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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근세관] 조선, 민의 성장과 시대 전환 (19세기)

18~19세기에는 인구의 자연증가와 농민의 계층분화가 심화되어 농촌 인구가 도시로 유입되었다.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금속화폐가 자연스럽게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도시민의 증가로 상품의 유통이 활발하게 되자 전국 각지에 장시와 포구가 개설되고 많은 교역이 이루어졌다. 도시의 부는 세도 가문, 상인, 하급 관료들에게 집중되었으며 이들이 새로운 도시 문화를 이끌어갔다.

<목민심서, 정약용, 조선 19세기, 종이에 먹>

유흥문화를 경계하는 정약용의 글
정약용이 전남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중에 지방관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 대해 논한 책이다. 백성을 다스리는데 있어 경계해야 할 부분으로 당대 유행하던 장기.쌍륙.골패 등의 도박을 언급했다. 유흥 문화의 성행과 이를 경계하는 사대부 지식인이 공존하는 19세기 조선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이춘풍전, 조선 19세기, 종이에 먹>

소비하는 사람, 이춘풍
이춘풍은 조선 후기 유흥을 즐기는 모습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오리지 돈만 쓰는데, 도박과 기방 출입 등으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모두 탕진한다. 시 소설은 방탕한 삶을 경계하고 근면한 생활을 할 것을 가르치는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독자들은 이춘풍의 유흥 생활을 보면 대리만족을 하기도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소반.그릇, 조선 19세기, 나무.백자>

조선시대 상차림은 소반에 몇몇 찬과 큰 밥그릇이 놓인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하루 생활에 필요한 열량을 밥에서 얻었기 때문에 밥을 많이 먹었다. 조선인이 대식가인 것은 한말 서양인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한 사항이었다. 쌀의 소비량은 지금과 비교하면 굉장히 많은 편이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자매명문, 조선 1852, 종이에 먹>

자신을 노비로 팔다
1852년 10월 김팔득과 장봉금이 송참봉 댁 노비 개복에게 자식 4명을 16냥에 매매하여 작성한 문서이다. 김팔득이 중병을 앓아 생계가 어려워지자 자식들을 장녀 미뿐이, 차녀 연분이, 아들 노미, 삼녀 삼분이를 매매하였다. 문서의 끝부분에는 장봉금이 본인임을 증명하는 손바닥 그림과 남편 김팔득, 증인과 문서를 작성한 정박생원 댁 노비 팔십금의 서명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거창가, 조선 19세기 중반, 원본의 20세기 필사본, 종이에 먹>

지방 수령의 학정을 폭로하는 한글 가사
19세기에는 토지 소유세를 걷는 제도인 전정과 군대를 가지 않는 대신 납부하는 군포를 징수하는 군정, 백성 구휼 제도인 화나곡을 운영하는 지방관의 비리가 크게 증가했다. 거창 지역 삼정의 폐단을 폭로하는 거창가는 백성의 곤궁한 삶이 반영되어 있다. 거창가 앞에는 한양가가 수록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빈곤한 삶
어느 시대나 가난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조선시대에도 가혹한 세금과 군역을 피하기 위해 노비가 되는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양반층이 토지를 계속 늘려가면서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한 하층 농민이 증가했습니다. 터전을 상실한 사람은 한양으로 몰려들어 임노동자가 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투호, 조선 19세기, 나무>

양반의 놀이문화
투호는 병 모양 통을 일정한 거리에 놓고 그 속에 화살을 던져 승부를 가리는 놀이이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궁중의 연화나 고관들의 기로연 때 투호놀이를 하며 흥을 돋구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연적.묵호, 조선 19세기, 백자>
<투각문 필통, 조선 19세기, 백자>
<관모함, 조선 19~20세기, 나전칠기>

