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는 절제와 소박함을 강조하던 유교사회였던 조선시대와는 달리 일상생활에서도 화려함과 세련된 문화를 향유한 사회였다.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재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화려한 색감과 형태의 고려청자를 비롯하여 물그릇으로 사용한 정병, 화려한 재질로 만들어진 생활용품 등이 남아 당시 지배층의 화려했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원통 모양의 뚜껑 윗면에 용이 구름에 노니는 모습을 형상화한 운룡문을 음각하였고, 바깥면의 뚜껑과 몸체가 맞닿는 부분에 각각 ‘상약국’이라는 글자를 음각으로 새겨 넣은 합이다. 상약국은 고려시대 왕과 왕실 인물들의 건강을 위한 의약을 관장하던 관청이었다. 그러므로 이 합은 가루로 만든 약재나 환약, 연고 같은 약을 보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거의 같은 형태의 ‘상약국’명 합이 보물로 지정되어 현재 한독의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강진 사당리 가마터에서도 이와 비슷한 합 뚜껑의 파편이 발굴된 바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2024년)
둥근 몸통에 물을 따르는 주구와 손잡이가 달린 청자 주전자이다. 몸통 전체에 박 혹은 수세미로 보이는 넝쿨식물을 넣었는데, 잎과 열매는 얕은 돋을새김으로, 잎맥과 넝쿨 줄기는 가는 오목새김으로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고르게 유약을 입힌 후 구워서 표면이 매끈하고, 맑은 비색이 큼직한 잎과 어우러져 싱그러움을 더한다. 전라남도 강진 사당리 가마와 같이 고려 때 명품 청자를 생산하던 곳에서 만들어졌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좁은 굽으로부터 사선으로 넓어지며 입술이 벌어지는 형태의 그릇으로, 고려시대에는 대체로 차를 담아 마시는 용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족 바닥에는 작은 원이 있고, 그 주위 면에 넘실대는 물결과 그 안을 넘나드는 물고기를 얕고 섬세하게 새겨 넣었다. 유색은 비색에 가까운 말고 투명한 담청색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표면에 국화꽃과 모란꽃, 구름무늬를 파고 백토를 채워 넣은 상감 기법으로 장식한 고려시대의 정병이다. 정병은 깨끗한 물을 담아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기 위해 사용했던 불교 용구이다. 고려의 상감 기법은 정교한 기술뿐만 아니라 높은 온도에서 원하는 무늬의 발색이 이루어져야 하므로 고도의 기술이 요구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산화철을 안료로 청자의 표면에 그림을 그려 만드는 철화청자는 문양을 새겨 만드는 다른 청자와 달리 붓의 율동감이 느껴지고 색채의 대비가 또렷하다. 이 매병은 철화청자의 전성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황갈색의 표면 위에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모란무늬를 그려 넣었다. 가지에서 뻗어 올라가는 듯한 모란은 고려 회화의 한 경지를 가늠하게 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어깨에는 국화꽃의 잎과 같은 무늬를, 몸통의 전면에는 철화로 국화넝쿨무늬를 생동감 넘치게 표현한 청자 매병이다. 밑에는 띠를 두른 듯 검게 철화를 발랐고, 바닥에는 모래를 받쳐 구운 흔적이 있다. 철화청자는 붓으로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문양을 새겨 만드는 자기와는 다른 느낌을 준다. 12세기 철화청자의 수준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물 위를 유유히 헤엄치는 오리의 모습을 표현한 청자 주전자이다. 머리 위에 있는 구멍으로 음료를 부어넣고, 툭 튀어나온 부리 끝으로 따른다. 오리의 꼬리를 과장하게 휘어서 손잡이를 만들었다. 머리 뒷부분에 작은 고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구멍을 막는 뚜껑도 있었을 것이다. 가지런히 접은 날개의 깃털을 하나하나 도드라지게 표현하여 입체감을 더하였고, 몸통 전체를 덮은 반점무늬 깃털은 색이 다른 흙을 메워서 구워내는 상감 기법으로 만들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폭이 좁고 길어 마치 배처럼 생긴 용기로, 입구에는 번개무늬를 음각으로 새겨 넣었다. 이 청자 그릇의 용도는 변기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이와 비슷한 모양을 한 구리 그릇 위에 나무틀을 씌워 ‘매화틀’ 또는 ‘매우틀’이라고 불렀는데 임금이 그 틀에 걸터 앉아 용변을 보도록 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청자는 아주 드물게 남아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길고 가느다란 목에 참외처럼 생긴 몸체를 한 고려시대의 정병이다. 정병은 원래 깨끗한 물을 담아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기 위해 사용했던 불교 용구이다. 