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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 신라의 번영] 주변국을 복속하다

6세기에 신라는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갖추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이 시기에는 소갈이와 수리시설의 보급을 통해 농업생산력을 발전시키고 나라이름을 ‘신라’라 칭하고 ‘왕王’이라는 왕호를 사용하였다. 율령을 제정하고 불교를 공인하는 등 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군사적인 경쟁력을 갗추면서 진흥왕때는 영토가 한강유역과 함경도 동해안 일대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 시기 국가로서 신라의 모습은 여러 유적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문자를 새겨놓은 비석들이다. 경주박물관에서는 경주 지역에서 세워졌던 여러 비석들을 볼 수 있다. 신라 화랑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임신서기석’, 성을 쌓으면서 책임 등을 기록해 놓은 ‘남산신성비’,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 비’ 등이 있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국보)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라비이다. 모양이 일정치 않은 돌에 203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글자가 뚜렷하게 남아 있어 대부분 판독이 가능할 정도이다. 신라 관등제 성립과정, 신라 6부의 내부구조, 신라의 지방통치와 분쟁 해결절차 등 다양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내용을 알려주고 있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 신라 6세기 501년, 국보>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재물 소송과 판결을 기록한 비석입니다. 비석에는 과거에 모단벌이라는 사람의 재물을 다른 사람이 빼앗았는데, 그 진상을 조사하여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고,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비석의 제작 시기는 첫머리에 적힌 신사라는 간지와 비문 내용, 표기법 등으로 볼 때 지증왕 2년(501년)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포항 냉수리 신라비(503년)보다 2년 앞선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신라 비석입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남산신성비’는경주 남산에 신성을 쌓고 건립한 비석이다. 비문에는 성을 서약 부분으로 시작하여 성을 쌓은 것과 관련된 사람들과 공사한 거리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까지 10개가 발견되었는데 경주박물관에는 그 중 9개가 전시되어 있다. 그 중 제1, 제2, 제3, 제9비가 비석으로 완전형태를 갖추고 있다.

<남산신성비>
<경주 남산신성 제1비, 경주 탑통, 신라 6세기 591년>
<경주 남산신성 제2비, 경주 탑동, 신라 6세기 591년>
<경주 남산신성 제3비, 경주 배반동, 신라 6세기 591년>
<경주 남산신성 제4비, 경주 탑동, 신라 6세기 591년>
<경주 남산신성 제5비, 경주 사정동, 신라 6세기 591년>
<경주 남산신성 제6비, 경주 탑통 신라 6세기 591년>
<경주 남산신성 제7비, 경주 배동, 신라 6세기 591년>
<경주 남산신성 제8비, 경주 배동, 신라 6세기 591년>
<경주 남산신성 제9비, 경주 배동, 신라 6세기 591년>

경주 동쪽을 방어하던 명활성을 축성하면서 세운 비석으로 1988년 인근 포도밭에서 발견되었다. 비석은 높이 69.8cm 정도이며, 땅에 묻혀 있어 보존상태가 좋다. 비석에는 총 148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첫머리에 ‘신미년’이란 글자가 있어 남산신성비로 여겨졌지만 그 구성과 내용이 다르고 내용 등으로 볼 때 명활성을 쌓으면서 세운 비석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주 명활산성비, 경주 보문동, 신라 6세기 551년>

성을 쌓아 전쟁에 대비하다.
신라는 6세기 무렵 백제와 고구려를 상대로 전쟁을 하면서 두 나라의 침략에 대비한 수도 방어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진흥왕은 551년 경주 명활산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해 수도 방어의 요지로 삼고자 했습니다. 명활산성은 405년 동해안으로 침략해 온 왜군을 막아 내는 근거지였으며, 자비 마립간이 한떄 피난처로 삼았을 정도로 중요한 성곽이었습니다. 진평왕은 백제와 왜의 침략에 대비해 수도인 경주 주변에 산성을 새로 쌓고, 오래된 산성을 계속 정비했습니다. 591년 남산에 산성을 처음 쌓았고, 2년 뒤에는 명활산성을 고쳐 쌓았으며 경주 서쪽의 선도사네 서형산성을 새로 쌓아서 적의 침입을 막았습니다. 남산에 성을 쌓은 내용을 새긴 비석은 지금까지 10개가 발견되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임신서기석’(보물)은 돌의 길이는 34.0cm 정도이고 앞면에 74자를 새겼다. 글자가 또렷히 남아 있어 판독에 이견이 없다. 당시 젊은 학생들이 다양한 고전을 읽으면서 공부를 했다는 내용도 있다.

