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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소수서원(사적), 안향을 모신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영주 소수서원紹修書院”(사적)이다.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안향을 모시기 위해 풍기군수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이란 이름으로 세웠던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이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직하면서 국왕으로부터 ‘소수서원’이란 현판을 하사받은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면서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게 된 것으로 보인다. 서원은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며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 중국 당나라 때 집현전서원 등의 설치에서 유래하였다.

소수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답게 건물이 크고 그 숫자다 많은 편이다. 경사진 언덕에 계단식으로 강학공간과 제향향공간이 배치되는 후대의 서원과는 달리 죽계천변에 옛 절터에 여러 건물들을 자연스럽게 배치하고 있다. 강학공간을 동쪽에, 제향공간을 서쪽에 두고 있는 동학서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서원의 중심에는 ‘백운동’이라는 현판이 걸린 강학당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유생들이 공부하는 직방재와 일신재, 학구재, 지락재와 서고, 전사청 등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으며, 서쪽편에 안향 등 을 모신 사당인 문성공묘가 배치되어 있다. 숙수사란 사찰이 있던 곳에 강당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다른 서원에 비해 유행들이 머물렀던 기숙사 건물이 크고 많은 편이다.

<영주 소수서원 (사적)>
<소수서원 공간배치>

진입 영역

소수서원은 안향이 머물렀던 숙수사란 절이 있던 곳에 세워졌다. 동쪽으로 죽계천이 흐르고 서쪽에는 나즈막한 언덕이 있으며, 학자수라 불리는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솔밭길에는 절터임을 말해주는 당간지주를 볼 수 있으며, 죽계천 너머로 옛사람들이 쉬었던 취한대란 작은 정자가 있다.

<소수서원 입구>

소수서원 서쪽 낮은 둔덕에는 학자수라 불리는 울창한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소나무숲>

소수서원의 소나무 숲
소수서원의 소나무 숲은 가지가 길게 축축 늘어지고 키가 커서 낙락장송으로 불리는 소나무 군락으로, 수백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다. 운치 있게 뻗은 소나무 가지들은 서원에 가까운 것일수록 서원 쪽으로 숙이고 있어서 마치 서원에 공경을 표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소나무 숲은 소수서원의 경관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죽계와 닿은 평지에 있는 소수서원이 풍수적으로 뒤쪽에 허하다는 단점이 있어 소나무 숲을 만들어 보완했다는 견해가 있다. 소수서워느이 소나무 숲 소나무들은 겉과 속이 모두 붉은 적송으로, 수령이 수백년에 달하는 것이 많다. 기록에 따르면 선조 19년(1586)에 풍기의 유행 황응규, 광해군 6년(1614)에 창석 이준이 소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또한 효종 5년(1586)에 영귀봉 아래에서 남쪽 냇가에 이르기까지 소나무 1천여 그루를 심었는데 산 것이 겨우 5백그루였다고 한다. 그 수 소를 방목하거나 화재가 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소나무를 더 심어 소나무 숲을 무성하게 하였다. 소나무는 추운 겨울으르 이겨내고 항상 푸름을 간직하는 것이 선비의 기개와 닮았기 때문에 학자수로도 불린다. (안내문, 영주시, 2024년)

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는 소수서원 들어가는 소나무 숲길에서 볼 수 있다. 소수서원이 숙수사 절터에 세워졌음을 알려주는 문화재이다. 이곳은 순흥지역에서도 경치가 좋고 사람의 통행이 많은 교통의 요지로 인근 부석사 못지않게 큰 절이 있었다. 유물들은 부근 소수중학교 건립공사 중에 발견되었는데 모두 25구의 불상들이 출토되었다. 

<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

죽계천은 고려말 유학자 안축이 지은 ‘죽계별곡’의 배경이 되는 하천이다. 죽계천 옆에 세워진 작은 정자인 ‘취한대’와 ‘경자바위’를 볼 수 있다. 주세붕은 ‘경敬’이라는 글자 한자를 바위에 새겨 남겼다.

