품유통의 동맥역할을 해 왔다. 이러한 한강 가에 설치된 나루터는 주요 간선도로와 연결되어 남북 교통망에서 매우 중시되었다. 조선후기에는 한강, 노량, 양화도, 삼전도, 임진도에 별장을 두어 나라에서 관리하였다.
한강변 포구의 상업 발달
우리나라는 산이 많아 육로보다 강과 바다로 물자를 운송하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조선에서는 배가 드나드는 포구가 시장 역할을 했는데, 17세기 후반 이래로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포구는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특히 한강변 포구는 전국 제일의 상업 중심지였습니다. 이곳 세금으로 징수된 곡식과 한양에 거주하는 지주들에게 보내진 소작미가 운송되고, 미곡.목재.어물.소금과 같은 상품이 모이면서 포구가 도매 시장의 기능을 했습니다. 상업 활동으로 일자리가 많아지면서 용산.마포.서강 지역의 인구가 증가하여 이 지역들이 한성의 행정조직으로 편입 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상평통보는 조선후기 숙종 때(1678년) 제작되기 시작하여 구한말까지 법정화폐로 유통된 주화이다. 법률에 따라 유통이 강제된 법정화폐이자 화폐의 가치가 고정되어 있는 명목화폐이다. 조선후기 쌀이나 옷감과 같은 물품 화폐는 보관하고 유통하는 데 한계가 있고 중국과 일본에서 유입된 은화의 영향으로 동전 유통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높아진 상황에서 발행되었다. 오늘날 화폐는 달리 호조를 비롯한 한양의 관청과 지방 감영에서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발행했다.
상평통보의 의미
‘상평통보’에서 ‘통보’는 ‘널리 통용되는 보배’라는 뜻으로 동전에 일반적으로 붙이는 표현입니다. ‘상’은 ‘늘, 항상’, ‘평’은 ‘평준’으로 사물을 균일하게 조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상평통보는 1678년 (숙종 4) 주조되어 1894년(고종 31)까지 널리 통용되었습니다. 상평통보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대로 물가를 조정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상평통보의 가치
상평통보 1개를 1문 또는 1푼이라 했습니다. 10문은 1전, 100문은 1냥, 1000푼은 1관입니다. 시기에 따라 상평통보의 가치는 달랐지만, 어림잡아 계산해 보았을 때, 1문은 현재 물가로 200~700원으로 추산됩니다. 숙동 때 은 1냥은 상평통보 800문에 거래되어 은에 비해 상평통보의 가치가 낮았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당일전은 1678년 발행한 최초의 상평통보이다.
상평통보 발행배경
전란 이후 국가 재건을 위한 정책으로 화폐 주조가 논의되었습니다. 17세기 후반 쌀과 포와 같은 물품 화폐는 보관하고 유통하는 데 한계가 있고 중국과 일본에서 유입된 은화의 영향으로 동전 유통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높아진 상황에서 1678년 허적, 권대운 등이 화폐 시행을 적극 건의하여 상평통보를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조선 사회는 본격적으로 화폐 유통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상평통보 발행기관
현재 화폐 정책과는 다르게 여러 기관에서 상평통보를 발행했습니다. 주조한 기관을 동전 뒷면 윗줄에 약자로 표기했습니다. 호戶는 호조를, 평平은 평안 감영을 뜻합니다. 발행 시기도 한양의 관청과 지방 감영에서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만들었습니다. 정조 때 호조가 전담하도록 했으나 순조 때부터 원칙이 흔들렸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당이전은 1679은 당일전보다 1.5배 큰 동전으로 당일전의 2배의 가치를 지닌다. 뒷면 구멍 아래에 ‘二’라고 표기했다.
당오전은 1883년 재정난을 해소하기 위해 상평통보의 5배 가치로 제작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 가치는 2배에 불과했다.
당백전은 1866년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상평통보 100배 가치로 제작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 가치는 5~6배에 불과했다.
