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기에 신라는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갖추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이 시기에는 소갈이와 수리시설의 보급을 통해 농업생산력을 발전시키고 나라이름을 ‘신라’라 칭하고 ‘왕王’이라는 왕호를 사용하였다. 율령을 제정하고 불교를 공인하는 등 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군사적인 경쟁력을 갗추면서 진흥왕때는 영토가 한강유역과 함경도 동해안 일대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 시기 국가로서 신라의 모습은 여러 유적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문자를 새겨놓은 비석들이다. 특히, 진흥왕 순수비와 단양 적성비는 진흥왕이 화장된 영토를 순수하면서 기념으로 새겨놓은 비석들로 당시의 관직체제, 인물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의 영역을 보여주는 유물로 큰 의미를 갖고 있다.
6세기 신라는 대내적으로는 율령을 정비하고 국가체제를 갖추게 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군사적으로도 강성해지면서 가야연맹체를 복속시키고, 한강유역을 장악하게된다. 신라가 점령한 지역에는 교통로를 따라 산성과 돌방무덤이 만들어졌다. 돌방무덤에서 나온 신라토기는 이전에 비해 모양이 단순해지고 굽다리가 짧아지는 등 신라토기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또한 신라 지방관의 관복을 장식하던 허리띠가 각 지역에서 출토되어 신라가 지방통치 방식을 간접적으로 설펴볼 수 있게 한다.
중앙통치체제의 정비
지증 마립간(재위 500~514)은 503년 나라 이름을 신라로 정하였다. 나라가 외교관계에서 문명국임을 드러내고자 국호에 ‘덕업德業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사방을 아우른다(덕입일신德業一新 망라사방網羅四方)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왕호 또한 고유한 칭호인 ‘마립간’에서 중국식 ‘왕’을 바꾸었다. 뒤를 이은 법흥왕은 17관등제와 공복을 정하는 등 통치체제를 정비하였다. 이처럼 6세기 신라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신분 질서와 문서에 기초한 행정 체계를 마련하여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경주는 신라 천년왕국의 심장이다. 신라는 한반도 동남부 작은 도시 경주에서 시작하였다. 그리고 천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경주를 중심으로 성장하고, 발전하고 사라졌다. ‘고분의 나라’, ‘황금의 나라’, ‘불교의 나라’ 등 신라를 수식하는 많은 말들에서 ‘신라’는 바로 ‘경주’를 가리키고 있다.
‘경주 월지 출토 명활성비’이다. 이 비는 월지 내 석축으로 사용된 것이 조사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명활성을 쌓으면서 세웠던 비석이 월지를 조성하면서 석축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길이는 30.0cm 정도로 일부만 남아 있다.
왕경의 정비
중앙통치체제를 정비하면서 경주의 중심지는 왕권을 상징하는 도시, 즉 왕경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바둑판 모양으로 도로를 놓아 도시를 구획하고 왕실과 사찰의 주요 건물을 지었다. 주변 산에는 남산신성, 명활산성 등 산성을 쌓았으며 왕경 외곽에는 그릇과 기와를 생산하는 관영 공방을 두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신라는 율령의 정비와 함께 당시 동아시아의 보편적 사상인 불교를 받아들여 국가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불교가 받아들여진 이후 신라 사회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는데, 대표적인 현상이 크고 화려한 고분을 조성하는 대신에 전국적으로 불교 사찰을 건축하게 되었다.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는 경주의 신성한 천경림을 베어낸 자리에 세웠는데, 귀족들의 반대로 이차돈의 순교 이후 진흥왕 때에 완성되었으며, 신라 최대의 사찰인 황룡사는 선덕여왕 때 궁궐이 들어설 자리에 세워졌다고 한다.
절을 세워 나라의 힘을 모으다.
527년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한 뒤, 진흥왕과 선덕여왕은 왕경 안에 큰 절을 세워 나라의 힘을 모으고자 하였다. 544년 진흥왕은 최초의 절인 흥륜사를 10년 만에 완공하였다. 574년에는 황룡사에 장육존상이라는 큰 불상을 봉안했다. 선덕여왕은 즉위하자 황룡사 옆에 ‘향기로운 왕의 절’이라는 뜻의 분황사를 지었다. 643년에는 왕의 위엄을 세우고 부처님의 도움으로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황룡사에 9층 목탑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신라, 불교를 받아들이다.
