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渤海)는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멸망한 이후 유민들이 말갈족과 함께 동모산 일대에서 세운 국가이다. 698~926년까지 약 230여년간 대동강 이북에서 중국 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 일대의 넓은 영토를 차지하면서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시대를 이루었다. 발해는 당의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당시 동아시아에서 큰 규모의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당나라와 일본과 적극적인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발해는 세계적인 초피(담비가죽)의 생산지였다. 이 초피는 후대에 러시아가 연해주까지 동진했던 동기가 되었던 무역상품으로 당시 중국,일본,신라,서역 간의 교류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품목이다. 이를 통해서 생긴 부의 결과로 발해는 상당한 수준의 건축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발해는 말갈족과 같이 공존했던 다민족 국가이지만 수도인 상경 등지의 주거지 유적에서 고구려 계통의 난방 시설인 구들이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확연히 알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박물관이지만, 발해 관련 유물은 거의 없다. 현재 전시하고 있는 유물들은 역사를 소개하는 일관성과 교육적인 면을 고려하여 일본과 러시아에서 소장하고 있는 발해를 대표하는 유물의 복제품을 전시하고 있다.
녹유치미는 평양 조선중앙역사박물관 소장하고 있다. 발해를 대표하는 유물로 유약을 발라서 구워서 아주 튼튼해 보인다. 치미는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이후 거의 없으졌으나, 일본.중국에는 치미가 있는 건물이 아직도 많다.
치미는 고대 목조 건축에서 용마루 양쪽에 높게 올려 건물을 장엄하게 보이는 장식 기능과 재앙을 막는 벽사적 의미를 담은 장식물이다. 진한 녹색의 유약이 발렸으며, 두 날개는 각 17개의 돋을 선으로 새의 깃을 표현하였다. 날개와 몸통 사이에 7개의 구멍을 뚫고, 거기에 머리가 꽃모양으로 생긴 장식을 맞추어 넣었다. 펼친 두 날개 사이로 주둥이를 내민 듯한 형상이 힘 있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발해의 왕성이었던 상경 궁궐터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이는 용머리장식을 비롯한 유물들을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발굴조사하여 일본내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중앙박물관에는 복제품들을 전시하여 발해의 강성함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건물 기단에 끼워 넣어 장식하였던 것으로 벽면에 튼튼하게 끼워질 수 있도록 뒷부분을 쐐기 모양으로 길게 깎아내고 고정하기 위한 홈을 팠다. 상경성을 비롯한 발해의 도성에서 몇 개가 출토되었지만 형태와 조각 기법은 모두 같다. 귀밑까지 찢어진 입, 날카로운 이빨, 툭 튀어나온 두 눈, 머리에서 귀 뒷부분까지 이어진 갈퀴 등이 어떤 악귀도 얼씬하지 못한 상스러운 용의 모습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용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건물기단에 끼워 장식했던 것이라고 한다. 여러개가 출토되고 있으며 현재 북경 자금성 월대 배수구 역할을 하는 동물의 얼굴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발해의 건축 미술
용머리 상은 상경성 제1궁전지에서 출토되었는데 건축물의 기단 장식품이다. 양쪽 눈을 크게 뜨고 있고, 입에는 이빨 사이로 드러난 커다란 앞니가 위아래 4개씩 표현되어 있다. 목 둘레에는 머리털과 갈기가 새겨져 있다. 녹유괴수면와는 발해 궁전이나 사원 건축물의 지붕을 장식하던 마루 기와의 일종이며, 녹유치미는 지붕 용마루 양 끝에 세워 건축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권위를 드러내는 장식이다. 녹유괴수면와와 녹유치미는 용머리 상과 더불어 발해 건축 장식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발해인들은 스스로 고구려 땅에 건국했다는 것을 표명하였으며,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부여의 전통을 계승한 나라임을 천명하였다. 발해 지역에서 출토된 문자가 적혀있는 기와와 일본과 교류를 보여주는 문서와 목간 등에 이를 표현한 글자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왕조의 정통성
발해는 고구려인과 말갈인으로 구성된 나라였지만 말갈인의 나라가 아니라 고구려의 계승국이며, 당의 지방 세력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황제국을 지향한 엄연한 독립 왕조였다. 발해인들은 스스로 고구려 땅에 건국했다는 것을 표명하였으며,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부여의 전통을 계승한 나라임을 천명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1758년 ‘견고려사’ 목간과 <속일본기>의 “발해는 옛 고구려국이다.”라는 표현이다. 이것은 당시 일본도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당시 주변국들 역시 발해의 건국을 고구려의 멸망과 직결되는 것으로 보고 고구려 후계 국가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평양 원오리 절터에서 출토된 고구려 불상과 발해 수도에서 출토된 불상을 비교하면 발해 문화는 고구려 문화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발해 수도에서 출토된 와당 역시 발해와 고구려의 문화적 유사성을 잘 보여 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758년에 발해 사신 양승경과 함께 발해에 갔다온 일본의 오노다모리 일행을 특진시킨다는 내용이다. 발해에 보낸 사신을 ‘견고려사’라고 하여 발해를 고려(고구려)로 칭하고 있다.
