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립간麻立干은 신라 17대 내물마립간 (재위 356~402)부터 22대 지증마립간까지 약 150년간 사용한 왕에 대한 호칭이다.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에 사용했던 지배자 칭호인 간干(Khan)이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이후로 김씨가 왕위를 독점했으며 왕족을 중심으로 중앙집권적 국가로 발전하였다. 신라의 황금문화는 북방유목민족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보이는 5~6세기 약 150여년간 화려하게 꽃피웠다. 마립간시대에 조성된 경주도심 신라 지배층의 무덤에서는 금관을 비롯하여 금귀걸이, 금목걸이같은 금은제 장신구와 화려한 유리제품 등이 출토되고 있다.
신라를 대표하는 유물로 화려한 금관을 들 수 있다. 금관은 세계적으로 남아 있는 숫자가 많지 않으며 우리나라에 가장 많이 남아 있어 세계적으로 중요한 유물들이다. 경주 도심에 위치한 5~6세기에 조성된 돌무지덧널무덤에서 5점의 금관이 출토되었다. 금관이 출토된 고분으로는 항남대총 북분, 금관총, 서봉총, 천마총, 금령총이 있다. 신라 금관은 금판을 오려 붙여 만든 것으로 아래쪽에 관테가 있고 그 위에 세움장식을 부착하였다. 세움장식은 나뭇가지모양과 사슴뿔 모양을 하고 있는데, 시베리사 샤먼(Shaman)이 착용했던 것과 유사하다. 이런 연유로 신라 금관을 만든 사람들은 시베리아 유목민들이 한반도 이주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 중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국보로 지정된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금관과 금제허리띠가 전시되어 있다. 이 금관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형태와 화려한 장식 등으로 미루어 왕관으로 추정하고 하고 있다.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이 금관은 나무와 사슴뿔 모양의 세움장식에 푸른빛의 곱은 옥이 달려 있고, 전체적으로 금판으로 장식해서 상당히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금관이 실생활에 사용한 것인지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전체적인 구성요소에서 신라의 지배층과 북방 유목민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금허리띠는 직물로 된 띠의 표면에 사각형 금속판을 붙인 것으로 길이 120 cm이며 28장의 판으로 만들어졌다. 허리띠 아래에는 13개의 띠드리개가 연결되어 있다. 띠드리개에는 물고기모양, 주머니모양, 쪽집게모양 등이 달려 있는데, 북방유목민들이 생활습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관.금허리띠, 경주 황남대총, 삼국시대 신라 5세기, 국보,
금관은 머리띠에 나뭇가지와 사슴뿔 모양의 장식이 세워진 형태이다. 초기에는 맞가지 세 개를 세웠고, 이후 사슴뿔 모양의 장식 두 개가 조합되어 곱은 옥과 달개가 달린 전형적인 신라 금관이 완성된다. 금관의 나뭇가지 도안에는 통치자이자 국가의 제의를 주관하는 최고 지배자 마립간과 그 일족의 정체성과 세계관이 내재되어 있다. 즉 황금빛 나뭇가지 모양 대관은 신라 마립간의 신성한 왕권을 상징하는 관이었다. 금허리띠는 버클에 해당하는 띠고리, 허리띠 끝에 다는 띠끝꾸미개, 가죽 또는 비단 허리띠의 겉면을 꾸몄던 띠꾸미개, 허리띠에 매달아 드리웠던 띠드리개로 구성된다. 띠드리개에는 물고기 모양, 손칼, 곱은 옥 등이 매달려 있는데 일상생활에 필요한 연모를 의미하는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경주 대릉원 98호 무덤인 황남대총(皇南大塚)은 길이 120 m의 거대한 쌍분인 이 무덤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조사 되었다. 먼저 조성된 남분이 왕의 무덤이며, 나중에 덧붙여진 북분은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출토된 유물들은 신라 고분 중에서 그 수량이 많으면서 수준도 높다.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유물들도 많으며 서역이나 중국, 일본 등에서 수입된 것도 있다. 4~5세기 마립간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황남대총 남분 은관(보물)은 높이 17.2 cm, 지름 16.6 cm 크기로 머리띠 위에 3개의 가지가 있는 장식이 있다. 가운데에는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형태의 은판을 붙였으며 좌우에는 깃털이 있는 반달모양의 은판을 붙였다. 신라 관모에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관모는 금관과 함께 출토된 것으로 내관(內冠)으로 추정하고 있다. 관모는 얇은 금판을 오려서 만들었으며 모자 위로 새날개 모양 장식을 꽂아 놓았다. 관모는 얇은 금판을 오려서 만든 세모꼴 모자로 위에 두 갈래로 된 긴 새날개 모양 장식을 꽂아 놓았다.
