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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근세관] 고려, 국가와 사회 체제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고구려 옛 땅을 향한 북진정책과 발해 유민을 포용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통합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한편 중국의 과거제도를 받아들여 신분상승의 길을 넓혀 지식인계층의 지지를 확보하고 농민들의 세금부담을 완화함으로써 통일신라에 비해서 진전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고려는 정치와 일반행정은 물론 전쟁을 이끄는 최고 지휘관까지 문신들이 이끌었던 관료중심의 사회였다. 고려의 관료체제가 성숙되면서 고위 관료를 배출한 문벌 가문들이 생겨나고 이들은 12세기 고려청자로 대표되는 화려한 귀족문화를 꽃피웠다. 한편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 등으로 문벌체제는 스스로의 모순으로 균열이 생기면서 무신정변의 발발로 국왕과 문신 중심의 정치체제는 무너지게 되었다.

<1 막새, 와당, 개성 출토, 고려>

만월대를 비롯한 개성 일대의 고려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막새이다. 막새는 기와지붕의 끝에 붙여 마감을 깔끔하게 하는데 사용된 기와다. 고려시대의 막새는 대체로 삼국시대 이래의 연화문 막새를 계승, 발전시켰다. 그러나 중기 이후로는 동그라미 모양인 원문圓文 또는 원의 영향을 받은 범자문 등이 막새에 많이 나타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2 쇠못, 개성 만월대, 고려><건물 장식, 개성 만월대 출토, 고려>
<3 새 모양 장식 기와, 개성 만월대 출토, 고려>

만월대에서 출토된 장식기와이다. 장식기와는 주로 지붕의 용마루나, 기와들이 겹쳐지는 위치에서 지붕의 마감을 깔끔하게 끝내기 위해 사용된 기와이다. 고려시대에는 주로 새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4 ‘월개신중’이 새겨진 기와, 개성 만월대 출토, 고려>

개성 만월대에서 출토된 기와로, ‘월개신중’이라는 명문이 있다. ‘월개’는 예성강 근처에 있었던 기와 가마 월개요를 가리키는 것으로, 신중은 기와를 굽는 장인의 이름으로 추정된다. 만월대 남북공동발굴조사 과정에서 ‘월개’명문이 있는 기와가 상당수 출토되어, 월개요가 당시 고려 궁궐의 기와를 공급하는 곳 중 하나였음이 밝혀졌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5 청자로 만든 기와, 고려 12세기>

고려시대 최고급 청자를 생산한 대구소가 있던 강진 사당리 가마터에서 구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청자 기와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1157년에 왕이 궐 밖에 연못을 파고 그 북쪽에 양이정이라는 정자를 지으면서 청자로 지붕을 이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청자 기와의 파편들은 개성 만월대에서도 출토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6 꽃무늬 전돌, 개성 만월대 출토, 고려>

개성 만월대에서 출토된 꽃무늬 벽돌로, 전돌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의 전돌은 통일신라의 전돌에 비해 무늬가 단순한데, 그 중에서도 불교적 의미가 담긴 연꽃 또는 길상을 상징하는 모란무늬 전돌이 성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무늬가 없는 전돌은 바닥에 깔고, 이처럼 측면에 무늬가 있는 전돌은 벽을 장식하는 용도로 사용하였다고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 궁궐이 건물 부재
지금 전시하고 있는 개성 만월대 출토 건물 부재들은 일제강점기 떄 지표에서 수집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다. 이 부재들만 화려했던 그 시절 고려의 궁궐 건축을 떠올리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여기 전시된 건불 부재들은 실제 만월대에 있던 고려 궁궐 건물에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고려 건축술의 수준을 일부나마 살펴볼 수 있고, 나아가 당시 건축의 경향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의 궁궐은 ‘만월대’라고 부르는 궁궐 터만이 현재 남아 있다. 고려의 왕이 거처하던 본궐인 만월대 궁궐은 송악산 아래에 위치하였다. 송나라 사신 서긍은 궁궐의 중심 건물인 회경전에 대하여 “동서 양쪽의 섬돌은 불게 칠하고 난간은 구리로 만든 꽃무늬로 장식하여 웅장하고 화려하다”라고 하며 고려 궁궐의 아름다운 모습을 칭송하였다. 현재 만월대에는 33단으로 된 4개의 돌계단 위에 자리했던 회경전 터를 비롯하여 신봉문.창합문.건덕전.장화전 등의 옛 터에 주춧돌만 남아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의 도읍지, 개경
개경은 태조 왕건의 본거지로, 왕건이 즉위한 이듬해(919) 고려의 수도가 되었다. 광종은 개경을 ‘황도’라고 칭하며 황제의 나라로서의 체제를 갖춰 나갔다. 개경에는 궁궐과 관청, 태묘와 사직단, 사찰 등이 세워졌고 남대가와 십자가를 중심으로 주요 도로망이 만들어지며 5부 35방 344리의 행정 구역이 편제되었다.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후 수도의 방어를 위해 궁성과 황성을 둘러싼 나성의 축조가 이루어지면서(1029) 개경은 수도로서 확고한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가 살았던 시기는 몽골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북방 민족의 요.금과 중국 민족의 송, 그리고 서역의 많은 나라들이 존재했으며, 서로 견제 및 협력관계가 형성되던 시기였다. 고려왕은 형식상 조공관계를 유지했지만, 국제관계의 역학 구도에 따라서 왕이라 칭하기도 하고 천자라 칭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역사 유적 또는 유물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가 고려 역사를 대표하는 유물 또는 기록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아마도 조선초에 역사에 대한 세탁이 한번 있었던 관계로 그런 현상이 생긴것으로 보인다.

