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는 신라의 수도로 신라가 약 천년의 세월을 이어온 도시이다. 금관 등이 출토된 마립간시기 고분을 비롯하여 불국사를 비롯한 많은 사찰과 절터들이 남아 있는 곳이다. 신라는 한반도 동남부에서 동해로 흘러드는 형산강과 태화강을 기반으로 고대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경주지역은 농경생활이 정착된 청동기시대부터는 형산상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지역에 정착하면서 일정한 세력권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박물관에서는 경주 동천동에서 출토된 구석기시대 도구인 찍개를 비롯하여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 청동기시대의 요령식동검과 한국식동검을 볼 수 있다.
자연에서 우연히 깨진 돌과 사람이 떄려서 만든 석기는 어떻게 다를까요? 뗀석기는 일정한 형태를 보이며 규칙적이면서 집중적으로 가공한 흔적이 보입니다. 또한 제작자의 의도에 따라 특정한 돌감이 선호되기도 하였습니다. 유적에서 발견된 몸돌과 박편을 되맞추는 작업은 뗀석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도구를 만들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돌, 나무, 동물의 뼈와 뿔 등을 이용해 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구석기시대의 도구는 대부분 돌을 깨뜨려서 만든 뗀석기들입니다. 나무나 동물의 뼈로 만든 도구들은 쉽게 썩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구석기시대 처음에는 큰 석기를 만들어 다용도로 썼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여러가지 쓰임새에 맞도록 작고 정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뒤 후기 구석기시대에는 전문적인 기능을 갖춘 여러 석기가 나타났습니다. 약 4만 년 전부터는 혼펠스, 규질혈암(셰일), 응회암 같은 고운 입자의 새로운 돌을 재료로 다듬어서 만든 돌날을, 2만 5천년 전 무렵부터는 작은돌날을 사용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구석기시대
구석기시대는 인류가 불을 이용하고 처음으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시대로 대략 250만 년 전부터 1만년 전까지의 시기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먹을 거리가 많은 곳을 찾아 무리를 이루어 옮겨 다니며 사냥과 채집을 했습니다. 동굴이나 강가에 일시적으로 머무르면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여러 도구를 만들어 썼습니다. 한반도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빙하시대라고도 불리는 플라이스코세 중기(약 78만~13만 년 전)로 추정됩니다. 그럼 신라의 중심지였던 경주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요? 아직까지 확실한 유적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경주에서 발견되는 석기나 울산과 포항의 유적으로 볼 때 후기 구석기시대(약 4만 ~ 1만 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돌을 갈아 도구를 만들다
신석기시대에는 돌의 일부 또는 전체를 숫돌에 갈아서 도구를 만드는 마제기법을 사용했습니다. 돌과 뼈 등을 두드려 치거나 깨뜨려서 도구를 만드는 타제기법을 사용하던 구석기시대와는 큰 차이입니다. 마제기법은 도끼, 칼 등 석기의 날을 세우거나 뼈 연모와 꾸미개를 만드는데도 널리 쓰였습니다. 울진 죽변리 유적에서는 간석기를 만드는 데 사용된 석재, 석재를 자르는 도구, 숫돌, 모룻돌 등이 함께 발견되어 당시의 석기 제작 과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신석기인은 무엇을 어떻게 먹었을까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사냥도 했지만 자원이 풍부한 강가나 바닷가에 살면서 고기잡이를 위한 다양한 방법과 도굴를 개발했습니다. 특히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 작살과 이음낚시를 사용해 고래, 상어 등의 바다 동물과 큰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또한 조개를 캐고 식물의 열매나 뿌리를 채집해서 생계를 꾸려 나갔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땅을 일구어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조와 피, 가장 같은 비교적 경작하기 쉬운 잡곡을 생산하면서 자연에 의존하는 생활에서 벗어나 자연을 이용하고 개발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농경의 시작으로 사람들은 좀 더 오랫동안 한곳에 머물러 살기 시작했으며, 땅을 일구고 이삭을 거두는 데 필요한 괭이, 낫 등의 농기구를 만드는 기술도 함께 발전하였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동해안 지역에는 고성 문암리를 비롯하여 속초, 양양을 거쳐서 여러지역에서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주거유적들이 남아 있다.
