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tstory Traveling

Since 2008, Korea & World by younghwan

[경주박물관] 국은기념실

국은기념실은 경북대 의과대 교수를 지내면서 경북지역 문화재를 발굴조사에 많은 공을 기울였으며 경주박물관에 많은 문화재를 기증한 국은 이양선박사 기증 유물을 전시한 공간이다.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들이 있다.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국보)와 ‘경주 죽동리 청동기 일괄'(보물)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 가야, 국보>

높이 23.2 cm 크기의 인물형 도기로 나팔모양의 받침 위에 판을 설치하고 그 위에 말을 탄 무사의 형상을 올려놓고 있다. 표현방법이 매우 사실적이어서 가야무사의 복식과 무기 등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무사는 머리에 투구를 쓰고 오른손에는 창을, 왼손에는 방패를 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뒤쪽에는 중앙아시아 유목민들과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각배가 있다. 

<옆에서 본 모습>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 가야, 국보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은 고대 우리나라 무사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걸작입니다. 나팔모양의 굽다리 위에 직사각형 판을 놓고, 그 위에 말을 탄 무사와 두 개의 뿔잔을 붙여서 만들었습니다. 말의 몸통에는 쇠 비늘을 엮어 만든 말 갑옷을 자세하게 표현했습니다. 무사는 갑옷을 입고 투구를 썼으며, 방패와 창을 지니고 있습니다. 갑옷에는 목가리개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고 갑옷으 등에는 깃대장식이 있습니다. 투구에는 특이한 챙이 둘러져 있으며, 정수리에 장식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말탄 무사모양 뿔잔은 고구려 벽화에 등장하는 말 탄 병사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이 뿔잔은 덕산에서 출토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덕산이라는 지명이 전국에 여러 곳이 있기 떄문에 정확히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0

돌로 만든 유물은 청동기시대에 사용했던 도구들이다. 마제석검이라고 부르는 청동기시대 많이 사용된 검에서 부터 화살촉.창.도끼,반달돌칼 등 동시대에 경북지역에서 사용되었던 다양한 형태의 석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대구 지산동 출토품, 대구 지산동, 원삼국>

대구 지산동 일괄 출토품
대구 지산동에서 출토된 유물은 꺾창집과 칼집 부속구, 칼자루끝장식, 고리, 쇠뿔모양 동기, 일광경, 이형동기 등입니다. 특히 청동기에 철의 녹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철기류와 함께 묻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꺾창집은 북부지역에서는 속을 파낸 나무로 만든 것이 주로 발견되는데, 남부지역에서는 나무로 만든 것은 출토된 적이 없고, 대신 청동으로 된 꺾창집 부속구만 보입니다. 칼집은 대부분 자루와 함께 나무나 가죽과 같은 유기 물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쉽게 썩어, 금속으로 만든 검과 칼자루 끝장식만 남은 경우가 많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0

<칼자루 끝 장식>
<간돌검>
<칼자루 끝장식>
<칼자루 끝장식>

검은 손잡이의 형태에 따라 자루에 끼워 고정하는 부분인 슴베식과 자루식으로 나뉩니다. 자루식 검은 자루의 모양에 따라 다시 일단과 이단으로 구분됩니다. 칼자루끝장식은 따로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별도끼, 청동기시대>
<옥, 청동기시대>
<옥, 청동기시대>

경주 죽동리 널무덤에서 장대투겁방울, 장식단추, 청동투겁창, 청동꺽창, 청동검, 말종방울, 마루리장식, 칼자루끝장식 등이 출토되었다. 이 유물을 중국 한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초기 철기시대 후기 문화의 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기원전 1세기초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출토지와 출토 이력이 잘 밝혀져 있어 의미가 있는 유물이다.

<칼자루 끝장식, 경주 죽동리, 초기 철기, 보물>
<청동 단추, 경주 죽동리, 초기 철기, 보물>

‘세형동검’은 길이 30.2cm로 매우 긴 편이다. 다른 동검과 달리 등날부분으니 홈이 약간 오목하게 들어갔다.

<동검, 경주 죽동리, 초기 철기, 보물>

‘투겁창'(銅矛)은 길이 28.3cm 크기이다. 날부분에 각각 2줄을 홈을 새겼다. ‘꺽창'(銅戈)은 길이 23.4cm의 전형적인 후기의 꺽창이다. 등날부분에 물고기 모양 무늬를 새겼다.