<1 인종의 시호를 올리며 지은 글, 고려 인종 시책, 전 인종 장릉 출토 1146년>
<가까이서 본 모습>

고려 17대 왕 인종의 아들인 의종이 인종의 시호를 공효대왕으로 지어 올리면서, 인종의 성품과 생전의 업적.덕행 등을 돌에 새겨 만든 유물이다. 신장상을 새긴 판 2점과 글이 새겨진 판 41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판들의 위아래에 구멍이 두개씩 뚫려있어 금실로 이를 엮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글씨와 무늬를 새긴 부분에는 금가루와 안료를 입혔던 흔적이 보인다. 인종의 능인 장릉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7 복녕궁주의 거처에서 쓰던 접시, 개성 출토, 고려 12세기>
<8 고려 임금의 딸, 복녕궁주 묘지명, 1133년(인종 11),>

복녕궁주 왕씨는 고려 15대 왕 숙종의 넷째 딸이자, 16대 왕 예종의 누이동생이다. 이 묘지명에서는 송의 연호를 사용하면서도 복녕궁주를 ‘천자의 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중국의 왕조와 조공 책봉 관계를 맺으면서도 천자의 나라를 자처한 고려 왕실의 자긍심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천자라고 불린 고려의 왕
고려는 후삼국 통일 이후 분열되었던 사회를 통합하기 위해 ‘일통 의식’을 내세우면서 왕의 권위를 드러내며 천자의 나라임을 자처하였다. 고려의 왕은 중국과 조공.책봉 관계를 유지하면서 대내적으로는 천자.황제라고 칭하였다. 뿐만 아니라 고려 군주를 폐하라고 하거나 황제국에 걸맞은 정치 제도와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수도인 개경을 황도라고 칭하고 왕을 황제라고 불렀다. 이는 고려가 천하를 통일한 왕조로서 천하의 중심이라는 문화적 자긍심이 높았기 때문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관료는 왕족을 제외한 당대 최고의 신분층으로 문반과 무반으로 구분되어 통틀어 양반이라고 하였다. 그 중 문신들은 정치와 일반 행정은 물론이고 전쟁 시의 최고 지휘관도 맡았다. 거란을 물리친 강감찬.강민첨이나, 묘청의 반란을 진압한 김부식.윤언이 등은 모두 문신들이었다. 5품 이상 고위 관료의 자식은 음서라는 특권적 제도를 통해 과거를 치르지 않고도 문신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에도 뒤늦게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과거는 중시되었다. 고려의 관료체제가 성숙되면서 여러 대에 걸쳐 5품 이상의 고위 문신을 배출한 문벌 가문들이 생겨났다.