<죽계천과 취한대>
<취한대>

경자바위와 취한대
주세붕은 ‘경敬’이라는 글자 한자를 바위에 새겨 남겼다. 경자는 선비의 덕목을 나타낸 글자로 공경과 근신의 자세로 학문에 집중한다는 의미이다. 더불어 안향을 공경하고 기리는 마음을 후대에 전한다는 뜻도 있다. 경자 위의 ‘백운동’은 소수서원의 본래 이름이다. 취한대는 자연을 벗하며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곳이다. 퇴계 이황이 터를 닦고 취한대라 이름을 붙였다. 이는 옛 시 ‘송취한계’에서 따 온 것으로 푸른 산의 기운과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의미이다. (안내문, 영주시, 2024년)

<서원 입구 유식공간>
<소수서원 은행나무>

소수서원 은행나무
수령이 약 500년 정도로 알려진 소수서원 은행나무는 소수서원이 세우질 무렵에 심어졌다고 추정된다. 이 은행나무는 학자수라고도 불리는데, 은행 열매처럼 많은 인재를 배출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서원과 향교에는 예외 없이 은행나무가 있다. 서원의 은행나무는 공자가 살구나무 아래에서 제자를 가르쳤던 정신을 상징한느 나무이다. 그러나 살구나무 대신 은행나무를 심은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살구나의 ‘행’과 은행나무의 ‘행’이 같은 글자이고 오래 살지 못하는 살구나무보다 천년 이상 사는 은행나무를 선택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서원과 향교에 있는 은행나무는 유교와 관련된 우리나라의 정신문화를 간직한 귀중한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안내문, 영주시, 2024년)

경렴정은 원생들이 쉬면서 경치를 즐기던 유식공간이다. 주세붕이 백원동서원을 세울 때 같이 세웠다. 퇴계 이황이 해서체로 쓴 현판과 초서의 대가 황기로가 초서체로 쓴 현판이 걸려 있다.

<경렴정>
<현판 글씨>

경렴정
경렴정은 소수서원의 대표적 유식공간으로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이다. 중종 38년(1643)에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만들면서 함께 세웠다. ‘경렴’은 북송의 철학자 염계 주돈이를 추모한다는 뜻으로 주돈이의 호인 염계의 첫글자 ‘렴’과 우러러 사모한다는 ‘경모’에서 ‘경’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현판 중 해서 현판은 이황의 글씨이고, 초서 현판은 이황의 제자이면서 초서의 대가인 고산 황기로의 글씨이다. 정자 내부에는 이황과 주세붕이 등이 자연을 노래한 시를 적은 시판이 걸려 있다. 경렴정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 가운데 하나로 소수서원 원생의 풍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경렴정은 서원과 주변 자연을 이어주는 공간에 있는데, 이곳은 죽계를 끼고 주변을 조망하기 좋은 장소이어서 원생이나 유림의 모임, 시회 개최, 풍류와 심신 수양 등의 활동을 하였다. (안내문, 영주시, 2024년)

후대 서원과는 달리 솟을삼문이나 문루를 사용하고 있지 않고 작은 협문을 두고 있다. 그 앞에는 제사에 올리던 제물을 잡던 성생단이 있다.

<진도문>
<성생단>

성생단
성생단은 제사에 쓸 제물을 검사하는 단으로, 생단이라고도 한다. 소수서원에서는 의식의 순서를 적은 <홀기>에 따라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에 제향을 지낸다. 제향 전날 선택한 제물을 올려 두고 흠집 여부를 살펴보던 곳이 성생단이다. 성생의 또는 충돌례 등으로 불리는 제물을 품평하는 의식, 즉 생간품은 제관달이 성생단 주위에 서서 진행한다. 서쪽에 선 축관이 성생단에 준비된 제물이 적합한지를 ‘돌’하고 묻고 헌관이 좋다고 한판하여 ‘충’하면 의식이 끝나고 제물을 잡는다. 원래 소를 제물로 사용하였으나, 소 도살 금지령이 내리면서 돼지로 바뀌었다. 이 성생단은 소수서원의 제향의식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서원의 성생단은 보통 사당 근처에 있지만, 소수서원의 성생단은 특이하게 서원 입구에 있다. (안내문, 영주시, 2024년)

진입영역
서원 왼편에 봉긋하게 솟아있는 둔덕은 거북이가 알을 품은 모습처럼 보여 영귀봉이라 한다. 영귀봉 주변으로 수백년 된 적송이 장관인데, 소나무에게서 선비의 충절을 배운다는 뜻으로 학자수라 불리기도 한다. 보기에도 멋진 소나무 숲은 서원의 품격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영귀봉 위에는 작별의 정을 나누던 소혼대가 있다. 서원 정문인 지도문 앞 잔듸 제단은 성생단이다. 매년 봄, 가을에 안향 선생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할 가축의 흠결을 살피고 잡던 제단터이다. 지도문 오른쪽 경령점은 죽계수를 따라 펼쳐지는 멋진 경관을 바라보며 학문을 이야기 하던 곳으로 1543년 주세붕이 세웠다. 경렴정에는 스승인 퇴계 이황의 앞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썼다고 전해지는 초서의 대가 고산 황기로의 현판이 남아 있다. (안내문, 영주시, 2024년)

강학공간

소수서원은 후학양성을 위해 세워진 서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다. 강당 건물인 강학당(보물)를 중심으로 여러동의 건물들을 두고 있다. 유생들이 머물렀던 기숙사는 3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학문의 단계에 따라 지락재, 학구재, 일신재와 직방재가 있으며, 평상시 많은 유생들이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강학공간 한쪽편에는 도서관 격인 장서각이 있다.