별전, 상평통보를 주조할 때 사용하는 재료의 품질, 무게 등을 시험하기 위해 만들거나 왕실의 경사나 성곽 건립 등 특별한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주조했습니다. 별전은 길상 및 벽사와 관련된 문자와 문양으로 장식하므로 왕실과 사대부 집안에서 패물로 사용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상평통보 제작 방법
상평통보는 구리.납.주석 등의 금속을 녹여 나무처럼 생긴 주전틀에 부어서 만들었습니다. ‘엽전’이라는 용어는 동전이 나뭇잎처럼 매달려 있는 모습에서 유래했습니다. 구리를 확보하기 위해 일본에서 구리를 수입했으며 국내 구리 광산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조선시대 가장 대표적인 물품 화폐는 쌀입니다. 쌀은 농민이 직접 생산할 수 있고, 홉.되.말 등 작은 단위로 나누어 지불이 가능했으며 국가에서 세금을 쌀로 거두었기 때문에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쌀은 무거워서 운반이 어렵고 장기간 보관할 수 없기에 고액 화폐로 사용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또한 풍년과 흉년에 따라 가격이 차이가 납니다. 가치가 일정한 교환 수단의 필요성이 커져갔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쌀과 더불어 면포도 물품 화폐로 사용했습니다. 포목 3필은 쌀 1석, 혹은 동전 6냥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면포는 백성이 직접 생산이 가능했고, 쌀보다 보관이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단위로 끊어 사용할 수 없고 실생활에 사용할 수 없는 성긴 재질의 포가 생산되어 가치를 균일하게 유지할 수 없다는 점이 한계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조선에서 은 제련 기술은 일찍부터 발달했지만, 은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은화 유통을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파병한 군대 유지 비용으로 은을 보내어 조선에서 은이 자연스럽게 유통되었습니다. 은화는 고액 화폐이므로 주로 청과 일본과의 무역 자금으로 활용했습니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 무역 결제 수단으로 은을 사용하여 동아시아 삼국의 교역이 활발해졌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임진왜란 이후 중국과 일본은 직접 교역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은 양국을 잇는 중개 역할을 했습니다. 일본은 중국산 비단과 조선의 인삼을 구입하고 은을 지불하여 조선에 은이 대량으로 유입되었습니다. 1684년부터 1697ㄴ녀까지 사무역으로 연평균 234,900냥의 은이 조선으로 들어왔습니다. 도쿠가와 막부느느 처음에는 순도 80% 은화를 발행했으나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순도 64%은화를 사용하였습니다. 은화의 신뢰도가 떨어지자 쓰시마 번에서는 조선의 인삼을 구입하기 위해 순도 80% 인삼대왕고은을 따로 주조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17세기 물품 화폐와 은의 유통
임진왜란 이후 중국과 일본은 직접 교역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은 양국을 잇는 중개 역할을 했습니다. 일본은 중국산 비단과 조선의 인삼을 구입하고 은을 지불하여 조선에 은이 대량으로 유입되었습니다. 1684년부터 1697ㄴ녀까지 사무역으로 연평균 234,900냥의 은이 조선으로 들어왔습니다. 도쿠가와 막부 처음에는 순도 80% 은화를 발행했으나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순도 64%은화를 사용하였습니다. 은화의 신뢰도가 떨어지자 쓰시마 번에서는 조선의 인삼을 구입하기 위해 순도 80% 인삼대왕고은을 따로 주조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소금 만드는 가마 매매 문서
