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과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조선은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독립국임을 국내외에 천명하였는데, 이 시기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서양문물의 영향으로 정비된 서구식 교육제도, 의료, 교통, 통신 등의 모습들과 서양인에 비친 조선의 모습들을 말해주는 내용들이 전시되어 있다. 19세기말 급격히 발전하는 서구문화를 따라 잡고자 하는 노력과 변화를 따라 잡지 못하고 일제에 강점당하는 조선사회의 모습을 간략하게 보여주는 유물이라 할 수 있다.
황제 직속 기구였던 궁내부의 현판
궁내부는 갑오개혁 때 입헌군주제를 실현하고자 만들었으나 대한제국에 들어서는 전제 군주권을 강화하는 황제 직속 기구가 되었다. 대한제국은 궁내부를 중심으로 근대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궁내부 산하에는 통신사.철도원.서북철도국.예식원.박문원.수륜원 등을 두어 1903년 정원 520여 명의 거대한 관부가 되었다. 특히 궁내부 내장원은 역둔토.광산.홍삼.잡세 등 막대한 황실의 재원을 관리하면서 개혁 자금을 지원하였다. 궁내부의 확대, 강화는 황제의 측근 세력이 정치적으로 급속히 성장하는 중요 기반이 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대한제국기 관부에서 사용한 도장
갑오개혁 때 국가 행정과 왕실 행정을 분리하여 의정부와 궁내부로 나누고 1895년 의정부를 내각으로, 각 아문을 부로 개칭하여 외부.내부.탁지부.군부.법부.학부.농상공부의 7부를 두었다. 아관파천으로 의정부가 한때 부활되기도 하였으나 갑오개혁 이후의 관제 개편이 대한제국기에도 기본 골격을 이루었다. 관인은 이러한 근대 관제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근대 관인은 공문서 양식의 변화에 따라 조선시대에 비해 크기가 더 작아졌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황태자를 책봉하면서 금으로 만든 책봉문.
대한제국이 황제국 체제가 되면서 금책이 등장하였다. 왕세자 척을 황태자로 책봉하면서 만든 금책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대한제국기에는 국가와 황실 기념일에 행사를 열러 참가한 사람들에게 기념장을 나누어 주었다. ‘고종황제 성수 50주년 긴며장’은 1901년 고종의 50주년 생일을 축하하고자 황제가 쓰는 통천관을 새겼고, 1902년 발행한 ‘고종황제 망육순과 등극 40주년 기념장’에는 기로소에 있던 영수각이란 누각을 새겼다. 1907년에는 ‘황태자 가례 기념장’과 ‘순종황제 즉위 기념장’을 만들었고 1909년에는 ‘순종황제 남.서 순행 기념장’을 발행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황제의 조칙에 사용한 도장
소자를 새긴 칙명지보이다. 칙명지보는 글자를 크게 새긴 대자와 작게 새긴 소자 두점이 제작되었다. 대자 칙명지보는 3~6품의 주임관 임명장에 사용하였고 소자 칙명지보는 조칙 등에 사용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대원수로서 군령을 낼 때 사용한 도장
고종황제는 대한국 국제를 반포해 자강을 꾀하는 동시에 1899년 6월에 원수부를 설치하여 육해군을 통솔하는 군통수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황제가 군부 위에서 직접 군령을 장악하고 육군과 해군을 하나로 통솔하였다. 대원수보는 대원수로서 군령을 낼 때 사용한 국새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종황제의 존호를 올리며 만든 도장
고종황제의 51세 생일과 즉위 40주년을 긴며하며 ‘건행곤정영의호유’라는 존호를 더 올리면서 제작한 옥보이다. 옥보는 옥을 깎아 사각형으로 만들고 손잡이를 용모양으로 장식하였다. 글자를 새긴 인면에는 총52자를 새겼는데, 고종의 덕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대한제국은 서양을 모방한 훈장제도를 정하여 공로가 있는 사람을 표창하고자 하였다. 1900년 4월 칙령 제13호로 <훈장조례>를 반포하여 훈위와 훈등을 정하고 그에 맞는 훈장을 내렸다. 훈등은 대훈위.훈.공 등 세 종류로 구분하고, 훈과 공은 각기 8등급으로 나누었다. 훈장은 금척대훈장.서성대훈장.이화대훈장.태극장.팔괘장.자응장으로 구분하였다. 1907년에는 내외명부 가운데 덕행과 훈공이 있는 자에게 서봉장을 수여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대한제국의 문관이 착용한 의례용 칼이다. 일반적으로 대례복에 국가 상징 문양을 넣어 자주국가임을 나타내었으며, 대한제국은 상징 문양으로 무궁화 문양을 채택하였다. 1900년 <문관복장규칙>.<문관대례복제식>을 발표하며, 연미복, 모자.예검.훈장 등으로 구성된 서구식 대례복이 문관의 공식 복장이 되었다. 이때 백피로 만든 손잡이와 무궁화문을 새긴 의례용 칼을 착용하였다. 1906년 궁내부 본부와 예식원의 친임관 및 칙임관의 예복 규정을 마련하며, 새로운 대례복을 만들고 이화문을 새긴 예검을 착용하게 하였다. 예식원은 궁내의 대외교섭, 외교문서, 예식친서, 국서를 번역하는 등의 일을 담당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자주독립과 근대화
대한제국은 황제국의 위상에 걸맞게 의례를 재정비하여 고종어진을 제작하고, 황제의 인장인 칙명지보, 제고지보를 만들었습니다. 부국강병의 나라를 만들고자 원수부를 창설하여 황제권을 더욱 강화하고 궁내부를 중심으로 근대화 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한편, 국제 사회에 대한제국을 알리고 세계 박람회에 참석하거나 국제 기구에 가입하였습니다. 또한 대한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한국을 소개하는 책자를 발간하여 한국을 알렸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대한제국기 서울 지도
