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국립박물관은 메이지시대 박물관이 설립된 이래 꾸준히 한국의 도자기를 체계적으로 수집해 왔다. 원삼국시대부터 만들기 시작한 가마에서 구워 마든 구운토기부터 삼국시대 도질토기, 통일신라의 도장무늬 토기나 녹유도기 등 시대를 대표하는 유들들을 볼 수 있다. 청자는 비색청자, 상감청자 등을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수집하여 전시했으며, 분청사기와 백자 등도 조형미가 뛰어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항아리에 다리부분이 달린 물건이 화로 모양 토기의 시초로 여겨집니다. 원래 용기로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점차 항아리 등을 올리는 받침대의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삼한시대의 토기
한반도 남부에 마한, 변한, 진한이 들어선 기원전 1세경부터 4세기 초까지를 삼한시대 또는 원삼국시대라고 합니다. 이때 도기 제작과 관련하여, 엄선된 흙과 회전대를 사용하고 표면을 두드려 성형하는 등 발전된 기술이 보급되었습니다. 이는 낙랑지역의 영향으로 추정됩니다.
삼국시대에는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물레가 사용되었으며, 지하식 굴가마 사용으로 높은 온도에서 구워진 회청색의 단단한 도기가 대량 생산되었다. 일상 용기 뿐 아니라 의례용이나 껴묻거리용으로 다양한 토기가 제작되었다.
세 발 달린 접시는 한반도 삼국 중에서도 백제 특유의 양식입니다. 이처럼 바닥이 평평하고 단단하게 구워진 세 발 달린 접시는 새로운 시기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일본의 스에키 토기 중에서 ‘하소’라고 알려진 형태입니다. 한국의 전라남도에서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스에키의 원류가 전라남도라는 설도 있습니다. 가운데 구멍에 대나무 등을 끼워 액체를 따랐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가야 지역에서는 각지에서 개성적인 토기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굽다리접시는 가야 지역의 서부인 고성을 중심으로 하는 ‘고자’라는 소국의 양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조형적으로 균형이 잘 잡힌 항아리입니다. 뚜껑과 어깨 부분에 보이는 원무늬는 컴파스 같은 도구로 만든 것입니다. 숙달된 도자 공예의 기술력을 엿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이 그릇 받침은 항아리를 위에 올려 무덤에 부장하는 토기로, 신라의 수도 경주의 양식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다리 부분을 튀어나온 띠 형태로 구호기하고 각각의 단에 맞새김 기법으로 물결무늬를 표현하였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삼국시대의 토기
4세기 이후 한반도에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 가야가 등장해 패권을 다투었습니다. 이러한 지역 분할은 소박하고 온화한 인상의 백제 토기, 단정하고 장식이 화려한 신라 토기와 같이 지역에 따른 다양한 토기 양식을 낳았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통일신라 때에는 불교식 화장이 유행하였다. 유골은 뼈단지에 담았고, 땅에 묻은 튼튼한 보관함에 넣어 장례를 치렀다. 뼈단지는에는 화려한 도장무늬를 새기거나, 녹유.청유.삼채와 같은 유약을 발랐다.
세로로 긴 점무늬로 구획을 나누고 그 사이에 가로로 긴 구슬 모양의 도장무늬 등을 조합하여 화려한 무늬를 만들었습니다. 불교가 성행한 신라시대에는 화장한 시신의 유골을 담는 뼈항아리가 제작되었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통일신라시대의 토기
7세기 후반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하자, 마치 그 세력 신장을 입증하듯 토기의 기면도 도장 무늬로 장식되는 등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습니다. 또, 불교 문화의 성숙으로 화장 풍습이 퍼져 뼈단지 등이 만들어졌습니다. 통일신라시대의 토기 중에는 뛰어난 뼈단지 작품이 많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고려시대에는 일상생활에서도 화려함과 세련된 문화를 향유한 사회였다. 화려한 금속기와 청자로 만들어진 다양한 용기들은 토기로도 만들어져 일상생활에 사용되었다.