1864년 3월 고치로가 가원서에게 바닷물을 고아 소금을 만드는 큰 가마 3좌를 40냥에 판매하는 매매 문서이다. 이 소금 가마는 충청도 면천군 송산면 용두벌에 있었고, 1등급 소금을 생산했다. 소금 가마에 물리던 세금인 염세는 지방재정에 큰 몫을 차지했다. <속대전>에는 염세를 연말까지 납부하도록 명시했고, 세율은 염분 1좌에 소금 4석이었다. 화폐로는 1냥, 면포로 대납할 때는 1필 반을 거두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상평통보로 꾸민 열쇠패
상평통보를 만들기 전에 주 원료인 구리의 순도와 무게를 확인하기 위해 시험삼아 만들어보는데, 점차 여기에 기하학적인 무늬나 동식물, 소망을 기원하는 글귀를 새겨 넣고 색칠을 하는 등 멋을 부렸다. 상류층에서는 이를 기념품처럼 보관했다. 동전으로 꾸민 이 열쇠패는 신부의 혼수품으로도 사용되었는데, 부정하고 불길한 것을 막는 벽사의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17세기 사회 경제의 변화
전란 이후 조선은 물품과 화폐가 활발하게 거래되고 인구 이동이 빈번한 사회로 점차 변화했습니다. 전란 중에는 부족한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전쟁 후에는 농업 생산력이 향상되어 생산물이 증가하면서 장시가 늘어났습니다.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물과 면포로 시장에서 물품을 구입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상풍 화폐 경제가 발달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조선 상인이 일본 상인에게 은화를 받고 중국의 비단을 파는 중개 무역이 이루어지면서, 은화 유입이 늘어났고 은화가 고액 화폐의 기능을 하게 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조선시대에는 국가와 민간에서 여러 종류의 지도를 만들었다. 전국 지도와 도별 지도를 비롯하여 한양과 지방의 지도, 세계 지도와 외국 지도, 군사 지도와 여행 지도 등 다양한 성격의 지도가 있다. 영조 때 정상기가 그린 <동국대지도>와 구한말에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도라 할 수 있다.
한양 도성을 그린 지도
조선 왕조의 정치.행정 중심지인 한성부 일대를 그리고 채색한 회화식 지도이다. 도성을 단독으로 표현하였는데, 그 속에는 상세한 지리적 내요이 담겨 있다. 도성을 홤녀 중앙에 배치하고 북악산, 인왕산, 목멱산(남산), 타락산(낙산)으로 연결되는 성곽을 표현하였다. 성곽 내부에는 중심 가로선과 물줄기를 그렸고 경복궁, 경희궁, 종묘, 성균관 등 주요 건물을 표시하고 있다. 또한 한성부 오부에 속한 방의 이름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다. 이 지도는 170년 명칭이 바뀐 경희궁이 표기되어 있어 18세기 후반 이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18세기에는 이 지도와 같은 회화식 도성도가 유행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표제는 속표지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지도의 이름과 제작연대, 제작자 김정호의 호인 고산자가 기재되어 있다. 이 중 주목되는 것이 제작연대이다. 대동여지도의 판본은 ‘십이년신유'(1861년)와 ‘원년갑자'(1864년)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표제 부분 목판의 연대 부분은 탈락되어 있어 후댕;ㅔ ‘원년갑자’라는 글자 조각을 끼워 인쇄했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책으로 치면 속표지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동여지도’라는 지도 이름과 제작연대를 비롯하여, 지도를 간행한 사람이 고산자인 김정호임을 밝혀 두었습니다. ‘당저십이년’이라는 연대는 철종 12년 곧 1861년을 나타내는데, 당저는 ‘바로 그 당시의 임금’을 뜻하는 말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지도표는 현대 지도의 범례에 해당하는 것으로, 지도에 사용한 기호를 정리해 두었다.
