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화려한 황금문화는 일제강점기에 경주 금관총에서 금관의 출토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신라의 황금문화를 대표하는 유물로는 금관을 들 수 있는데 신라고분에서는 5점의 금관이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되었으며, 도굴된 것을 압수한 1점을 포함하여 총 6점의 금관이 남아 있다. 이는 세계에서도 가장 많은 수량이라고 한다. 신라 금관은 금판을 오려 붙여서 만든 것으로 아래쪽에는 관테가 있고 위쪽에는 나뭇가지와 사슴뿔 모양을 하고 있는 세움장식으로 구성된다. 신라의 황금문화는 중앙아시아 스키타이에서 기원하 몽골의 선비족을 거쳐 전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금관의 형태는 시베리아와 동아시아의 샤머니즘 정신세계가 반영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천마총 금관'(국보)은 높이는 32.5cm의 금관으로 ‘황남대총 북분 금관'(국보)과 함께 신라 금관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머리를 두르는 관 테 위에 山자 모양이 3줄, 뒷편 양쪽에 2개의 사슴뿔 모양의 가지를 세워 올려 놓고 있다. 원형 금판과 굽은 옥으로 장식하고 있으며 금실을 꼬아 장식을 꼼꼼히 연결하여였다. 양쪽에 2개의 드리개가 달려 있다.
신라 금관
금관은 최고 통치자인 마립간(왕)과 그 일족의 상징입니다. 둥근 금테 위에 3개의 나뭇가지모양 장식과 2개의 사슴뿔모양장식을 세운 것이 신라가 창안한 고유 의장입니다. 나뭇가지와 사슴뿔에는 하늘과 땅,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영혼의 전달자라는 관념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금관은 마립간(왕)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역사 기록에 나오는 마립간은 모두 여섯 명뿐인데, 지금까지 금관이 나온 무덤들과 비슷한 대형 돌무지덧널무덤들이 아직 발굴되지 않은 채 상당수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황남대총 북쪽 무덤에 묻혀 있던 사람도 여자였습니다. 서봉총과 금관초으이 주인도 여자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금관이 나온 신라의 능묘
신라 금관은 지금까지 모두 6점이 발굴 또는 발견되었습니다. 1921년 금관총에서 금관이 처음 출토된 뒤, 1924년 금령총, 1926년 서봉총, 1973년 천마총, 1974년 황남대총 북쪽 무덤에서 잇따라 발굴되었스빈다. 그리고 1972년에는 경주 교동의 한 무덤에서 문화재를 노린 도굴꾼에 의해 초기 형태의 작은 금관이 발견되었습니다. 가장 오래된 금관은 둥근 금테 위에 1단으로 된 나뭇가지 모양 장식을 3개 세운 간소한 형태로 교동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황남대총 북분, 금관총, 서봉총의 금관은 나뭇가지모양 장식이 3단으로 5세기대의 금관들이빈다. 6세기대의 금령총.천마총의 금관은 나뭇가지모양 장식이 4단으로 바뀌며 더욱 화려해집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천마총 관모'(국보)는 고깔모양의 금으로 만든 관모로 금관 안에 쓰는 모자이다. 높이 16 cm, 너비 19 cm로 모양이 다른 금판 4매를 연결하여 만들었다. 머리에 쓴 천에 꿰매거나 고정 후 썼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신라인의 관식문화를 보여주는 유물로 상당히 화려하다. 여러가지 무늬를 화려하고 정교하게 제작한 것으로 신라 관모 중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천마총 금제관식'(1978-2, 보물)은 큰 새가 날개를 펴고 있는 모양으로, 아래에는 방패모양 장식이 달려 있다. 좌우 날개에는 넝굴무늬를 파놓았으며, 표면에는 지름 0.7 cm 크기의 원판 400여 개를 연결하였다. 매우 화려해 보이는 유물로 실제로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삼국시대 신라인의 관식문화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천마총 금제관식'(1978-1, 보물)은 높이 23 cm, 너비 23 cm로 가운데 새머리같은 둥근 부분이 있고 좌우에 날개모양이 있다. 머리 부분에는 2개, 좌우 날개에는 5개씩 나뭇잎 모양 구명이 있다. 일반적 새날개 모양 관식에 비해 크기가 작은편이다. 고깔모양의 관모 앞부분에 꽂아서 사용했다고 생각되지만 실제 용도는 분명하지 않다.