<1 금동 널 꾸미개, 고려>
<1 금동 널 꾸미개, 고려>

고려 관료계층 이상의 인물이 사용했던 목관에 부착한 것으로 보이는 금동장식이다. 관의 네 면 중앙에는 각각 타출로 만든 청룡.백호.주작.현무를, 뚜껑에는 봉황을 배치하고, 모서리에는 투조로 만든 넝쿨무늬 장식과 비천상을 붙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풍風”자 모양 벼루, 고려>
<3 청자로 만든 연적, 개성 출토, 고려 12세기>
<3 청자로 만든 연적, 개성 출토, 고려 12세기>
<4 금동 허리띠 꾸미개, 금동 과대 장식, 고려>

고려의 관료들이 품계에 따라 구분하여 착용하였던 허리띠꾸미개이다. 이 꾸미개는 한쪽이 둥근 모양으로 안에 9명의 인물상을 배치한 2점과, 기로 5.1cm.세로 4.1cm의 사각형으로 안에 5명의 인물상을 배치한 10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 있는 인물은 불상이나 사천왕으로 추정된다. 동판을 땜으로 접합하여 장식판의 기본 형태를 만들고 밀랍주조한 인물상을 붙인 뒤 정을 이용하여 세밀한 형태를 새겼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1 고려의 고위 관료들이 짓고 쓴 비석의 탁본, 묘향산 보현사지기 탁본, 조선 18세기>

1042년, 현재의 평안북도 향산군에 창건된 보현사의 내력과 위상을 담은 글을 새겨 1142년 세운 비석인 <묘향산 보현사지기>를 조선시대에 탁본한 것이다. 이 비석의 제목은 인종이 직접 썼고, 내용은 김부식이 짓고 문공유가 썼다. 김부식과 문공유는 고려 중기의 문신으로 재추에 오른 인물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2, 청자로 만든 인장, 고려>
<3 청동과 청자로 만든 인장, 고려>

개성에서 출토된 고려시대의 인장들로, 고려의 관료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자나 원숭이, 물고기, 새 같은 동물 모양의 손잡이를 하고 있다. 대부분 손잡이에 구멍이 뚫려 있는데, 여기에 끈을 꿰어 묶고 다녔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장 면에는 글자뿐만 아니라 의미를 알 수 없는 무늬가 새겨져 있기도 한데, 당시 유행하던 문양이거나 권위 또는 길상을 상징하는 기호였다고 여겨진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4 “내시우번”이 새겨진 완, 고려 14세기>

고려 시대의 내시는 대개 과거 급제자나 문벌 출신이었으며, 국왕의 측근에 있으면서 자신의 문장.유학 실력을 바탕으로 국왕의 통치를 돕는 관료였다. 이들은 좌번과 우번으로 나뉘어 궁중에서 숙직을 하였다. 이 완에는 “항상원방내시우번’이라는 명문이 상감되어 있는데, “상원방 내시우번에서 왕에게 바친다”로 풀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의 관료
고려시대 관료층이 본격적으로 확립된 것은 성종대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의 2성 6부 체제와 관직 제도가 성립되면서부터이다. 관료는 왕족을 제외한 당대 최고의 신분층으로 문반과 무반으로 구분되어 통틀어 양반이라고 하였고, 경제적으로 전시나 녹봉 등을 통해 생활이 보장되었다. 고려시대 관료가 되는 길은 여러 가지 있었지만 과거와 음서가 대표적이었다. 고려시대의 관료는 정1품에서 종9품까지 18품계가 있었으며, <고려사> 백관지에는 문반 532명, 무반 3,867명으로 모두 4,399명에 달하는 관직이 있었다. 이들은 등급에 따라 다른 색의 관복을 입었으며 모자와 허리띠도 등급에 따른 구별이 있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는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채택하여 사회를 운영하고자 했다. 중국의 예제를 받아들여 환구제와 태묘, 사직, 문묘 제사 등 유교적 예제를 적극 시행했다. 의례에 사용하는 제기는 중국에서 수입한 것도 있지만 예서를 참조하여 직접 만들기도 했다. 예기는 유교 제사 뿐만 아니라 불교 및 도교 의례에도 널리 이용되었다.