고려 사람들은 주전자, 화병 등을 만들 때 참외나 박 같은 과일의 모양을 많이 응용했으나 정병의 사례는 드문 편이다. 골과 골 사이의 면에 연꽃과 모란을 번갈아가며 섬세하게 새겼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옷칠을 바른 뒤 금을 입힌 칠박도금 기법이 사용된 보살상이다. 상투를 높게 틀은 머리에는 보관을 얹기 위한 턱을 만들었고, 몸에는 화려한 장식을 덧붙였다. 이러한 보살상은 원의 영향을 받았던 고려 후기부터 많이 만들어졌다. 등을 굽힌 자세 또한 고려 후기 불상에 자주 나타난다. 고려시대 금동보살상 중에서 큰 편에 속하며, 장식이 섬세하고 상태 또한 양호해서 고려시대 금속공예와 불교미술의 수준을 잘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정병, 향완, 주전자, 매병 등 일상 생활에서 널리 쓰이는 그릇은 다양한 재질로 만들어 사용했다. 특히 청자는 이전에 사용했던 도기나 금속으로 만든 그릇의 외형을 재현한 형태가 많으며 그 중 빼어난 걸작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같은 모양, 다른 재질의 그릇
정병, 향완, 주전자처럼 널리 쓰이는 종류의 그릇은 도기.자기.금속기 같은 다양한 재질로 만들어지곤 했습니다. 이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형태와 기법을 다듬어 나갔습니다. 특히 청자는 청동기와 도기, 곧 질그릇의 다양한 형태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지요. 현재 고려의 질그릇은 상당히 많이 전해지며, 유적에서 출토되는 양도 적지 않습니다. 이로 보아 고려시대 사람들은 청자나 청동기도 많이 사용했지만, 일상에서는 질그릇을 주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시대의 무덤이나 생활 유적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도자기들이 출토되고 있다. 대체로 접시나 대접, 완, 잔처럼 크기가 작은 것들은 청자 제품이, 항아리나 병처럼 상대적으로 큰 것들은 도기 제품이 많이 보인다. 지역에 따라서는 잔, 발 등을 도기로 만든 것도 적지 않게 확인된다. 청동 또는 청자로 만든 병이나 정병, 주전자 등을 모방한 도기들도 있는데, 일반 도기들보다 질이 좋은 편이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중국 송나라를 중심으로 활발한 무역거래가 있었던 시기이다. 또한 무역거래가 활발했던 당시 사회를 반영하여 송나라에 유학했던 대각국사 의천의 주장으로 해동통보, 동국통보, 삼한통보, 삼한중보 등 금속화폐를 발행하여 화폐의 유통을 촉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물품화폐가 제 기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동전은 그리 오래 유통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고려의 화폐경제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에 따르면 고려에는 화폐제도가 없어서 사람들이 베나 은, 쌀 같은 현물로 물건 값을 치렀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 고려시대 유적에서는 동전이 많이 출토됩니다. 그 중에는 삼한중보, 해동통보처럼 고려에서 만든 동전도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고려 중기 문인인 임춘의 <공방전>은 동전을 의인화해서 쓴 글입니다. 이것은 화폐경제의 흐름과 폐단을 파악하지 못하면 쓰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또 고려시대 동전들이 많이 출토되는 유적은 바로 무덤입니다. ‘저승길 노잣돈’이라는 관념을 고려 사람들이 가졌던 것입니다. 이를 종합해보면, 고려 사람들은 화폐경제의 개념을 잘 알고 있었고 국가 차원에서도 보급을 위해 노력했지만, 경제의 여건상 화폐가 현물을 대체해 전국적으로 유통되지는 못하였던 상황이라고 추정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1990년대부터는 토지 개발을 앞서 고고학적인 유적지 발굴이 제도적으로 정착되면서 여러곳에서 고려 이후 시기 유적들이 발굴되고 있다. 특히 강화도와 경기도 일대에 당시 생활상을 알 수 있게 하는 다양한 생활유적과 무덤들이 확인되고 있다.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분천리이 고려시대 유적에서는 흙구덩이를 파서 만든 토광묘 73기가 조사되었다. 이 토광묘에서서는 질그릇.도자기.수저.벼루.동전.청동거울 등 고려시대 껴묻거리 23종 192점이 출토되었다. 특징적인 점은 고려시대의 유구에서만 동전이 출토되고, 12~13세기 무렵 운영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기마 가마 3기가 나왔다는 것이다. 이 유적엣 나온 다양한 일상용품을 통해서 이곳을 기반으로 살아갔던 고려 지방민의 삶과 장례풍습, 생산에 종사하던 고려 마을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시대 상류층은 귀금속을 비롯하여 다양한 재료로 만든 화려한 장신구와 생활용품을 사용할 수 있다. 중국은 당나라 때 화려한 금속공예품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고려는 중국의 영향을 받으면서 고려의 정서가 반영된 금속공예품들을 많이 만들어 사용했다.