캐나다 선교사 제임스 스카이 게일이 왕립 아시아학회에 소개한 대한제국기 한성부 지도이다. 김정호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수선전도>의 제작방식을 거의 따르고 있다. 그러나 지명을 한자와 한글로 병기하고 통신원, 철도원, 헌병부, 독립문 등 당시 설립된 기관들이 표시되어 있다. 경운궁을 중심으로 영국, 미국, 러시아, 중국 등 공사관이 표기되어 있어 열강의 각축장이 된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2024년)
대한제국 여인의 결혼
게일은 캐나다인 선교사로, 한국명은 기일이다. 1888년 한국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하며 성서를 번역하였다. 이 책은 게일이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면서 경험한 일을 기록한 것으로, 한국의 지리, 역사와 문화, 종교와 신앙, 풍습 및 기독교 선교에 관한 내용과 한국인들의 의식을 심도있게 기술하였다. 또한 평양신학교 학생들 사진 등 한말의 사회, 문화, 종교 등을 살펼볼 수 있는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명성황후에 대한 기억
제중원의 부인과 의사이자 명성황후의 주치의였던 언더우드 여사가 대한제국에 들어와 보고 체험한 것을 기록한 여행 서적이다. 우리나라의 첫인상부터 국민의 성격, 습관, 환경, 국민적 신념과 미신, 사회적 퇴보, 대중의 가난과 만연된 무지, 풍속과 당시 시대적 배경, 생활 모습 등을 사진과 함께 생생하게 서술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프라스인 화가의 눈에 비친 한국의 소금장수
폴 자쿨레는 주로 일본에 거주하며 활동했던 프랑스인 목판화가이다. 아버지가 일본 도쿄외국어대학의 교수로 부임하면서 일본으로 이주하였다. 1930~40년대에 한국과 중국 등을 수차례 방문하였고 이때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다색판화로 담아냈다. 이 작품은 커다란 짐을 지고 돌에 걸터앉아 쉬는 노인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미국인 샌즈의 대한제국 회고록
샌즈는 1898년 1월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한국 땅에 부임하였다. 궁내부 찬의관, 외부 고문관을 지냈다. 그는 조선에 비교적 긍정적이었고 한국의 민속놀이와 제주도의 이재수의 난, 조선 사람의 신뢰성과 친절, 대한제국의 외교 정택과 서구 열강의 이권 외교 등을 언급하였다.(안내문, 중앙박물관,2024년)
영국인 비숍의 조선 방문기
영국인 비숍이 1894년부터 1897년 사이에 조선을 네 차례 방문한 뒤 현장 답사, 자료 수집, 문헌 연구를 통해 조선에서 경험하며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책이다. 비숍은 이 책에서 한국의 부패한 관료를 비판하면서 한국인의 가난, 여성들의 삶, 자연 경관의 아름다움을 언급하였다.(안내문, 중앙박물관,2024년)
독일인 에케르트가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
애국가는 1890년대 말에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자인>의 곡조에 배재학당 학생들이 가사를 붙여 부른 애국가를 비롯해 여러 종류가 등장하였다. 이런 가운데 1901년 9월 군악대장 독일인 에케르트가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가 고종 50세 생일에 처음 연주되었으며 1902년 공식적으로 인정 받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황색 곤룡포를 입은 고종황제의 초상화
전통 초상화에 바탕을 두면서도 서양화법과 근대 사진술의 영향을 받아 사실적이며 입체적이다. 이전 시기 초상화에 비해 다소 왜소해진 몸의 표현과 사실적인 비율의 체구, 과장되지 않은 옷 주름, 관복 윤곽의 표현은 20세기 이후 초상화의 특징이다. 이 작품 외에도 현재 고종 어진은 두 점이 더 알려져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종은 1897년 10월 독자적으로 ‘광무’라는 연호를 제정하고, 국호를 ‘대한’으로 바꾸어 대한제국이 자주 독립국가임을 선포했습니다. 대한제국은 1899년 근대 헌법의 성격을 띤 ‘대한국 국제’를 반포하여 황제권을 강화하고, 여러 가지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전차, 통신, 철도 등 서양의 문물이 속속 도입되면서 한성은 근대적인 도시로 변하게 됩니다. 암울한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도 근대의 문물이 놀라운 속도로 생활 곳곳에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 후 대한제국은 일제의 반식민지로 전락하고 1910년 결국 일제에 국권을 침탈당했습니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대한제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국망’이란 결론에만 매달려 평가할 것이 아니라 당시 대한제국이 놓여 있었던 시대적인 특수성도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는 대한제국이 반봉건, 반외세, 근대화라는 역적인 과제를 안고 있었고 이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일본의 침략 행위를 비판하고 민족 운동을 소개하다.