죽은 이를 위하여 무덤을 만들다
무덤은 죽음이나 사후 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확실하게 구석기시대의 무덤이라고 이야기할 만한 것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신석기시대에는 다양한 형태의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땅을 파고 시신을 묻는 경우가 가장 많았으며, 동굴을 무덤으로 이용하거나 뼈만 추려 토기 등에 넣기도 했습니다. 울진 후포리 유적에서는 지름 4m 안팎의 구덩이에 40구가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묻은 곳이 발견되었습니다. 20대 전후로 보이는 남녀의 뼈와 다듬거나 갈아서 만든 180여 점의 돌도끼, 대롱옥, 꾸미개 등을 함께 묻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신석기시대는 약 1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나면서 시작해 기원전 3000년 무렵까지로, 서서히 정착생활을 해 나가며 토기와 간석기를 만들던 시기입니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강가나 바닷가에 움집을 짓고 살면서 고기잡이, 사냥, 식물 채집, 초기 농사를 통해 먹을거리를 얻었습니다. 경주와 주변 지역의 대표 유적으로는 경주 봉길리 유적, 울진 후포리 유적과 죽변리 유적, 울산 세죽리 유적 등이 있습니다. 봉길리 유적에서는 움집이, 후포리 유적에서는 많은 사람이 묻힌 무덤이, 세죽리 유적에서는 일종의 생활 쓰레기장인 조개무지가 발굴되었습니다. 또 바닷가의 죽변리 유적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배의 조각과 노로 추정되는 나무 제품이 발견되었습니다.
전형적인 신석기시대 토기인 빗살무늬토기의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토기의 형태를 하고 있다. 빗살무늬토기는 빗과 같은 도구로 토기에 무늬를 새겨 넣었다. 음식물을 저장하는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흙으로 토기를 빚다
토기는 약 1만 년 전 진흙을 불에 구우면 단단해진다는 화확적 변화를 깨닫고 만든 인류 최초의 발명품으로 무엇을 담는 그릇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토기의 발명으로 끓이고 데치고 삶는 등 조리법이 다양해져 먹을거리의 범위가 한결 넓어지고 보관이나 운반이 손쉬워졌기 때문입니다. 신석기시대에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무늬의 토기를 만들었습니다. 특히 기원전 5천년 무렵 한반도 중서부 지역에 처음 나타난 빗살무늬토기는 한반도 전 지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습니다. 빗살무늬토기의 무늬는 표면 전체에 새겼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간략해졌으며,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면서 민무늬토기로 바뀌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청동기시대 경주는 형산강 주변과 안강, 영천 일대의 넓은 농토에서 벼농사를 하던 지역으로 한.중.일 해상교역로와는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있다. 벼농사가 본격화되었던 청동기시대에는 농경의례가 생기고 이를 관장하는 농사를 짓는 사람과 거둔 곡식을 나누어 주는 결정권을 가진 지배계층이 생겨난다 또한 곡식을 저장하기 위한 창고와 그것을 지키기 위한 방어시설 등이 나타난다. 한반도 청동기시대 유물인 요령식동검, 한국식동검, 반달돌칼, 간돌검 등이 경주와 주변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청동기시대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5세기 무렵 시작되었습니다. 청동기시대라고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민무늬토기, 간석기, 나무 제품 등이 주로 사용되었고, 청동기는 권위의 상징물이나 특별하고 중요한 의식을 위한 기몰로서 특정 계층의 사람만이 가질 수 있었습니다. 벼농사가 발달하면서 오늘날과 비슷한 마을이 생겨났과, 집단 내에서는 사회 계층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은 이런 청동기시대 사회를 바탕으로 등장하였습니다. 경주 곳곳에서도 청동기시대 마을 유적이 확인되었습니다. 신라를 건국했던 사람들의 조상은 이 무렵부터 경주 일대에 살면서 농사를 짓고 큰 마을을 이루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반달돌칼은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농업용 도구이다. 곡식의 이삭을 따는 도구로 몸체에 구멍이 뚫려 있고 이 구명에 끈을 꿰어 손에 걸어서 사용하였다. 청동기시대에는 간석기의 종류가 다양해지며, 형태가 정형화되었다. 청동기가 주로 무기와 의기 등 매우 제한적으로 만들어지 데 비해 간석기는 일상생활 도구로 널리 사용되었다.
