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7세기 중엽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당전쟁을 거치면서 고구려 권역의 일부인 대동강~원산만을 연결하는 국경선 남쪽을 그 영역으로 비교적 안정된 통일국가를 형성하였으며, 그 북쪽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자리를 잡았다. 이 시기는 중국의 강력한 당왕조를 중심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국제정시를 유지하였다. 통일신라는 새로운 국가를 운영하기 위하여 관료제를 정비하였다. 통일신라는 지방을 9주로 나누고 다시 5소경을 두어 지방을 통치하였으며, 제도의 개선과 함께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중앙집군국가의 틀을 완성하였다.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는 삼국시대에 조성된 수많은 고분에서 출토된 화려한 유물들을 통해서, 금관을 비롯하여 화려했던 그들의 옛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 조성된 불국사, 석굴암 등을 비롯하여 많은 사찰들에서 그들의 뛰어난 예술 감각과 경제력 등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사찰 건축에 많은 공을 들여서인지, 일상 생활과 관련된 유물들은 생각보다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 통일신라인의 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유물을 그나마 조금씩이라도 볼 수 있게 된 것은 신라 왕궁인 월성의 후원에 해당하는 안압지라고도 불리는 임해전지의 연못속에 빠졌던 여러가지 유물들이 발굴되면서 일 것이다. 임해전지에는 신라인이 생활에 사용했던 여러 유물들이 발굴되어 당시 그들의 생활 모습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임해전지에서 출토된 유물 대부분은 경주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으며, 중앙박물관에서는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 일부만을 전시하고 있다.
토용은 흙으로 사람이나 동물을 본 떠 만든 것으로 옷이나 모자, 표정 등이 사실적이며, 사회적 지위에 따라 색깔이나 크기를 다르게 만들었다. 통일신라시대 복식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는 유물이다. 당나라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료제와 토용
삼국 통일 이후에 새로운 국가 운영을 위해 관료제를 정비하아였다. 이전에는 왕경인과 지방민에게 각각 차등있게 벼슬을 주었으나, 통일 후에는 동일한 벼슬을 주었다. 이 시기에는 율령에 기초하여 국가기구를 조직하였고 이를 위해 국학 등의 교육기관도 정비되었다. 관료제의 정비는 중국 문화와 복식의 수용으로 엿 볼 수 있다. 당나라에 간 김춘추가 당의 복식을 받아 들여 진덕여왕 3년(649)부터 당나라식 관복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당나라 복식은 무덤에서 출토된 토용과 허리띠장식에서 잘 알 수 있다. 토용은 흙으로 사람이나 동물을 본 떠 만든 것으로 옷이나 모자, 표정 등이 사실적이며, 사회적 지위에 따라 색깔이나 크기를 다르게 만들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왕경 귀족
통일신라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간 세력은 왕경의 진골 귀족이었다. 왕경에는 17만 8,936호가 살았고, 금입택이 30여 채 있었다고 전한다. 금입택의 주인은 왕권에 비견될 만한 유력한 진골 귀족이었다. 경주 왕경 유적과 월지에서 나온 많은 유물은 이러한 진골 귀족의 모습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특히 금과 은으로 장식한 생활용품과 녹유기와는 당시 진골 귀족의 호사스러운 생활 모습을 잘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창녕 화왕산성 연못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말과 관련된 재갈과 발걸이가 출토되었다.
창녕 화왕산성은 그 지역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해발 757m의 산꼭대기에 쌓은 통일신라의 석성이며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다. 산성 안에서 물을 공급하고 보관하던 샘과 못이 여럿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연못 하나가 발굴되었다. 무기와 말갖춤, 차를 가는 도구, 향을 담는 그릇, 가위, 북과 같은 군수품 및 일상용품 뿐만 아니라 나무인형과 같은 제사용품도 출토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창녕 말흘리의 건물터 주변 작은 구덩이 안에서 많은 풍탁과 장식판 등이 출토되었다. 대부분 불전을 장식하는 장엄구이거나 불교의식에 사용하는 도구들이다.
창녕 말흘리유적의 건물터에서 쇠솥에 담긴 불교 공예품이 여럿 발굴되었다. 이는 아주 특이한 모습이었는데, 이유를 분명히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가까이 있던 어느 절에 큰 변고가 있어 급하게 중요한 물품을 쇠솥에 넣어 문든 것이라 여겨진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통일신라의 지방 사회
통일신라의 지방 사회는 9주 5소경이라는 새로운 제도의 실행으로 중앙의 행정력이 각 지방에 고르게 미치게 되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지방 사회의 행정은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와 토착 촌주의 협력 아래 이루어졌으며, 문자의 활용과 도로와 역의 정비를 통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 결과 왕경의 문화가 지방에까지 그대로 이식되었고, 일부 지방 유력자는 왕경 귀족과 비슷한 문화 수준을 유지하게 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통일신라 말의 지방 세력
통일신라 말 지방에는 독자적인 세력들이 등장하였다. 이 지방 세력들은 주로 변경의 군진이나 상업과 대외 교역이 발달한 곳에서 크게 성장하였다. 대표적인 곳이 장보고가 활동한 남해의 청해진 지역과 당과의 교역로였던 북방의 패강진 지역이다. 황해도 평산에서 출토된 유물은 변경의 군진에서 성장한 지방 세력의 모습을 잘 알려 주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통일신라 유적에서 발견되는 도자기는 중국에서 수입된 것으로 대부분 중국 저장성 월요에서 제작된 것이 많다. 특히 수도인 경주에서 출토된 월요 청자의 대부분은 품질이 뛰어난 것이며, 그 가운데 상당수는 월요가 만든 최고 경지의 청자인 비색자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동아시아와의 교류
통일신라는 당으로 견당사와 숙위학생, 구법승을 파견하고, 신라방의 설치를 통해 당과 밀접하게 교류해다. 또 나라시대 일본과도 긴밀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 일본 도다이 사이 쇼쇼인에 보관된 소장품 중에는 통일신라와 일본 사이에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유물이 많다. 또 경주 괘릉과 흥덕왕릉을 지키는 무인상은 서역과의 교류를 잘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통일신라
7세기 중엽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나당 전쟁을 거치면서 한반도와 주변 지역의 국제 관계는 대동강~원산만 이남의 통일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공존하는 모습으로 변화했다. 이렇게 성립된 남북국시대는 당을 중심으로 통일신라와 발해, 일본이 공존하는 비교적 안정된 국제 정세가 유지된 때였다. 통일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넓어진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했다. 우선 새로운 국가 운영을 위해 관료제를 정비하여 왕경인과 지방인을 차별하지 않고 관등을 주는 방식을 채택하였고, 율령에 입각한 강력한 왕권 중심의 중앙 집권 국가를 수립해 갔다. 행정구역은 지방을 9주로 나누고 다시 특별 구역으로 5소경을 두었다. 이러한 제도의 개선과 새로운 행정 구역의 개편은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 집권 국가의 틀을 완성하는 과정이었으며, 새로운 국가의 위상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