신라에서 불교의 공인은 정치와 사회 그리고 문화에 큰 변혁을 가져왔다. 이전에는 귀족들이 각자의 조상신이나 산천신을 숭배하고 있어 국가의 대표적인 종교가 없었다. 반면, 불교는 종교로서 신앙 체계가 논리적이고,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하는 신들의 존재감이 뚜렷하였다. 왕실은 귀족과 백성에게 부처의 신앙을 강조하여 사상적 통일을 이루고, 더불어 왕과 왕족을 신격화하고자 하였다. 처음에는 보수적인 귀족들의 반대로 불교를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 않았다. 법흥왕은 이차동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할 수 있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신라는 확대된 영토를 지배하기 위해 지방관과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각 지역에 남아 있는 돌방무덤이나 토기에서 신라문화의 확산된 모습들을 살펴볼 수 있다. 신라 영역내 지방에서 발견되는 비석이나 목간 등의 문자자료에서도 신라가 정복지 주민에 관직을 주거나 세금을 매기는 모습 등을 살펴볼 수 있다.
함안 성산산성의 목간
함안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목간에 등장하는 감문(김천), 구리벌(옥천), 추문(의성) 등은 소백산맥 인근의 지명으로 일찍이 산라에 편입된 지역들이다. 함안은 원래 아라가야의 터전이었다. 물품에 붙였던 꼬리표인 이 목간들은 아라가야를 복속시킨 신라가 함안 지역에 산성을 쌓으며 여러 지방의 물자와 인련을 동원했음을 알려 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5~6세기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글자가 새겨진 것이 있는데, 신라에서 문자가 사용된 초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허리띠끝장식과 청동그릇 등에 새겨진 ‘부인대夫人帶’, ‘대부大富’ 등의 글씨는 문장이라기보다는 단어로 된 문자라고 해야 할 정도다. 그러나 호우총과 서봉총에서는 ‘광개토지호태왕廣開土之好太王’이나 ‘태왕太王’ 등과 같이 고구려의 왕을 지칭하는 용어와 제작연대.제작자.용량 등 여러 내용이 새겨진 그릇이 출토되어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삼국시대 신라지배층이 포항 냉수리 지역 호족의 재물에 관한 권리를 보장하는 명령을 내린 비석이다. 1989년 마을 주민이 밭에서 발견되었다. 비석은 사다리꼴 형태의 자연석에 앞.뒷면과 윗면에 총 231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글자가 거의 닳지 않아 일반인도 쉽게 읽을 수 있다. 글자는 해서체로 보이며 비석의 형태나 글씨체 등은 중원고구려비(국보)와 울진 봉평신라비(국보)와 비슷하다.
문자 사용의 확대
마립간 시기 말부터 일상생활에 문자 사용이 깊이 자리를 잡았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는 비석의 세기라 할 만큼 많은 비가 세워졌다. 포항의 중성리비와 냉수리비, 그리고 울진 봉평리비는 여러 다툼을 조정한 판결문을 적어 널리 알린 것이다. 북한산과 황초령 등에 세운 진흥왕 순수비는 영토를 확장하고 이를 긴며한 비석이다. 또한 산성과 저수지를 만들어가 수리한 내용도 비석에 남겼다. 문자를 적거나 새긴 물품이 늘어나는 것도 이 때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경주 지역 돌방무덤은 무덤길이 중앙 또는 좌측에 있고 높이가 30cm 이상인 주검받침이 있다. 나무널을 사용하지 않고 대신 머리고임, 발받침 등을 사용하였다. 이전 시기의 무덤과 달리 여러 번 걸쳐 시신을 묻는 가족장이다.