<강학당(보물)>

강학당(보물)은 앞면 4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궁궐건물에서 볼 수 있는 겹처마를 사용하고 있다. 내부에 명종이 친필로 ‘소수서원’이라 적은 현판이 걸려 있다. 퇴계 이황의 건의로 국왕으로 부터 현판을 하사받은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앞에서 본 모습>
<뒤에서 본 모습>
<강학당 대청마루>
<소수서원 현판>

영주 소수서원 강학당, 보물
강학당은 중종 38년(1543)에 주세봉이 세운 건물이다.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던 곳이기 때문에 이름을 강학당이라고 하였다. 강학당은 소수서원의 강학공간에서 중심이 되는 건물로 가장 규모가 크다. 향교의 명륜당에 해당하는 곳이다. 강학당은 앞면 3칸, 옆면 4칸 규모의 기와집이다. 일반적인 한곡 건물의 옆면에 해당하는 부분을 앞면으로 설정한 독특한 구조이다. 지도문을 통해 서원 안으로 들어오면 바로 강학당으로 들어갈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건물 앞부분 3칸은 대청이고 뒤쪽 1칸은 방을 둔 이른바 전청후실의 특이한 구조이다. 대청은 원생이 모여 공부하던 곳이고 방은 교수가 거처하는 공간이다. 강학당 내부 대청 북쪽에는 명종이 직접 쓴 ‘소수서원’ 편액이 걸려 있다. 그리고 강학당 앞쪽에는 “백운동”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데, 백운동은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기 이전 이름이다. 강학당은 전체적으로 웅장하고 기품 있는 인상을 주는 건물로, 이화으이 문하생을 포함해 4천여 명이 넘는 인재를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다. 소수서원의 역사와 역할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며, 건물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서 조선 시대 건축사 연구에도 좋은 자료이다. (안내문, 영주시, 2024년)

유생들이 머무는 기숙사 중 지락당은 앞면 3칸 건물로 온돌방 1칸, 마루 2칸으로 되어 있다. 학구재는 앞면 3칸짜리 건물로 가운데 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 1칸씩이 있다.

<지락당>
<지락당 마루>
<학구재>
<학구재 마루>

지락재.학구재
지락재와 학구재는 원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곳이다. 소수서원의 강학공간에 있는 건물로, 2동의 건물이 조금 떨어져 ‘ㄱ’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지락재는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기와집이다. 북쪽의 1칸은 온돌방이고, 남쪽의 2칸은 마루인데, 온돌방과 접하는 면을 제외한 마루의 3면은 모두 개방된 구조이다. ‘지락’은 송나라 구양수의 글 중 ‘지락막여독서’에서 따온 이름으로 ‘지극한 즐거움은 독서만한 것이 없다.’란 뜻이다. 높은 곳을 우러러보는 공간이라고 하여 앙고재라고도 한다. 학구재도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기와집이다. 중앙에 앞뒷면이 개방된 마루가 있고 양쪽에 각각 1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학구’는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구한다는 뜻이나, 어린 학생이 생활하는 공간이어서 동몽재라고도 한다. (안내문, 영주시, 2024년)

일신재와 직방재는 원생, 교수와 서원이 임원들이 같이 생활하던 숙소이다. 하나의 건물을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일신재와 직방재>
<반대편에서 본 모습>

일신재.직방재
일신재와 직방재는 원생, 교수와 서원의 임원인 원임들이 생활하던 숙소로 각각 독립된 건물이 아니라 하나로 이루어진 독특한 구조인데 편액으로 양자를 구분한다. 앞면 6칸 옆면 1칸 반 크기의 기와집으로, 중앙에 2칸 크기의 마루가 있고, 양쪽에 각각 2칸 크기의 방이 있다. 직방재는 건물을 기준으로 오른쪽에서 있는 방, 일신재는 왼쪽에 있는 방이다. 일신재는 원래 직방재 옆에 딸린 작은 서재로 신방이라 불리었다. 순조 5년(1805)에 건물을 다시 지으면서 확장하고 일신재란 이름을 붙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일신재의 ‘일신’은 <대학>의 ‘나날이 새로워져라.日日新又日新’라는 문장에서 따서 지은 이름이다. 직방재의 ‘직방’은 <주역>의 깨어 있음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바른 도리로써 행동을 가지런하게 한다.’는 문장에서 따서 지은 이름이다. (안내문, 영주시, 2024년)