<임신서기석, 경주 석장동, 신라 6~7세기, 보물>

비석의 첫 머리에 ‘임신’이라는 간지와 충성을 서약하는 긁귀가 보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1934년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 석장사 터 부근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임신년이라는 간지가 어느 해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비문 내용 중에는 신라 국학의 주요한 교과목이 등장하는 점이나 화랑도의 근본정신을 강조한 점 등을 들어 화랑도가 융성하였던 시기의 임신년인 552년 또는 612년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신라 융성기에 청소년들의 강렬한 유교도덕 실천사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신라는 확대된 영토를 지배하기 위해 지방관과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각 지역에 남아 있는 돌방무덤이나 토기에서 신라문화의 확산된 모습들을 살펴볼 수 있다. 

<유리목걸이, 울릉도 천부동, 통일신라 7~8세기>
<금동 옥, 울릉도 천부동, 통일신라 7~8세기><금동 방울, 울릉도 천부동, 통일신라 7~8세기>
<장군, 울릉도 천부동, 통일신라 9~10세기>
<굽다리 항아리, 강릉 병산동, 신라 6세기>
<각진 병, 울릉도 천부동, 통일신라 9~10세기>
<굽다리 바리, 울릉도 천부동, 통일신라 9~10세기>
<각진 병, 울릉도 천부동, 통일신라 9~10세기>
<굽다리접시, 강릉 병산동, 신라 6세기>
<굽다리접시, 강릉 병산동, 신라 6세기><뚜껑접시, 신라 6세기>

실직주에 군주를 파견하고 우산국을 복속하다
지증왕은 중요 군사 지역을 중심으로 행정 구역을 정비하고, 군주를 파견해 본격적인 지방 통치를 시작합니다. 먼저 실직국(지금의 삼척)을 신라의 행정 구역인 실직주로 삼고 이사부를 군주로 파견하여, 고구려의 침략에 맞서 동해안 일대를 지키게 하였습니다. 또 512년에 이사부를 보내 동해의 우산국을 복속했습니다. 지증왕이 시작한 동해안 개척은 신라가 발전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굽다리 곧은목 항아리, 금관가야양식 토기, 김해 삼계동, 가야>
<뚜껑 있는 굽다리 접시, 금관가야양식 토기, 김해 삼계동, 가야>
<굽다리 긴목 항아리, 신라양식 토기, 김해 삼계동, 가야>
<긴목 항아리><짧은목 항아리, 신라양식 토기, 김해 삼계동, 가야>
<굽다리 접시, 신라양식 토기, 김해 삼계동, 가야>
<금귀걸이>
<쇠뿔모양 손잡이 항아리>
<뚜껑 있는 굽다리 접시>
<굽다리접시>
<화로모양 그릇>

금관가야를 병합하다
금관가야는 중국과 왜로 이어지는 바닷길 무역을 통하여 성장하였으며, 4세기 대까지 백제, 왜와 연합해 신라를 공격할 정도로 강성했습니다. 그러나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고 국력이 크게 약해졌습니다. 5세기 대 이후에는 국가의 명맥만 겨우 유지했을 뿐, 가야의 주도권은 대가야로 넘어갔습니다. 법흥왕은 금관가야의 땅을 차지하려고 국왕 구해를 설득해 532년에 마침내 항복을 받았습니다. 이로써 신라는 남쪽 지역의 위협을 없애고 금관가야의 중개 무역을 차지하였습니다. 훗날 금관가야 국왕이었던 구해의 셋째 아들 김무력과 증손자 김유신은 신라 장군으로서 뛰어난 활약을 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긴목 항아리>
<긴목 항아리>
<뚜껑있는 접시>
<짧은목 항아리>
<굽다리 긴목 항아리>
<뚜껑 있는 짧은목 항아리>
<뚜껑 있는 굽다리접시, 가락바퀴, 신라양식 토기, 고령 지산동, 가야>

