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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학가산 광흥사

경북 안동시 서후면 학가산에 있는 광흥사(廣興寺)이다. 봉정사와 함께 안동지역을 대표하는 큰 사찰이었으나 지금은 응진전과 작은 전각들만 남아 있는 작은 사찰이다. 광흥사에서는 <월인석보>와 같은 한글 경전들이 발견되었으며, 뉴스에서 접할 수 있는 <훈민정음 혜례본> 상주본 또한 이곳 광흥사에서 훔쳤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물과 여러 정황 등으로 볼 때 한글 창제 초기 한글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 조성한 사경인 <취지금니묘법연화경>(보물), <백지묵서묘법연화경>(보물)과 조선중가에 조성한 동종(보물)을 소장하고 있다. 근래에 들어 대웅전, 극락전, 학서루 등의 큰 전각들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안동 학가산 광흥사>

광흥사는 대웅전, 극락전 등이 있었던 큰 사찰이었는데 지금은 응진전을 중심으로 요사채와 문루 등이 있는 작은 규모의 사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광흥사 공간배치>

광흥사는 안동시 서북쪽에 위치한 학가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안동도심에서 약 12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학가산(해발 870m) 안동시, 영주시, 예천군에 걸쳐 있는 지역이 명산이다.

<광흥사 일주문>
<언덕 아래에서 보이는 모습>

중심영역

광흥사는 화재로 소실되기 전 부속 전각이었던 응진전이 주불전 역할을 하고 있다. 중심영역은 응진전을 줌심으로 마당 양쪽에 요사채들이, 앞쪽에 문루가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공간은 협소한 편이다.

<문루>
<중심영역 마당>

응진전이 언제 지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옛 모습이 남아 있는 유일한 불전이다. 건물은 얖면 3칸, 옆면 2칸 규모를 하고 있으며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다. 가운데 출입문을 제외하고는 창문이 있는 벽을 사용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응진전>
<처마와 공포>
<창문>

내부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양옆에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을 모셨으며, 그 양옆으로는 부처의 여러 제자 중 으뜸이라고 하는 아난과 가섭을 비롯한 16나한상이 있다

<응진전 내부>

대웅전 뒷편으로는 산신을 모시는 산령각이 있다.

<산령각>
<산령각 내부>

응진전 마당 양쪽에는 요사채들이 배치되어 있다. 마당은 비교적 좁은 편이다.

<마당 왼쪽 요사채>
<오른쪽 종무소가 있는 요사채>
<바깥에서 본 모습>
<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안동지역>

안동 광흥사 응진전
응진전은 석가모니불과 그 제자인 나한을 모시는 불전이다. 응진은 ‘진리에 상응하는 이’라는 뜻이다. 광흥사 응진전은 신라 신문왕 때 의상대사가 지었다. 자세한 연혁은 전해지지 않으며, 1827년 가람 전체가 불탔다가 1828년 다시 지으면서 당시 안동 지역에서 손꼽히는 대가람을 갖추었다고 한다. 그러나 1946년 대웅전에 화재가 일어나면서 세력이 점차 쇠락하여 전각들이 낡아 무너지면서 응진전이 중심 불전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응진전의 지붕은 겹처마로 되어 있으며, 건물 중앙의 문을 제외하고는 모든 벽을 널빤지로 만들었다. 상부에는 채광을 위해 창을 내었다. . 나한상 사이마다 동자상이 있고, 입구 쪽에는 인왕상 2구, 사자상 2구, 제석천상 1구가 있다. 총 42구의 불상이 있으며, 일반적인 사례에 비해 불전에 모신 상의 수가 많고 배치가 특이하다. 이 불상들은 제작 시기가 임진왜란 이전으로 올라갈 가ㅏ능성이 높아 16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는 희귀한 사례일 뿐 아니라 전체 불상들을 흙으로 조성한 것 역시 드문 경우이다. 이는 모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안내문, 안동 광흥사, 2024년)

바깥 공간

오른쪽 언덕에는 명부전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에 비해 공간이 넓은 편으로 다른 전각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부전이 있는 공간>
<명부전>
<명부전 내부>
<지장전 옆 요사채>

오른쪽 언덕 아래에는 최근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대웅전이 있다. 원래 중심영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