<1 기린을 본떠 만든 청자 향로>
<고려시대에 쓰였던 향 도구, 2 향젓가락 3 향숟가락>
<4 향병>

향도구
예부터 각종 의례에서는 향을 피움으로써 의례의 시작을 알렸다. 향을 피울 때 사용하는 향 도구에는 향로와 향합, 그리고 향을 집는 향 젓가락과 향 숟가락을 꽂아두는 향병 등이 있다. 고려시대의 향로는 초기엔 중국 고대의 청동기를 본떠서 만들곤 했지만, 차츰 고려 특유의 형태를 갖추어 나갔다. 청자 기린모양 향로는 고려에서 유행했던 동물 모양 뚜껑 향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1 청자로 만든 제기, 희준, 개성 출토, 고려 13세기>

제사 때 술을 담는 그릇, 희준
왕실에 제사를 지낼 때 술을 담기 위해 사용한 바리 형태의 그릇을 ‘준’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몸통에 소를 그려 넣은 것을 ‘희준’이라고 불렸다. 신에게 바치는 제물인 희생 중 소를 최고로 쳤기 때문에 소를 그린 준을 ‘희준’이라고 한 것이다. 고려 때 희준은 깊은 바리 형태의 그릇에 소를 그려 넣은 모습이다. 조선 초 <세종실록>에도 같은 모습의 희준 그림이 있다. 이후 희준은 소 모양으로 만든 그릇 형태로 바뀌었고,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다. <고려사>에는 희준 사용 방법이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다. 왕이 하늘에 제사를 올릴 때 희준을 2개 쓰는데, 1개는 맑은 물을, 다른 1개는 제사용 술을 담는다고 하였다. 제사가 시작되면 집사관이 희준에 담긴 술을 국자로 떠서 왕 앞의 술잔에 부었고, 왕이 이 술잔을 천신에게 바쳤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2 고대 충국 청동기를 본뜬 향로 고려 12세기>

예제의 정비와 국가 의례
성종은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채택하여 고려 사회를 운영하고자 하였다. 그에 따라 중국의 예제를 도입하여 환구제와 태묘, 사직, 문묘 제사 등 유교적 예제를 적극 시행하였다. 1113년에는 예의상정소를 설치하였고, 의종대에 <성정예문>을 완성하면서 유교적 국가 의례 체제를 갖추었다. 한편 의례에 쓰이는 제기는 중국에서 수입한 것도 있었지만 송의 예서를 참고하여 직접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왕실 및 국가 의례를 비롯하여 연등회.팔관회 등의 불교 의례 등에 이러한 제기들을 널리 이용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1 청자 잔과 잔받침, 고려 13세기>
<2 청자 참외모양 주전자, 고려 12세기>

바둑 두기는 거문고 타기와 활쏘기, 말타기 등과 더불어 고려시대 상류층의 필수교양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왕 뿐만 아니라 관료, 상인들도 바둑을 잘 두고 좋아했다고 한다.

<3 청자로 만든 바둑판과 바둑알, 전북 부안군, 전남 강진 출토, 고려><5 청자로 만든 주사위, 고려 13세기>

청자로 만든 바둑판 파편과 청자 바둑알이다. 기록에 따르면 경종과 공민왕 같은 왕뿐만 아니라 고려의 관료, 상인들도 바둑을 잘 두고 좋아했다고 한다. 이 바둑판과 바둑알이 출토된 곳은 모두 고려시대 최상급의 청자를 굽던 가마터로, 고려의 관료 계층 이상의 취향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4 청자 국화넝쿨무늬 잔, 고려 13세기>

개경 귀족의 문화
고려의 관료 체제가 성숙하면서 여러 대에 걸쳐 5품 이상의 고위 문신을 배출한 문벌 가문들이 생겨났다. 경원 이씨, 해주 최씨 등이 대표적 문벌 가문이었고 이들은 폐쇄적인 통혼권을 유지하며 인척 관계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문벌 귀족은 고려의 수준 높은 미술품인 청자, 금속 장신구, 나전 칠기의 주요 수요층이었다. 고려를 다녀간 송나라 사신 서승이 <고려도경>에서 “고려 공예의 기술이 매우 뛰어나다”라고 표현할 만큼 고려의 공예품들은 우수하였다. 고려의 문벌 귀족은 세련되고 화려한 생활용품을 선호하며 고려 문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 지역에서 왕궁터와 무덤, 절터 등을 중심으로 경덕진요를 비롯하여 송나라, 금나라에서 제작된 다양한 도자기들이 출토되고 있다. 왕족과 문벌귀족을 비롯한 고려 상류층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1 백자 잔과 잔받침, 송>
<2 검은 유약을 입힌 주전자, 송>
<3 시가 새겨진 청자 완, 송>
<4 백자 모란무늬 접시, 금>