신라의 관
신라에는 금.은.금동으로 만든 머리띠 형태의 관, 고깔모양의 관, 새날개모양의 관장식 등 다양한 재질과 형태의 관이 남아 있습니다. 이 가운데 금으로 만든 관은 경주 시내에 있는 돌무지덧널무덤에서만 출토되며, 금동으로 만든 관은 경주와 주변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금으로 만든 관은 최고 권위를 가진 자만이 제한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그 어떤 유물보다 착용자의 신성성과 정통성을 드러내는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족보다 낮은 귀족 또는 지방의 지배자들에게는 금관이 아닌 금동관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천마총 목걸이’는 내부 관(棺)에서 출토된 것으로 가슴 윗부분에 있던 것이다. 금, 은, 비취, 유리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서 만든 화려한 장식구이다. 목걸이는 6줄로 이어져 있는데 좌우와 가운데에는 큰 굽은 옥이 매달려 있다. 삼국시대 6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다름 무덤에서 출토된 목걸이에 비해 상당히 화려하다.
천마총, 절정을 이어가다
1970년대에 들어와 나라에서는 대릉원을 조성하여 역사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고자 신라 무덤을 발굴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첫 대상은 황남동 155호 무덤으로 1973년 4월 역사적인 발굴을 시작했습니다. 봉분의 규모는 밑지름이 47m, 높이가 13m였습니다. 봉분 윗부분을 7m 가량 걷어내자 지름 23m, 높이 6m의 돌무지가 나타났습니다. 그 아래 나무 덧널이 있고, 그 안ㅇ;ㅔ 널과 껴묻거리 상자가 놓여 있었습니다. 무덤의 주인은 금관, 귀걸이, 옥으로 만든 가슴걸이, 금제 허리띠, 장식큰칼 등을 착용하고 묻혀 있었습니다. 껴묻거리 상자 안에는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두 장의 말다래가 들어있었습니다. 말의 배 양쪽에 늘어뜨렸던 말다래에는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흰말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천마총’은 1500년 전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이 천마도 발굴을 기념해 붙여진 이름입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신라 마립간 시기(5~6세기)에 조성된 경주 도심의 고분들에서는 금관 외에도 금귀걸이, 금제드리개, 금반지, 금팔찌 등 다양한 장신구들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무덤에 묻을 껴묻거리로 제작된 것도 있겠지만, 무덤의 주인들이 생전에 실제 사용했던 것도 상당히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출토된 장신구들은 제작수법이 상당히 정교하며 디자인이나 조형미 등은 오늘날 현대적인 감각의 장신구에 비해서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우수하다. 동시대 백제나 고구려에서도 화려한 장신구들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돌무지덧널무덤이라는 신라의 매장방식이 도굴을 어렵게 하여 오늘날까지 신라의 유물들이 많이 남아 있는 측면도 있다.
금팔찌와 금반지를 끼다
팔찌는 귀걸이와 함께 인류가 사용한 장신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신라의 팔찌는 처음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가 5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새김눈을 장식한 것이 유행했습니다. 6세기에는 둥근 돌기를 만들거나 돌기에 유리를 끼워 장식했습니다. 반지는 한 점에서 여러 점까지 출토되며, 때로는 무덤 주인의 열 손가락에 모두 끼운 예도 있습니다. 반지는 금판이나 은판을 둘글게 말아 간단하게 만든 것도 있고 유리구슬을 끼워 장식한 것도 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금관에 드리개를 달다
드리개는 귀걸이와 유사한 형태이나 발굴 정황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금관테으 아래쪽 좌우에 매달아 금관의 화려합을 돋보이게 했습니다. 드리개는 중심고리 아래에 샛장식과 드림이 드리워진 형태입니다. 샛장식은 동일한 장식 여러 개를 이어서 만들었으며, 금실로 달개들을 촘촘히 붙였습니다. 샛장식 끝에는 펜촉모양의 금판이나 굽온옥으로 만든 드림을 붙였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귀걸이
신라의 귀걸이는 매우 정교하고 화려해 신라 사람들의 미적 감각과 수준 높은 금세공 기술을 잘 보여 줍니다. 귓볼에 다는 고리의 굵기에 따라 굵은 고리와 가는 고리로 나뉩니다. 5세기에서 6세기로 갈수록 화려하고 복잡한 디자인으로 바뀌며, 아주 작은 금 알갱이들을 촘촘히 붙여 장식하는 누금 기술로 만든 것과 여러 색깔의 옥을 박아 넣은 것들도 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신라의 황금문화
오랜 시간 변치 않고 빛을 발하는 금은 예로부터 영원함과 고귀함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마립간이 통치하던 5세기부터 6세기 전반까지 신라는 고대 국가로서 비약적인 성장을 하였고 이 150년간이 신라 황금문화의 전성기였습니다. 관을 비롯하여 허리띠, 귀걸이, 팔찌, 반지, 목걸이 등 각종 장신구뿐만 아니라 무기와 말갖춤, 그릇 등을 만드는데 금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각종 금제품을 무덤 안에 넣어 죽은 이의 영원한 안식과 내세에서의 고귀한 삶을 기원하고, 한편으로는 죽은 이의 장례를 치르는 산자의 위세를 나타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출처>
- 안내문, 국립경주박물관, 2024년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 위키백과,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