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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 신라의 건국과 성장] 성읍국가 사로국

신라는 진한에 소속된 성읍국가 중 경주 지역의 사로국(斯盧國)이 그 시초이며 혁거세 거서간이 나라를 세웠다가 알려져 있다. 삼국 중 가장 먼저 세워졌으며 인근 울산지역 달천에서 철광산을 개발하여 고대왕국으로 성장할 동력을 얻었다. 4세기 대 신라 지배자의 무덤에서는 덩이쇠나 쇠괭이를 묻어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했으며 금관이 부장품으로 묻혔던 마립간시기까지 이런 경향은 이어졌다. 경주박물관에서는 기원후 1~2세기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경주 사사리 130호 무덤 출토품과 기원후 3~4세기 무덤에 ‘경주 구어리 1호 덧널무덤 출토품’을 전시하고 있다. 고조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여러 유물들을 살펴볼 수 있다.

<청동 호랑이모양 허리띠고리, 경주 사라리 130호 널무덤 출토품, 1~2세기>

6촌이 힘을 합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세워졌습니다. 신라는 낙동강 동쪽에 터전을 마련한 진한 12개의 작은 나라 가운데 하나였으며, 그때의 이름은 사로국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사로국을 구성하고 있던 6촌의 촌장이 힘을 합쳐 박혁거세를 왕으로 받들었으며, 왕의 칭호는 거서간居西干’이었습니다 거서간은 시조인 박혁거세 임금 때에만 사용되었으며 귀인을 뜻합니다. 거서간 이후 차차웅次次雄, 이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 왕王의 순서로 바뀌었습니다. ‘차차웅’은 무당을 뜻하는 말로 제사장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2대 남해 임금때만 사용했습니다. 남해 차차웅의 아들 유리가 3대 임금에 오르면서 ‘이사금’이라고 고쳐 불렀습니다. 이사금은 이가 많다는 뜻, 즉 연장자를 뜻하며 16대 홀해 임금 때까지 사용되었습니다. 이사금 시기에는 박, 석, 김의 세 성씨 집단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고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면서 국가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한국식동검은 요령식 동검에 비해서 직선적인 모양을 하고 있다. 청동기문화가 발달했던 평양지역과 한반도 해안지역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한국식 동검, 경주 구정동, 기원전 4 ~ 기원전 1세기>
<한국식 동검, 경주 구정동, 기원전 4 ~ 기원전 1세기><한국식 동검, 재현품>
<청동 투겁창, 경주 입실리 등, 기원전 4 ~ 기원전 1세기>
<청동 꺾창, 경주 입실리.구정동, 기원전 2세기>
<청동 거울, 경주 조양동, 기원전 1세기>
<청동 종방울, 경주 조양동 등, 기원전 2 ~ 기원전 1세기>
<청동 종방울, 경주 조양동 등, 기원전 2 ~ 기원전 1세기>
<청동 방울, 경주 구정동, 기원전 2세기><오수전, 기원전 1세기><청동 꺾창집, 영천 용전리, 기원전 1세기>
<청동 꺾창, 영천 용전리, 기원전 1세기>
<쇠꺾창, 영천 용전리 기원전 1세기>
<쇠낫, 영천 용전리, 기원전 1세기><쇠끌, 영천 용전리, 기원전 1세기>
<쇠투겁창, 경천 용전리, 기원전 1세기><쇠투겁창, 재현품>
<청동 화살 발사기, 영천 용전리, 기원전 1세기>

한국식 동검을 사용하다
우리나라의 청동기문화는 대표적인 동검의 형태에 따라 전기의 ‘요령식 동검(비파형동검) 문화’와 후기의 ‘한국식 동검(세형동검) 문화’로 나뉩니다. 한국식 동검 문화는 기원전 5 세기~ 기원전 4세기 무렵부터 한반도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청동기문화입니다. 이 시기의 청동 제품으로는 요령식 동검에 비해 폭이 좁고 가는 한국식 동검을 비롯해 투겁창, 꺾창 같은 무기류와 거울, 방울 등의 의기류가 있습니다. 이러한 청동기들은 당시의 청동기 제작 기술이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줍니다. 청동기문화는 기원전 2~기원전 1세기에 철기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막을 내립니다. 신라는 이 새로운 금속문화를 기반으로 건국되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쇠도끼, 영천 용전리, 기원전 1세기><쇠도끼, 경주 조양동.영천 용전리, 기원전 1세기>

신라가 삼한 중 진한의 중심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철을 생산하고 제련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 신라 영역에서는 울산 달천 광산에서 철을 생산하여 경주 황성동 공방에서 이를 제련하고 가공하였다고 하며, 일본과 중국으로 수출도 했다고 한다. 3세기 신라 지배층의 무덤에서는 철로 만든 무기나 덩이쇠 등이 출토되고 있 다. 이는 신라가 철을 가공하여 농기구와 무기를 만들고 교역하면서 국가로 성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철광석, 울산 달천동><모룻돌, 경주 황성동, 3~4세기>
<쇠도끼, 경주 구어리, 3세기><도끼 거푸집, 경주 황성동.용강동, 3~4세기>
<송풍관, 경주 황성동, 3~4세기>

