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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 황금의 나라] 마립간시기 거대한 고분

신라의 고분은 초기 신라식 덧널무덤에서 통일신라의 굴방무덤까지 다양한 형식의 무덤이 존재한다. 그 중 마립간 시기(5~6세기)에 경주 도심에 조성된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를 대표하는 무덤의 형식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은 덧널 위에 강돌을 높이 쌓아서 작은 동산을 만들었던 도굴이 어렵기때문에 금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스키타이를 비롯하여 중앙아시아, 몽골 등에서 볼 수 있는 무덤의 형식으로 함께 묻은 금은으로 만든 화려한 장신구들로 함께 화려한 황금문화를 보여주며, 같은 시기는 아니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많다.

<금관총 금관(국보)>

금관총은 1921년 경주 도심에서 주택공사를 하던 중 금관이 우연히 발견되어 신라고분의 존재를 알렸던 곳이다. 금관총은 돌무지덧널무덤으로 길이 48 m, 높이 13 m 규모로 대릉원 고분 중 중간 정도이다. 금관 및 금제관식(국보)과 금제 허리띠(국보)를 귀걸이.팔찌 등 장신구와 토기류 등 다양한 종류의 껴묻거리가 출토되었다. 2015년에는 금관총에 대한 발굴조사가 다시 실시되어 ‘이사지왕도(尒斯智王刀)’라는 명문이 새겨진 칼집 끝 장식을 비롯한 새로운 부장품이 발견되었다.

<금관총 목관 내 출토된 유물, 경주 금관총, 신라 5세기>

금관총 금제 허리띠(국보)는 금관과 하나의 세트를 구성하고 있는 유물이다. 허리띠는 원래 천이나 가죽에 덧대었던 것인데 금속제 장식만 남아 있으며, 드리개는 허리띠에 늘어뜨린 장식품을 말한다. 허리띠는 길이 109 cm로 39개의 순금제 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드리개는 17개로 옥(玉)같은 장식품과 칼, 향낭, 물고기 등을 표현하고 있다. 

<금관총 금제 허리띠(국보)>
<1 금동 물고기 장식>
<2 귀걸이>
<2 귀걸이>
<2 귀걸이>
<3 관꾸미개, 국보>
<4 금.은 장식>
<5 곱은옥>
<6 청동 방울>
<7 금동 목가리개>
<8 말띠꾸미개>
<9 말띠드리개>
<10 금장식><11 금달개>
<금동신발>
<경주 대릉원 금관총>

금관총, 금관을 처음 발견하다. 1921년 9월 어느 날, 경주의 중심가였던 노서동에서 집을 짓고 있었습니다. 집주인은 집터의 낮은 곳을 고르기 위해 주변 언덕에서 흙을 파내어 썼습니다. 그때 아이들이 이 흙 속에서 구슬들을 발견하여 가지고 노는 것을 지나던 일본 경찰이 우연히 보았고, 흙을 파낸 언덕에서 유물들을 확인했습니다. 그 언덕은 바로 무덤이었습니다. 무덤을 조사한 결과 뜻밖에도 금관을 비롯한 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무덤에서 처음으로 금관이 나와 ‘금관총’이라고 이름하였습니다. 봉분 크기는 지름 약 45m, 높이 약 12m로 추정하며 구조는 돌무지덧널무덤입니다. 금관총은 475년 ~500년 사이에 축조된 무덤으로 금관이 출토되었지만 무덤의 규모나 입지 등으로 볼 때 왕릉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2013년 유물을 정리하던 중 고리자루 큰칼의 칼집 끝에서 도구로 새겨 쓴 글자를 확인하였다. 판독결과 ‘尒斯智王(이사지왕)’이라는 글자였다. 또 칼 손잡이 부근에서 ‘尒(이)’자와 이사지왕이 새겨진 칼집 끝 뒷면에서도 ‘十(십)’자가 드러났다. 금관총의 또 다른 칼에서도 ‘八’, ‘十’, ‘尒’라는 글자가 추가로 발견되었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 중 왕의 이름이 새겨진 유물은 금관총 출토 고리자루 큰칼이 유일하다.