황남대총 남분 금제관식(보물)이다. 황남대총이라 불리는 황남동 고분군 98호 무덤 남분에서 출토되었다. 관모에 끼워 장식하는 것으로, 새 날개를 본떠 만든 것이다. . 날개가 달려있어 화려하며 날아갈 듯한 새의 모습을 보여준다. 높이 45 cm, 날개 끝 너비 59 cm 크기로 3매의 금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山자 모양을 하고 있다.다.
신라의 무기는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가야의 무기류와 차이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광개토대왕의 고구려군과 함께 왜.가야 동맹과 큰 전쟁을 치른 5~6세기 이후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각종 고분에서 금이나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고리자루칼 등이 껴묻거리로 출토되고 있다.
가슴꾸미개는 간결한 목걸이와는 달리 가슴 앞부분과 어깨, 등부분까지 꾸며준다. 주로 왕릉급 무덤인 천마총과 황남대총에서 확인되며, 잠자리구슬이라고도 불리는 청령옥, 금구슬, 곱은옥 등 다양한 종류의 구슬이 있다.
신라는 정복한 지역을 어떻게 다스렸을까
마립간 시기 신라는 새로이 영토로 편입한 주변 소국들을 어떻게 다스렸을까? 신라는 관리를 직접 파견하는 대신, 그 지역 지배층의 후손들을 계속해서 지배자로 인정하는 간접 지배 방식을 썼다. 경주 시내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금관이나 허리띠, 큰칼 등과 똑같거나 비슷한 형태의 부장품이 경주 이외 지역이 무덤에서도 출토되지만, 격식과 질이 떨어지는 점에서 그러한 간접 지배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이를테면 중심 지역인 경주에서는 금관이 출토되지만, 다른 주변 지역에서는 금동관이 출토된다. 금동관은 대구, 경산, 의성, 창녕, 부산뿐만 아니라 멀리 북쪽의 강릉에서도 발견되고 있어서 신라의 세력이 어디까지 미쳤는지 알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신라는 ‘금의 나라’로 알려질 정도로 금과 은으로 수 많은 꾸미개들을 만들었다. 신라금관을 비롯하여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재들 중 상당수는 신라에서 만든 금제 꾸미개들이며 특히 금관은 세계적으로 출토되는 사례가 많지 않다고 한다. 금관 외에도 신라의 꾸미개로는 귀걸이, 목걸이, 팔찌 등이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주로 금, 은, 옥, 유리 등을 가공하여 만들고 있으며 출토된 유물의 양도 상당히 풍부하면서 그 세공기법 또한 상당히 뛰어나다. 주로 삼국시대에 중기에 만들어진 무덤부장품들이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그 세공기술은 후대에서는 불상 등 불교관련 문화재들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1949년 경주 황오동 52호 무덤에서 출토된 귀걸이 한쌍이다. 주고리, 중간식, 마감장식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신라 귀걸이이다. 귀에 거는 부분인 주고리는 굵게 만들었으며 중간식에는 이파리 모양의 장식이 매달이 있다. 마감장식는 펜촉모양을 하고 있다.
금동신발 바닥면에 서역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다양한 동물 등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장식의 구성이나 형태에서도 섬세하면서도 이국적인 면모를 많이 보여주고 있다. 이 금동신발이 출토되어 식리총(飾履塚)이라 부른다.