품에 넣고 다닐 수 있도록 작게 만든 칼인 장도를 넣던 칼집이다. 은으로 만들고 표면을 타출하여 문양을 넣었다. 고려시대의 장도는 조선시대의 것과는 달리 배 부분이 불룩하며, 윗부분에 끈 따위를 매달 수 있는 작은 고리를 달아놓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세련된 아름다움, 장신구과 금속공예
왕실과 관료계층을 포함한 고려의 상류층은 금.은 등의 금속과 옥.유리.보석 같은 다양한 재료로 만든 화려한 장신구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요.송.금.원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고려만의 특색이 담긴 장신구들이 많이 제작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금이나 은, 옥으로 만든 소형 장신구가 발달하였다. 이는 의복 위에 부착되는 장신구나 단추, 호신의 의미가 담긴 부적 등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정교한 타출 기법이 사용된 향합과 칼집, 입사 기법을 활용한 향완 정병 등이 많이 나타나는데, 이는 한국 금속공예의 백미로 꼽힌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개경 여성의 화장대
아름다움을 가꾸고 드러내는 일은 시대에 따른 미의식이 반영되어 표현하는 방법과 그 기준에 차이가 있을 뿐, 동서고금을 막록하고 여성들의 일상이 되었다. 고려 귀족 여성들은 청자 유병에 기름을 담고, 큰 합 속에 여러 작은 합이 들어 있는 모자합에는 화장품으로 사용한 재료들을 한 세트로 담은 듯하다. 다양한 형태와 무늬의 청동 거울로 예쁘게 치장한 자신들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고 은입사로 화려하게 장식한 거울걸이를 사용하였다. 또한 귀이개.족집게.비녀 등의 일상 용품에도 고려 여인들의 아름다움이 투사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시대의 청동 자물쇠와 자물쇠의 장식 부재, 문에 박았던 금동 문고리와 그것을 장식한 연꽃무늬 장식판이다. 자물쇠는 오른쪽 열쇠 구명에 ‘ㄱ’자 모양의 열쇠를 끼워 밀어 넣으면 잠글쇠의 왼쪽 부분이 분리되는 구조이다. 이러한 모양의 자물쇠는 고려 초기의 승탑에도 새겨져 있어, 당시 이런 자물쇠가 실제 사용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투박하고 소박한 일상 용기
지방의 세력가들은 개경의 귀족들을 모방하여 청동그릇이나 청자를 사용하였다. 세숫대야.주전자.화로.대접 등 다양한 용기를 청동으로 만들었는데, 금속을 녹이거나 두드리는 제작 공정의 어려움 때문에 그 모양은 비교적 단순하였다. 청동그릇의 다양한 종류와 형태는 청자 제작에도 영향을 끼쳐서 청동그릇과 동일한 모양의 청자도 많이 생산되었다. 도기는 질그릇.옹기.토기와 같이 흙으로 빚어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구운 것이다. 대체로 유약을 바르지 않지만, 고려시대에는 유약을 발라 구워서 적갈색을 띠는 도기도 많이 사용하였다. 귀한 물건이었던 청자나 청동그릇과 달리 도기는 각지에서 직접 만들어 썼기 때문에 구하기가 쉽고 지역 특색도 잘 드러났다. 덕분에 도기는 신분이나 계층에 상관없이 대용랑 저장 용기나 일상생활 용기로 널리 사용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당당한 고려 여성의 삶
고려시대에는 아들과 딸을 구분하지 않고 태어난 순서대로 호적에 올렸고, 자녀들이 번갈아가며 부모를 봉양하거나 제사를 지냈다. 재산 또한 균등히 분배되었으며, 딸이 결혼을 하더라도 자신이 부모로부터 받은 재산은 남편의 재산과 구분하여 따로 관리하였다. 고려 여성들의 사회.경제적 처우는 남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활동 영역은 확실하게 구분되었다. 여성들은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관리하고 자녀를 양육하였으며, 평소에는 길쌈과 바느질을 하면서 살림을 꾸려갔다. 고려후기에 재상을 지낸 김원의의 부인은 “문서 관련은 남자의 일이요, 길쌈과 바느질은 부인의 일”이라고 말하였다. 이를 통해 고려의 여인들은 집안을 잘 꾸리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받아들이고 자부심을 느꼈음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동거울은 청동기시대부터 사용되어온 것으로 전국의 주요 박물관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전시되어 있다. 원래는 제사장이나 부족장의 권위를 나타내는 주술적인 용도였으나, 점차적으로 화장을 위한 일상용품으로 그 용도가 변하고 고려시대에 보편화되었다고 한다.