- 영아: 병영이나 수영 등의 군 사령부가 있는 곳을 표시
- 읍치: 부.목.군.현 등 각 지방 행정 단위의 중심지(읍치에 성이 설치되어 있으면 쌍원으로 표시)
- 진보: 군사기지인 진과 보(성이 설치되어 있으면 사각형을 겹쳐 표시)
- 역참: 여행하는 관리에게 숙식과 말을 제공하며 공문의 전달을 담당한 기관을 표시
- 창고: 관영 창고를 표시
- 목소: 관영 목장을 표시
- 봉수: 불이나 연기로 외적의 침이을 알리기 위한 시설을 표시
- 능침: 왕과 왕후의 무덤을 표시
김정호는 모두 60여 개의 목판 양면에 각종 지리 정보를 새긴 뒤 인쇄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들었습니다. <지구도>라는 세계 지도를 직접 조각했다는 <이향견문록>의 기록에서 미루어 볼 수 있는 것처럼 김정호는 조각에도 능했습니다. 목판의 크기는 대개 가로 43cm, 세로 32cm내외이며, 수령 100년 정도의 파나무로 만든 것입니다. 목판 하나에는 남북 120리, 동서 160리의 지리정보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12개의 목판과 여러 판본에는 <대동여지도>를 처음 간행한 이후에도 김정호가 교정과 수정 작업을 꾸준히 진행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지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김정호의 열정을 잘 보여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대동여지도> 제1책에는 한성 지도 두 점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는 경조오부도이고 다른 하나는 도성도입니다. 경조오부도는 조선왕조의 수도를 관장하는 한성부의 관할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한는 지도입니다. 경조는 서울을 뜻하는 여러 이름 중 하나이며, 오부는 중부.북부.남부.서부.동부 등 한성부의 다섯 행정구역을 뜻합니다. 풍수지리 관념에 따라 삼각산에서 백악으로 내려오는 산줄기를 두드러지게 표현했습니다. 또한 한성과 주변 지역을 잇는 교통로가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도성도는 성곽 궁궐과 관청 등 국가 중요 시설이 집중되어 있는 도성 내부의 시가지를 그린 지도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대동여지도와 목판
대동여지도는 1861년 김정호가 제작하고 목판으로 인출하여 간행한 전국 지도로 우리나라를 남북 120리 간격으로 구분해 22층으로 나누었습니다. 모두 펼쳐 연결하면 세로 약 6.7m, 가로 약 3.8m의 초대형 지도가 됩니다. 산줄기와 물줄기 표현이 상세하고 정확하며 오늘날의 지도처럼 정보를 가로로 표기한 점이 특징입니다. 대동여지도를 새긴 목판 12매에는 제작 이후에 수정한 흔적도 남아 있는데, 오류를 고쳐 보다 정확한 지도를 만들고자 했던 김정호의 열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대동여지도는 우리 민족의 지도 제작 전통이 집대성한 최고의 지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동국대지도는 조선 영조 때 정상기가 제작한 <동국지도>를 보고 그린 지도이다. 축적(1/420,000)과 방위가 매우 정확하여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때 참조했다고 한다. 1장의 전국도와 8장의 도별도로 구성되어 있다. 백리척을 이용해 축정을 나타내고 지도상 거리를 측정하게 하였으며 육로, 해로, 수로가 잘 표시되어 있다. 원본은 남아 있지 않으며 정상기가 그린 <동국지도>를 보고 도화서 화원이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축적을 본격적으로 활용하여 만든 전국 지도
지리학자 정상기가 18세기 중엽에 조선의 전국 지도인 <동국지도>를 제작했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이 지도가 <동국지도>에 가장 가까운 필사본 중 하나로 세로 272.2cm, 가로 137.5cm에 이르는 희귀한 대형 지도이다. 백두산 등의 북부 지방을 정확하게 표현했고, 현재의 독도인 우산도,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가 분명하게 표기되어 있어 당시의 영토에 대한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축적을 일률적으로 활용한 전국 지도로 정상기가 고안한 백리척이 사용되었다. 또한 이 지도에는 2,200여 개에 달하는 지명이 다양한 기호로 표기되어 있어 지리 정보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지도의 가장 기본적인 용도는 국가 통치와 방어인데, 이에 부합하도록 이 지도에는 육로.해로.수로가 잘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는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전통 지도의 결정판인 <대동여지도> 탄생에 밑거름이 된 지도라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지도 제작
