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7세기 중엽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당전쟁을 거치면서 고구려 권역의 일부인 대동강~원산만을 연결하는 국경선 남쪽을 그 영역으로 비교적 안정된 통일국가를 형성하였으며, 그 북쪽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자리를 잡았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 궁성은 월성 주변 일대까지 넓어졌다. 문무왕은 월지와 양궁, 동궁을 새로 짓고 기존의 궁궐도 웅장하게 수리했다. 월성의 후원인 임해전지 연못속에 빠졌던 여러가지 유물들이 발굴되면서 통일신라인의 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확인되고 있다. 그외 경주 일대 여러지역에서 유물이 출토되기는 하지만 마립간시기에 비해 유물들이 많지 않은 편이다.
사자는 ‘백수의 왕’으로 신성함과 절대적인 힘, 위엄을 나타냅니다. 이 사자상은 원래 어디에 세워졌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발견된 곳이 교동이기 때문에 신라 궁성과 연관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교동 근처의 춘양교터, 월정교터에서도 사자상이 발견되었습니다. 장방형의 받침 위에 앉아 있는 형태이며, 고개를 꼿꼿이 들고 전체적으로 경직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경주시 구정동 대덕산 남쪽 구릉 말단에는 9~10세기에 만들어진 신라 돌방무덤이 하나 있습니다. 이 무덤은 독특하게 네모난 형태를 하고 있는데, 무덤의 주인공은 봉분을 따라 돌린 둘레돌과 십이지신상 등에서 볼 떄 왕으로 추정됩니다. 네모난 봉분의 각 모서리에는 사각의 돌기둥이 세워져 있었는데, 여기에 서역의 무인상과 사자상이 각각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무인은 눈을 부릅뜬 채 양 손으로 무기를 치켜들고, 사자는 힘차게 땅을 딛고 포효하면서 왕의 무덤을 지키는 모습입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궁성과 왕경을 정비하다
궁성은 왕이 사는 궁궐과 이를 둘러싼 성벽을 말합니다. 신라 궁성은 월성이 중심이었습니다. 국력이 커지고 통일을 이루면서 궁성은 월성 주변 일대까지 넓어졌습니다. 문무왕은 월지와 양궁, 동궁을 새로 짓고 기존의 궁궐도 웅장하게 수리했습니다. 더 나아가 왕성까지 새로 지으려고 했으나 의상 대사가 만류해 그만두었습니다. 뒤를 이은 신문왕은 수도를 달구벌로 옮기고자 했으나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신라왕들이 궁성을 새로 짓고 수도를 옮기고자 했던 까닭은 오래된 수도 왕경이 통일 왕조에 걸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왕경은 수백여 년 동안 도읍지 역할을 했기 때문에 도시를 넓히는 데 걸림돌이 많았습니다. 결국 수도를 옮기지 않고 그 대신 왕경을 주변으로 확장해 건물과 도로 등을 만들고 정비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통일신라의 지방 사회는 9주 5소경이라는 제도로 중앙의 행정력이 각 지방에 고르게 미치게 되었다. 지방 행정은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와 토착 촌주의 협력 아래 이루어졌으며, 문자의 활용과 도로와 역의 정비를 통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지방의 산성 등에서 출토된 기와 등을 통해 당시 지방 통치의 모습을 살펴볼 수있다.
