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초기 지배층의 무덤에서는 옥으로 만든 장신구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초기에는 푸른빛을 띠는 유리옥을 썼으나 나중에는 수정, 마노, 유리 등 다양한 소재로 화려한 장신구를 만들었다. 비약적인 성장을 했던 마립간 시기에는 금을 집중적으로 사용했다. 신라는 금속세공기술이 상당히 뛰어났던 것을 보이며, 제작수법이나 디자인 측면에서 상당히 우수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라인들이 즐겨했던 장신구로는 귀걸이,목걸이,금관을 비롯한 관식,팔찌와 반지 등이 있으며 현대인의 장신구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상감유리구슬 (보물)은 경주 황남동 대릉원 미추왕릉지구 C지구 4호 무덤에서 발견된 옥 목걸이다. 구슬에는 물속을 헤엄치는 오리 16마리와 두 사람의 얼굴이 아주 세밀하게 상감되어 있다.
상감유리구슬은 서아시아나 지중해에서 유행했던 제작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신라의 상감유리구슬과는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직수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 주인의 가슴 부위에서 출토된 것으로, 하나의 출에 묶여 있지만 재질, 형태, 크기, 색상 등이 다양합니다. 마노제의 곱은옥.다면옥.둥근옥, 벽옥제의 대롱옥, 수정제의 대추옥, 유리제의 둥근옥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색상은 붉은빛과 푸른빛, 초록빛 등을 띱니다. 특히 지름이 1.8cm에 불과한 둥근 유리구슬에는 사람 얼굴과 오리, 꽃나무 무늬 등이 정교하게 상감되어 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다양한 장신구를 걸치다.
중국 역사서인 <<삼국지>> <위서동이전> 한조에 따르면, 삼한 사람들은 금과 은이 아닌 옥을 보물로 여겨 이를 옷에 장식하거나 목이나 귀에 걸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로국 지배층의 무덤에서 나오는 장신구는 이 기록을 뒷받침하듯 모두 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로국 초기에는 푸른빛을 띠는 유리옥을 주로 썼으나 나중에는 수정, 마노, 유리 등 다양한 소재로 화려한 장신구를 만들었습니다. 옥은 모양에 따라 둥근 옥, 곱은옥, 다면옥 등이 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신라는 ‘금의 나라’로 알려질 정도로 금과 은으로 수 많은 꾸미개들을 만들었다. 금은 신라가 비약적인 성장을 하던 마립간시기에 집중적으로 사용되었다. 신라금관을 비롯하여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재들 중 상당수는 신라의 금제 꾸미개들이며 특히 금관은 세계적으로 출토되는 사례가 많지 않다고 한다.
신라인, 금을 사용하기 시작하다
8세기에 편찬된 일본의 역사책 <일본서기>는 신라를 가리켜 ‘눈부신 금과 은, 채색이 많은 나라’라고 표현했습니다. 금은 신라가 고대국가로서 비약적인 성장을 하던 마립간 시기(4~6세기)에 집중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마립간은 금관을 쓰고 금허리띠를 찼습니다. 금귀고리는 물론 금반지와 금팔찌를 꼈으며, 금장식과 구슬을 꿴 목걸이 및 가슴꾸미개를 했습니다. 신라에서 언제부터 금을 사용하고 어디에서 구했는지는 분명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4세기 중후반 무렵의 경주 월성로 가-13호 무덤에서 금으로 만든 아주 세련된 목걸이와 귀고리, 그릇 등이 나온 점으로 보아 4세기 초부터는 금을 사용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2024년)
경주 교동의 무덤에서 도굴되었다가 회수된 금관이다. 작은 관테에 3개의 나뭇가지 모양 장식이 있다. 다른 신라 금관에 비해 형태가 단순하면서 장식도 많지 않다. 현재까지 발견된 6개의 신라 금관 중 그 연대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주 교동의 한 무덤에서 도굴되었다가 1972년 압수된 금관입니다. 지름이 비교적 작은 관테에 3개의 나뭇가지 모양 장식을 세웠습니다. 이 장식은 전형적인 신라 금관의 산山자 모양의 나뭇가와는 달리 비교적 사실적인 나뭇가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관테나 장식의 가장자리에는 다른 금관들과는 달리 점무늬 또는 물결무늬가 새겨져 있지 않습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지금까지 발견된 6개의 신라 금관(금관총.금령총.서봉총.교동.천마총.황남대총 북분)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크기도 가장 작은 이 금관은 마립관 시기 초기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신라는 새로인 영입된 주변 지역은 지역 세력을 인정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지방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금동관을 비롯한 화려한 금제품들이 신라의 지방통치 방식을 잘 보여준다. 금동관이나 귀걸이, 큰칼 등 다양한 위세품들이 신분에 따라 지방 유력 세력에게 주어졌다. 신라는 지방 수장들의 권한을 인정해 주는 정치력으로 지배력을 강화하면서 고대국가로 성장했다.