조선시대에는 지도 제작 기술이 발전하여 국가와 민간에서 여러 종류의 지돌르 제작했습니다. 전국 지도와 도별 지도를 비롯하여 한양과 지방의 지도, 세계 지도와 외국 지도, 군사 지도와 여행 지도 등 다양한 성격의 지도를 만들었습니다. 세계 지도와 외국 지도에는 조선의 세계 인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지방 지도는 행정에 이용했고 군사 지도는 지형과 통신 체계를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 제작한 것입니다. 중국의 발전된 지도 제작 방법을 우리나라 환경에 맞게 적용하여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지도들을 창조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산수 유람 문화
아름다운 산수를 보러 가고 자신의 감흥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은 오랜 전통입니다. 산수 유람의 동기.과정.평가를 글로 남기는 일은 고려시대 말부터 조선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송도.지리산.금강산.관동.사군四君(제천.단양.청풍.영춘현) 지역이 대표적인 유람지였습니다. 성리학이 확산되면서 산수는 단순한 유람 공간을 넘어 은거지로서 도를 깨우치고 심성을 기르는 학문과 생활의 공간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조선후기에는 아름다움을 느끼고 자유롭게 노닐거나 역사적인 사실을 담고 있는 공간으로 산수를 인식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단양 유람 노래
평양과 주변 지역의 생활 풍속과 명승, 역사 인물을 노래한 <관서악부>의 작가 신광수가 영월부사로 재임하던 시절에 단양의 명승지를 유람하고 지은 작품이다. 단산은 단양의 옛 이름이다 신광수는 단양의 명승지를 신선의 거처로 노래하거나 선경화하는 동시에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로서 백성들을 불로불사의 이상향에서 살게 하고 싶은 마음도 함께 표현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휴대용 문방구
조선 선비들은 여행길에 시도 짓고 편지도 쓰기 위해 휴대하기 편리한 묵통, 붓, 묵호를 지니고 다녔다. 묵통은 끈을 달아 매달 수 있게 되어 있고, 묵호에는 원통형 대롱을 달아서 붓을 끼우도록 했다. 묵통과 묵호 안에 먹솜이 들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나침반이 달린 부채 장식
둥글거나 네모난 나무 상자 안에 작고 정교한 나침반이 들어 있다. 나침반에는 12간지가 새겨 져 있다. 선추에 달린 나침반은 방위를 측정하는 실용적인 기능 이외에 멋을 내는 장식품으로서 역할을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지관용 나침반
묘지나 주거지를 선정할 때 지질과 길흉을 판단하는 역할을 한 지관은 방위를 찾기 위해 나침반을 사용했다. 이 나팀반 뚜껑은 장수를 상징하는 십장생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휴대용 그릇
물 등의 액체를 떠 마실 수 있는 도구이다. 조롱박을 반으로 갈라 표주박을 만들면 깨지기 쉬워 나무, 종이, 가죽, 금속, 조개 등의 여러 재료로 만들었다. 표주박의 한 끝에는 끈을 매달 수 있는 고리가 달려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휴대용 그릇
찬합은 음식을 여러 층으로 담아 간수하거나 운반할 수 있게 만든 휴대용 그릇이다. 이 찬합은 특이하게도 그릇과 술병으로 이루어져 있다. 맨 아래 원통형 그릇 위에 긴 술병을 올려 놓고 잔을 엎고 뚜껑을 덮어서 사용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산수 유람 문화
아름다운 산수를 보러 가고 자신의 감흥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은 오랜 전통입니다. 산수 유람의 동기.과정.평가를 글로 남기는 일은 고려시대 말부터 조선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송도.지리산.금강산.관동.사군四君(제천.단양.청풍.영춘현) 지역이 대표적인 유람지였습니다. 성리학이 확산되면서 산수는 단순한 유람 공간을 넘어 은거지로서 도를 깨우치고 심성을 기르는 학문과 생활의 공간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조선후기에는 아름다움을 느끼고 자유롭게 노닐거나 역사적인 사실을 담고 있는 공간으로 산수를 인식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18세기, 숙종.경종.영조.정조, 탕평과 문예 부흥
숙종이 여러 당파로 권력을 교체하며 정국를 주도하는 환국정치에 줄 의존했던 것과 달리, 영조와 정조는 정치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는 탕평책으로 국정을 안정시키고 유교적인 이상 국가를 수립하고자 했습니다. 18세기 초 숙종은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시행했고 영조는 조세 제도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상업 유통망이 활성화되면서 한양이 상업 도시로 성장했습니다.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하고 실력이 있는 인재를 등용했는데, 이 과정에서 중인 계층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청과 서양의 발전된 학문이 들어와서 학문이 다변화될 수 있었습니다. 조선의 18세기는 왕권과 신권의 균형이 이루어졌고 문예가 부흥한 시기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2024년
- 위키백과,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