사대부의 부유한 삶을 반영하는 소형 가구
관모를 보관하는 함으로써 얇게 간 조개껍데기인 나전으로 화려하게 장색했다. 웟면을 ‘희’와 ‘수복강녕’글자 그리고 천도, 석류무늬로 꾸몄다. 8각의 몸체 각 면은 구름과 학 그리고 ‘효제충신예의염치’글자로 장식했다. 유교이념이 생활화되면서 한편으로 현세의 복을 추구하던 19세기 현상을 반영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풍요로운 삶
부유층은 여가 시간에 바둑, 장기, 투호, 활쏘기를 하며 심신을 단련했고, 향을 피우고 차를 마시며 서화를 즐기거나 문방구, 골동품, 서책, 분재, 수석을 수집하고 감상했습니다. 특히 청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화려한 문방구를 선호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곤봉, 조선 18~19세기, 나무>

치안과 형 집행에 사용된 도구
18~19세기 유흥문화가 성행하자 이에 대한 단속도 강화되었다. 곤봉은 치안이나 형 집행과 관련하여 일선에서 일을 하던 순라꾼.포졸들이 사용했으며, 계급이나 용도에 따라 모양과 크기에 따라 차이가 있다. 손잡이가 연꽃 봉오리처럼 조각되어 있거나 몸체 앞부분에 용머리 모양이 있는 곤봉도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도순패, 조선 18~19세기, 나무><도금산패, 조선 18~19세기, 나무>

순찰패
둥근 나무의 한쪽에는 ‘도순’이라는 글자가 있으며 다른 면에는 ‘본병’이라는 글자와 함께 관리의 수결이 새겨져 있다. ‘도순’은 조선시대 각 군영 순라군들의 근무 상태를 조사하는 일이고, ‘본영’은 병조의 으뜸 벼슬인 정2품 병조판서를 의미한다. 허리에 매달 수 있도록 가죽으로 된 끈에 ‘병조’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조선시대 병조의 군졸들이 사용하던 순찰패로 보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산림 감시원의 패
산림 벌채를 감시하는 관리가 들고 다니던 패이다. 동그란 나무 한 면 가운데 ‘도금산’이라 새기고 그좌우에 ‘감관’, ‘기미시월일’이라 새겨져 있다. 다른 면에는 ‘익평군궁’이라는 글자와 관리의 서명이 새겨져 있다. 왕실 인물 익평군의 궁에서 관리하던 산지의 산림보호를 맡은 관리가 착용했던 것으로 보이나 익평군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골패, 조선 19세기, 상아>
<골패보, 조선 19세기, 종이>

골패와 골패보, 조선 19세기, 상아.종이
골패는 둘이나 넷이 하는 놀이로 조선 후기 성행한 도박의 한 종류였다. 골패는 가로 1.2~1.5cm, 세로 1.8~2.1cm의 납작하고 네모진 검은 나무 바탕에 상아나 짐승 뼈를 붙이고 여러 가지 수를 새긴 것으로 모두 32쪽이다. 골패보는 골패 놀이 방법을 설명한 책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도박과 단속
도박은 오랜 역사를 지니며 생산력이 높고 불확실한 사회에서 더욱 성행합니다. 조선 후기에도 도박이 성행했습니다. 사기 도박도 늘었고 도박장을 개설하여 고리로 이자를 놓거나 자릿세를 뜯는 자들도 나타났습니다. 도박으로 패가망신하는 자가 많아 지면서 도박을 금지했으나, 거리의 점포에서 도박도구가 일상용품으로 팔렸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담뱃대, 조선 18~20세기, 나무와 금속><쌈지.부시와 부시통.담뱃대 걸이, 조선 18~20세기, 천, 금속, 백자>