<안동 광흥사 동종>(보물)은 1583년에 만들어진 종으로 한국 범종을 전통적인 양식을 잘 따르고 있다. 높이 60cm 정도의 작은 종이지만 매끄러운 곡선과 사실적인 용의 표현 등 조각수법이 우수하다. 세부 문양은 단순하지만 4면에 표현된 보살입상이 돋보인다. 기록된 명문에 따르면 인근 수암사에서 사용하기 위해 조성되었으며 사장과 승장의 협업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광흥사 동종, 조선 1583년, 안동 광흥사, 보물>

 2013년 광흥사 지장전의 시왕상과 금강역사상의 복장에서 다량의 전적이 발견되었다. 그 중 <월인석보>는 권7, 8, 21 총4책이 발견되었다. 특히 권21의 경우 초간본으로 추정되며 1542년에 제작된 중간본도 함께 확인되었다

<훈민정음 목판, 재현품, 안동 광흥사>
<월인석보 권7, 21, 조선 1459년.1542년, 안동 광흥사>
<월인석보 권7, 21, 조선 1459년.1542년, 안동 광흥사>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편한 것이다. <월인천강지곡>은 세종이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며 직접 지은 찬불가이다. <석보상절>은 세조가 모친인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며 발원하여 편잔한 것으로, 두 책을 통해 훈민정음 반포 이후 중세 국어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2013년 광흥사 지장전의 시왕상과 금강역사상의 복장에서 다량의 전적이 발견되었다. 그 중 <월인석보>는 권7, 8, 21 총4책이 발견되었다. 특히 권21의 경우 초간본으로 추정되며 1542년에 제작된 중간본도 함께 확인되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3, 4>(보물)은 법화경의 내용을 청색 종이에 금색 글씨로 옮겨 쓴 것으로 권3과 권4가 전해지고 있다. 권3의 끝에 ‘施主權圖南(시주권도남)’이라고 적혀 있다. 고려말에 펴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3, 4, 고려 14세기, 안동 광흥사, 보물>

감색 종이에 금으로 <묘법연화경>의 내용을 쓴 사경이다. 현재 권3과 권4가 남아 있는데 필체가 유사하여 동일한 인물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각 권의 표지 문양이 약간 다르지만 보상화 무늬로 전면을 장식하고 1절에 6행 17자씩 배열한 경문 형식이 고려 사경의 전형을 보여준다. 권3 끝부분에 ‘시주 권도남’이라는 시주질이 확인되는데 ‘권도남’은 1366년에 제작된 <감지금니묘법연화경>에도 등장하고 있어 이를 토대로 광흥사 <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3, 4 역시 고려 말기에 조성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백지묵서묘법연화경 권1, 3>(보물)은 흰종에 먹으로 글씨를 쓴 것으로 전체 7권 중 1,3권이 남아 있다. 각권의 크기와 글씨체가 달라 여러 사람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끝부분에 책을 만들게 된 경위가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간행연대를 알 수 있다.

<백지묵서묘법연화경 권1, 3, 고려 1398년경, 안동 광흥사, 보물>

흰 종이에 먹으로 <묘법연화경>의 내용을 쓴 사경이다. 전체 7권 가운데 권1과 권3이 남아 있다. 절첩본으로 표지에는 감색 종이에 금으로 연꽃무늬와 보상화무늬를 그렸으며, 제목과 권차를 기재하였다. 권3의 앞부분에는 금으로 그린 변상도가 남아 있는데, <묘법연화경>을 설하는 부처님과 그 권속을 오른쪽에, 경전의 내용을 왼쪽에 그렸다. 끝부분에는 장씨 부인 묘우가 돌아가신 부모와 일체중생을 위해 만들었다는 제작 경위와 함께 1398년이라는 정확한 제작 연도를 밝히고 있어 매우 중요하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광흥사 아미타극락회상도, 조선 1886년, 비단에 채색, 안동 광흥사>

이 그림은 서방 극락세계에서 설법하는 아미타불과 보살, 권속을 그린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붉은새과 녹색을 주로 채색하여 차분하고 안정적 분위기르 자아내고 있으며, 화면 하단 짙은 청색의 원형 안에 그려진 동자가 주목된다. 그림 하단에 남아 있는 화기를 통해 이 그림이 하은 응상 스님을 비롯한 7명의 스님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출처>

  1.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2. “광흥사”,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4년
  3. “보물 광흥사 동종”,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