신라양식 장신구, 5세기, 경상도 여러 지역
5세기 대 신라의 지방(부산, 창녕, 밀양, 대구, 의성, 김천, 상주 지역 등) 무덤에는 신라 양식의 장신구가 많이 나옵니다. 이 중 금동관과 흔허리띠는 권력을 상징하는 위세품으로, 중앙에서 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타 나머지 여러 금, 은, 유리 옥제품들도 정확한 유통과정은 아직 알 수 없지만 신라의 문화와 영역을 말해주는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신라는 정복한 지역을 어떻게 다스렸을까
신라는 마립간 시기에 새로이 영토로 편입한 주변 소국들을 어떻게 다스렸을까요? 관리를 직접 파견하는 대신, 그 지역 지배층의 후손들을 계속 지배자로 인정하는 간접 지배 방식을 썼습니다. 경주 시내의 무덤들에서 출토되는 금관이나 허리띠, 큰 칼 등과 똑같거나 비슷한 형태의 부장품들이 경주 이외의 무덤들에서도 출토되지만, 격식과 질이 떨어지는 점에서 간접 지배 방식을 취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중심 지역인 경주에서는 금관이 출토되지만, 다른 주변 지역에서는 금동관이 출토되는 것입니다. 금동관은 대구, 경산, 의성, 창녕, 부산뿐만 아니라 멀리 북쪽의 강릉에서도 발견되어 신라의 세력이 어디까지 미쳤는지 잘 보여줍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신라는 고구려, 백제, 가야뿐만 아니라 중국, 북방의 유목민족, 왜, 그리고 멀리 서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교류했다. 고구려의 도움받아 중국 전진에 사신을 보내고 광개토대왕의 도움을 받아 백제, 가야, 왜를 물리치는 등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호우’명 청동합을 비롯하여 네귀항아리, 금귀걸이 등이 고구려에서 전해진 유물들이다.
청동합에는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고구려에서 장수왕 3년(415)에 광개토대왕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으로, 이후 신라에 전해졌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고구려양식 유물, 5세기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금동신발, 은합, 금 굵은 고리 귀걸이, 연유단지는 신라와 고구려 간의 밀접한 관계를 잘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바닥에 크고 작은 사각못이 달려 있는 금동신발, 뚜껑에 ‘+’자 모양 손잡이가 달려 있는 은합, 작은 드림이 달려 있는 금 굵은 고리 귀걸이, 편평한 바닥의 황록색 연유단지는 모두 고구려에서 유행한 것 들입니다. 장기처럼 생긴 놀이판에서 이름을 따온 중국거울인 박국경, 쇠거울, 갈유병은 중국에서 고구려를 거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이웃 나라들과 소통하고 맞서다
마립간 시기 경주의 큰 무덤들에서는 외국산 진귀한 물품들이 종종 발견됩니다. 고구려.백제.중국.왜의 물품도 있지만 유리그릇처럼 저 멀리 서역에서 온 것들도 있습니다. 신라는 4세기 후반 고구려의 도움으로 전진에 처음으로 사신을 보냈으며, 백제.가야.왜를 물리치는데도 고구려의 도움을 받는 등 5세기 중반까지는 고구려와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외래품들은 고구려의 물품이거나 고구려를 거쳐 들어온 것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가운데 19대 눌지 임금 때인 433년에는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백제와 손을 잡기도 합니다. 고구려의 간섭을 물리친 5세기 후반에는 전쟁에 대비해 성을 쌓는 등 신라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외교와 전쟁을 병행하는 양면 전략을 썼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출처>
- 안내문, 국립경주박물관, 2024년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 위키백과,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