고려 사람들이 썼던 외국 물건
개성의 고려시대 유적에서는 고려청자 뿐만 아니라 송나라나 금나라에서 만든 도자기도 많이 출토된다. 이는 고려와 이들 나라 사이에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했음을 의미한다. <고려사>와 <송사>에 따르면 12세기 개경에는 송나라 사람 수백 명이 살았고, 동남아시아나 아라비아의 상인들도 벽란도를 통해 드나들었다. 뿐만 아니라 쌍기처럼 중국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시대 향리는 그 지역을 통치하던 호족의 후예로 상당한 지위를 누리며 중요한 일들을 하였다. 향리는 고을 주민들로부터 조세.공물 등을 수취하여 중앙에 바칠 뿐만 아니라, 유사시에는 주민들을 이끄는 전투 지휘관이 되었다. 또한 향리들은 불탑 조성과 같은 각종 불사를 주도하거나 지역에서 산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는 등 정신적 지도자이기도 하였다. 향리는 과거를 통해 중앙 관료로 진출한 경우가 적지 않았으며, 조선을 건국한 주도 세력이 되었다.

<1 호장 김지원의 딸 묘지명, 개성 출토, 고려>

이 꽃 모양 묘지명에는 “낙랑김씨녀 부호장지원”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낙랑은 고려시대 경주의 아칭이었다. 따라서 이 묘지명의 주인공은 본관이 경주인 김씨 여인이고, 그 아버지는 호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남편이 밝혀져 있지 않아 미처 혼인을 하지 못한 채 죽은 것이 아닌가 한다. 호장이란 한 고을의 행정 실무를 맡은 향리의 우두머리로, 수리라고도 하였다. 고려시대의 호장은 때로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한 고을을 다스리는 책임을 맡기도 할 정도로 격이 높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2 향리들이 발원한 사리합과 탑지, 경기도 안성시 죽산리 발견, 997년>

지금의 안성 일대에 살던 향리들이 뜻을 모아 장면사에 5층 석탑을 세우면서 탑 안에 봉한한 사리합과 탑지이다. 이 사리합 안에서 비단 주머니에 감싸인 조롱박 모양의 유리사리병이 나왔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3 돌벼루, 개성 출토>
<4 “풍風”자 모양 흙벼루, 안양시 만안구 삼성산 출토, 고려>
<지방 백성들이 뜻을 모아 만든 쇠북, ‘청운사’명 청동 금고,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출토>

쇠북은 구리로 만든 북으로, 사찰에서 공양이나 예불 등에 사람들을 모을 때 가운데 면을 쳐서 이 쇠북의 중앙에는 연꽃이, 주변에는 넝쿨무늬가 묘사되어 있다. 옆면에 새겨진 글씨에 따르면 이 쇠북은 고려 후기 충렬왕 27년인 1301년에 문씨 부인을 비롯한 향도들이 만들어 청운사에 바친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시대의 향리
고려 건국의 주역인 지방세력 호족 중 일부는 중앙정부에 참여하여 중앙귀족이 되었고, 또 다른 일부는 지방에 그대로 남아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향리가 되었다. 향리직의 기본적인 임무는 지방 주민들에게 조세.공납.군역 등을 부과하고 거두어 들이는 일이었다. 고려 전기에는 작은 지방 행정단위까지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할 수 없었다. 떄문에 원할하게 지방을 통치하는 데에 향리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성종 때부터 계속된 향직 정비 노력은 지방의 유력 세력으로서 향리들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동시에 이들을 중앙집권체제의 틀 속에 편입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철조 불 좌상, 고려 10세기, 경기 포천>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국보>

