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시대후기 각 왕조는 지역국가에서 벗어나 초기 국가를 형성해 나갔디. 지방에서는 각지의 호족들이 부 등을 만들어 세력을 펴고 있었다. 이 시기 한반도에서 전래된 말갖춤이나 무기, 금속제 장신구 등이 일본열도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왕권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각지 호족들에서 나눠지면서 결속을 나타냈다.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가야를 압박하면서 가야는 526년 멸망했다. 이후 백제에서 불교를 받아들이는 등 정치적 관계를 심화시켰다. 이 시기 무기나 금속제 장신구 등은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것과 비슷하며 금동판을 많이 사용했던 것이 특징이다. 이후 점차 일본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장식 큰칼 등의 무기나 투구, 갑옷, 장신구 등이 만들어졌다.
방울 달린 거울은 신에게 제사 지낼 때 음향 효과를 더하는 역할을 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고훈시대에는 안장에 승마자의 위신을 드러내는 장식을 넣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지방호족의 대두, 왜풍화倭風化의 진전
5세기 말경에는 한반도에서 전래된 말갖춤이나 무기 및 무구.금속제 치레걸이가 일본열도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반도에서는 금과 은이 많이 사용되고 있었지만 일본열도에서는 금동판을 많이 사용하는 등 특징을 볼 수 있으며, 6세기 중엽 이후에는 독자적인 장식 큰칼 등도 발전되었습니다. 이들은 야마토 왕권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각지의 호족(유력자)에게 나눠지고, 호족과 왕권과의 결속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고분에는 규슈에서 도후쿠지방까지 자족을 합장할 수 있는 굴식돌방이 빠른 소도로 퍼져갔습니다. 또한, 소규모 고분이 밀집된 군집분이 증가된 만큼 고분을 축조할 수 있는 계층이 확대되었음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또한, 스에키 등을 사용한 새로운 장송의례가 정착되고 분구墳丘 위에는 새로 인물이나 동물을 본뜬 하니와가 등장했습니다. 한반도에서는 야마토와 철자원이나 스에키에 있어서 깊은 관계를 가졌던 남부의 가야제국을 신라가 압박하기 시작하고, 야마토 왕권은 백제에서 불교 등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백제와의 정치적 관계를 심화시켰습니다. 그러나 결국 가야는 562년에 망하고 야마토는 한반도에서 발판을 잃게 되었습니다. 금속기에서 볼 수 있는 왜풍화는 이러한 국제관계를 배경으로 하여 진전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에타후나야마고분(江田船山古墳)은 일본 구마모토현 다나마시에 있는 고훈시대 고분으로 전장후원분 형태를 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14개의 큰 같을 비롯하여 금동관모, 금동관, 여러점의 청동거울 등이 출토되었다. 장신구들은 가야지역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며, 금동신발 등은 백제 무령왕릉 등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다. 가야나 백제와 활발한 교류를 했음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칼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일본에서는 가장 오래된 금석문으로 추정되고있다.