‘빛나며 창성한 하늘’이라는 뜻의 “황비창천”이란 한자가 새겨진 고려시대의 청동 거울이다. 글자 아래에 넘실대는 파도를 헤치고 항해하는 배 한 척을 새겼다. 명문과 문양에서 보듯 바다 가운데 있는 상상 속 별천지, 이상 세계를 찾아가는 모습을 표현했다고 보인다. 이러한 문양의 거울은 송나라나 금나라에서도 확인되지만, 고려시대의 유적에서 월등히 많은 수가 나오고 있어 고려 사람들이 유독 이 거울의 도상을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형태는 대개 테두리가 여덟 장 꽃잎 모양인 팔룡형이지만, 둥근 원형도 나타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나무와 전각이 돋을새김된 청동거울이다. 이 두 점의 청동거울은 소재와 구성이 서로 비슷하지만, 세부 묘사는 차이가 크다. 거울 1의 전각은 주심포 양식의 팔작지붕집인데 비해 거울 2의 전각은 보다 복잡한 다포양식이다. 1에는 용이 있는 반면 2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표현되어 있고, 1에는 새겨진 달에는 방아 찧는 토끼 옆에 두꺼비가 있다. 두 거울 중 어느 것이 먼저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기 어렵지만, 중국에서 만든 거울을 고려에서 본떠 만들면서 고려 사람들에게 익숙한 무늬로 바꾸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에서 만들었다는 “고려국조” 명문이 새겨진 청동거울이다. 송이나 요, 금 등지에 수출하기 위해 이러한 문구를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국조”라고 새겨진 거울은 남아 있는 사례가 매우 드물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인의 삶을 엿보는 청동 거울
고려에서 실제 만든 것으로 보이는 거울은 “고려국조”를 새긴 거울, “황비창천”을 새긴 거울, 용.나무.전각무늬 거울 등이다. 고려 무덤에서 나온 청동 거울에는 중국의 지명인 “호주”.”항주”.”소주”를 새긴 거울이 상당량 있는데, 이들은 중국에서 직접 수입하기도 하였지만 중국제 원본을 바탕으로 고려에서 다시 찍어낸 것도 많았다. 한편 고려시대 청동 거울이 대부분 일상 생활 용품과 동반 출토되는 것을 보면 일반인이 사용한 듯하다. 뿐만 아니라 거울에 새겨진 무늬를 통해서도 고려인의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커다란 배를 타고 먼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 팔각지붕의 전각, 여인의 모습, 씨름하는 장면, 다리를 건너는 인물 등 다양한 배경과 인물이 청동 거울에 묘사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금속제 그릇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무덤 부장품으로 주로 만들어졌으며 오늘날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고려시대 이후에는 금속으로 만든 그릇이 점차 일상생활에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옛 기록에도 이에 대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금속제 그릇은 음식을 먹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며,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시대에는 향그릇이, 조선시대에는 여인네들의 화장품 그릇 등이 만들어 졌다.
고려시대 숟가락과 젓가락
고려시대 숟가락의 가장 큰 특징은 측면이 S자형으로 굴곡져 있다는 점이다. 또한 숟가락면(술잎)의 형태에 따라 장릉에서 출토된 타원형과 버들잎 모양의 유엽형으로 구분하고 손잡이 끝의 모양에 따라 제비꼬리 모양의 연미형.연봉형.약사형.능형 등으로 나눈다. 고려시대 숟가락이 본격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요.금.원 등 북방 문화권의 영향으로 육류의 섭취가 늘어나고 밥상에 국이 등장하게 되면서부터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고려시대 궁중에서 필요로 하는 술과 감주를 공급하던 관청인 ‘사온서’가 몸체에 새겨져 있다. 이로 보아 고려시대에는 매병이 술 같은 액체류를 담는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성기의 비색청자에 비해 색이나 형태의 아름다움은 떨어지지만, 관청의 이름과 연도가 적혀 있어 고려시대 사회사.문화사를 연구하는 데 귀한 자료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인의 식생활
고려 전기에는 불교적 행사와 의식의 성행으로 떡과 차를 즐기는 풍습이 성행하며, 도축 금지령 등을 통해 육식을 절제하였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는 원의 영향으로 육식이 유행하며 밥과 국(탕)이란 한국적 식단의 기본을 이루었다. 쌀과 보리.조를 주요 곡물로 재배하였으며 특히 채소 요리가 발달하였고, 재배된 채소로 장아찌 등을 만들어 먹었다. 원의 영향으로 주류 가운데 증류식 소주가 도입되기도 하였다. 고려 가요 <쌍화점>에 나오는 ‘상화’는 밀가루로 반죽하여 팥소를 넣고 만든 찐빵의 일종인데, 고려시대 밀가루는 중국에서 들여왔기 때문에 밀가루로 만든 국수는 귀한 음식으로 잔치 때에나 맛볼 수 있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2024년
- 위키백과,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