담뱃대는 담배를 담아 피우는 기구이다. .17세기 초 임진왜란 후 담배가 조선으로 전래되었는데, 처음에는 특수층의 기호품이어서 담뱃대도 양반의 권위를 상징하는 장죽이 유행했다. 담배가 일반 서민엑 널리 보급되면서 담뱃대 길이도 짧아졌다.
쌈지는 부시와 담배를 넣어 휴대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을 말한다. 넣는 물건에 따라 각각 부시쌈지, 담배쌈지라 한다. 부시는 불을 일으키는 도구로, 부시.부싯돌.부싯깃이 한 벌을 이루며 성냥이 없던 시절 담배 피울 때 사용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조선 후기 사회의 풍요와 빈곤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로 18~19세기 한양은 상업도시의 면모를 갖추었습니다. 도시의 부는 세도 가문, 상인, 하급 관료들에게 집중되었으며 이들이 새로운 도시 문화를 이끌어갔습니다. 상인과 하급 관료들은 향락적인 문화를 향유했습니다. 당시는 극소수에게만 성공과 부가 집중되던 불안정한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손쉬운 방법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도박이 성행했습니다. 한양은 점점 화려해졌지만 가혹한 수탈로 백성의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19세기에는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부유층이 늘어나고 중국.일본과의 교류가 확대되면서 이전에는 없던 다양한 백자 그릇이 제작되었다. 중국과 일본에서 수입된 화려한 도자기가 생활 속에 폭넓게 자리를 잡아 갔고, 이러한 취향은 관요 백자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차와 술을 소비하는 문화가 확산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주자와 잔이 만들어졌고 각이 진 병 등 새로운 형태의 그릇이 등장했다.

<산수 인물무늬 항아리, 조선 18세기, 청화백자>
<뒤에서 본 모습>

18세기 후반 산수 인물무늬 청화백자
정조 때에는 백자 위에 한 폭의 그림처럼 산수 풍경을 배경으로 인물을 그린 청화백자가 제작되어다. 이 백자에도 소나무 아래에서 신선처럼 보이는 인물이 바위에 앉아 물가를 바라보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소나무 호랑이 까치무늬 항아리, 조선 18~19세기, 청화백자, 경주박물관>
<뒤에서 본 모습>

18세기 후반 동물무늬 청화백자
정조 때에는 새와 동물 문양의 청화백자가 제작되었다. 이 청화백자의 까치와 호람이 글미은 조선시대 회황서도 볼 수 있다. 호랑이는 탐관오리를, 까치는 민초를 상징하는 풍자적인 의미를 담고 이다. 또한 호랑이는 힘이 있는 동물로 사악한 기운을 막아주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구름 용무늬 항아리, 조선 19세기, 청화백자>
<뒤에서 본 모습>

19세기 용무늬 청화백자
용이 그려진 항아리는 조선 전기부터 왕실 잔치에 사용되었으며 왕을 상징한다. 이 항아리는 구름을 헤치며 날고 있는 용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19세기 청화 안료가 진해지고, 용이 익살스럽게 바뀌는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1.수복무뉘 발, 조선 19세기 중반, 청화백자>

수복 문양 청화백자
19세기에는 ‘수’와 ‘복’ 글자와 같이 상서로운 의미의 글자로 백자를 장식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 커다란 발의 형태는 19세기에 유행한 것이며, 왕실에서 1840년 때 만든 청화백자 발과 크기와 문양이 유사하여 이 수복무늬 발도 왕실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보상화무늬 합, 19세기, 청화백자>

보상화 무늬 왕실용 청화백자
청나라 자기의 영향으로 볼 수 있는 보상화 무늬는 왕실에서 사용한 그릇을 장식하는 문양이었다. 오른쪽 백자의 뚜껑과 발은 각각 다른 시기에 제작되었으나 서로 잘 맞는다. 발에는 ‘문신영츈헌고간디듕소일듁ㅅ’가, 뚜껑 안쪽에는 ‘뎡ㅅ웃던고간이뉴십이개구’가 한글로 새겨져 있어서 제작 시기와 사용처를 알 수 있다. 각각 무신년 창경궁 영춘헌과 정사년 왕이 기거하던 전각에서 사용하기 위해 제작한 그릇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운현’ 글자가 있는 보상화 넝쿨무늬 접시, 조선 1864년 이후, 청화백자>

