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척화비”이다. 서울 종로에 세웠던 것을을 임오군란 이후 철거되어 묻혔다가 1915년 보신각 이전 시 발굴되었다. 척화비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대표하며, 쇄국정책은 후대 사람들이 조선의 근대화가 늦어지고, 멸망하게 된 큰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아편전쟁 이후 피폐된 중국 청나라의 정세를 듣고 있었던 사람으로서 당연히 취할수 있는 여러 정책 중 하나라고 보여지며 이를 폄훼하는 것은 바림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서양 세력의 침입을 경계하는 비석
19세기 후반 조선은 농민들의 봉기와 제국주의 열강의 문호 개방 요구에 직면했다. 고종을 대신하여 실권을 장악한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후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외세의 침입에 대항할 것을 선언했다. 이 척화비는 서울 종로에 세웟던 것으로 임오군란 이후 철거되어 묻혔다가 1915년 보신각 이전 시 발굴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 위키백과,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