지방제도를 확립하다
신라는 6세기 초부터 효율적인 지방 통치를 위해 군사적인 성격의 주군제를 시행했습니다. 통일 후 신문왕 5년(685)에는 옛 삼국의 영역을 각각 3주씩 나누어 전국에 9주를 설치하고 도독을 파견해서 다스렸습니다. 본래의 신라 땅은 상주.양주.강주로, 옛 백제 땅은 웅주.전주.무주로, 옛 고구려 땅은 한주.삭주.명주로 나누었습니다. 이와 함께 수도인 경주는 소경들과 구분하기 위해 금경.대경이라 부르고, 지방은 중원경(충주), 북원경(원주), 금관경(김해), 서원경(청주),남원경(남원)의 5소경을 설치했습니다. 소경에는 사신이라는 지방관을 보태어 통치했습니다. 군사 조직으로는 경주에 중앙군 9서당을 배치하고, 지방에는 10정을 설치해 국방을 강화하고 치안을 효과적으로 유지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국학을 설치해 학문을 장려하다
국학은 신문왕 2년(682)에 세워진 교육 기관입니다. 교육, 외교 및 의례를 맡아보는 예부에 속했습니다. <논어>, <효경>, <주역> 등을 가르쳤으며, 경학을 중심으로 문학도 가르쳤습니다. 학생들은 15~30세인데, 보통 9년 동안 공부했으며, 상황에 따라 기간이 달라지기도 했습니다. 학업을 마치면 대나마(10관등)나 나마(11관등)의 관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학업 기간에 비하면 주어지는 관등이 상대적으로 낮아 진골보다는 육두품 이하 출신들이 많이 다녔습니다. 국학은 나라의 상위 관직을 독점하던 진골 세력을 견제하려고 유교 지식을 갖춘 육두품 세력을 정책적으로 양성한 것입니다. 신라에서 국학을 설치하고 학문을 장려했던 목적은 정치 제도를 정비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토용은 흙으로 사람이나 동물을 본 떠 만든 것으로 옷이나 모자, 표정 등이 사실적이며, 사회적 지위에 따라 색깔이나 크기를 다르게 만들었다. 통일신라시대 복식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는 유물이다. 당나라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나라 복식을 받아들이다
복식은 사람이 걸치는 모든 것을 뜻합니다. 복은 몸과 팔다리를 가리는 옷이고, 식은 모자와 관, 신발이나 허리띠 등의 장식입니다. 복식은 그것을 입은 사람이 어느 집단에 속하는지, 어떤 지위에 있는지를 나타냅니다. 법흥왕 7년(520)에 율령을 반포하고 관리의 복식과 등급을 정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진덕여왕 2년(648)에는 김춘추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당나라 복식을 따르겠다고 한 다음 해부터 당나라 복식을 받아들였습니다. 처음에는 남성에게만 한정했으나, 문무왕 4년(664)에는 여서으이 옷도 당나라 복식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러한 복식의 변화는 신라의 흙 인형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0
하늘에 제사를 지내다
신라는 종묘와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제도가 있었으며 제사는 중요한 국가 행사였습니다. 종묘에서는 왕과 왕비의 제사를 일 년에 여섯 번 지냈고, 왕경 주변에서는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사는 왕권의 정당성을 드러내고 호국 사신에게 나라의 무사 평안을 기원하고, 풍요와 번영을 비는 것이있습니다. 가뭄이 들면 하천이나 연못가 주변이나 우물에서 기우제를 올렸습니다. 우물은 단순히 물을 긷는 공간이 아니라 신에게 안정적인 물 공급을 기원하는 상징적인 제사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이 사자상의 정확한 출토지는 알 수 없으나, 본래 어떤 구조물의 모서리에 세워졌던 기둥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앞다리를 뻗어 위를 올리고 고개는 옆으로 돌린 자세를 하고 있습니다. 얼굴의 눈, 코, 입과 함께 웃고 있는 표정이 보이십니까? 사자의 해학적인 표현에서 신라인들의 꾸밈없고 여유있는 심성이 느껴집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경주 지역 돌방무덤은 무덤길이 중앙 또는 좌측에 있고 높이가 30cm 이상인 주검받침이 있다. 나무널을 사용하지 않고 대신 머리고임, 발받침 등을 사용하였다. 이전 시기의 무덤과 달리 여러 번 걸쳐 시신을 묻는 가족장이다
