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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예안이씨충효당(보물)

경북 안동 풍산읍 하리리(下里里)에 있는 고택인 “안동 예안이씨충효당”(보물)이다. 이 고택은 풍산천과 넓은 벌판이 내려다 보이는 경관이 빼어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임진왜란때 의병활동과 후손들의 효심으로 인해 국가로부터 ‘충효당(忠孝堂)’이라 이름을 하사받은 유서깊은 저택이다. 조선중기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집은 넓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섬세하게 설계되어 있고 개방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안동 예안이씨 충효당(보물)>

풍산읍 넓은 들판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예안이씨충효당(보물)이다. 원래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대문이 별도로 없고 별당인 ‘쌍수당’이 먼저 보인다.

<안동 예안이씨 충효당(보물)>

건물은 살림집인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ㅁ’자형 본채와 별당인 ‘쌍수당(雙修堂)’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축학적 측면에서 고려시대 양식부터 조선후기 양식까지 다양한 형태의 건축양식이 반영되어 있다. 건물 내부 구조도 화려함이나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소박한 느낌을 주고 있다. 건물 자체는 부나 권세를 상징하는 중후함이나 화려함보다는 소박한 양반저택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본채>

중문 왼쪽에 앞면 4칸 규모의 사랑채가 있다. 왼쪽 2칸은 마루, 오른쪽은 온돌방으로 되어있다. 집주인이 일상적으로 생활하면서 손님을 맞는 공간이다.

<사랑채 마루>
<중문>
<안마당에서 보이는 중문 바깥 들판>
<외양간>

중문을 들어서면 넓은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방과 부엌들이 배치되어 있다. 주인 할머니께서 마루에 앉아 오가는 손님을 살펴보는 전형적인 양반가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청마루>
<건너방>
<부엌>

이 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창호와 기둥이다. 보통 한옥의 경우에는 방문 중간을 분리하는 문틀이 없으나, 이집에서는 볼 수 있는 양식이다. 고려시대 건축양식이 반영된 것이라 한다.

<고려시대 건축양식이 남아 있는 창호>

반면에 대청마루에는 방문 중간에 분리하는 문틀이 없는데 조선후기 건축양식을 반영한 것이라 한다.  문을 열어 두어 시원한 느낌을 준다. 실제로는 추워서 겨울을 보내기가 힘들다고 한다.

<대청마루 창호>

기둥과 마루를 연결하는 부분도 일반적인 한옥과 다른 형태를 보여준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여러차례 중수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는 흔적들이 기둥에 남아 있다.

<기둥>
<중수의 흔적>

이 집은 오른쪽에 안채를 출입하는 문이 별도로 있다. 남쪽을 향하고 있어 원래 출입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차례 중수하는 과정에서 안채 정면 방향인 서쪽에 중문을 새로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른쪽에서 본 모습>
<오른쪽 출입문>
<바깥쪽 안방 출입문>

왼쪽에는 사랑채에 딸린 작은 방들이 있고, 별당인 ‘쌍수당’을 출입하는 문이 따로 있다.

<왼쪽에서 본 모습>
<왼쪽 날개채>
<왼쪽 출입문에서 보이는 안마당>

사랑채 왼쪽편에는 이 저택의 별당 건물이 있다. 별당은 ‘쌍수당’이라 부르며, 충과 효를 다 갖춘 집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살림집인 본채 건물은 비교적 소박하게 지었는데 반해, 별당의 웅장하면서 화려하게 지었다. 이 별당에 올라서면 멀리 풍산지역 벌판이 한눈에 들어 온다.

<별당>

정면에는 ‘쌍수당’ 적힌 현판이 걸려 있고 옆쪽에 ‘백원당(百原堂)’이라는 이름도 같이 있는 것 같다.

<쌍수당 현판>
<백원당 현판>
<아래에서 본 모습>

이 집이 있는 마을은 풍산읍치 남쪽에 있다고 하여 하리(下里)라고 불렀다고 한다. 예안이씨(禮安李氏)가 모여사는 집성촌으로 이 집을 비롯하여 일성당(日省堂), 사직공파구택 등 고택등이 남아 있다. 마을 남쪽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넓은 들판이 있는 곳으로 마을에 고려시대 석탑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교통요지에 세워졌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풍산읍 하리마을>

안동 예안 이씨 충효당, 보물
충효당은 예안 이씨 이홍인 가문의 종택으로, 명종 16년(1551)에 지어졌다고 한다. 종택이란 가문의 맏이가 대대로 살아온 집을 말한다. 충효당이라는 이름은 이홍인의 충절과 그의 후손인 이한오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붙여졌다. 이홍인은 풍산에 처음 정착한 예안 이씨인 이영, 이전, 이훈 삼 형제 중 이전의 둘째 아들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재산을 들여 의병을 일으켰으며, 지금의 안동 구담리 지역에서 왜적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한오는 몸이 아픈 아버지를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였으며 학문으로도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충효당은 ‘ㅁ’자형의 본채와 누각 형태의 별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채는 1974년 해체한 후 복원되었다. 별당에는 ‘쌍수당 雙修堂’과 ‘백원당 百源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쌍수당은 ‘충과 효를 함께 닦은 집’이라는 뜻이고, 백원당은 효는 모든 행실의 근본이라는 뜻의 ‘백행지원’에서 비롯되었다. 충효당에서 북서쪽으로 약 750m 떨어진 풍산우체국 바로 옆에는 이홍인과 이한오에게 내려진 정려를 모신 예안 이씨 정충.정효각이 있다. (안내문, 안동시, 2024년)

<출처>

  1. 안내문, 안동시, 2024
  2. “보물 안동 예안이씨 충효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4년
  3. “하리리”,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