<‘이사지왕’글자가 새겨진 고라자루 큰칼, 신라 5~6세기, 경주 금관총>
<글자가 새겨진 칼집 끝 부분>
<칼손잡이>

금관총과 이사지왕
금관총에 묻힌 이는 머리에 금관을 쓰고, 귀걸이, 목걸이, 허리띠, 팔찌, 반지 등을 차고 있었습니다. 머리 위쪽 껴묻거리를 담은 상자 속에는 그릇, 장식품, 말갖춤, 무기 등 많은 보물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2013년 금관총에서 출토한 고리자루 큰칼의 보존처리를 진행하면서 칼집 끝에서 ‘이사지왕’이라는 글자가 확인되었습니다. ‘이사’는 이름, ‘지’는 이름 끝에 붙는 존칭이며, ‘왕’은 말 그대로 왕을 의미합니다. 신라의 무덤에서 글자가 새겨진 유물은 여러 점 출토되었지만 왕의 이름이 새겨진 유물은 금관총에서 출토된 큰칼이 유일합니다. 이사지왕이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금관총에서 출토된 유물로 볼 때 500년 전후에 사망한 신라의 유력자 중 한사람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경주 도심에 위치한 고분들은 일제강점기 도심 주택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금관으로 인해 화려한 황금문화의 존재가 알려졌으며, 봉황대라 불렸던 노동리, 노서리 고분들은 일제강점기에 상당수 발굴이 이루어졌다. 해방 이후 고구려로부터 받은 호우(壺杅)라는 글자가 적힌 청동그릇이 발견된 호우총이 처음으로 발굴.조사되었다. 이후 70년대 경주고도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천마총과 황남대총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찬란한 신라의 황금문화가 다시 한번 조명받게 되었다.

<봉황대와 금령총(왼쪽), 식리총(오른쪽)>
<경주 시가지 고분군>

왜 거대한 무덤을 만들었을까?
경주의 중심지에는 작은 산봉우리처럼 보이는 큰 무덤들이 있습니다. 이 무덤들은 4세기 중반에서 6세기 중반까지 만들어진 무덤으로 구덩이를 파고 나무 덧널을 만들어 그 안에 시신과 껴묻거리를 넣은 뒤 덧널 주위와 위를 돌로 덮고 다시 흙을 입혀 다진 돌무지덧널무덤입니다. 신라 사람들은 왜 이렇게 큰 무덤을 만들었을까요? 박씨, 석씨, 김씨가 교대로 왕위를 이어나가던 신라는 마립간이 등장한 이후 김씨가 왕권을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맏아들 중심의 왕위 계승 원칙이 수립되어 왕권이 제도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왕권이 강화되어 가는 와중에 거대한 무덤을 만들고 온갖 호화스러운 물품을 가득 넣어 장례를 치르면서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왕의 권위를 과시하였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경주 대릉원 98호 무덤인 황남대총은 길이 120 m의 거대한 쌍분인 이 무덤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조사 되었다. 먼저 조성된 남분이 왕의 무덤이며, 나중에 덧붙여진 북분은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나무기둥을 줄지어 세웠던 기둥구멍과 기둥 사이를 연결했던 목재의 흔적이 발견되어 목조가구를 먼저 설치하고 돌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북분에서는 금관, 남분에서는 금동관을 비롯한 수많은 껴묻거리들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들은 신라 고분 중에서 그 수량이 많으면서 수준도 높다.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유물들도 많으며 서역이나 중국, 일본 등에서 수입된 것도 있다. 4~5세기 마립간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주 대릉원 989호 무덤 황남대총>

신라 왕릉, 황남대총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큰 무덤이라는 뜻의 황남대총은 두 개의 무덤이 남북으로 길게 맞붙어 있는 무덤입니다. 남북 길이가 120m, 동서 길이는 80m입니다. 남쪽 무덤을 먼저 만들고, 북쪽 무덤을 나중에 덧붙여 만들었습니다. 남쪽 무덤에는 남자, 북쪽 무덤에는 여자가 묻혀있었습니다. 무덤의 크기가 주변 무덤들을 압도할 정도로 크고, 껴묻거리는 모든 면에서 최상급이며, 묻힌 이는 화려한 황금 장신구로 치장하고 있어 신라의 최고 통치자였던 마립간과 그 부인, 즉 왕와 왕비의 능이 분명해 보입니다. 황남대총은 5세기 초부터 중후반 사이에 만들어졌다고 보는데, 금관을 비롯한 수만 점의 껴묻거리는 5세기 대 발전하는 신라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특이한 점은 마립간(왕)이 묻힌 남쪽 무덤에서 금동관이 나오고, 부인(왕비)이 묻힌 북쪽 무덤에서 금관이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경주 황남대총 북분, 신라 5세기>
<1 장식큰칼>
<2 허리띠>
<3 ‘부인대’명 은 허리띠끝장식>
<4 유리 옥>
<5 방추차형석기>
<6 은 굽다리접시><7 은 사발><8 은 합>
<9 금 굽다리접시, 보물>
<10 금 사발>
<11 청동 긴목항아리>
<12 청동 솥>
<13 청동 자루솥>
<14 토기반과 뚜껑굽다리접시>