<서적과 목판을 보관하던 장서각>

장서각
서원의 장서각은 나라에서 내려준 책과 서원의 책, 서원에서 출판한 목판들을 보관했던 곳으로, 현대의 도서관과 비슷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소수서원 장서각은 임금이 직접 지어 하사한 책인 ‘어제내사본’을 비롯하여 나라에서 내려준 서책과 각종 책 3,000여 권을 보관했던 건물이다. 장서각은 직방재와 문성공묘 사이에 있는데, 주세붕이 중종 38년(1543) 무렵에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앞면 2칸, 옆면 1칸의 기와집으로, 앞면에는 칸마다 문을 달았고 내부는 습기를 방지하려고 마루를 깔았다. (안내문, 영주시, 2024년)

일영대는 해시계로 알려져 있다. 자연속 주춧돌 위에 문지도리석을 올려 놓은 것으로 숙수사의 유적이라는 설도 있다.

<일영대>

일영대
일영대는 해시계로 알려져 있다. 맑은 날, 윗부분 돌에 꽂은 막대기의 그림자가 아랫돌에 드리워지는 것을 보고 시간을 알았다고 한다. 자연석 주춧돌 위에 문지도리석을 올려 놓은 것으로 숙수사의 유적이라는 설도 있다. (안내문, 영주시, 2024년)

강학영역
서원은 크게 강학영역과 제향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강학영역은 학문을 닦고 배우던 공간이다. 앞의 제일 큰 건물이 강학당(보물 1403호)이고, 오른쪽 뒤편으로 돌아가면서 지락재와 학구재, 일신재와 직방재가 위치한다. 강학당 왼쪽으로 장서각이 있다. 건물배치는 하학상달, 즉 학문의 차례와 단계를 뜻한다. 독서를 통한 학문의 즐거움을 의미하는 지락재를 시작으로,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구하는 학구재, 날마다 새롭게 한다는 일신재, 그리고 깨어있어 마음을 곧게 한다는 직방재, 이 직방재에 이르면 학문을 크게 이루게 되므로 비로소 명륜당이라 불리는 강학당에 들어 세상의 이치를 밝히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배출된 인재가 4,000여명에 달한다. 1543년에 건립된 강학당 내부에는 명종임금이 내려준 친필 편액이 걸려있으며,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장서각은 책과 목판을 보관하던 곳이다. (안내문, 영주시, 2024년)

제향공간

소수서원은 고려 때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제향공간에는 사당인 문성공묘(보물)과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이 있다. 사당은 담장으로 둘러져 있는데 후대 서원과는 달리 그 규모가 크지 않은 편이다. 반면에 사당을 사(祠)라 하지 않고 묘(廟)로 격을 높여 부르고 있다. 사당 뒷편에는 안향초상(국보)와 주세붕초상(보물)를 모시기 위한 건물인 영정각을 두고 있다.

<서원 동쪽편에 위치한 사당인 문성공묘(보물)>

“문성공묘”(보물)는 고려시대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안향을 주향으로 안축, 안보, 주세붕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건물 주위로 담장을 둘렀으며, 앞과 옆에 출입문을 두고 있는데 후대 서원의 사당과는 달리 작은 협문을 사용하고 있다. 최초 서원에 세워진 사당으로 ‘사(祠’자를 쓰고 있는 다른 사당과는 달리 ‘묘(廟)’자를 사용하고 있어 격이 높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당>
<강학당 마루에서 보이는 모습>

영주 소수서원 문성공묘
문성굥묘는 중종 37년(1542)에 주세붕이 안향을 기리기 위해 안향의 고향인 순흥에 세운 사당으로 소수서원이 세워지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당에는 ‘사祠’자를 사용하고 왕이나 나라의 큰 인물을 모신 곳에만 ‘묘廟’호를 쓰게 하였다. 이를 보면 문성공묘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주자학을 도입한 문성공 안향을 기리고자 격을 높였음을 알 수 있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기와집이다. 안향을 모신 이후 중종 39년(1544)에 안축과 안보, 인조 11년(1633)에 주세붕을 추가로 모셨으며, 매년 3월과 9월 초정일에 제향을 올리기고 있다. 주세붕과 이황이 직접 제향 의식 절차를 기록한 <홀기笏記>도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제향을 올릴 때 주세붕이 직접 지은 <도공곡>이라는 경기체가를 부르는데, 이는 안향이 중국 공자의 도道를 우리나로 옮긴 것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서원에서 도동곡을 부르는 곳은 소수서원이 유일하며, 이는 소수서원이 우리나라 도학의 연원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안내문, 영주시, 2024년)