청자와 백자가 주류가 된 고려시대 이후에도 도질 토기 제작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그릇 중에는 이러한 참외 모양 병 형태를 본뜬 것도 있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고려시대의 토기
고려시대에는 중국 기술의 전래와 함께 청자와 백자 생산이 본격화 되었습니다. 한편, 유약을 바르지 않은 토기 생산되어 계속되어 민간을 대상으로 한 일용품이 만들어졌습니다. 금속기와 청자에서도 공통된 조형 감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비색청자로 불렸던 고려 청자는 은은한 녹색을 띠는 도자기로 우리나라을 대표하는 문화재이자 예술작품이다. 비색청자는 유약이 반투명하며 그릇표면에 금이 생기지 않고 광택이 은은한 것이 특징으로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전반에 절정기를 이루며 12세기에는 상감기법이 도입되어 그 빛깔과 함께 예술적 조형미까지 갖추게 되었다.
12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한 고려 청자의 대표작입니다. 연꽃과 넝쿨무늬 위에 아름다운 청자 유약을 입혔습니다. 이 작품은 메이지시대에 박물관이 수집한 초창기 컬렉션 중 하나입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바탕에 철을 바르고 백상감으로 인삼잎무늬를 표현하였습니다. 청자 유약을 바른 고려의 독특한 도자기입니다. 표주박 형태의 물주전자로 금속기를 본뜬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상감청자는 바탕에 무늬를 새기고 다른 종류의 흙을 메워 넣는 방법으로 나전칠기나 금속공예의 입사기법에서 이전부터 볼 수 있었던 것인데, 이를 고려시대에 도자기에 적용한 것이다. 제작기법이 어려워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는 상감무늬를 만든 후 고온의 가마에 구워야만 했기 때문에 재질의 차이 등으로 상당히 어려운 기술이라고 한다. 고려시대의 상감기법은 12세기에 그 기술의 절정을 보였다고 하며, 많은 걸작들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청자 상감은 고려에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한 장식 기법입니다. 바탕흙에 무늬를 새기고 백토와 적토로 메워 초벌 구이한 뒤청자 유약을 입혀 다시 굽습니다. 근대 사업가였던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옛 소장품입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중국 오대에서 북송시대에 걸쳐 월요 및 여요에서 제작된 도자기의 직접적인 영향이 나타나는 고려 청자입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기물 표면에 용과 봉황무늬를, 기물 안쪽면과 바닥 등에 모란넝쿨무늬를 정교하게 새긴 13세기의 상감 청자입니다. 전남 담양군 대덕면 묘지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고려청자
고려의 왕후 귀족들이 사랑한 고급 청자. 중국 기술의 도입으로 10세기 중반부터 생산이 본격화되어 12세기에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비색’이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청록색 유약과 양각, 음각 및 상감 기법에 의한 우아한 장식이 특징입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분청사기는 외형상 고려청자에 비해서 제작수법이 쇠퇴한 느낌을 주고 있지만, 투박하면서도 서민적인 면모를 보이는 등 한국적인 미를 잘 담아내고 있다. 고려말 청자의 주요 생산지였던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의 가마들이 왜구의 침략으로 피폐화되면서 장인들이 내륙으로 이동하면서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15~16세기에 걸쳐 약 150년의 기간 동안 만들어졌으며, 고려청자.조선백자와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도자기로 평가받고 있다.