금관을 쓴 마립간의 부인
황남대총 북쪽 무덤에는 마립간의 부인, 왕비가 묻혀 있었습니다. 왕비는 금관을 쓰고 있었는데 나뭇가지 모양 세움장식 금관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입니다. 왕과 마찬가지로 왕비를 위해서 이승 이후의 삶을 꾸려 나가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황금으로 된 장신구,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과 먼 나라에서 온 유리그릇 등 귀한 물품을 넣었습니다. 마립간이 묻힌 남쪽 무덤에는 딸린 덧널이 있지만 왕비를 위해서는 으뜸 덧널 안 왕비의 머리 쪽에 껴묻거리를 두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경주 황남대총 남분, 신라 5세기>
<1 고리자루큰칼>
<2 금동 관모>
<2 금동 관모>
<2 관모 장식>
<2 관모 장식>
<3 허리띠와 꾸미개>
<4 말안장꾸미개><5 말띠드리개>
<6 장식칼>
<7 팔뚝가리개>
<8 허리띠>
<9 신발>

마립간을 모시다
황남대총 남쪽 무덤에 묻힌 이는 금허리띠와 화려한 큰칼을 차고 있었는데, 금관이 아닌 급동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몸에는 금과 옥으로 만든 여러 장신구를 둘렀고, 머리맡에는 진귀한 보물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바단벌레로 장식한 금동제허리띠, 금동제팔뚝가리개 등은 널뚜껑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널 바깥 안쪽 석단에서는 젊은 여자의 치아와 두개골 일부가 나왔는데 저승에서 마립간의 시중을 들 소녀를 함께 묻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경주 황남대총 남분, 신라 5세기>
<1 금동관 조각>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국보)는 곱은옥 모양의 금 구슬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3개씩의 금 구슬을 연결하였다. 금사슬, 금 구슬, 곱은옥이 비례와 구성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간결하면서도 세련미가 돋보인다. 푸른색의 곱은옥을 사용하지 않고 금으로 곱은옥 모양을 만든것이 특이한 유물이다.

<2 드리개><3 목걸이, 국보>
<4 가슴걸이>

‘황남대총 남분 금제허리띠'(보물)는 허리띠 길이는 99 cm이며 띠드리개는 작은것 18 ~ 22 cm, 큰 것은 79.5 cm이다. 허리띠는 문양이 뚫린 사각형 판과 나뭇잎 장식을 연결하였다. 장식 아래에는 7줄의 띠 드리개가 있다. 금관과 함께 출토된 다른 금제허리띠에 비해 형태는 단순하고, 매달린 드리개 수와 종류도 적다.

<5 금 허리띠와 꾸미개, 보물><6 세고리장식큰칼><7 귀걸이><8 금동 통형꾸미개>
<9 빗장쇠>
<경주 황남대총 남분, 신라 5세기>
<1 청동 세발솥>
<2 금 사발><3 은 사발><7 금동 투조장식판>
<4 은 합>
<5 은 손잡이 달린 항아리><6 은 국자>
<8 은 삼각형장식>
<12 은 허리띠꾸미개><13 귀걸이>
<9 유리 구슬>
<10 곱은옥><11 옥>

