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영주 소수서원 강학당”(보물)이다. 서원에서 교육기능을 하는 강학공간의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서원 출입문이 있는 남쪽 기단에 계단이 설치하여 내부로 출입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조선 중종때 주세붕이 성리학을 처음 도입한 안향을 모신 ‘백운동서원’을 세울때 강학공간으로 정의한 영역으로 ‘백운동’이라는 현판이 건물 남쪽에 걸려있고, 명종이 친필로 쓴 ‘소수서원’ 현판이 내부 대청마루에 걸려 있다.
서원 강학공간 중심건물로 동향을 하고 있지만, 현판은 남향을 하고 있다. 최초로 세워진 백운동 서원의 강당으로 후대에 세워진 서원의 강당이나 향교의 명륜당과는 약간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출입문을 향하는 건물 남쪽에 ‘백운동’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은 북쪽 앞면 1칸을 제외하고는 3면이 개방되어 있는 넓은 대청마루로 되어 있다. 정면에 명종이 친필로 쓴 ‘소수서원’이라 적힌 현판을 볼 수 있다.
사방 둘레에 너비 1m 정도의 툇마루를 설치하여 통로로 사용하고 있다.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려 놓았다. 건물은 앞면 4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사방에 툇마루를 설치하여 공간이 넓어 보인다.최초의 서원답게 궁궐 전각을 연상시키는 건물 형태이다. 기단 네 모서리에는 추녀를 받는 활주가 설치되어 있다.
영주 소수서원(紹修書院, 사적)은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안향을 모시기 위해 풍기군수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이란 이름으로 세웠던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이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직하면서 국왕으로부터 ‘소수서원’이란 현판을 하사받은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면서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게 된 것으로 보인다. 서원은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며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 중국 당나라 때 집현전서원 등의 설치에서 유래하였다.
영주 소수서원 강학당, 보물
강학당은 중종 38년(1543)에 주세봉이 세운 건물이다.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던 곳이기 때문에 이름을 강학당이라고 하였다. 강학당은 소수서원의 강학공간에서 중심이 되는 건물로 가장 규모가 크다. 향교의 명륜당에 해당하는 곳이다. 강학당은 앞면 3칸, 옆면 4칸 규모의 기와집이다. 일반적인 한곡 건물의 옆면에 해당하는 부분을 앞면으로 설정한 독특한 구조이다. 지도문을 통해 서원 안으로 들어오면 바로 강학당으로 들어갈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건물 앞부분 3칸은 대청이고 뒤쪽 1칸은 방을 둔 이른바 전청후실의 특이한 구조이다. 대청은 원생이 모여 공부하던 곳이고 방은 교수가 거처하는 공간이다. 강학당 내부 대청 북쪽에는 명종이 직접 쓴 ‘소수서원’ 편액이 걸려 있다. 그리고 강학당 앞쪽에는 “백운동”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데, 백운동은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기 이전 이름이다. 강학당은 전체적으로 웅장하고 기품 있는 인상을 주는 건물로, 이화으이 문하생을 포함해 4천여 명이 넘는 인재를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다. 소수서원의 역사와 역할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며, 건물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서 조선 시대 건축사 연구에도 좋은 자료이다. (안내문, 영주시, 2024년)
<출처>
- 안내문, 영주시, 2024년
- “보물 영주 소수서원 강학당”,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