대가야를 정복하다
대가야는 4세기 후반 이후 백제의 지원으로 가야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합니다.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까지는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지만, 한때는 영남 서부 지역과 호남 동부 지역까지 영역을 넓히기도 했습니다. 554년에 백제 성왕은 신라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으려고 대가야의 도움을 받아 신라를 공격했습니다. 신라와 백제는 관산성에서 치열하게 싸웠으나 결국 백제가 크게 패했고 이에 대가야의 세력도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그로부터 8년 뒤인 562년, 신라 진흥왕이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신라는 현재의 영남 지역 모두를 차지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굽다리 긴목 항아리, 충주 누암리 고분, 충주 가금면, 신라 6세기>
<굽다리 긴목 항아리, 충주 누암리 고분, 충주 가금면, 신라 6세기>
<굽다리 접시, 충주 누암리 고분, 충주 가금면, 신라 6세기>
<굽다리 접시, 충주 누암리 고분, 충주 가금면, 신라 6세기>
<두 귀 달린 항아리, 파주 성동리고분, 파주 탄현면, 신라 6세기><짧은목 항아리, 충주 누암리 고분, 충주 가금면, 신라 6세기>
<완, 충주 누암리 고분, 충주 가금면, 신라 6세기>
<가락바퀴, 충주 누암리 고분, 충주 가금면, 신라 6세기><완, 충주 누암리 고분, 충주 가금면, 신라 6세기>
<병, 파주 성동리고분, 파주 탄현면, 신라 6세기>
<굽다리 긴목 항아리, 파주 성동리고분, 파주 탄현면, 신라 6세기>
<뚜껑 있는 바리, 충주 누암리 고분, 충주 가금면, 신라 6세기>
<덩이쇠, 충주 누암리 고분, 충주 가금면, 신라 6세기><말방울, 파주 성동리고분, 파주 탄현면, 신라 6세기><허리띠고리><금귀걸이, 충주 누암리 고분, 충주 가금면, 신라 6세기>
<금동관, 파주 성동리고분, 파주 탄현면, 신라 6세기>

한강유역을 차지하다
한강 유역은 지리적,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삼국의 격전지였습니다. 가장 먼저 한강유역에 자리 잡았던 백제는 고이왕과 근초고왕 때 번성했으나, 475년 고구려가 남하 정책을 펴면서 한강 유역을 빼앗겼습니다. 그 뒤 백제는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나라의 운명을 걸다시피 했습니다. 551년 성왕이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몰아내고 한강 유역을 비로소 되찾았습니다. 이때 신라는 한강 상류, 백제는 한강 하류를 차지했습니다. 그로부터 3년 뒤 신라는 역사상 가장 중대한 전투(관산성 전투)를 벌였고, 이 전투에서 승리한 진흥왕은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하류를 신라의 영토로 편입했습니다. 이로써 신라는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통로와 삼국 통일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주변국을 복속하다
지증왕과 법흥왕은 중앙 집권의 바탕을 마련하였고, 진흥왕은 영토를 사방으로 넓히기 시작했습니다. 551년에는 연호를 ‘나라를 연다’는 뜻의 ‘개국’으로 바꾸어 영토를 확장하겠다는 의지를 다졌습니다. 지증왕은 실직국(지금의 삼척)을 복속하여 고구려의 침략에 맞서는 근거지로 삼았습니다. 이후 법흥왕과 진흥왕이 금관가야를 병합하고, 대가야을 정복하는 등 현재의 영남 지방은 물론 백제로부터 한강유역을 빼앗으면서 중부 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새로 개척한 영토는 신라의 주로 편입되었고, 국가에서 파견한 군주가 통치했습니다. 특히 553년에는 진흥왕이 백제를 쫓아내고 한강 유역을 차지한 뒤 그곳에 신주(지금의 경기도 광주)를 설치해 대외 교류의 통로를 개척했습니다. 이로써 신라는 대중국 외교의 통로와 삼국 통일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사천왕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문무왕릉비는 조선후기 정조 때 발견되어 경주부윤 홍양호가 이를 소개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그후 추사 김정희가 이를 확인하였다. 그후 비석들이 사라지고 탁본만 남아 있었는데 하단부는 1961년에, 상단부는 2009년에 경주 동부동 주택가에서 발견되었다. 