<전사청>

전사청
전사청은 향사 시 사용하는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을 마련하던 곳이다. 제물을 장만하거나 제사를 지낼 때 편리하도록 문성공묘 바로 옆에 배치하였다. 주세붕이 중종 37년(1542)에 문성공묘를 지으면서 함께 만들었다고 전한다. 앞면 3칸, 옆면 1칸의 기와집으로, 1칸은 방이고 2칸은 마루를 두었다. (안내문, 영주시, 2024년)

영정각은 1970년대에 세워진 건물이다. 주자를 비롯하여 안양, 주세붕, 이덕형, 이원익, 허목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영정을 모시기기 위헤 세워진 영정각>
<영정각 내부>

경북 영주시 소수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안향 초상(국보)이다. 초상화에 적혀 있는 찬문에 따르면 고려 충숙왕 때(1318) 문묘에 그의 초상화를 모실때 1본을 더 그려 흥주향교에 봉안했다고 한다. 이후 풍기군수 주세붕이 백운동서운을 세운 후 그의 초상화를 옮겨 모셨다. 이후 15559년 화원 이불해가 원본 보고 옮겨 그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향초상, 전 이불해, 조선 16세기 중엽, 비단에 채색, 국보, 소수서원>

영정각
영정각은 소수서원에서 보관하는 영정을 모시기 위해 1975년에 지은 건물로, 앞면 3칸, 옆면 2칸 크기의 기와집이다. 조선 시대에는 도동각 또는 영정실이라고 하였으며, 안향의 영정을 모셨다고 한다. 서원에 영정각을 두는 것이 드문 일이기는 하나 소수서원에는 보물급 영정이 많았기 때문에 특별히 영정각을 건립하였다. 영정각 내부의 중앙 좌측에 주자학의 시조인 주자의 영정, 우측에 우리나라 주자학의 선구자인 안향의 영정, 왼쪽에 소수서원을 세운 주세붕의 영정, 능력과 덕망을 겸비한 문신인 한음 이덕형의 영정, 오른쪽에는 청백리의 표상인 오리 이원익의 영정과 조선 후기 사상계를 이끌었던 미수 허목의 영정이 있다. 이 가운데 안향의 영정은 국보, 주세붕의 영정은 보물로 지정되었다.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있으며 전시된 영정은 복제본이다.

제향영역
제향영역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문성공묘(보물 1402호)와 전사청, 영정각 등의 건물이 있다. 문성공묘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불리는 문성공 회헌 안양의 위패를 모신 사묘로 1542년 주세붕이 세웠다. 문성공묘를 사(祠)라 하지 않고 묘(廟)로 격을 높여 부른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매년 봄, 가을로 두 번의 제사를 지낸다. 문성공묘 뒤편에 있는 전사청은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을 준비하던 곳이다. 일반적으로 전당후묘라 하여 강학공간 뒤에 제향공간을 두는데 서쪽방향을 중시하는 우리 전통사상에 따라 강학공간 측면 서쪽에 제향공간을 배치한 독특한 사례이다. 서원에 영정각이 있는 것도 특이한 일로 안향초상(국보 111호)과 주세붕초상(보물 717호) 등 보물급 영정을 많이 소장하고 있어 1975년에 특별히 지어진 건물이다. 현재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안내문, 영주시청, 2009년)

<서원 뒷편에 있는 사료관>

소수서원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조선 중종 37년(1542) 풍기군수 주세붕이 이 지역 출신 고려시대 유학자인 회헌 안양의 위패를 모신 사묘를 세우고, 이듬해 백운동 서원을 세웠다. 후에 퇴계 이황이 명종임금께 건의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친필 현판을 하사받았다. 서원은 강학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강학공간에는 강학당을 중심으로 지락재, 학구재, 일신재, 직방재 등의 건물이 있고 제향공간에는 문성공묘, 전사청, 영정각 등이 있다. 소수서원은 숙사라는 절터에 세워졌다. 서원 안팎으로 당간지주 등 숙수사 유적이 남아 있어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영주시, 2024년)

<출처>

  1. 안내문, 영주시, 2024년
  2. “사적 영주 소수서원”,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