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시대 삼한 중 변한을 계승한 가야연맹체는 고조선 이래로 중국.한반도.일본과의 해상무역로에서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지리적인 잇점과 철생산이 많았던 지역적인 특성으로 가야는 상당한 경제력을 축적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한시대에는 해안과 가까운 여수, 사천 늑도, 창원 다호리 지역 등이 해상무역의 중심지였으나 점차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낙동강 하류에 위치한 금관가아와 아라가야가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으며, 5세기와 6세기에는 대가야와 아라가야가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여 신라, 백제와 힘을 겨루었다.
대장간에서 사용하는 철기를 만드는 도구로 집게, 망치, 모루, 숫돌 등이 있다. 무덤의 주인공이 철기의 생산을 담당했던 사람임을 의미하며 그 직위가 상당히 높았다고 추정할 수 있게 해 준다. 다양한 지역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비슷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6 단야구 鍛冶具
단야구란 철기를 가공할 때 사용하는 도구를 말한다. 집게를 이용해 뜨겁게 달궈진 철기를 모루 위에 올려놓은 뒤 고정시키고, 망치로 두드려 모양을 만든다. 끌은 철판을 자르거나 구멍을 뚫는 데 사용하는 도구이다. 모양이 다듬어진 철기는 숫돌을 이용해 표면을 미끄럽게 만들고 날을 날카롭게 세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쇠납작도끼는 납작한 철판의 한쪽에 날이 있는 도끼를 말한다. 나무 자루에 홈을 판 뒤 끼우거나 끈으로 묶어서 사용한다. 영남 지역에서는 무덤으 껴묻거리로 사용하여 많은 양을 묻는데, 이는 무덤 주인공의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여러 가지 철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철소재로서 함께 묶인 형태로 출토된다. 무덤에 묻힌 덩이쇠는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부산 복천동무덤, 함안 도항리무덤, 고령 지산리무덤에서 출토되었다. 가야와 중국, 일본과 교류할 때 화폐의 기능도 가졌다고 하며 다양한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8, 9 덩이쇠
덩이쇠는 쇠를 납작하게 만든 것으로 쇠납작도끼에서 변화한 것이다. 쇠납작도끼와 마찬가지로 철기의 중간소재, 화폐, 무덤의 껴묻거리 등의 용도로 사용된다. 이른 시기에는 한쪽만 넓은 모양이었으나 점차 양쪽 끝이 넒은 형태로 변화한다. 김해 대성동 2호 덧널무덤에서는 약 100여 점에 달하는 덩이쇠가 출토되어 주목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본뜬 철기는 실제 농기구와 공구의 형태를 본떠서 5cm 내외의 작은 크기로 만든 것이다. 대가야 지역에서 주로 출토되며 고령 지산동 유적에서 가장 많은 종류가 확인된다. 대가야 지배층이 지역 수장들과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나눠준 것으로 생각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불과 쇠로 태어나다
삼국시대의 ‘철’은 최고의 첨단 소재였다. 철이 풍부했던 가야는 ‘철의 왕국’으로도 불린다. 철은 한반도 동남부 지역의 작은 세력으로 출발한 가야를 꾸준히 성장시키는 주요 배경이 되었다,. 가야는 철제 농기구를 만들어 농업 생산력을 높였고, 철제 무기와 방어구를 만들어 군사력을 높였다. 한편 철기 제작의 중간 소재 또는 화폐로 사용되던 덩이쇠에 장식을 더해 미늘쇠와 같은 의례용품도 만들었다. 또한 농업 통제권의 장악과 지배자 간의 결속을 의미하는 작은 모형 농기구를 만들어 지배자의 무덤에 넣기도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칼 모양의 몸통에 미늘같은 뾰족한 날이 서 있으며, 아래에는 투겁이 있어 자루를 끼울 수 있다. 긴 덩이쇠의 가장자리에 새모양 장식을 만든 것이 경남 함안과 합천 지역을 중심으로 발견되고 있다. 미늘쇠는 지배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의식용 도구로 추정된다. 권위의 상징으로 지역에 따라 새모양, 고사리 모양 등의 문양이 나타난다.
칼 손잡이의 뒷부분에 둥근 고리가 달려 있고 금.은으로 장식한 용이나 봉황 등의 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용과 봉황 등을 장식한 고리자루칼은 지배자의 신분과 정치체 사이의 결속을 다지는 상징물로 추정된다.