경주 부부총 금귀걸이(국보)이다. 경주 보문동 부부총에서 일제강점기에 출토된 유물로 태환이식(太環耳飾)이라 불렸다 태환이식이란 가운데를 빈 공간으로 하여 무게를 가볍게 한 귀걸이이다. 전형적인 삼국시대 금귀걸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세부적으로 금실과 금알갱이를 섬세하게 붙이는 누금세공(鏤金細工)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금귀걸이 전체에 누금세공법을 사용하여 화려한 조형미와 세공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귀걸이의 중심고리의 형태에 따라 굵은 고리와 가는 고리 귀걸이로 구분된다. 특히 굵은고리 귀걸이의 경우 가죽 등으로 묶어 귀에 걸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중심고리는 속이 비어 있어 가볍다.
노서동 215번지 고분은 발견당시 봉분은 없고 민가가 있었던 곳으로 금목걸이(보물), 금귀걸이(보물), 금팔찌(보물)가 출토되었다.
경주 노서동 고분군에 있던 노서리 215번지 민가에서 발견된 금목걸이다. 금판으로 속 빈 구형(球形)을 만들어 금줄로 연결한 장식을 44개 연결하여 만든 목걸이로 끝에 비취 곡옥을 달았다. 제작수법이 상당히 정교하며 조형미도 뛰어나다. 출토 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고 1965년 한국으로 반환되었다.
경주 노서동 고분군에 있던 노서리 215번지 민가에서 발견된 금귀걸이 1쌍이다. 하나가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65년 한국으로 반환되었다. 주고리, 중간식, 마감장식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5~6세기 신라 귀걸이 형태를 하고 있다.
경주 노서동 고분군에 있던 노서리 215번지 민가에서 발견된 금팔찌 1쌍이다. 금반지는 지름 8 cm 크기로 바깥쪽에 각각 59개씩 돌기를 내어 옥을 상감하였다. 돌기 좌우에 용을 생동감있게 새겨 놓고 있다. 섬세한 조각수법과 조형미가 뛰아난 신라를 대표하는 금팔찌이다.
신라의 황금문화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8세기)에는 신라가 ‘눈부신 금은의 나라’라는 기록이 있다. 966년 아랍 지리학자 알 마크디시는 신라에 대해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집을 단장한다. 밤을 먹을 때도 금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한다.’라고 적었다. 신라 황금 문화의 전성기는 5세기부터 6세기 전반까지 약 150년간이었다. 신라의 지배층들은 금관을 비롯하여 허리띠, 귀걸이, 팔찌, 반지, 목걸이, 장식대도 등에 금을 사용하였다. 황금 제품들은 왕이나 왕족, 귀족 등의 신분을 과시하고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이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금속 그릇들은 경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것들을 위주로 전시되어 있으며, 대부분 실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을 모방하여 만든 부장품이나 청동제 제기인 것으로 보인다. 사발이나 합은 지금 사용하는 것들과 형태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는 않고, 신라나 가야에서 많이 사용한 굽다리접시가 특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한무제 시대 중국이 서역과 교역로인 실크로드를 개척한 이래로 동.서양은 많은 교류를 가져왔다. 한반도 또한 중국과 교류, 북방 유목민족과의 교류 등을 통해 서역과 교류관계를 가져왔는데 동물문양 장신구, 각배 등 다양한 유물들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신라는 서기 5~6세기에 조성된 많은 돌무지덧널 무덤에서 서역과의 교류관계을 보여주는 여러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그 중 유리그릇이나 유리잔 등은 서아시아지역에서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유물들은 비단길 또는 바닷길로 신라에 전해졌다고 한다. 당시의 바닷길로는 인도와 아라비아 상인들과의 교역을 통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에는 여러차례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삼국시대의 바닷길 교류는 크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황남대총 북분 유리잔(보물)이다. 경주 신라 대릉원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되었다. 높이 7 cm, 윗부분 지름 10.5 cm 크기이다. 받침에 약간 손상이 있기는 하지만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외형이나 유리의 무늬는 한국이나 중국에서 볼 수 없는 형태로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에서 들어온 대표적인 유물이다.