운현궁에서 사용한 청화백자
접시 안쪽에는 ‘복’자가 있고, 뒷면 가운데에 ‘운현’이라는 글자가 있으며 주변을 보상화 문양으로 장식했다. 여기서 ‘운현’은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자택인 운현궁을 뜻한다. 1863년 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이하응의 집을 운현궁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운현’이라는 글자로 보아 운현궁에서 사용한 접시로 생각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복’자무늬 접시, 조선 18세기, 청화백자>

왕실 가례에 사용한 백자 접시
헌종 때 한글로 그릇 바닥에 명문을 쪼아 새긴 백자 여러 점이 전해지고 있다. 두 접시 뒷면에 각각 한글로 ‘갑진가례시큰뎐고간디듕쇼칠십듁’과 ‘무신슈강지고간디듕쇼이십듁’이라고 새겨져 있다. 각각 갑진년(1844) 현종의 두번째 가례 때 대전 곳간에 대.중.소 크기의 그릇 700개를 올렸다는 내용이고 무신년 창덕궁 수강재 곳간에 대.중.소 200개를 바쳤다는 뜻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꽃무늬 대접, 조선 1847년, 청화백자>

왕실에서 사용한 화려한 청화백자
헌종의 세번째 가례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화려하고 이국적인 청화백자이다. 대접 안쪽과 바깥쪽 모두를 청화 안료로 다양하게 장식했다. 대접 안쪽 가운데에는 보상화 문양이 있고 바깥쪽은 꽃가지가 있는 능화창을 그려 넣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구름무늬 병.접시.합, 조선 19세기 후반>

화려한 문양 장식의 청화백자
19세기에는 청화 안료가 18세기에 비해 값싸고 풍부하게 도입되었기 때문에 그릇 장식에 청화 안료를 넉넉하게 사용하였다. 구름무늬 백자의 문양은 이전과 다르게 바탕 면을 청화 안료로 파랗게 칠하는 방식으로 표현하여 화려함과 장식성을 더했다. 새로운 형태와 문양, 표현 방시이 등장한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청화백자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거북 등 껍질무늬 타구.접시, 조선 19세기 후반, 청화백자>

새로운 형태와 문양의 청화백자
19세기에는 가래나 침을 뱉을 때 사용하는 타구가 많이 만들어졌다. 사랑방에서 타구를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타구와 접시를 거북이 등껍질 문양으로 장식했는데, 문양을 붓의 굵기와 안료의 농도를 달리하여 두 겹으로 표현한 방법이 독특하다. 이는 19세기에 나타난 새로운 문양 표현 방식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그물무늬 잔.합.접시, 조선 19세기 후반, 청화백자>

새로운 문양의 청화백자
19세기에는 새로운 형태의 그릇이 제작되기도 하고 청화 안료를 새로운 방식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 청화백자를 장식한 그물처럼 보이는 문양과 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다. 이국적이지만 현대적인 느낌을 독특한 청화백자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18~19세기 문화 특성을 반영하는 청화백자
청화백자는 청화 안료로 그림을 그려서 장식한 백자입니다. 시대에 따라서 백자의 형태, 문양, 유색이 달라지는데 18세기와 19세기의 사화 변화가 청화백자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18세기에는 사군자나 산수 등 문인 취향의 화제를 담백하게 표현한 청화백자가 제작되었으나 19세기에는 청화백자 안료의 색이 짙어지고 문양이 화려해지며 종류가 다양해졌습니다. 이는 청나라에서 값싼 무명청이안료를 대량으로 수입하여 청화백자 생산량을 늘릴 수 있었고, 화려한 청나라 자기의 영향으로 장식적인 문양을 선화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래 살고 복을 누리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문양의 청화백자와 동일한 문양을 반복적으로 표현하는 청화백자가 제작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 경제력 있는 계층이 늘어나 청화백자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다양한 청화백자가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안내문, 중앙앙박물관, 2024년)

구한말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대표하는 유물로 그가 전국 각지에 세웠던 척화비 중 서울 종로 보신각 옆에 세웠던 척화비가 전시되어 있으며, 주로 대한제국의 성립과 근대화와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구한말은 격변하는 세계정세와 중국 정세를 당시 집권층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했는지에 대한 유물들과 당시 집권세력의 부패와 무능함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유물과 기록들이 전시되어 후대에 교훈이 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곳이다