<청동 투겁창, 경주 죽동리, 초기 철기, 보물><청동 꺾창, 경주 죽동리, 초기 철기, 보물>
<청동종방울, 경주 죽동리, 초기 철기, 보물><마구리장식동기, 경주 죽동리, 초기 철기, 보물>

‘장대투겁 방울’은 포탄모양을 하고 있는 한쌍의 청동기유물이다. 높이 15.4cm 크기로 내부에 방울을 넣어 소리나게 만들었다. 윗부분에는 4개이 긴 틈이 있으며 아랫부분 테두리는 4단으로 되어 있다. 간두령이라 부르며 다른지역에서도 비슷한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장대투겁 방울, 경주 죽동리, 초기 철기, 보물>

경주 죽동리 일괄 출토품
경주 외동읍 죽동리에서 출토된 청동기입니다. 한국식동검, 투겁창, 꺾창, 칼자루 끝장식, 창 자루 끝 장식 등의 무기류를 비롯해 장대투겁과 같은 의식에 쓰인 도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죽동일 출토 청동기이 무늬와 형태는 기존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의 전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와 함꼐 중국 한나라 문화를 일부 받아들인 흕거도 보입니다. 출토품들은 대략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 사이에 만든 것으로 추정됩니다. 경주 죽동리와 가까운 입실리, 구정동, 조양동에서도 이와 비슷한 양식의 청동기가 출토되었습니다. 모두 같은 계통의 지배집단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오리모양 그릇, 전 경주 교동, 원삼국>

오리의 부리와 눈 등 머리 부분은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했지만, 속이 빈 몸통 부분은 간략하게 표현했습니다. 등 위에는 원통 모양의 입구가 있고 꼬리 부분은 뚫려 있습니다. 오리모양 토기는 진한과 변한 영역인 경상도 지역에서 한 쌍으로 출토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상에서 썼던 토기가 아니라 죽은 사람의 영혼을 하늘로 보내려는 뜻으로 무덤에 함께 묻었던 껴묻거리로 추정됩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청동 도끼, 청동기시대>
<삿갓모양 동기, 경주 안계리, 초기철기>
<청동칼, 초기 철기>
<청동 투겁창, 경주 안계리, 초기 철기>
<청동 가지방울, 초기철기>
<금동 맞새김 꾸미개, 신라>
<금동 장식 신발, 신라>
<청동 거울, 원삼국>
<통모양 동기, 김해 양동리>
<통모양 동기, 김해 양동리>
<말모양 허리띠 고리, 원삼국>

오늘날의 버클과 같은 청동제 고리입니다. 말의 가슴 앞에는 긴 걸쇠가 달렸고, 뒷면의 배 중간 부분에 단추 모양의 꼭지를 붙여 여기에 띠를 걸어 허리띠장식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초기 철기부터 이른바 원삼국 말까지 주로 말이나 호랑이 모양으로 만드러져 사용되었습니다. 무덤의 껴묻거리부장품으로 출토되는 예가 많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금동관 장식, 신라><청동 재갈, 김해 양동리, 원삼국>
<청동 말방울, 삼국>
<청동 말방울, 삼국>
<금동 말방울, 통일신라>
<금동 말방울, 통일신라>
<금동 작은 솥, 경주 조양동, 통일신라>
<‘건통 9년’ 글자를 새긴 쇠북, 고려 1109년>

쇠북은 금고, 금구, 판자라고도 부르는 불구입니다. 징과 같이 소리를 내어 대중을 불러 모으거나 급한 일을 알릴 때 사용하였습니다. 얇은 북 모양이고 무늬는 가운데의 연꽃을 중심으로 몇 겹의 동심원을 도드라지게 표현하였습니다. 앞면 가장자리에 새겨진 글귀로 보아 고려 1109년에 중림사의 주지였던 현의대사 충조가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림사는 당시 경산에 있던 절로 추정됩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청동 다리미, 신라>
<청동 요령, 고려>
<금동여래입상, 경주 내남면, 통일신라>
<공양탑, 고려>
<공양탑, 고려>