9~12 고리자루 큰 칼
고리자루 큰 칼은 손잡이 끝에 둥근 고리가 달린 긴 칼을 말한다. 실용 무기로 사용되며 여러 가지 장식을 더해 지배자의 위세를 드러내는 데 사용했다. 금과 은으로 손잡이와 고리에 넝쿨무늬, 물고기 비늘무늬 등을 장식했다. 고리 내부에는 용.봉황 모양의 장식을 넣는데, 고리와 장식을 별도로 만든 후 조립하는 것이 가야의 특징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무기
가야는 칼.창.활 등 용도에 따라 다양한 철제 무기를 만들어 전투에 사용했다. 철기 제작기술이 발달하면서 무기 종류도 다양해지고 성능 또한 좋아졌다. 실용 무기이자 권위의 상징물인 큰 칼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중 손잡이를 용과 봉황 등의 무늬로 화려하게 장식한 고리자루 큰 칼은 지배자의 청치적.군사적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활용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가야 지역에서 널리 사용된 갑옷은 큰 철판 20~30매를 이어서 만든 판갑옷이다. 판갑옷은 오른쪽 앞 몸통, 왼쪽 앞 몸통과 뒷몸통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는데 뒷몸통과 앞몸통은 분리할 수 있도록 하거나 가죽, 경첩 등으로 연결하여 갑옷을 쉽게 입고 벗을 수 있도록 하였다.
갑옷과 투구
가야는 이른 시기부터 큰 철판을 연결해 만든 판갑옷과 투구를 사용했다. 보명 중심의 소규모 전투에서 점차 말을 타고 벌이는 대규모 전투로 바뀌면서 갑옷과 투구를 대량으로 생산했다. 이와 더불어 작은 철판을 엮어 만든 비늘갑옷을 제작하여 움직임을 더욱 편리하게 만들었다. 또한 말에도 투구와 갑옷을 입혀 방어력을 높이고 지배자의 위세를 드러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말갖춤으로는 말을 제어하는 재갈.굴레.고삐, 말 탄 사람의 안정을 위한 발걸이.안장.가슴걸이.뒤걸이, 그리고 장식을 위한 띠꾸미개.말방울.기꽂이 등이 있다. 이와 더불어 말 자체를 보호하기 위한 말머리가리개와 말갑옷도 있다. 가야의 말갖춤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지만 차츰 가야 특유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기꽂이는 말안장의 뒤쪽에 붙여 기를 꽂는 것이다. 무사의 위엄과 화려함을 더해주며, 고구려의 무덤벽화에서도 보인다.
기꽂이는 긴 철봉을 물결 모양으로 구부려 만든 철기로, 깃발을 꽂을 수 있게 만든 것이다. ‘U’자 모양으로 굽은 끝부분의 모양으로 보아 말안장의 뒷부분에 착장한 것으로 생각된다. 기꽂이에 깃발을 꽂아 말을 화려하게 꾸밈으로써 말 탄 사람의 권위를 드러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19~24 말띠드리개
말띠 드리개는 고삐에 매달린 줄 또는 말의 가슴과 엉덩이 쪽에 위치한 끈에 매달아 말을 장식하는 데 사용한 것이다. 나뭇잎 모양, 물고기 꼬리 모양 등 다양한 형태가 있으며 가야의 경우 칼끝 모양의 말띠드리개가 가장 많이 사용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25~28 말띠 꾸미개
말띠 꾸미개는 말에;둘러진 끈들이 교차되는 부분을 장식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고리모양, +자 모양 등 형태가 다양하며 금과 은을 사용해 더욱 화려하게 장식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구려 철기병을 연상시키는 금속판금으로 만든 말머리가리개이다. 전투할 때 말을 보호하기 위해 말의 얼굴에 씌운 것이다. 얼굴 덮개, 볼 가리개, 챙으로 구성된다. 고구려의 무덤벽화에서 많이 보인다.
가야의 말갖춤
가야의 말갖춤은 기능에 따라 말을 제어하는 재갈.굴레.고삐 등과 말에 탄 사람을 안정시키는 안장.발걸이.가슴걸이, 말을 꾸미는 말방울.말띠드리개.기꽂이 등으로 나뉜다. 초기의 말갖춤은 북방 기마민족과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가야의 독자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실용성이 높은 초기의 말갖춤은 점차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꾸밈으로써 그것을 사용하는 지배자의 위상을 높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쇠를 부려 나라를 지키다.
가야는 각 지역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작은 나라가 공존했으며 지리적으로 백제와 신라 사이에 위치하여 많은 전쟁을 치르며 성장했다. 철 자원이 풍부했던 가야는 이른 시기부터 북방 유목민족과 고구려로부터 발달한 철기 문화를 받아들여 실용적인 군사 장비를 생산했고, 이를 토대로 군사력을 성장시켰다. 또한 가야는 철제 무기로 무장한 기마병을 앞세워 주변 나라의 침략에 맞서고 영토를 확장하며 세력을 키워 나갔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가야는 바다에 접해 있다는 지리적인 이점과 풍부한 철자원을 바탕으로 중국 및 일본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가야연맹체 유적지에서는 당시 교류를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는데 그 중 지리적,정치적으로 가까웠던 일본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들이 가장 많이 출토되고 있으며, 중국 북조와 남조를 비롯하여 멀리 서역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유리잔도 보인다. 청동솥, 거울, 방패꾸미개, 적갈색토기 등은 가야와 주변국가와의 국제적인 교류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유물들이다.