<운현궁 화포, 조선 1874년(고종 11), 청동>

운현궁에서 만든 서구식 대포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를 탄압하고 쇄국을 고집하는 동시에 서양의 군사 기술을 받아들여 서양식 무기를 개발했다. 그 결과 1874년 근대적인 소포와 중포를 개조했다. 이 화포는 포구에서 포미에 이르기까지 점차 그 부피를 두껍게 하여 바깥 둘레의 길이가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17~18세기 서구 사회에서 널리 사용되던 포신의 형태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척화비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대표하며, 쇄국정책은 후대 사람들이 조선의 근대화가 늦어지고, 멸망하게 된 큰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아편전쟁 이후 피폐된 중국 청나라의 정세를 듣고 있었던 사람으로서 당연히 취할수 있는 여러 정책 중 하나라고 보여지며 이를 폄훼하는 것은 바림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당시 집권세력의 부패로 인한 국가재정과 경제력의 피폐가 더 큰 원인이었던 것 같은데, 이에 대한 연구는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척화비, 조선 1871년(고종), 석>

서양 세력의 침입을 경계하는 비석
19세기 후반 조선은 농민들의 봉기와 제국주의 열강의 문호 개방 요구에 직면했다. 고종을 대신하여 실권을 장악한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후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외세의 침입에 대항할 것을 선언했다. 이 척화비는 서울 종로에 세웟던 것으로 임오군란 이후 철거되어 묻혔다가 1915년 보신각 이전 시 발굴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성경직해, 구스타브 뮈텔 번역, 조선 19세기 말, 종이에 활자 인쇄>

한글로 번역한 성경 해설서
한국 천주교회에서 초기에 사용한 한글로 번역된 성경 해설서이다. 18세기 후반 교인들 사이에 한문 성경을 번역한 필사본 성경이 잔파되고 있었다. 당시의 교구장인 뮈텔 주교가 이를 다듬어서 이 책을 간행했다. 모법이 되는 기독교 성인의 말과 행동이 기록되었으며, 명언을 묵상하고 익혀 진리를 알고 뜻을 익히기 위한 책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유중외대소민인등척사윤음, 조선 1839년(헌종 5), 종이에 활자 인쇄>

천주교를 배척하라는 임금의 명령
기해박해 이후 천주교의 확산을 막기 위해 헌종이 백성에게 내린 글이다. 한글 번역본을 함께 수록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했다. 기해박해 당시 앙베르 주교를 비롯한 70여명의 천주교도가 처형당했다.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천주교에 대한 박해였지만, 실제로는 풍양 조씨 가문이 안동 김씨 가문의 세도정치를 견제하가 위해서 일으킨 사건이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서양 학문에 대한 관심은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비롯한 천주교 서적이 들어오면서 점차 신앙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조선 왕조는 천주교를 무부무군의 사악한 종교로 낙인을 찍고 탄압했습니다.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 최초의 교회를 세운 후 천주교는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서민들 사이에 퍼져 나갔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이후 프랑스와 조약을 맺으며 조선에 종교의 자유가 생겼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당백전, 흥선대원군이 발행한 동전, 조선 1866년, 청동>