돌방무덤을 꾸미다
마립간 시기의 돌무지덧널무덤은 규모가 크고 부장품이 화려하였다. 이는 현실이 사후에도 이어진다는 믿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후 불교의 수용과 돌방무덤의 도입은 사후 세계에 대한 인식을 변화하게 만들었다. 돌방무덤은 내부로 출입할 수 있는 길과 문을 마련하여 여러 번 장례를 치를 수 있었고 부장품도 적게 넣었다. 돌을 다듬어 무덤을 만들면서 이전에는 없던 장식적인 조각 기법이 나타나게 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의례와 제기의 변화
중고기가 되면 의례에 큰 변화가 나타난다. 상장례용 제기는 여러 종류의 그릇을 함께 사용하다가 짧은 굽다리 접시와 긴목 항아리를 세트로 하는 단순한 구성으로 변화한다. 마립간 시기 후반부터는 금속제 그릇이 유행하기 시작하여 이를 모방한 질그릇이 유행했다. 또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그릇도 등장하였다. 제기의 변화와 금속제 그릇의 유행은 제사의 구성과 내용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신라는 국가정책 등을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글자를 새겨놓은 비석을 많이 활용했는데, 그 내용은 법의 시행, 국왕의 순시, 댐과 성 등 토목사업의 과정과 책임소재 등을 기록하고 있다. 신라의 비석은 특정한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라영역 전체에 걸쳐고 고루게 분포되고 있어서 국가운영의 중요한 수단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신라 진흥왕이 고구려, 백제와의 경쟁을 이기고 한강유역을 장악한 후 북한산을 방문하면서 그 내용을 새겨 놓은 것으로 황초령, 마운령, 창녕에 세운 비석과 함께 4개의 순수비(巡狩碑) 중 하나이다. 진흥왕의 영토확장에 대한 활약과 강력한 왕권, 당시의 관직제도와 인물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원래 북한산 비봉에 있었는데 현재는 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창녕 척경비가 건립된 561년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569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이 지역을 둘러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진흥왕의 영토 확장과 순수의 목적, 순수에 참여한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 비는 원래 북한산 비봉에 서 있었으나 현재는 국보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여기에 전시되고 있다. 비가 있던 원래 자리에는 원형을 본뜬 모형이 세워져 있다. 이 비는 1816년 추사 김정희가 비봉에 올라 조사한 결고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이후에도 김정희는 다시 이 비를 찾아 조사하였는데 옆면에 그런 사실이 그의 필치로 새겨져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영토를 넓히고 기념비를 세우다
진흥왕은 불교의 이상적 왕인 전륜성왕이 되기를 원했다. 진흥왕은 불과 수 년 만에 한반도 중부 지역까지 영토를 넓혀 위업을 이루었다. 여기에는 스스로 미륵의 화신이 되고자 한 젊은 화랑들의 헌신적인 희생도 한 몫 하였다. 568년 진흥왕은 태왕을 자부하며 변경까지 수레를 몰아서 나라 안을 살피는 순수의 길에 올랐다. 북한산을 거쳐 8월에는 함경남도 함흥에 있는 황초령에 닿았다. 이 때 진흥왕은 비문을 남겨 자신의 업적을 후세에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신라는 확대된 영토를 지배하기 위해 지방관과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각 지역에 남아 있는 돌방무덤이나 토기에서 신라문화의 확산된 모습들을 살펴볼 수 있다. 신라 영역내 지방에서 발견되는 비석이나 목간 등의 문자자료에서도 신라가 정복지 주민에 관직을 주거나 세금을 매기는 모습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지방관과 지방지배
505년 지증왕은 주군현으로 지방 조직을 정비하였다. 이는 각 지방들을 국가의 강한 통치체제 아래 두겠다는 의도였다. 신라의 영역은 다음 대인 법흥왕과 진흥왕을 거치면서 현재의 영남지방은 물로 중부 지방까지 확대되었다. 새로 개척한 영토는 신라의 주州로 편입되었고, 국가에서 파견된 군주가 통치 하였다. 특히, 553년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차지한 뒤 신주를 설치하여 대외교류의 통로를 개척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한강 유역을 차지하다.
한강 유역은 지리적,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하여 삼국의 격전지였다. 가장 먼저 한강 유역에 자리하였던 백제는 고이왕과 근초고왕 때 번성하였으나, 475년 고구려의 남하 정책으로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말았다. 백제는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나라의 운명을 걸다시피 하였다. 551년 비로소 성왕이 신라를 끌어 들여 고구려를 몰아내고 한강 유역을 다시 탈환하였다. 이 때 신라는 한강 상류, 백제는 한강 하류를 차지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 신라 진흥왕은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하류를 빼앗고 신라의 영토로 편입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대중국 외교의 통로와 삼국 통일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중앙집권국가로 성장한 중고기
신라의 법흥왕(재위 514~540)부터 진덕여왕(재위 647~654)에 이르는 140년간을 ‘중고기中古期’라 부른다. 중고기는 신라가 왕권을 강화하고 통치체제를 정비하여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이다. 안으로는 법령을 정비해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받아들여 통치 이념을 굳건히 함으로써 집권국가 체제를 완성하였다. 밖으로는 금관가야를 병합하고 대가야를 정복한 뒤 중국과 직접 교류할 수 있는 한강 유역을 확보하여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2024년
-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