귀얄로 백색 화장토를 칠하고 철화 무늬를 그린 도자기입니다. 충남 계룡산 동쪽에 위치한 공주 학봉리에서 제작된 전형적인 도자기입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쌀가마니를 옆으로 눕혀놓은 것 같은 이러한 형태의 그릇을 장군이라 합니다. 물가에 풀과 물고기 그림이 철화로 그려졌습니다. 생생하게 묘사된 물고기의 표정이 매력적입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회색 바탕흙 위에 귀얄로 백토를 칠하고, 표면을 긁듯이 하여 나뭇잎과 물고기무늬를 냈습니다. 그 위에 전체적으로 투명한 유약을 발라 구워낸 사발입니다. 원래는 제사 용기로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분청사기
분청사기는 회색 바탕흙 위에 백토로 분장한 다음 유약을 입혀 구운 자기입니다. 고려청자부터 조전백자로 이행하는 15세기 무렵에 활발히 제작되었습니다. 유머스러하고 다채로운 표현이 특징입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백자는 다양한 형태와 무늬들이 있는데 그 중 순수한 흰색의 자기를 순백자(純白磁)라고 한다. 순백자에는 무늬가 없는 것을 비롯하여, 음각, 양각, 투각 등으로 장식한 백자들을 포함한다. 유교사회를 추구했던 조선사회에서는 순백의 절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순백자는 검소와 절제를 중요시하는 사대부들의 취향과 맞아 떨어졌다.
입 둘레가 얇고 날카롭게 꺾인 단순한 형태의 접시로, 태토에는 불손물이 들어가 있지만 순백색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안바닥의 중앙 부분에는 유약이 없으며 접지면에는 백색의 모래 알갱이가 붙어 있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높은 굽과 둥근 몸통에 작은 손잡이가 달린 꾸껑이 갖춰진 사발입니다. 태토는 회백색을 띠며 두께가 있습니다. 조선 왕조에서 백자는 음식 그릇 외에도 제기로서도 귀중하게 여겨졌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백자는 조선 궁정에서 제기와 음식 그릇으로서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15세기 무렵에 백자 생산 공정이 확립되었고 경기도 공주에 관요가 설치되었습니다. 이 항아리는 관요 초기의 제품으로 추정됩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청화백자는 코발트가 주성분인 안료를 사용하여 푸른색 무늬를 그린 백자를 말한다. 조선에서는 명나라의 영향을 받아 15세기 중반부터 청화 백자를 직접 제작하기 시작했다. 청화 안료는 값이 매우 비싸고 구하기도 어려워 백자에 청화 안료로 그리는 일은 궁중에 소속된 전문화가가 맡았다. 청화 안료의 수입이 어려울 때는 철화 안료로 그린 철화백자가 만들어 졌다. 15~16세기의 청화 백자에는 작품성이 상당히 높고 우아한 품격을 갖춘 무늬들이 그려졌다.
철사란 백자에 철분이 함유된 안료로 무늬를 그리는 기법을 뜻합니다. 17세기에는 거듭되는 전란으로 코발트 안료 대신 철사가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용 표현에 조선시대 철화 작품의 특색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진사는 동을 발색재로 사용한 유약으로 산소의 공급이 불충분한 상태에서 구워지면 불게 변합니다. 청화와 진사로 잠자리와 나비가 그려졌습니다. 이런 형태는 광주 분원리의 관요 작품에 보이는 특징입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조선백자
조선시대에는 백자 생산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맑은 희색과 온화한 인상을 지닌 백자는 조선의 양반층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15세기 중반에는 경기도 광주에 관요가 설치되었고, 15세기 후반에는 유약 아래 무늬를 그리는 철화와 청화가 제작되었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흰색 바탕에 투명유를 입힌 백자 그릇입니다. 유약은 약간 청록색을 띠는 것처럼 보입니다. 고려시대에 중국에서 전래된 제조 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십장생이란 장수를 상징하는 10가지 무늬를 뜻합니다. 이러한 무늬는 조선시대의 회화와 공예품에 널리 표현되었습니다. 푸른색을 띠는 도자기 바탕은 조선시대 후기의 백자가 가지는 특징입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상형토기는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 거대한 무덤에 많은 껴묻거리를 넣고 장례를 치르는 풍습에서 비롯되었다. 새, 동물, 뿔잔, 말, 수레, 배, 집, 등잔 등을 축소에서 만들었다. 중국 진한대 병마용 같은 토용, 당나라 도용, 일본 고분의 하니와 등과 비슷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둥글고 큰 수레바퀴를 뿔잔의 양 옆에 붙여 만든 것으로 무덤에서 출토된다. 영혼을 나르는 의미로써 제사 등의 의례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상적인 바퀴이지만 회전시킬 수는 없습니다. 두 개의 구멍을 잘 보면, 입이 넓은 작은 항아리 두 개를 나란히 둔 형태입니다. 4세기 무렵에 등장한 이러한 형태의 항아리는 축제 도구로서 사용되었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신라의 토기 겉면에는 무늬를 새기거나 토우 등을 붙여서 꾸미기도 하는데 이들 토우들은 신라시대 사람들의 생활모습이나 동물이 형태를 간략하면서도 특징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어서 현대적인 관점에서 그 묘사가 뛰어난 점이 많다.