왕실 권위 회복을 시도하다.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에 탔던 경복궁을 다시 세우고,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비하여 군사력을 강화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국가 경제가 어려워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1866년 11월부터 약 6개월 동안 당백전을 발행했습니다. 당백전은 상평통보의 100배 가치를 지니도록 계획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당백전 발행과 물가 폭등
당백전은 약 1천6백만 냥을 주조했습니다. 정부는 공사 경비를 지출할 때 당백전 2/4, 상평통보 1/3의 비율로 지급했습니다. 그 결과 당백전 발행 초기인 1866년 12월 경에 7~8냥에 지나지 않았던 미곡 1섬의 가격이 1~2년 사이에 약 6배로 급격히 올랐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대원군간찰첩, 조선 1866~1867년, 종이에 먹>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대원군의 노력
흥선대원군은 국가의 권위를 회복하고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쇄국, 당백전 발행, 경복궁 중건 등의 정책을 시행했다. 이 간찰첩에는 이들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주변 인물들과 긴밀하게 논의한 내용이 담겨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흥선대원군, 개혁으로 부국강병을 꾀하다
흥선대원군은 외부 세력을 물리치고 내부 부패를 바로잡아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는 토지 제도를 개혁하여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했으며,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제를 실시했고, 붕당의 온상이었던 서원을 전국에 47개만 남기고 폐지했습니다. 그러나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당백전을 남발하여 물가가 폭등했고, 힘든 공사에 징발된 백성들의 불만이 고조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대동전, 고종이 발행한 동전, 조선 1882년, 1883년, 청동>

유통되지 못한 최초의 서양식 동전
상평통보는 운반하기 불편하고 가치 변동이 심했기 때문에, 외국과의 교역에서 상당한 손해를 보았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고종은 1882년 최의 근대 동전인 대동전을 발행했습니다. 이 동전은 화폐를 발행할 법적 근거가 되는 <화폐조례>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행되었기 때문에 시중에 유통되지 못하고 발행한 지 9개월만에 주조가 정지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근대 동전의 발행, 전환국
근대 동전은 전환국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주조했습니다. 경성 전환구에서 압인기와 압사기를 수입했습니다. 이 시기 만든 동전에는 개국이라는 연호와 태극 인장, 오얏 나무 가지, 쌍룡 무늬가 있습니다. 이는 근대 화폐 제도 도입을 위한 최초의 시도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근대 서구 열강의 무역 통화, 멕시코 은화, 멕시코 1883년, 은>

아시아 진출한 서구 열강이 무역할 때 사용한 동전으로, 조선에서는 개항장을 중심으로 중국 상인들이 주로 사용했습니다. 한 면에는 뱀을 문 독수리가 그려져 있고, 다른 면에는 인디언 모자가 그려져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진신편람, 조선 19세기, 종이에 먹>

관리들의 이름을 기록한 책
조선시대 궁내부 산하 각 관서의 관리 및 직원들의 이름을 기록한 책으로, 책 표지에 내안외안이라고 쓰여 있다. 내안은 중앙 관서의 관리들을, 외안은 지방 관서의 관리를 말한다. 절첩본의 앞면은 종친부와 승문원 및 유조를 비롯한 경직이, 뒷면에는 각 도의 관찰사.부사.현감.찰방 등 외직이 적혀 있으며, 해당 관직에 성명이 기재된 색지를 붙였다. 문과 급제자 적색, 소과 합격자 황색, 무과 합격자 청색, 음직 백색, 종친 황색이다. 민영준, 민충식, 민찬호, 민재덕 등 여흥 민씨 일가의 이름이 유독 많이 보인다. 여기에는 여흥 민씨가 장악했던 고종 집권 당시 정치계 상황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종, 개화 정책으로 부국강병을 꾀하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하야하고 고종이 친정을 선포했습니다. 고종은 근대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개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정부는 중국에 유학생을 보내 무기 제조법을 배우게 했으며, 일본에는 문물 제도를 살펴보기 위해 시찰단을 보냈습니다. 1883년 미국에 파견한 보빙사는 신식 우편 제도 도입, 근대 교육 기관 설립, 농업 기술 연구에 기여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약장합편, 대한제국 1898년, 종이에 인쇄>