신소재 철을 마듬대로 부리다
신라가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 가운데 하나는 바로 ‘철’이었습니다. 철을 다루는 것은 당시 최고의 기술이었고, 철을 가진 세력은 다른 세력과의 싸움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철은 돈처럼 사용되었고, 이웃 나라들과의 주요 교역 물품이었습니다. 사로국이 철을 마음대로 다루어 활발히 이용한 증거는 1~4세기의 경주 황성동 유적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쇳물을 거푸집에 부어 쇠도끼 등을 만드는 주조 작업과 쇳덩이를 불에 달구어 모루에 대고 두들겨 철기를 만드는 단조 작업으 한 증거들이 나왔습니다. 이는 사로국이 높은 수준의 철제품 생산력을 보여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신라는 철제무기를 바탕으로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통합하면서 지역의 맹주로 발전하였으며 후대에 가야연맹체를 압박하게 되었다. 전쟁을 위해 칼과 창, 화살 등 철제 무기들을 만들었으며 몸을 보호하기 위한 철제 갑옷도 만들어 입었다. 신라, 가야, 왜는 경쟁과 교역 등을 통해 교류를 하면서 비슷한 형태와 무기와 갑옷 등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 사라리 5호 덧널무덤에서 출토된 투구는 볼 가리개와 이마를 보호하는 쇠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머리 위쪽을 보호하는 복발이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판갑옷과 투구, 경주 사라리, 4~5세기>
<말머리 가리개, 경주 사라리, 4~5세기>
<판갑옷과 목가리개>
<판갑옷과 목가리개>
<판갑옷과 목가리개,경주 사라리, 4~5세기>

전쟁으로 이웃 나라들을 아우르다
<삼국사기>에는 사로국이 이사금 시기에 이웃의 음즙벌국(경주 안강), 압독국(경산), 감문국(김천) 등을 공격해서 병합한 기록들이 보입니다. 이는 사로국이 군사 행동으로 이웃 나라들을 아울러서 더욱 큰 나랄 성장 했음을 말해 줍니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국보다 월등한 무기들이 필요했기에 쇠로 만든 긴 칼과 창 등 강력한 철제 무기들을 만들었습니다. 또 전투에서 몸을 보호하기 위해 쇠로 갑옷도 만들어 입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경주사라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청동기와 철기 유물들이 출토된 유물들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평양지역 유물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중국거울과 이를 모방한 청동거울, 동물모양의 띠고리, 한국형동검, 청동꺽창 등이 대표적이다.

<경주 사라리 130호 널무덤 출토품, 1~2세기>
<반대편에서 본 모습>
<청동 칼>
<쇠도끼><유리목걸이><청동 호랑이모양 허리띠고리>
<쇠도끼><유리목걸이><청동 호랑이모양 허리띠고리>
<쇠칼><청동 꾸미개><본뜬 거울>
<쇠화살 촉>
<쇠칼><청동 꾸미개><‘8’자모양 띠고리>
<U자형 철기><청동 팔찌><쇠재갈><고사리모양 꾸미개><‘8’자모양 띠고리>
<쇠뿔모양 손잡이 항아리>
<주머니모양 항아리><쇠낫><쇠도끼>
<쇠도끼>
<항아리><쇠도끼>
<쇠솥>

무덤으로 본 사로국의 지배자, 널무덤
신라 건국 이래 기원후 300년 즈음까지 지배층의 무덤은 널무덤 또는 덧널무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널무덤은 구덩이 안에 널을 넣은 것으로 대표적인 유적으로 경주 사라리 130호 무덤을 들 수 있습니다. 사라리 130호는 기원후 1세기대의 널무덤으로 여러 가지 철기와 함께 한경을 본떠 만든 4매의 방제경과 동검, 철검 등이 함께 출토되었습니다. 동검과 철검은 손잡이, 검, 그리고 옻칠을 한 칼집으로 이루어졌으나 칼집은 썩어 없어지고, 칼집 부속구만 남아 있습니다. 철검은 쇠로 만들어졌을 뿐, 손잡이와 칼집 부속구는 모두 청동제입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덧널무덤은 구덩이 안에 따로 나무덧널을 만들고 그 속에 널과 부장품을 넣어 묻은 무덤이다. 2세기 중엽 무렵부터 덧널무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덧널무덤은 쇠로 만든 창과 같은 무기나 도끼, 덩이쇠를 바닥에 가득 깔아 놓은 곳이 많아 당시 지배층의 경제력을 살펴볼 수 있다.

<경주 구어리 1호 덧널무덤 출토품, 3~4세기>
<반대편에서 본 모습>

미늘쇠는 철을 이용하여 만든 무기이지만, 실제로는 신분을 나타내거나 의식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을 추정되고 있다.

<미늘쇠>
<꺾쇠>
<쇠도끼><쇠투겁창><덩이쇠>
<쇠투겁창><고리자루 큰칼>
<쇠도끼><고리자루칼><꺾쇠>
<꺽쇠><쇠투겁창>
<따비><덩이쇠><쇠투겁창><꺾쇠>
<뚜껑 있는 굽다리 곧은목 항아리>
<짧은목 항아리>>
<그릇받침><굽다리 긴몸 자배기>
<목가리개><허리가리개>

무덤으로 본 사로국의 지배자, 덧널무덤
2세기 중엽 무렵에 나타나는 덧널무덤은 구덩이 안에 나무 덧널을 만들고 그 속에 널과 껴묻거리를 함께 넣은 무덤입니다. 덧널무덤은 시신을 이중으로 보호하고 좀 더 많은 부장품을 넣을 수 있는 구조로, 3세기 후엽에 해당하는 경주 구어리 1호 덧널무덤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무덤들에는 쇠로 만든 창과 같은 무기나 도끼, 덩이쇠를 바닥에 가득 깔아 놓은 예가 많습니다. 이 같은 무덤과 부장품을 바탕으로 이사금 시기 지배층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으며, 당시 사회에서 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출처>

  1. 안내문, 국립경주박물관, 2024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3. 위키백과,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