당시 발간되던 신문 가운데 가장 강력하게 일본을 비판한 신문이다. 일본은 언론을 감시하고 간섭했지만,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영국인 베델이어서 함부로 하지 못했다. 의병 항쟁을 자세히 보도하는 등 민족 정신을 일깨우는 글을 매일 싣고, 대한제국 관리들의 비리와 일본인들의 횡포를 고발했다.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 보상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한글과 한자를 함께 표기한 단어집
지석영이 저술하고 정기선이 교정한 국어 단어집이다. 사전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약 19,000개의 한자 단어에 한글로 독음을 표기하고 가나다순으로 배열하였다. 한자의 성조를 표현하기 위해 둥근 고리점을 표시하였다. 서문에 따르면 국어를 올바르게 적는 방법을 수립하고 휴율적으로 한자를 학습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편찬되었다고 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중학교 수학교과서
1900년 이상설이 편찬한 사범학교.중학교용 수학 교과서이다. 일본인이 1888년 저술한 <근세산술>을 번역하여 재편집한 것이다 이규환이 쓴 서문에 따르면 서양산법을 조선의 학자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여 산학에 정통한 이상설에게 부탁하여 이 책을 간행하였다고 한다. 세로쓰기가 원칙이지만 계산과정 등은 가로쓰기를 하고 있어, 전통 수학과 서양 수학의 과도기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대한제국기 물리학 입문서
물리학에 관한 기초적인 내용을 가르치기 위한 교재이다. 한글과 한문이 섞인 국한문혼용체로 적혀 있으며, 실험하는 장면이나 물리현상을 그림으로 그려 이해하기 쉽게 편집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 물리학에 대한 관심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전문 신문
상업 관련 업무를 관장하기 위해 설립된 기관인 상무사가 발행한 1899년 5월 2일자 상무 총보이다. 상무총보는 1899년 4월 창간되었다. 격일로 발행되었고 한글만 사용한 신문이었다. 구독 대상은 보부상이다. 주요 내용은 상품의 시세, 논설, 광고 등이다. 1899년 10월에 국한문 혼용의 <대한상무신보>로 이름을 바꾸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대한제국의 화폐 발행과 일제의 화폐.금융 장악
대한제국은 1901년 <화폐조례>를 반포하여 화폐 제조와 발행 권한이 대한제국 정부에 있음을 명시하였고, 금본위제를 채택했지만 이것은 법령상의 규정에 그쳤다.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 체결로 대한 제국 경제를 일제에 예속시키는 일련의 정책이 추진되었다. 대한제국이 전환국을 폐쇄하고 화폐정리 사업을 시행하였다. 일본 제일은행권을 태환권으로 보장하였고 제일은행이 우리나라 조세를 취급하는 금고 역할을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대한제국 전보사의 전보
대한제국 전보사에서 취급한 전보이다. 수신자는 ‘부산 밀양진읍 박태영 댁 진영’이라고 되어 있다. ‘위참셔관’이라는 내용이 적혀있는 전보용지와 봉투가 한세트를 이루고 있다. 봉투에는 광문 6년(1902) 6월14일자 소인이 찍혀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대한제국에서 발행한 보통 우표
1895년 발행한 태극 보통우표, 대한제국기에 발행한 이화 보통 우표와 독수리 보통우표 등 183개의 우표가 부착되어 있다. 모두 실제 사용한 우표들이다. 1895년 서울과 지방의 우체사를 설치하였고, 1900년에는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하여 외국과의 우편업무를 시작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종의 초상화가 실린 프랑스 신문
프랑스 신문 <라 비 일뤼스트레> 276호 1904년 1월 29일에 실린 사진이다. 경운궁 중화전 어좌에 앉아 있는 고종의 모습으로, 금척대수정장.금척부장을 패용학 있는 점이 특징이다. 신문은 고종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 드 라 네지에르와의 인터뷰를 실었다. 이 인터뷰에서 드 라 네지에르는 고종과의 접견 당시 상황, 조선 내 일본의 영향력에 대한 자신의 생각 등을 밝히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사진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입체경