간석기는 나무를 베거나 다듬는 데에 이용된 도끼, 대팻날, 끌 등의 공구와 곡식의 이삭을 따거나 베는데 사용된 반달칼, 낫 등의 농구 그리고 무기와 사냥도구인 칼, 화살촉 등이 있다. 특히 이 시기 대팻날, 끌, 홈자귀 등 목제 가공용 도구가 크게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목기가 폭넓게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농경사회로 들어서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와 벼농사를 포함한 농경을 중심으로 정착 생활이 이루어지면서 큰 마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낮은 언덕이나 평지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으며, 괭이나 도끼 등의 농기구로 논밭을 일구어 벼, 조, 수수, 콩, 보리 같은 농사를 지었습니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농경도구로는 곡물을 거두는 데 쓰던 반달돌칼과 돌낫이 있습니다. 돌뿐만 아니라 나무를 재료로 만든 농경 도구도 널리 쓰였습니다. 청동기시대 유적에서는 나무를 깎아 다듬는 데 쓰는 자귀, 끌, 대팻날 등이 많이 발견됩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요령식동검은 중국 본토의 동검과는 확연하게 다른 중국 랴오녕 지방과 한반도에서 출토되고 있다. 지배층 무덤인 탁자식 고인돌과 요령식 동검은 이 지역 문화를 특징짓는 유물이다.
요령식 동검은 한반도에서 기원전 8세기 무렵부터 나타났습니다. 이는 중국의 요령 지역에서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으로써, 고조선의 특징적 검이라는 점에서 ‘고조선식 동검’이라고도 부릅니다. 요령식 동검은 아랫부분이 넓고 동근 형태를 이루며, 가운데 좌우에 뾰족한 돌기가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또한, 검과 자루를 따로 만들어 조립하는 형식이로, 검과 자루가 한 몸인 중국식 동검과는 다릅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한국식 동검은 요령식 동검과 같이 검몸과 자루를 따로 만들었으나, 검몸이 직선화하고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과 마디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간돌검은 전국적으로 고루 출토되는 형태로 지배층의 권위를 나타내는 유물이다. 청동검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특이하게 한반도에서는 많이 출토되고 있으나 야요이시대 일본에서는 많지 않은 편이다.
달도끼는 바퀴날도끼라고도 부르며 청동기시대에 사용된 돌도끼이다. 실제 무기 등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별도끼와 함께 의식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배자가 나타나다
농경사회로 들어서면서 마을 사이에 경쟁이 벌어지고 먹을거리와 농사지을 땅을 둘러싼 싸움도 일어났습니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다툼을 조정하고 마을 사람들을 이끌어 줄 지배자가 필요해졌습니다.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무덤인 고인돌은 강력한 지배자의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수십 톤이 넘는 돌들을 옮겨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의 힘이 필요했고, 그런 일을 지휘하고 감독하던 지배자가 얼마나 대단한 영향력을 지녔었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또한 무덤에 넣은 청동검이나 큰 간돌검, 옥 장신구와 집터에서 발견되는 바퀴날도끼(달모양 도끼)나 톱니날도끼(별모양 도끼) 등은 지배자의 지위와 권력을 더래는 상징품(위세품)이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신라의 건국과 성장
신라역사관은 모두 4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신라의 탄생과 번영, 삼국통일 그리고 멸망에 이르는 천 년의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습니다. 이 곳, 제 1실은 아득히 오래된 구석기시대부터 6세기 초 신라가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하기 바로 전까지의 기간을 다룹니다. 자료나 기록이 전혀 없던 시절인 선사시대에 돌도끼를 쓰던 경주 일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집단을 이루고 사회.정치적으로 성장해 신라의 모태인 사로국을 세웠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한 신라가 기원전 57년 건국 한 이래로 크고 작은 전쟁과 외교를 통하여 이웃의 작은 나라들을 아우르면서 나라를 안정시키고 기틀을 다져 나간 과정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출처>
- 안내문, 국립경주박물관, 2024년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 위키백과,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