견고려사 목간
이 목간은 고대 일본의 궁성이었던 헤지조 궁(平城宮) 터에서 출토되었다. 길이 24.8cm, 너비 2cm, 두께 0.4cm인 목간에 모두 22자가 적혀 있다. 여기서 고려는 발해를 가리키며, 이는 당시 일본에서 발해를 고려라고 부르고 있었다는 것을 실증하는 가장 오래되고 귀중한 사료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이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인정했다는 사실도 말해 준다.
“고려(발해)에 파견된 사절이 사명을 완수하고 귀국하였으므로 데표호지 2년(758) 10월 28일에 위계를 두 개 올린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발해 2대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는 발해가 스스로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부여의 전통을 계승한 나라임을 천명하고 있다. 일본은 발해를 고구려 후계 국가로 가장 강하게 인식했다. 발해 멸망 후 건국된 정안국 관련 기록을 통해서는 당시 발해인의 자의식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수도.왕권.통치
발해 5경은 <신당서> 발해전에 나오는 것과 같이 상경 용천부, 중경 현덕부, 동경 용원부, 남경 남해부, 서경 압록부로 구성되었다. 5경은 당의 5경제를 기본 골격으로 삼아 760년대 중반 무렵 설치하였다. 발해가 5경제를 채택한 것은 국력에 따른 자신감을 바탕으로 당과 같은 황제 체제를 취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발해 초기의 수도는 동모산으로 현재 중국 길림성 돈화시 성산자 산성이다. 그 뒤 문왕는 756년에 수도를 중경 현덕부에서 상경 용천부로 천도했다. 문왕 말년에 수도를 일시적으로 동경 용원부로 옮긴 적이 있으나, 성왕 대에 다시 상경 용천부가 발해의 수도가 되었다. 상경 용천부는 당시 동아시아 왕조의 도시시와 같이 정연하게 계획되었으며, 왕권의 통치 이념을 구현한 공간이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발해지역에서는 많은 불교 관련 유적이 출토되고 있으며, 그 중 수도였던 상경의 절터에 있던 석등이 가장 유명한 것으로 보인다. 발굴된 유물들로 보아 발해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것은 불교였고, 상류층부터 하류층 서민까지 불교가 생활 속에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앙박물관에는 발해관련 유물의 진품은 전시되어 있지 않고, 일제 강점기에 발해의 수도였던 헤이룽장성 상경부를 조사.연구했던 일본 도쿄대에서 많은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연해주 지역은 러시아 과학원에서 발굴작업을 하여 크고 작은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발해의 불교 신앙
발해 왕실에서 불교는 왕권 정당성 강화의 이념적 도구였다. 발해 불교의 원류는 고구려에 있으며 9세기가 되면 크게 융성하게 된다. 상경 지역은 관음상으로 대표되는 관음 신앙이, 동경 지역은 이불병좌사으로 대표되는 법화 신앙이 유행했다. 발해 문자 기와 중에는 불佛자의 고자古字가 새겨진 것이 있는데,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또 이시야마 사 다리니경은 발해 사신이 일본에 전해 준 것으로 밀교의 일본 전파뿐만 아니라 발해 불교도 밀교와 긴밀한 관련이 있음을 암시해 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목간 글자 중에 ‘발해사渤海使’, ‘교역交易’, ‘맥인貊人’, 발해의 특산물인 ‘초피貂皮’ 등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발해와 일본이 활발히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함화 11년(841) 발해 중대성에서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의 필사본이다. 발해와 일본 사이의 외교 관계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해성성국 발해와 주변 세게
발해는 건국 이후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 당, 통일신라, 일본과 같은 동아시아 주변 세계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특히 주변 국가와의 교류를 위해 동경, 남경, 서경과 같은 거점 도시를 설치하고 신라도, 일본도, 거란도, 영주도, 조공도라는 교통로를 열었다. 이 교통로는 외교뿐만 아니라 당시 아시아 물류 유통의 핵심이었다. 발해는 주변 세계와 교류하며 새로운 정치제도 유학, 예술 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발해의 문화에는 중앙아시아의 요소뿐만 아니라 당이나 말갈 등 주변 모든 문화가 응축되어 있다. 그 결과 주변 나라에서 발해를 해동성국이라고 부를 정도로 수준 높은 문화를 갖게 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발해
670년 신라와 당의 전쟁 이후 한반도는 대동강 이남 지역을 통합한 통일신라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공존하는 남북국시대가 되었다. 발해는 698년 건국하여 926년까지 존속했으며, 당시 주변 국가인 당, 통일신라,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해동성국으로 불렸다. 건국 이후 중앙의 3성 6부 조직을 완비하고 전국을 5경 15부 62주로 정비하여 중앙집권화를 추진하고 지방 사회를 효율적으로 통합, 재편해 갔다. 발해는 왕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유교 정치 이념을 수용하고 불교를 통해 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면서 대내적으로는 황제국을 표방했다. 발해 지배층은 건국 당시부터 고구려를 계승하였다고 생각하였으며, 동아시아 주변 국가들 역시 발해를 고구려 부흥 국가 또는 후계 국가로 인식하고 있었다. 발해는 이렇듯 고구려의 전통을 기반으로 세워진 나라였으며, 당을 비롯한 동아시아 주변 국가들과 본격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발전해 갔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