<문무왕비편, 통일신라 7세기, 경주 동부동>
<아래 부분>
<윗부분>

조선시대 후기, 경주에서 문무왕비편이 발견된 사실이 이계 홍양호와 추사 김정희의 문집에 실려 있습니다. 이 탑본이 청나라 금석학자 유희해에게 전해져 <해동금석원>에 수록되었습니다. 그 후, 문무왕비의 하단 부분은 1961년, 상단 부분은 2009년 경주 동부동에서 다시 발견되었습니다. 문무왕비의 받침돌은 낭산 근처 사천왕사터에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기도 합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문무왕, 전쟁을 마무리하다
문무왕은 태종무열왕의 첫째 아들입니다. 일찍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신라 병부령을 지내다 태자에 책봉되었습니다. 무열왕을 따라 백제 정벌에 나서서 큰 공을 세우고, 왕위에 오른 뒤에는 통일에; 힘을 쏟아 당나라군과 연합해 고구려를 멸망시켰습니다. 이후 당나라가 한반도를 차지하려는 야욕을 드러내자 당과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고, 20여 년 동안 이어진 통일 전쟁을 마무리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십이지상 돼지, 경주 전 김유신묘, 통일신라 8~9세기>

곱돌로 만든 십이지상(돼지)으로 김유신묘라고 전해오는 무덤에서 출토된 것입니다. 십이지상 가운데 돼지를 묘사한 것으로, 이 외에 말과 토끼상이 더 발견되었습니다. 멧돼지의 머리 형상에 사람 몸을 하고 바위모양의 대좌 위에 서 있는 이 십이지상은 갑옷을 입고 오른손에 칼을 든 이른바 무장형입니다. 특히 지석의 성격을 지닌 점에서 통일신라 십이지신장상으로 가장 먼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와 같은 통일신라시대 무장형 십이지상의 무복은 사천왕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중화 3년’을 새긴 사리기, 경주 전 황룡사 구층목탑지, 통일신라 9세기>
<다른 방향에서 본 모습>

경주 황룡사 터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금동제 사리기입니다. 다만, 도굴되었다가 압수되어 그 출토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동판을 재료로 하였으며, 사리기의 겉면에 작은 글씨를 가로로 새겼는데, 김유신을 위해 조성한 탑을 헌강왕 9년(883)에 새로 고치면서 소탑 77기와 진언 불교의 비밀 주문 77벌을 봉안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통일전쟁을 끝내다
신라는 태종무열왕과 문무왕 대에 걸쳐 통일 전쟁을 완수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합니다. 무열왕은 왕자들과 김유신을 중용하며 지배체제와 왕권을 안정시켰습니다. 또한 당나라와의 외교에도 힘쓰며 통일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통일 전쟁의 첫걸음은 백제 정벌이었습니다.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 사비성을 공격했고 의자왕이 항복했습니다. 그 후에 백제 부흥군이 주류성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일어났지만 결국 신라군에 패배했습니다. 문무왕 8년(658년)에는 나당 연합군이 고구려 평양성을 포위하여 보장왕이 항복했습니다. 이로써 통일 전쟁은 끝났으나 당나라가 한반도를 차지하려 하면서 나당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신라는 문무왕 15년(675)에 당나라 장군 설인귀에게 대승을 거두었고, 다음 해 당나라가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기면서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비록 영토 확장의 한계가 있었지만 통일 전쟁을 승리로 끝낸 신라는 일통삼한을 이루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신라의 번영
503년 지증 마립간은 나라의 이름을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사방을 아우른다.’는 뜻의 신라로 정하고 신라 최고 통치자의 호칭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꾸었습니다. 법흥왕은 520년 율령을 반포하고 17관등제와 관리들의 공복을 정해 귀족들을 체계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밑바탕을 마련했습니다. 법흥왕이 다진 중앙 집권의 토대를 바탕으로 진흥왕은 영토를 사방으로 넓혔습니다. 이후 무열왕은 당나라와의 외교에 주력해 정치 제도와 복식을 받아들이고, 군사 지원을 이끌어내 통일 전쟁을 꾀했습니다. 그리하여 신라는 660년에 백제, 668년에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676년에는 당나라를 물리쳐 한반도 최초의 통일 국가를 이룩했습니다. 삼국 통일을 이룬 문무왕은 왕권을 강화하려고 정치 제도와 지방 조직을 개편했으며 넓어진 영토에 걸맞는 군사 제도를 갖추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백성을 포용하고 그 문화도 받아들여 아름답고 조화로운 통일신라 문화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출처>

  1. 안내문, 국립경주박물관, 2024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3. 위키백과,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