1, 2 청동 그릇
중국 서진시대 무덤에서 주로 발견되는 세숫대야 모양의 청동 그릇이다. 비슷한 모양의 그릇이 북방 지역에서도 발견된다. 당시 중국과 금관가야의 활발한 교류 관계를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여러가지 무늬와 사신이 표현되어 있으며, 손잡이 주위에 작은 꼭지가 달려 있다. 기원후 1세기 무렵 중국 후한에서 만들어진 거울이다. 청동거울은 청동기시대 이래로 다양한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대부분은 중국에서 수입한 것이라 한다.
중국 중원지역과 관련된 청동 거울이다. 가운데에 위치한 네모꼴 무늬를 중심으로 주위에 ‘T.L.V’ 무늬가 있으며 동서남북으로 사신과 산수 무늬를 세밀하게 배치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가야와 신라의 왕릉급 무덤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로마계 유리잔이다. 유리표면에 감색 유리를 덧붙인 것으로 경주 금령총에서도 출토되었다.
서역에서 제작된 후 한반도로 유입된 로만글라스이다. 경주 금령총에서도 유사한 형태가 출토된다. 한편 김해 대성동 91호 무덤에서 출토된 서여계 유리그릇 조각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유리 용기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당시 금관가야 원거리 교역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반달모양의 손잡이가 달려있고 바닥이 편평하며, 음식을 끓이는 그릇이다. 초원지대 유목민족의 것으로 북방문화의 영향임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몽골지역에서는 이런 용기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TV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북방 유목민족들이 말 등에 싣고 다니며 사용한 취사도구이다. ‘오르도스형 청동 솥’이라고도 부른다. 중국 지린성 일대, 랴오허 강 서쪽 지역 등에서 비슷한 형태의 용기가 발견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김해 대성동.양동리 유적 등 4세기 대 금관가야 지역에서 주로 출토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6~8 말갖춤
중국 동북지역 유목민족의 문화와 관련된 말갖춤이다. 4세기 대 금관가야 지역을 중심으로 확인된다. 그 중 삿갓 모양 금동 말방울의 경우 김해 대성동 유적에서만 출토되고 있어 주목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문물을 받아들이고 전파하다
가야는 바다와 접해 있는 지리적 특성과 풍부한 철 자원을 바탕으로 이른 시기부터 낙랑, 왜 등 주변 나라들과 활발히 교역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철기.토기 제작 기술을 비롯한 여러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다. 이를 기반으로 가야는 독자적인 문화르 발전시켰다. 동북아시아 해상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한 가야는 주변 나라와 교류하며 다채로운 문화를 꽃피웠다. 이렇게 번창한 가야 문화는 일본에까지 전해져 스에키와 같은 새로운 토기 문화의 성립과 철기 문화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돌로 만든 것은 일본에서 들어온 것으로 지배자의 상징적인 물품으로 추정된다. 상어의 이빨을 가공하여 만든 화살촉은 삼각형이며 가장자리에 가늘고 날카로운 톱니가 새겨져 있다.
바람개비 모양으로 나무나 가죽으로 된 방패에 붙인 것이다. 뒷면에는 방패에 매달기 위한 고리가 있다. 일본과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속이 빈 둥근 통 속에 청동 또는 철로 된 작은 구슬이 들어 있어 흔들면 소리가 난다. 장대에 꽂아 사용한 것이다.
국제교류의 중심지
가야는 당시 중국과 한반도, 왜를 연결하는 국제 교류의 중심지였다. 가까운 바다 항로를 이용해 중국, 북방 지역과 고구려 등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으며 왜와 활발하게 해상 교역을 했다. 이는 가야 지역에서 출토되는 중국 중원 지역의 청동 거울과 그릇, 북방 유목민족과 관련된 청동 솥과 말갖춤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금관가야 지역을 중심으로 바람개비.통 모양 청동기 등 왜와 관련된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일본 규슈, 긴키 등의 지역에서도 가야 계통의 유물이 확인되고 있어 당시 가야의 국제성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가야加耶는 낙동강 유역에 있었던 변한의 여러 작은 나라에서 출발하였다. 가야라는 이름은 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등 여러 나라를 아우르는 말이다. 가야는 발달된 철기 생산 능력과 우수한 해운 입지 조건을 바탕으로 주변 지역과 교역하며 성장했다. 이른 시기에는 금관가야가 중심이 되어 북방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였고, 바닷길을 이용해 낙랑, 왜 사이의 먼 거리 교역을 이어주는 중간 교역 지대로서 큰 역할을 했다. 5세기 이후부터는 대가야가 중심이 되어 세력을 떨였으며 아라가야, 소가야 등이 함께 발전했다. 부드러운 곡선이 아름다운 다양한 토기와 금속 공예품, 구슬 장신구, 철제 판갑옷 등에는 가야 문화의 다양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배자의 무덤에서 확인되는 다채로운 유물과 순장 풍습 등은 당시 가야가 백제, 신라와 힘을 겨룰 만큼 발전한 나라였음을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2024년
-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