한반도에서 전래된 장례 의례용 신발입니다. 피장자였던 왕의 발에 신긴 것입니다. 백제 무령왕릉에서는 발받침도 출토된 바 있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에타후나야마고분에서 출토되는 많은 장신구는 한반도 남부에서 전래된 것입니다. 피장자의 국제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1~5는 중국 남조의 송나라에서 만들어진 중국 거울이며, 6은 일본 열도에서 만들어진 일본 거울입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가로로 긴 철판을 가죽끈으로 엮어서 제작한 몸통갑옷입니다. 야마토 정권이 제작하여 하사한 일본열도 특유의 무구입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금박으로 감싼 고리 안에 구슬을 문 봉황장식이 있습니다. 한반도 남부의 영향으로 이와 같이 칼자루 머리를 가진 큰 칼이 일본 열도에 보급되었으며 이는 그중에서도 초기 작품입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에타후나야먀(江田船山) 고분, 선진문화의 수용
에타후나야마 고분은 아리아케해로 흘러 들어가는 구마모토현 기쿠치강 유역에 위치하는 전방후원분(길이 약 77m)입니다. 일본 교과서에서도 반드시 실려 있는 은상감명이 있는 큰 칼을 비롯해, 금.은.금동제 치레걸이, 박재경舶載鏡을 중심으로 한 청동거울, 말갖춤이나 무기 등 수많은 출토품들은 일본을 대표하는 고분 출토 유물로서 1965년 5월에 모두 함께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금은제 치레걸이는 한반도와 거의 동등한 수준의 제품들입니다. 금동제 관이나 관모는 관위제도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금동제 이산식二山式 관冠이나 장식신발은 6세기 후반까지 발전되면서 많이 만들어진 일본열도 제품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6세기의 금속제 치레걸이를 몸에 지니는 풍습의 선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일본에 있어서 초기의 말갖춤은 당시 최신의 승마기슬이 벌써 습득되었던 사실을 나타내주고 있으며, 기나이 지방에서 생산된 일본열도의 독자적이고 전형적인 갑옷은 중앙세력(야마토 왕권)과의 강한 유대관계를 말해줍니다. 이들 출토품은 백제를 비롯한 한반도의 왕권과도 교류했던 지방호족(유력자)들의 활동과 선진성을 다각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고훈시대가 끝나는 6세기 말에는 전국적으로 전방후원분이 만들어지지 않고, 사각형 방분이나, 원분, 팔각분 등이 축조되었다. 종말기 고분은 개임 무덤 서격으로 무덤칸이 작고 앞칸과 널길이 되화된 것이 특징이다. 이 시기 전래된 불교는 호족을 중입으로 널리 보급되었으며 호류지 등의 사찰이 나라현 지방에 세워졌다. 한반도에서는 백제와 고구려가 망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다. 581년과 618년에 견수사와 견당사가 중국에 파견되어 선진적 문화가 도입되었다.
은상감으로 넝쿨무늬를 표현한 거울로, 불상 주위를 장식하는 장엄구로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아스카시대의 관영 공방에서 생산한 칼자루 장식이 사각형인 검으로, 동일본 지역에 주로 분포되어 있습니다. 그 배경에는 동일본 지역의 지배층을 국가의 군사력으로 포섭하려 한 정책이 있었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6세기 이후의 도관(점토를 구워 만든 관)은 규슈 지방 중부 ~ 도후쿠 지방 남부에 걸쳐 분포되어 있습니다. 이 도관은 일반적인 도관보다 크기가 작아 유해 그대로가 아닌 뼈를 보관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종말기의 고분, 동아시아 문화의 침투
6세기말에 전방후원분이 모습을 감추고, 유력자들은 대형 방분.원분을 축조하게 되고, 7세기 중엽에 새로운 대왕묘로서 팔각형 무덤이 나타났습니다. 또한, 기나이 지방의 아스카.가와치(河內) 지역에 개인묘로서의 성격이 짙은 앞트기식 돌덧널무덤이 나타났습니다. 무덤칸이 아주 작고 점차 앞칸과 널길이 퇴화된 것이 특징이며, 전통적 장송의례가 많이 변화되었음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종말기 고분이라고 불리며, 흙무니를 축조할 때 흙을 세게 쳐서 굳히는 판축공법이나 절석적, 옻칠관 등 기술은 고대 동아시아의 최첨단 기술을 응용한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단계에는 다카마쓰즈카 고분이나 기토라 고분처럼 고대 동아시아의 사상을 반영한 벽화를 갖춘 것들도 나타났습니다. 또한, 6세기 중엽에 전래된 불교는 호족들을 중심으로 널리 보급되고, 아스카데라.호류지 등 사원이 나라현 아스카 지방에 건립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581년에 수隋, 618년에 당唐 등 통일국가가 성립되고, 견수사, 견당사에 의해 대륙의 선진적 문화가 도입되었습니다. 한반도에서는 660년 백제가 망하고 백강전투 (663) 시에도 야마토도 백제를 돕기 위해 군대를 보냈지만 당.신라 연합군에 패배했고, 668년에는 고구려도 망하는 등 긴장된 국제관계 속에서 국가 건설이 추진되었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출처>
-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 Wikipedia,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