입체사진과 그것을 입체감 있게 볼 수 있는 장치인 입체경이다. 입체감이 생기는 이유는 사람의 좌우 두 눈의 망막에 비치는 영상이 일반적으로 대상의 거리에 따라 좌우로 조금씩 밀리기 때문이다. 1850~1920년 사이 수백만 장의 입체사진과 다양한 스테레오 카메라, 입체경이 발매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자석식 전화기
1900년대 미국의 통신 장비 제조 회사인 ‘스트롬버그 칼슨’에서 만든 자석식 전화기이다. 최초의 전화 통화는 1896년 궁내부에서 자석식 전화기가 설치되면서부터이다. 1902년 3월에 한성과 인천 사이의 공중용 시외전화가 개통되었고 6월에 한성 시내에 교환전화가 개시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소리를 기록하고 재생하는 축음기
영국에서 1900년대 만든 보급형 축음기이다. 원반을 통해 소리를 재생하고 나팔 모양의 혼이 소리를 크게 해준다. 축음기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기계 안에 사람이 있거나, 귀신이 내는 소리라고 생각하여 가까이 하지 않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한성 도심의 전차 운행
1899년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의 전차 노선이 처음으로 개통되었습니다. 한성 도심을 운행하는 전차는 도시 문화를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전차는 상등칸과 하등칸에 따라 요금에 차이가 있었지만 돈만 있으면 누구든 상등칸을 탈 수 있었습니다. 전차는 정해진 시간과 노선을 운행하였기 때문에 전차를 타려면 규칙을 준수해야 했고, 전통시대 신문, 남년, 성 안과 밖, 밤낮에 따라 구분지었던 것을 타파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오락거리, 여흥의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근대 문물의 도입
대한제국 도심에 전등이 켜지고, 전차가 운행되며, 전화가 설치되면서 한성은 근대 도시의 모습을 갖춰 나갔습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사진기, 축음기, 자동차 등 문명의 이기가 보급되었습니다. 근대적 문물과 제도가 도입되면서 사람들의 인식도 크게 변화하였습니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탈피하여 서양을 우리가 닮아야 하고 달성해야 할 문명화된 사회로 인식하였습니다. 따라서 세계 여러 나라의 정보와 신지식을 담은 근대 교과서, 신문, 잡지, 학보, 신서적 등이 발간되어 일반인의 의식을 일깨우고 여론을 형성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물관, 2024년)
근대 서양 의학의 수용
의료 개혁의 추진
19세기 후반부터 조선은 의학 교육, 병원, 종두 및 방역 등 다방면에 걸친 의료 개혁을 추진하며 공공의료의 전통을 이어갔습니다. 1885년 미국인 선교사 알레의 건의로 우리나라 최초 서양식 의료 기관인 광혜원을 설립하고 알렌에게 진료를 맡겼습니다. 1899년 대한제국 정부는 정규 의학 교육 기관인 의학교와 국립병원인 광제원을 세워 근대식 의학 교육과 진료를 강화했습니다. 1907년 국립병원인 대한의원을 개원하고, 1909년에는 전주, 청주, 함흥에 서양식 병원인 자혜의원을 세웠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철도 부설의 의미
대한제국은 외국인에게 철도 부설권을 양여하기 보다는 자력으로 철도 부설을 추진하고자 궁내부 산하에 철도원과 서북철도국을 별도로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금 부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이 철도 부설권을 사들였습니다. 1899년 9월 18일 제물포와 노량진을 잇는 경인선이 처음으로 개통된 후 경부선과 경의선도 연결되었습니다. 철도는 사람, 물자, 정보의 유통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며 국가 산업의 근간이 되었지만 일본의 식민지 수탈과 대륙침략이라는 목적으로 부설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1897~1910년, 고종황제 ~ 순종황제, 대한제국의 선포
고종은 1897년 10월 13일 국호를 ‘대한’으로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했습니다. ‘대한’이라는 국호는 한반도 고대 정치체인 삼한을 통일한 ‘일통삼한’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뜻입니다. 이후 1899년에는 오늘날 헌법에 해당하는 <대한국 국제>를 마련했습니다. 이 법에서 ‘대한국’은 자주독립한 제국이며, 황제가 무한 불가침의 권한을 갖는 전제군주제 국가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2024년
- 위키백과,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