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요이시대(弥生時代)는 일본의 시대 구분 중 하나로 조몬시대가 끝나는 기원전 5세기부터 고훈시대가 시작되는 3세기까지를 말한다. 야요이(弥生)라는 명칭은 1884년 일본 도쿄시 야요이쵸(弥生町) 패총에서 발견된 토기를 야요이식토기라 부른데서 유래되었다. 야요이시대는 벼농사가 도입되면서 잉여작물의 생산과 축적이 생겼고, 빈부격자와 계급의 발달로 이어졌다. 이 시기는 개간과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하면서 집단의 대형화가 진행되었다. 일본은 청동기와 철기와 동시에 전해져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를 구분하지 않고 농경사회로 바뀐 점의 의미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탁(청동방울)은 일본 야요이시대를 대표하는 청동기 유물이다. 중국에사 사용된 종에서 유래하여 한반도를 거쳐 일본을 전해졌다고 하나 일본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비교적 많은 500여 점이 출토되고 있다. 몸통에는 물고기를 잡는 새나 멧돼지를 사냥하는 그림의 표현되어 있다. 우스꽝스러운 인물이나 사다리가 걸린 고상가옥은 농경제사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과 제사 모습을 보여준다.
야요이시대 후기의 취락 유적에서 발굴된 작품입니다. 취락과 청동방울 제사의 관계를 고찰하는 데 있어 귀중한 예입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이 청동방울은 1918년 저수지 공사에서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함께 발견된 거울은 당시까지 명화하지 않았던 청동방울의 연대를 특정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청동방울 중에서도 가장 최근의 돌선유식 청동방울입니다. 소용돌이와 삼각형, 격자무늬가 곳곳에 새겨져 있습니다. 소리를 내는 본래의 기능을 잃고 장식성을 강조하여 보다 크게 만들어졌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야요이시대弥生時代, 기원전 5세기 ~ 3세기
대륙과의 교류와 벼농사의 시작, 농경사회의 토기
약 2400년 전, 중국과 한반도에서 벼농사와 함께 청동기와 철기 등 금속기가 전해져, 규슈나 시코쿠, 그리고 혼슈 지역에 널리 퍼져갔습니다. 사람들은 관개설비가 있는 논 근처에 마을을 만들어 살기 시작했습니다. 농경을 생업으로 하는 야요이 시대의 시작이었습니다. 또한, 벼농사가 정착되지 않았던 홋카이도 지방에서는 속조몬 문화, 난세이 제도 지방에서는 패총시대 후기로 불리는 독자적 문화를 이루어 갔습니다. 이 시대의 토기는 야요이 토기라고 불립니다. 야요이 토기는 조몬 토기와 마찬가지로 질그릇이었지만, 구운 방법이 달라서 색깔이 밝고 단단한 특징이 있습니다. 농경이라는 생활상의 변화는 취사용 독이나 저장용 항아리, 음식을 담기 위한 굽다리접시를 기본으로 용도에 따라 각종 그릇을 탄생시켰습니다. 야요이시대 전기(기원전 4세기 ~ 기원전 3세기경)에는 서일본 일대에서 공통된 특징을 지닌 야요이 토기(와가가와식 토기)가 만들어져, 그 영향을 받은 토기가 동일본이나 북일본에서도 출토하는 등 문화가 널리 전파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기(기원전 2세기 ~ 기원전 1세기 경)가 되면 돌림판을 이용해서 모양을 만드는 등 새로운 기술도 볼 수 있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야요이시대 최대급 규모의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로, 띠 형태를 그리는 무늬와 얼굴 표현이 특징적.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조몬시대 말기(긴키)의 토기, 농경 시작 시기의 사회를 반영한 조몬시대 후기의 토기
야요이 시대 중기의 긴키 지방에서는 돌림판을 이용하여 토기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빗모양 무늬, 오목선 등의 문양이 베풀어졌다. 회전대를 이용하여 만들어져 왜곡이 없는 균질한 형태로 마무리되었다.
야요이시대의 대규모 취락으로 유명한 오사카부 후나바시 유적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무덤에서 출토된 토기로 이러한 조롱박 모양은 간토 지방 중에서도 동쪽 지역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형태입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야요이시대에는 중국 및 한반도에서 벼농사와 함께 간석기와 금속기가 전해졌다. 벼를 베는 도기인 돌칼, 목제를 가공하는 간돌도끼와, 간돌 화살촉 등이 대표적인 유물이다.
야요이시대의 생활도구
야요이시대에는 중국 및 한반도에서 벼농사와 함께 대륙계 간석기와 금속기가 전해졌습니다. 석기로는 벼 이삭을 베는 돌칼, 목제 농기구를 만드는 각종 간돌도끼, 무기로 사용되는 간돌 화살촉 등이 있습니다. 이 도구들은 이후에 철로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야요이시대에는 대표적인 장신구인 곱은옥이 많이 만들어졌으며 청동 팔찌, 유리 목걸이가 새롭게 등장한다. 일본적인 장신구로 손꼽히는 조개 팔찌도 많이 볼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청동기나 철기로 만든 무기 등을 모방한 석기도 만들어졌다. 제사도구나 부장품으로 사용된 것으로 한반도에서는 전북 부안야요이시대에는 대표적인 장신구인 곱은옥이 많이 만들어졌으며 청동 팔찌, 유리 목걸이가 새롭게 등장한다. 일본적인 장신구로 손꼽히는 조개 팔찌도 많이 볼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청동기나 철기로 만든 무기 등을 모방한 석기도 만들어졌다. 제사도구나 부장품으로 사용된 것으로 한반도에서는 전북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에서도 비슷한 성격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대롱옥(管玉)은 비즈 형태의 장신구로 팔찌나 목걸이 등으로 사용되었다. 일본에서는 조몬시대부터 만들어졌으며 비교적 늦은 나라시대까지 사용되었다.