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국보)이다. 경주 대릉원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유리병 1점과 유리잔 3점이다. 유물들은 파손된 채 발견되었으나 원형을 알 수 있게 복원되었다.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과 교류했음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이 유리잔은 경주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되었습니다. 대롱불기 기법으로 형태를 만들고 띠를 덧대거나 입술을 둥글게 말아 제작하였습니다. 초기 비잔틴 시기 지중해 동부 연안의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북부 지역에서 제작하여 실크로드를 따라 신라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함께 전시된 봉황머리모양 유리병과 세트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황남대총 북분 은잔(보물)은 경주 대릉원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잔모양의 그릇이다. 높이 3.5 cm, 지름 7 cm 크기로 표면에 특이한 장식을 새겨놓고 있다. 사람머리를 하고 있는 새, 용 등 상상속의 동물을 표현하고 있는데 페르시아에서 전래되어 중국 남북조시대 유행했던 형식이라 한다.
진남색의 유리알갱이를 위 아래로 녹여 붙여 반점무늬를 만들었다. 유리의 옅은 녹색과 짙은 코발트색의 조화가 오늘날의 미적 감각과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다.형태나 장식 기법으로 보아 서아시아에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의 팔찌 중 유일한 형태의 것이다.
말갖춤은 말을 안정적으로 타고 내리거나 말을 장식하는데 사용되는 것으로 안장, 발걸이, 재갈, 말방울, 말띠드리개, 말띠꾸미개 등이 있다. 신라의 왕릉급 무덤에서 출토되는 금이나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말갖춤에는 뛰어난 공예기술이 잘 나타나 있다. 신라의 말갖춤은 ‘말탄사람토기’에서 잘 살펴볼 수 있다.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明器, 국보)이다. 경주 대릉원 금령총에서 출토된 1쌍의 도기이다. 말을 타고 먼 여행을 떠나는 주인과 하인을 모습을 하고 있는데 죽은이의 영혼이 저세상으로 떠나는 모습을 잘 표현하고 이다. 두꺼운 사각형 판위에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인데 엉덩이 위에 등잔이 있고, 앞 가슴에는 물을 따를 수 있는 긴 대롱이 있고 속은 비어 있다. 신라사람들을 사후세계관, 복식, 말갖춤 등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사람의 표정 등이 잘 표현되어 있다.
신라의 말갖춤
마립간시기 신라에 도입된 최초의 말갖춤은 중무장기병과 관련이 있다. 처음에 실전무구였던 말갖춤은 4세기말 이후 귀금속 장식이 더해져 지위의 상징물이 되었다. 이를 장식마구라 부를 수 있다. 금빛과 비단벌레의 화려함이 어우러진 신라 마립간시기의 말갖춤은 역사상 어디의 것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마립간을 위해 만든 화려한 말갖춤은 왕의 권력을 드러내는 최상의 물품이었다. 서로 겹쳐 일렬로 둔 화려한 말갖춤은 요즘 방식으로 최고급 자동차 여러 대를 가지런하게 주차해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신라토기는 항아리, 굽다리접시, 그릇 등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그 중 인상적인 부분은 동물.배.수레 등을 본 떠 만든 상형토기이다. 이들 토기는 실생활에 사용되었던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무덤의 껴묻거리로 묻혀진 것이 많다. 신라의 토기 겉면에는 무늬를 새기거나 토우 등을 붙여서 꾸미기도 하는데 이들 토우들은 신라시대 사람들의 생활모습이나 동물이 형태를 간략하면서도 특징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어서 현대적인 관점에서 그 묘사가 뛰어난 점이 많다.