황남대총 남분에 묻힌 사람은 누구일까
왕남대총 남쪽 무덤은 지름이 80m에 달하는 신라 무덤 가운데서도 초대형입니다. 무덤을 축조한 때는 대략 5세기 전반 또는 중반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에 해당하는 마립간으로나는 나물마립간, 실성마립간, 눌지마립간이 있습니다. 세 마립간 가운데 한 사람이 황남대총 남쪽 무덤에 묻혔을 가능성이 높지만, 현재로서는 누구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고분에 출토된 유물들은 대부분 껴묻거리로 묻혔는데 무덤 주인의 권위와 지위를 말해 주고 있다. 마립간 시기 신라 고분에서도 금관을 비롯한 장신구, 그들이 사용했던 무기류, 일상생활에 사용했던 토기를 비롯하여 금.은.유리 등으로 만든 그릇 등 다양한 형태의 물품들을 출토되고 있으며 이들 유물들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유추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마립간 시기 이후 불교가 새로운 국가이념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무덤의 껴묻거리는 형태는 간소화되고 수량 또한 많이 줄어들었다.

<황남대총 남분 출토 유물, 신라 5세기>
<1 말안장꾸미개><2 안장 장식구><3 발걸이><4 말띠드리개>
<3 발걸이>
<4 말띠드리개><5 재갈><6 띠고리>
<7 말띠꾸미개>
<8 유리구슬>
<8 유리구슬>
<1 굽다리접시>
<2 뚜껑>
<3 청동 긴목항아리><4 청동 쟁반><5 청동 시루><6 청동 솥><7 청동 자루솥><8 청동 합><9 청동다리미>
<10 긴목굽다리항아리><11 긴목항아리><12 그릇받침>
<13 뚜껑달린 작은 굽다리단지><14 뚜껑접시><15 작은 굽다리단지>
<16 손잡이 달린 잔><17 항아리>
<18 큰항아리>
<18 큰항아리><1 굽다리접시>
<18 큰항아리><2 뚜껑>
<18 큰항아리><12 그릇받침><1 굽다리접시>
<19 세발솥>
<19 세발솥>
<1 쇠를 두드려 만든 도끼><2 쇠스랑><3 삽>
<4 화살촉>
<5 쇠를 틀에 부어 만든 도끼>
<6 투겁창>
<7 투겁창>
<8 고리자루칼>
<9 물미><10 창><11 덩이쇠><12 철괴>
<11 덩이쇠><12 철괴>

마립간을 위해 온갖 재물을 채우다
황남대총 남쪽 무덤의 주인인 마립간을 위해 커다란 딸린덧널을 설치하고 온갖 재물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 창고를 가득 채운 수많은 물건은 마립간이 가진 권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군사력을 드러내는 무기, 생산력을 보여주는 농.공구, 경제력을 나타내는 덩이쇠, 수를 셀 수 없을 만큼의 토기는 마립간의 특별한 지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음식이 가득했을 큰항아리는 45점이 있습니다. 철제 무기로는 큰칼, 창, 화살촉 등이 있고, 농.공구는 삽날과 쇠스랑 등이 있습니다. 덩이쇠는 10의 배수 단위로 묶어서 최소 1,330개를 넣었습니다. 큰항아리 위에 말을 부릴 때 쓰는 여러 가지 연장이나 말에 딸린 꾸미개, 그릇 등을 켜켜이 쌓았습니다. 말갖춤은 적어도 7벌을 넣었는데 금동이나 은 등 귀금속으로 꾸민 것도 4벌이나 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고대국가, 신라
마립간이 등장하다
신라는 4세기 중반에 낙동강 동쪽의 작은 나라들을 아우르며 고대국가의 기틀을 갖추어 나갑니다. 또한 고구려, 백제, 가야, 왜 등 주변 나라와 전쟁을 벌이고 외교 관계를 맺으며 계속 발전합니다. 이때가 바로 마립간 시기입니다. 마립간이라는 최고 지배자의 이름은 17대 내물 임금부터 22대 지증 임금 4년(503) 왕으로 칭호를 바꿀 때까지 쓰였습니다. 마립간은 으뜸을 뜻하는 마립과 왕을 뜻하는 간干.칸hkan이 합쳐진 말로 최고의 우두머리, 즉 ‘왕중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이 시기에는 마립간의 권력을 과시하듯 거대한 봉분을 올린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 지금의 경주 시내와 그 주변에 만들어졌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금관 등 수많은 신라의 황금 문화재는 바로 이 돌무지덧널무덤에 함께 묻힌 것들입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출처>

  1. 안내문, 국립경주박물관, 2024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3. 위키백과,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