경주 서악동 돌방무덤에서 출토된 돌문입니다. 문에는 천정과 바닥에 결합될 수 있도록 돌출부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앞.뒷면에는 신장상이 돋을새김 되어 있습니다. 머리 뒤에 두광이 있고, 하체에만 군의를 입고 있습니다. 손에는 긴 금강저를 들고 있고, 손목.발목에는 장식이 있으며 연꽃대좌 위에 서 있는 모습입니다. 당당하고 위엄있는 신장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왼쪽 돌문에는 앞뒤면 모두 신장상 조각이 있습니다. 오른쪽 복제품은 왼쪽 돌문 뒷면의 모습입니다. 선명한 문양을 볼 수 있도록 탁본 처리하였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지석은 주인공의 인적사항이나 사망 시기 등을 기록하여 무덤에 넣어주는 돌입니다. 신라에서는 처음으로 나왔으며, 백제에서는 무령왕릉 지석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무령왕이 523년에 사망하자 3년상을 치르기 위해 2년 3개월 동안 다른 곳에 가매장하였다가 지금의 대묘에 안치하였다는 내용 등을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무덤에 지석을 넎은 것은 중국 장묘문화의 영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용강동 6호 무덤에서 나온 지석은 다소 거칠게 마연한 돌의 표면에 가는 붓으로 내용을 기록한 것인데, 대부분이 자연소멸되어 육안으로는 거의 판독이 불가능합니다. 무령왕릉의 사례를 볼 떄, 이 지석에는 주인공의 이름, 관등 관직, 사망 시기 등이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돌방무덤을 꾸미다
마립간 시기에 만들어진 돌무지덧널무덤은 규모가 크고 껴묻거리가 화려했습니다. 이는 죽은 뒤에도 삶이 이어진다는 믿음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수용과 돌방무덤의 도입은 사후 세계에 대한 인식을 변화하게 만들었습니다. 돌방무덤은 내부로 출입할 수 있는 길과 문을 마련해 여러 번 장례를 치를 수 있으며 부장품도 적게 넣는 대신 돌을 다듬어 무덤을 꾸몄습니다. 경주 서악동 돌방무덤의 문에;는 앞뒤로 신장상이 새겨져 있는데 신체 비율이 조화롭고 의복과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의 표현이 매우 사실적입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다
내물 마립간에서 지증왕 때까지 왕과 왕족이 죽으면 큰 무덤을 만들고, 죽은 이를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해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또 저승에서도 부귀영화가 이어지길 기원하며 많은 재물을 함 넣었습니다. 죽은 이의 머리맡에는 금은보화가 가득 찬 나무 상자를 두었고, 발치에는 각종 재물을 담은 부곽을 설치했습니다. 법흥왕이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장례가 간소해졌으며, 왕릉도 나지막한 언덕에 만들면서 왕이나 귀족들이 무덤 크기가 점점 작아졌고 껴묻거리의 양도 줄어들었습니다. 왕이나 귀족 등이 죽으면 주인을 따라 강제로 또는 스스로 죽은 사람을 함께 묻던 순장을 금지하고 흙 인형을 묻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무덤 구조도 여닫기 쉬운 출입 시설을 마련한 돌방무덤으로 바뀌면서, 추가장이 가능해져 나중에 죽은 가족들도 같은 무덤에 묻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통일신라에서는 불교식 장례방식인 화장이 유행하였다. 8세기의 고급스러운 뼈단지는 화려한 도장무늬를 새기거나, 녹유.청유.삼채와 같은 유약을 발랐다. 국력이 쇠퇴하는 9세기 이후의 뼈단지는 이전과 다르게 꾸밈을 없앤 소박한 형태로 서서히 바뀌었다
화장이 성행하다
통일신라 대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주검을 불에 태워 장례 치르는 화장이 유행했습니다. 최초의 화장은 7세 중반 자장율사의 기록에서 확인됩니다. 문무왕도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라는 유언을 내리면서 화장은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화장 방식으로는 뼛가루를 바다나 산에 뿌리는 산골, 땅에 묻은 뒤 부도를 세우는 승탑, 용기에 담아 땅에 묻는 화장묘 등이 있었습니다. 화장묘는 유골을 담는 용기에 따라 이중형과 단일형으로 구분됩니다. 이중형 뼈항아리는 뼈를 담는 장골기와 이를 보호하는 석관, 석함, 석혈, 토기로 구성됩니다. 이것들은 주로 왕경 주변에서 발견되며, 화려한 도장무기 토기나 연유도기가 사용된 상위층의 화장묘입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통일신라는 의례를 통해 국가 권력의 정당성과 왕권의 위엄을 과시했다. 도성에서 베풀어진 국가 의례는 왕경인과 지방인에게 왕에 대한 충성과 복속 의식을 그들의 마음 속에서 불러 일으키는 힘으로 작용했다. 사찰 역시 국가와 왕권의 위엄을 구현하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신라의 미소’라고 널리 소개된 신라의 원형 기와입니다. 이 수막새는 1934년 일본인 다나카 도시노부가 골동상점에서 구입하여 일본으로 반출되었으나 1972년 국내에 반환되었습니다. 