노동동 11호 무덤에서 출토된 목항아리에는 남자가 성기를 드러내고 있는 장면과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는 장면을 표현하여 있으며 겉면에 선과 동심원 등을 새겼다. 높이는 40.5 cm, 윗부분 너비는 25.5 cm 정도의 크기이다.
상형토기와 토우
신라 무덤에서는 말, 오리 같은 동물은 물론 배, 수레, 뿔잔, 집, 신발처럼 특정한 물건을 모방해 만든 상형토기가 종종 발견된다. 상형토기는 장례를 치를 때 술 같은 액체를 담아 따르는 데 쓰였던 것으로 의식이 끝난 뒤 사후세계를 위하여 무덤에 넣은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신라 사람들은 굽다리 접시나 긴목 항아리 등에 사람이나 동물 모양으로 작게 빚은 토우를 붙이거나 갖가지 무늬를 새겨 장식하였다. 단순하지만 사실적으로 표현딘 상형토기나 토우 등에서 신라 사람의 모습과 희로애락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신라토기는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신라 영역에서 출토되는 토기를 말한다. 신라토기는 신라가 성립된 이래로 통일신라때까지 만들어진 토기를 말할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 신라적인 토기양식을 보여주는 토기는 대체로 5세기부터 삼국이 통일된 7세기까지의 토기를 말한다. 토기의 형태로는 굽다리접시, 뚜껑접시, 긴목항아리, 짧은목항아리가 기본적으로 만들어졌으며, 다양한 형태의 이형토기도 만들어졌다.
시간과 공간의 척도, 신라 토기
신라 토기는 신라의 역사만큼이나 오랫동안 사용되었고, 다양한 유적에서 출토되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이다. 신라 토기는 서서히 바뀌는데 같은 종류의 그릇을 변화 순서대로 배열하면 흐름이 보인다. 주로 제사에 사용된 그릇인 굽다리 접시는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대표적 토기이다. 뚜껑이 없는 것을 사용하다가 뚜껑이 있는 것으로 변화한다. 굽다리가 높다가 낮아지고 구멍이 4~5개에서 3개로 줄어든다. 이러한 특징들은 토기가 발견된 유적의 시기를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신라의 지방에서는 중앙의 그릇을 모방해 제사 그릇을 만들었다. 제작 기술이 같지 않아 지방마다 조금 다른 신라 토기가 만들어졌다. 이런 차이는 어느 지역에서 제작된 신라 토기인지 알려주는 특징이 되었고, 지역 간 교류나 물류의 이동을 알려주는 중요한 정보로 활용된다. 이처럼 신라 토기에는 시간의 흐름과 지역의 개성이 담겨 있어 시간과 공간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마립간, 황금의 나라 신라를 열다.
4세기 중반에 고구려는 이미 북방 평원을 아우르는 거대 왕국이었고, 백제는 한반도 중부에서 서남쪽으로 영역을 넓혀가며 튼실한 왕국을 만들어 갔다. 이 즈음인 356년 신라에서 내물奈勿(재위 356~402)이 왕위에 올랐다. 내물은 앞서 사용하던 이사금尼師今이란 왕호를 가장 높은 지위란 뜻을 지닌 ‘마립간麻立干’으로 바꾸었다. 마립간은 앞선 삼한 시기부터 지역소국을 이끌던 지배자은 간干(Khan)보다 한층 더 높은 통치자를 이끌던 신라 고유의 왕호이다. 이 통치자는 황금에 주목하였고, 황금을 통해 나라의 위계를 새로 만들어갔다. 마립간을 중심으로 일정 범위에 속하는 왕족은 황금 장신구로 꾸민 복식을 착용하였다. 방계로 멀어진 왕족과 지방의 전통적인 족장세력은 금동 혹은 은으로 꾸민 복식을 사용하였다. 복식을 꾸민 장신구는 재질만 다를 뿐 모양이 마립간의 것과 같았는데, 모두가 신라 사람이라는 표시였던 듯하다. 황금의 나라 신라는 마립간이 다스리던 시기에 만들어졌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2024년
-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