탑 속에 넣었던 작은 탑들입니다. 이 소탑들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나오는 무구정탑 신앙 내용에 근거하여 만든 것으로, 이에 따르면 탑을 조성할 때 그 안에 소탑을 봉안하면 나라가 태평하고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대개 흙이나 곱돌로 만든 99개의 소탑을 사리기 주위에 배치하고 각 소탑의 바닥에는 구멍을 뚫어 불교의 주문인 다라니를 한 벌씩 끼워 넣었습니다. 이 소탑들은 크기가 서로 다르고 매우 단순화된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연꽃무늬 꾸미개, 고려><목제금칠소형사리탑, 조선>
<사리구, 고려>
<팔찌, 삼국>
<팔찌>
<팔찌>
<팔찌>
<팔찌>
<금 굵은 고리 귀걸이, 삼국>
<금 굵은 고리 귀걸이, 삼국>
<금 가는고리 귀걸이, 삼국>
<금 가는고리 귀걸이, 삼국>
<금 가는고리 귀걸이, 삼국>
<금드리개, 삼국>

금속공예
우리나라 금속 문화는 고조선의 대표 표지 유물이라 할 수 있는 요령식동검과 함께 시작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청동기를 제작하고 사용한 것은 약 기원전 3~2세기경이 초기철기시대입니다. 정교하게 새겨진 가는무늬 청동거울이나 청동방울, 가는 몸체의 한국식 동검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러한 청동기는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도 널리 사용되며 실제 사용된 실용기라기보다는 당시 사회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하거나 종교적 성격을 띤 의기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삼국시대에 들어오면 청동에 더하여 금, 은, 동, 철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한 여러 종류의 금속공예품이 제작되었고, 이것을 거푸집에 녹여 붓거나 두드려서 형태를 만들고 여기에 음각, 양각, 투각, 도금, 금은입사 등으로 장식한 것도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번창하고 사차르이 건립이 증가함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불교 공예품이 활발히 제작됩니다. 범종이나 요령, 쇠북, 향로와 정병을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의 각종 사리장엄구 등이 대표적입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토기>
<토기>
<토기>
<토기>
<토기>
<토기>
<토기>
<토기>
<토기>
<토기>
<토기>
<토기>
<토기>
<토기>

토기
원삼국시대의 영남 지방에서는 와질토기가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와질토기는 삼국시대 이전에 긴목 검은간토기에서 출발한 목항아리가 주로 쓰이다가, 그 뒤 아가리가 벌어지고 바닥이 둥근 쇠뿔모양 손잡이 항아리와 항아리가 사용되었습니다. 무늬는 두드림무늬에서 다양한 기하학 무늬로 변했습니다. 삼국시대의 신라와 가야 토기에는 회청색의 도질토기가 많습니다. 도질토기는 물레로 모양을 만든 뒤 흙을 단단하게 두드려 1,000℃가 넘는 고온의 가마에서 구운 것입니다. 그릇받침, 굽다리 긴목 항아리, 뚜껑 있는 굽다리 접시가 대표적이고 여러 물체를 본떠 만든 상형토기와 흙 인형을 붙인 토기, 각종 무늬가 새겨진 토기 등도 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국은 수집 기증품의 특징
국은 이양선 선생님이 수집하여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증한 문화재는 단순한 미적 감상의 대상이 아닌 학술적 가치를 지닌 고고학 계통의 자료가 많은 것이 특징입니다. 선생은 문화재를 수집할 때, 출토지와 출토 상태를 꼼꼼하게 추적하였을 뿐만 아니라, 출토품과 함께 있었던 모든 것을 확인하고 검승하였습니다. 문화재의 학술적 가치에 대한 그의 집념은 훗날 국보로 지정된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의 수집 과정에서 잘 드러났습니다. 당시 선생은 완형도 아니었던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을 더 비싼 도자기를 주고 바꾸었습니다,. 이는 선생이 이 문화재가 지닌 자료적 가치를 잘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문화재는 삼국시대 말탄 무사와 말갖춤 복원에 중요한 기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밖에 경주와 대구의 출토지가 분명한 청동기 일괄품 등 한국의 고고학과 미수사학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가 많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출처>

  1. 안내문, 국립경주박물관, 2024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3. 위키백과,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