지방의 특색을 드러낸 철불과 석불
10세기에서 11세기에 걸쳐 지방 각지에는 대형의 철불과 석불.마애불들이 제작되었다. 이들 불상은 커다란 몸집에 투박하고 토속적이며 개성적인 얼굴 모습으로 고려의 지방적인 특색을 표현하였다. 지방에서는 거대 불사를 이루기 위해 향도라는 대규모 인원을 조직하였다. 향도는 원래 불교 신앙에서 유래한 자치적인 공동체였으나 지방의 세력가인 향리층에 의해 통제되기도 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지방 제도와 향촌 사회
고려는 지방 통제의 수단으로써 거주지를 중심으로 성씨를 부여하는 본관제를 시행하여 지방 사회에 계층적 질서를 부여하는 독특한 지방 제도를 확립하였다. 또 성종과 현종대를 거치면서 5도와 양계의 지방 행정 조직을 정비하였다. 지방관의 파견 여부에 따라서 주현과 속현을 구분하였고 향.소.부곡 등의 특수한 행정 단위를 두었다. 고려의 지방 세력은 점차 지방 통치 체제에 편입되었지만 여전히 그 지방의 실질적 지배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해갔다. 향리직의 우두머리인 호장은 읍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며 고을의 업무를 총괄하였고 지방민들을 동원하여 사찰.불상 등을 조성하는 등 지방 문화의 창조자 역할을 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향.소.부곡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전기까지 있었던 하층민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다. 신분은 양민이지만 천민과 비슷한 지위였다. 향과 부곡은 농산물 생산을, 소는 수공업이나 광물, 수산물 등의 생산을 담당했다. 일본에서도 부라쿠민(部落民)이라 비슷한 계층이 있으며 메이지유신 때 까지 유지되었다.

<1 자기소에서 만든 그릇의 파편, 전남 강진구 대구면 사당리 출토, 고려>

강진 사당리 청자 가마터에서 출토된 청자 잔의 파편이다. 사당리 일대는 고려시대 최상급의 청자를 구워 내던 자기소인 대구소가 있던 곳이었다. 왕실, 관청과 관료들이 필요로 하는 자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이 자기소의 주요 업무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2 묵소에서 만든 먹, 고려>

고려시대에는 단양과 맹주(평안남도 맹산)의 먹이 유명했는데, 단양의 먹은 단산오옥이라 하여 높이 쳤다. 고려 중기 맹주에서 운영하던 묵소의 풍경이 기록으로 남아 전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3 철소에서 만든 농기구, 충북 청주시 이류면 본리 출토, 고려, 청주박물관 소장>

고려시대 충주 지역에서 철과 관련된 수공업제품을 생산하던 다인철소의 유적에서 출토된 철제 농기구이다. 유적의 규모나 출토 유물로 미루어 보아 다인철소는 고려 전체를 통틀어서도 손꼽힐 정도로 큰 철소였다고 추정된다. 이 철소는 고려 중기 몽골의 침입을 막아낸 공로로 정식 고을인 현으로 승격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의 특수 지방 행정 단위, 향소.부곡
고려시대에는 군현 단위인 향.소.부곡 등을 두었다. 이들은 군현의 통제;를 받고 군현의 주민과 마찬가지 각종 세금을 부담하였지만 차별 대우를 받았다. 향과 부곡의 주민들은 대부분 농경에 종사하였고 소의 주민들은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특정한 물품을 생산하여 공급하였다. 특히 고려시대 소는 원료 공급에 유리한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그에 따라 도자기를 만드는 자시고, 먹을 만드는 묵소, 금을 생산하는 금소, 소금을 생산하는 염소, 철을 생산하는 철소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외에도 왕실과 사원에 귀속된 토지를 경장하는 지역인 장.처 등도 있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는 한반도의 두 번째 통일 왕조로 918년 건국하였다. 송악(개성) 출신의 왕건이 지방의 호족 세력들을 규합하여 성립한 고려는 고대 국가와는 구별되는 중세 국가적인 면모를 보였다. 백성에 대한 과도한 수탈을 억제하기 위해 전시과 제도를 만들고 각지에 지방관을 지속적으로 파견하였으며, 과거제를 도입하여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층을 확보하였다. 고려의 사상으로는 불교뿐 아니라 도교.도참사상이 큰 영향을 미쳤다. 사상적인 측면 외에도 고려는 이민족에 대해 개방적이었으며, 개경의 문벌 귀족 문화와 각 지역의 독특한 지방 문화가 병존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고려를 다원적인 사회로 만들었다. 고려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천자국이었다. 또한 고려는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는 동시에 발해 유민을 흡수하면서 적극적인 북진정책을 추진하였고, 송.거란(요).여진(금)과 실리 위주의 외교 정책과 군사 정책을 펼침으로써 격변하는 국제 질서 속에서 국가의 위상을 높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2024년
  2. 위키백과,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