일반적인 기와 조성방법처럼 틀에 찍어 일률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먼저 형태를 잡은 후 손으로 빚어 얼굴의 세부 형상을 만들고 도구를 써서 마마리한 작품입니다. 자연스럽고 정교한 솜씨로 보아 숙련된 장인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실제 사용한 흔적도 있습니다. 오른쪽 하단 일부가 결실되었으나 이마와 두 눈, 오뚝한 코, 잔잔한 미소와 두 뺨의 턱 선이 조화에 이르기까지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유일하게 알려진 손으로 빚은 얼굴무늬 수막새이자 신라인의 소박하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담아낸 작품으로서, 당시 우수한 기와 조성 기술이 집약된 대표작입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신라, 불교를 받아들이다.
신라에서 불교를 받아들이자 정치와 사회 그리고 문화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불교가 국교로 공인되기 이전에는 귀족들이 저마다의 조상신이나 산천신을 숭배했습니다. 기존의 민간 신앙과 달리 불교는 종교로서 신앙체계가 논리적이고,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하는 신들의 존재감이 뚜렷했습니다. 왕실은 귀족과 백성에게 부처의 신앙을 강조해 사상의 통일을 이루고, 더불어 왕과 왕족을 신격화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보수적인 귀족들의 반대로 불교를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528년에야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했습니다. 534년에는 서라벌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숲인 천경림을 걷어내고, 신라 최초의 큰 절이었던 흥륜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절을 세워 나라의 힘을 모으다
528년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한 뒤, 진흥왕과 선덕여왕은 왕경 안에 큰 절을 세워 나라의 힘을 모으려 했습니다. 진흥왕은 544년에 신라 최초의 절인 흥륜사를 10년 만에 완공했습니다. 553년에는 황룡사를 세우기 시작해 566년에 완공했으며, 574년에는 황룡사에 장육존상이라는 큰 불상을 봉안했습니다. 선덕여왕은 즉위한 뒤 황룡사 옆에 향기로운 왕의 절 이라는 뜻의 분황사를 지었습니다. 또 643년에는 왕의 위엄을 세우고 부처님의 도움으로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황룡사에 목탑 건설을 추진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신라 천 년 역사를 마감하다
9세기 말, 신라 왕실은 귀족과 백성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나라는 빠르게 기울어 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935년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면서 약 천 년에 걸쳐 번성하던 신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꽃피는 문화
통일신라의 문화는 정치가 안정되고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한층 발전했습니다. 특히 한강 유역을 확보하여 당나라와의 교류가 자유로워지면서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였고 유교와 불교의 경전을 수입하거나 유학생을 보내는 등 실리도 얻었습니다. 왕릉은 당나라의 능원 제도를 받아들여 석인상과 사자상 등의 석물로 정성들여 꾸몄습니다. 평지에는 큰 절을 조성하고 금당 앞에 두 개의 탑을 두는 쌍탑식 가람 배치가 성행했습니다. 석탑 조성의 기준은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불국사 석가탑, 다보탑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덕이 높은 승려를 기리는 부도와 비석도 많이 세웠습니다. 불교 조각은 신라인의 미의식에 당나라 양식을 더한 독창적이고 비례가 훌륭한 작품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석굴암 본존상이 대표작으로, 이는 부처를 가장 이성적이며 조화롭게 표현한 걸작입니다. 불교 공예품인 범종과 사리갖춤 등도 역시 높은 수준을 보여줍니다. 통일신라는 고유의 문화를 바탕으로 당나라.고구려.백제 문화를 폭넓게 수용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출처>
- 안내문, 국립경주박물관, 2024년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 위키백과, 2024년