곱은옥(曲玉)은 머리에 구멍이 뚫린 초승달 모양의 구슬로 한국과 일본에서 많이 출토된다. 대부분 옥, 마노, 수정, 활석 등 보석으로 만들어 진다. 일본에서는 조몬시대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나라시대까지 사용되었다. 한반도에서도 삼국시대 신라, 가야, 백제에서 사용되었으며 특히 신라 금관에 사용된 곡옥이 잘 알려져 있다.
야요이시대의 장신구와 제사 도구
야요이시대에는 청동 팔찌, 유리 목걸이가 새롭게 등장합니다. 유리 제품의 제작 기술은 금속의 주조 기술을 바탕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한편, 금속제 무기를 모방한 석기도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석기는 부장품 혹은 제사 도구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일본이 청동기는 한반도와 중국에서 북부 규수로 전해졌다. 북부 규수지명에서는 청동 창, 동검, 등의 무기형 청동기가, 긴키지방에서는 동종이 잘 알려져 있다. 한반도에서 전해진 초기의 청동제 무기는 실제 사용하였던 실용품이었다. 이후 일본에서 만들어지면서 크고 편평한 형태로 바뀌었는데 제사에 사용의 의례 도구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칼자루 동검의 일종으로 대단히 드문 형태입니다. 나비의 더듬이를 닮은 칼자루는 북방 유라시아의 청동기 문화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칼자루에는 다양한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규슈지방 북부에서는 돌 거푸집을 이용한 청동기가 다수 생산되었습니다. 이 거푸집도 주조에 쓰이면서 변색된 흔적이 나타납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거울 뒷편은 가는 선에 의한 기하학무늬로 장식되어 있으며, 복수의 손잡이를 지녔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야요이시대의 의례 도구, 청동투겁창.동검.청동꺾창과 청동방울
여기서는 창동투겁창.동검.청동꺾창 및 청동방울 등 금속기를 중심으로 야요이시대의 의례 도구를 볼 수 있습니다. 야요이시대가 되면서 먼저 한반도에서 북부 규슈에 청동기와 철기가 전해져 전기 말에서 중기 초에는 그 생산이 시작되고 곧 세토우치(瀬戸内를 거쳐 긴키(近畿) 지방에도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야요이시대 전기(기원전 4세기 ~ 기원전 3세기)에 북부 규슈에서 출현한 청동투겁창.동검.청동꺾창 등 청동제 무기는 당초 한반도에서 전래된 세형(細形)의 실용품이었습니다. 곧 일본에서도 만들어지기 시작되고 국산화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대형으로 평평한 제사를 위한 도구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청동방울은 대부분 긴키 지방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 기원은 중국이나 한반도의 청동방울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당조부터 중국이나 한반도 보다 크고 표면을 무늬로 장식하는 등 일본의 독자적 특징을 갖춘 것이었습니다. 20Cm 안팎의 크기인 ‘종’으로서 탄생된 청동방울은 점차 대형화되고 소리를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극히 장식적인 것으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이들 제기는 풍년이나 마을의 번영을 기도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속조몬(續縄文) 문화는 기후나 자연환경 때문에 벼농사가 적용되지 않고 수렵과 채취, 어로 생활을 했던 홋카이도 지역의 문화를 말한다. 농경생활이 정착됨에 따라 계급의 분화, 집단의 대형화가 이루어진 다른 지역과는 달리 조몬시대의 생활과 문화가 유지되어 이를 속조몬문화라한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간돌도끼를 비롯해, 바다짐승의 사냥과 해체에 사용된 돌작살, 돌칼 등의 석기가 있다. 토기 또한 장식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조몬시대 토기를 그대로 사용했다. 속조몬시대는 고훈시대가 시작되는 3세기까지 이어진다.
수렵이나 채집, 어로를 생활의 기반으로 삼았던 홋카이도의 야요이 ~ 고후시대에 해당하는 시기를 속조몬시대라고 부릅니다. 조몬토기의 기법과 무늬를 계승한 토기가 사용되었으며 다양한 조리도구 등이 제작되었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속조몬문화의 생활 도구
속조몬문화의 장신구
속조몬(續縄文)문화, 조몬시대 이후의 홋카이도
한랭한 기후 때문에 벼농사가 정착되지 않았던 홋카이도에서는 혼슈, 시코쿠, 규슈 등 지역이 야요이시대나 고훈시대로 바뀐 후에도 고기잡이, 사냥, 채집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속조몬시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당시의 유적 중 대부분은 해변 지대나 하천 유역에 집중되고 있고, 바다짐승의 뼈나 엄니도 많이 출토되고 있어 조몬시대 보다 고기잡이나 사냥에 비중이 두어져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메밀 등 잡곡의 발견 사례도 있지만, 전체 생업에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낮았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속조몬시대에는 양날칼이나 한쪽날의 간돌도끼 외에 바다짐승 등의 사냥이나 해체를 위해 사용된 돌작살이나 돌칼 등 다종다양한 석기가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또한, 속조몬문화의 특징적 석기로서 물고기 모양 석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유사먹이로서 낚시에 사용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토기는 조몬시대에 이어 다채로운 장식을 갖춘 것이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사도가시마산 벽옥을 가공한 대롱옥이나 난세이제도산 조개제품, 그리고 철기 등이 출토되고 있어 혼슈의 야요이 문화나 사할린을 경유한 대륙 문화와의 교 류도 행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출처>
-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 Wikipedia,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