조선이 세계 여러 나라와 맺은 조약
조선이 각국과 체결한 조약을 모아서 수록한 책이다. 일본.미국과 먼저 조약을 체결하였스므로 그 내용을 먼저 수록하고, 다른 나라와의 조약은 차이점만을 간략히 기록했다. 국호가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뀌었지만 조약 문안을 일일이 수정할 수 없으므로 원래 내용대로 수록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개항, 세계 질서 속으로 나아가다.
산업 혁명을 완수한 서양의 여러 나라는 원료 공급지와 상품 시장을 확보하고, 나아가 새로운 투자처를 찾기 위해 아시아 여러 지역을 침략했습니다. 1842년에는 중국이, 1854년에는 일본이, 1862년에는 베트남이 각각 영국, 미국, 프랑스에 의해 강제로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조선은 1876년 미국에 의해 먼저 개항한 일본과 조일수호조규를 맺으며 개항했습니다. 이후 미국, 러시아, 독일 등 서양 열강들과 근대적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 역시 치외법권, 최혜국 대우 등 불평등 조항을 포함하고 있는 한계가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흥선대원군 호송도, 일본 1894년, 목판화>

일본군이 경복궁을 습격하다.
1894년 오토리 게이스케 공사가 대원군을 앞세워 경복궁을 기습 점령한느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1894년 동학군을 진압한나는 구실로 조선에 온 일본 군대가 심야에 경복궁을 기븟하였다.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은 고종을 협박하여 조선의 정책을 마음대로 결정하였다. 이때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내세우고, 김홍집, 박정양 등 친일파 인물들에게 권력을 맡겨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가 편집한 <고종실곡>은 이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일본 군사들이 대궐로 들어왔다. 이날 새벽에 일본군 2개 대대가 영추문으로 들어오자 시위 군사들이 총을 쏘면서 막았으나 임금께서 중지하라고 명하였다. 일본 군사들이 마침내 궁문을 지키고 오후에은 각 창고에 있는 무기를 회수하였다. <고종실록>

<용담유사,, 최제우, 조선 1881년 이후, 종이에 목판 인쇄>

동학의 기본 경전
최제우가 지은 동학의 포교가사집이다. 최제우는 그가 깨친 후천개벽사상을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따를 수 있도록 한글로 쓰고, 가사의 형식을 빌려 표현했다. 현재는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세상이지만, 다가올 세상은 평등하고 공명정대한 살기 좋은 문명 세상이 도리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동학군 토벌 명령 문서, 조선 1895년, 종이에 먹>

동학군 토벌 준비 명령
1895년 1월 29일에 동학도이 토벌을 담당한 호남초토사 민종렬이 도내 각 읍에 내린 문서이다. 4읍마다 한 통으로 편성하여 동학도 소탕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작통성책을 즉시 작성하여 보고하라는 내용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독립신문, 대한제국 1899년, 종이에 인쇄>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신문
1896년 4월 7일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이자 최초이 한글 신문이다. 근대 민족주의 및 민주주의 사상, 자주적 근대화를 강조하여 국민 계몽의 역할을 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 창간사에서 ‘전국 국민을 위한 대변자가 되고 정부가 하는 일을 백성하게 전하고 고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소학교령 조선 1895년, 종이에 먹>

초등교육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글
구한말 신학제의 제정에 따라 학부는 1895년 7월 <소학교령>을 공포하여 초등교육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소학교의 교육 목적은 아동의 신체 발달에 비추어 국민교육의 기초와 생활에 필요한 보통 지식 및 기능을 가추기 위한 것이다. 만 8세부터 15세까지 남녀 모두를 대상으로 하며, 각 부.군은 관내의 아동을 위한 공립소학교를 세우도록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19세기, 수종-헌종-철종-고종, 민의 성장과 시대 전환
1800년 정조 승하 후 노론 벌열 가문이 정권을 장악하는 세도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가문의 사적인 이익을 우선시하는 세도 정권 아래에서 국정이 문란해졌고, 민들은 점점 어려워지는 삶을 민란으로 바로잡고자 했습니다. 이 시기 청과 서양의 새로운 문물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며 무역과 거래를 담당한 중인과 상인이 성장했습니다. 한편 급변하는 세계 정세를 판단하지 못하고 서양을 배척하는 척사 정책으로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고종은 개항 조약을 맺고 개화 정책을 추진하며 세계의 흐름을 따라잡으려 했으나 근대 사회로 진입하는 데 늦었고 외세의 간섭을 물리치기 어려웠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2024년
  2. 위키백과,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