토기 위에 토우를 나란히 두어 전체로 하나의 장면을 만들어냈습니다. 뚜껑 위에는 거북이 등의 동물과 인물이 표현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알몸의 인물과 개구리, 뱀 등이 토기 위에 많이 등장합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5세기 말에서 6세기 중반의 신라 토기 주에는 고리 장식을 단 그릇이 때때로 보입니다. 점토판과 점토 띠를 조합하여 만든 장식은 표면에 붙지 않도록 절묘하게 구워졌습니다. 움직일 때 마다 흔들리고 소리도 납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바닥이 높게 설치된 집 형태로 가로와 세로로 이어진 지붕과 출입문이 표현되어 있다. 삼국시대 창고인 부경의 구조를 알 수 있다. 다호리 유적에서도 비슷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고상 창고를 본뜬 토기로 기둥 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했습니다. 한국 차원 다호리 유적과 일본 와카야마현에서도 이와 유사한 토기가 출토된 적이 있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가야는 작은 청치 집단을 아우르는 명칭으로 토기에도 지역마다 차이가 보입니다. 이 작품은 가야 중 경남 함안군을 중심으로 한 아라 가야의 토기로 여겨지며, 잔 안에 새를 붙인 기물은 드뭅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한반도에 전해지는 새 모양 용기입니다. 날개와 물갈퀴는 점토판으로 잘라 내어 붙인 것이지만, 물새의 움직임을 훌륭하게 표현했습니다. 흘러내린 자연유가 의도치 않게 수면을 표현한 듯 합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굽다리 웟부분을 변형시켜 말 모양으로 만든 용기입니다. 등 위의 안장에는 고정 벨트, 가죽 흙받기가 달려 있습니다. 당시 말을 장식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말 모양을 만들고 점토로 만든 마구를 일일이 붙였습니다. 그 위에 갑옷 차림에 관모를 쓰고, 큰 칼과 화살통을 찬 인물이 있습니다. 투구가 아닌 관모를 착용한 것으로 보아 의식에 참가한 모습을 나타낸 듯 합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한국의 도자기
이 코너에서는 원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도자기를 소개합니다. 한반도에서는 원삼국시대에 중국의 기술이 전해지고 그 이전까지의 붉은 토기를 대체하여 가마에서 회색으로 구운 토기가 등장하였으며 삼국시대에는 도질토기로 발전되었습니다. 6세기에 등장한 도장무늬 토기나 녹유도기는 통일신라 시대에 완성됩니다. 고려시대 초기에는 청자의 생산이 시작되고 주로 궁정에서 사용되었습니다. 12세기 후반부터는 상감기법이 발전합니다. 조선시대 전반에는 분청사기 등 조선의 독자적 무늬 표현이 탄생되고 후반에는 궁정의 생활용품이나 제사용으로 광주의 관요(정부의 가마)를 중심으로 생산된 백자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시대에 따른 변천을 감상하십시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출처>
-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 Wikipedia,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